제 12 장 사해율무도(死海律武島)
[1]
철엽상보다 하루 먼저 구룡항에 도착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천화대부인의 밀서를 지닌 잔혈마랑(殘血魔狼) 살가륵(薩伽勒)이었다.
살가륵은 구룡항에 도착하는 즉시 구룡항 북동쪽,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절벽가 후미진 곳에 은밀히 정박해 있는 거대한 철갑선(鐵甲船)으로 귀신처럼 잠입해 들었다.
철갑선의 뱃머리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흑룡(黑龍)이 수놓아진 거대한 삼각 깃발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거선은 육 개월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절영도까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실어 나르는 사해율무도 소속 철갑선이었다.
그러나 잔혈마랑이 몰래 숨어들었던 그날 밤, 전체가 묵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철갑선은 주인없이 떠도는 유령선처럼 음산한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사실 철갑선에는 오백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배 밑창에 있는 식량 창고로 연기처럼 스며든 잔혈마랑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튿날 밤이 되자 철갑선은 고통에 시달리는 망령(亡靈)들의 신음소리를 내면서 출항했다.
상하 두 단계로 나뉘어져 총 삼백 팔십 개의 노를 젓는 철갑선은 쏘아진 화살보다 빠르게 바다 위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세찬 파도는 뱃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잔혈마랑은 산더미처럼 쌓인 식량포대 위에 누워 비릿한 미소를 게워냈다.
"백사낭혼, 네놈은 두 번 다시 중토(中土)를 밟지 못할 것이다."
밤은 죽음처럼 다가왔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출렁거리는 검푸른 물결과 가물거리는 수평선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바다는 무거운 정적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철엽상은 별들만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통나무배 위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누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내공(內攻)을 양 손에 집중시킨 후 두 팔을 머리 위로 제꼈다가 허벅지까지 힘껏 끌어당겨 바닷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통나무 배는 물결 위를 스치는 듯 나는 갈매기처럼 파도 위를 미끄러지며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나아갔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유성 하나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외로운 항해자(航海者) 철엽상.
그는 지난 이틀 동안 촌각도 쉬지 않고 바다 위를 일직선으로 치달려 왔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문득 철엽상은 수면 위를 스치는 해풍에 미미한 회오리 현상이 일고 있는 것을 피부로 감지했다.
그는 고개를 젖혀 배가 나가고 있는 머리 뒤쪽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바다 위로 돌출된 무엇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흑색괴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이었다.
'삼봉도로군.'
철엽상은 속도를 늦추기 위해 팔을 물 속으로 집어 넣었다.
삼봉도는 배 한 척 정박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무인도(無人島)였다.
암초로 생각될 만큼 작은 바위 십여 개가 모여 있는 섬 중앙에 기형의 흑색괴암(黑色怪岩) 세 개가 푸른 이끼를 두른 채 삐죽이 솟아 있는 것이 삼봉도의 전부였다.
중앙에 다소 높게 솟아오른 바위섬으로 올라선 철엽상은 통나무 배를 이고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는 건량 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먼저 철엽상은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뚜껑을 닫는 그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나직이 흘렀다.
"환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그 순간 철엽상이 앉아 있던 곳으로부터 삼장 가량 떨어진 곳에 바위 하나가 꿈틀거리더니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바위는 완벽한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
어둠의 한조각인 듯 헐렁한 흑색폐포를 걸친 데다가 얼굴마저 흑색복면으로 감싼 인물.
그는 바로 언젠가 묵비룡이 말한 바 있는, 철엽상을 찾기 위해 무작정 백야벌을 뛰쳐나온 환요였다.
모습을 드러낸 환요는 머뭇거리며 다가와 철엽상의 곁에 앉았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흑색폐포가 전신에 착 달라붙어 섬세한 몸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는 환요.
그녀는 바로 백야벌에서 가장 뛰어난 여살수(女殺手)였다.
철엽상의 무심한 음성이 이어졌다.
"환둔무영술(幻遁無影術)을 극성까지 터득했구나."
환요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철사형(鐵師兄)에게 이토록 간단히 발각될 정도라면 아직 멀었습니다."
백야벌에 입문한 시기는 철엽상보다 칠 년이 빨랐으나 환요는 항상 철엽상을 사형(師兄)이라고 불렀다. 단지 나이가 두 살 적기 때문일까?
"제가 뒤따르는 것을 언제부터 알고 계셨나요?"
"구룡항에서부터."
"그랬겠지요."
환요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환둔무영술이 고금제일의 은형술(隱形術)이기는 하나…… 철사형의 이목을 속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철엽상은 묵묵히 건포(乾曙) 한 조각을 씹었다.
환둔무영술(幻遁無影術)은 아무리 견고한 금강철벽(金剛鐵壁)이라 해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의 육체를 마음먹은 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최절정의 기환술(奇幻術)이었다.
그런 환둔무영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 설사 그 모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들이 다 환둔무영술을 익힐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환둔무영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운명적인 업(業)을 타고나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아니고서는 절대 환둔무영술을 익힐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백 일이 경과하여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기틀을 잡기 이전에 개정대법(開頂大法)을 시전함과 동시에 삼백 육십 가지의 기화이초(奇花異草)로 만든 약물을 뼈 속까지 침투시켜 신체의 모든 부분이 연기가 움직이듯 흐늘흐늘하게 되는 기환연체골(奇幻軟體骨)이 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백야벌에서 유일무이하게 환둔무영술을 십성까지 익힌 환요. 현존하는 백야벌의 초특급 살수들 중에 암살(暗殺)에 관한한 그녀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엽상의 음성이 침중하게 변했다.
"환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알고 있느냐?"
환요는 철엽상의 내심을 짐작했다. 그녀는 철엽상의 말을 재빨리 중단시켰다.
"사형, 백야벌로 돌아가라는 말씀이라면 하지말아 주십시오."
그녀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철사형이 없는 백야벌은 제게 있어서 무덤 속처럼 어둡고 황폐한 죽음의 공간일 뿐입니다."
환요의 암갈색 동공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철엽상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
"천하무림인들이 철사형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물론, 백야벌조차 추적하는 와중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철사형 혼자 고군분투할 것을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고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
"멀리서나마 사형의 건재한 모습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철엽상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나 혈육의 정(情)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아래 가장 불행한 생애가 아닐까?
환요의 호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 가혹한 형벌(刑罰)임이 틀림없을 터였다.
그녀의 암갈색 눈동자가 뿌연 물안개로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사형……, 부탁이 있습니다."
"……."
"백야벌로 돌아가라는 말씀만 하지 말아주세요. 이대로 그저 아무 말없이 사형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 뿐입니다."
철엽상은 승낙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환요는 그의 내심을 읽었다.
'고맙습니다, 사형!'
환요의 두 눈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고아한 달빛이 검푸른 수면 위로 쏟아져 내리며 은백색 편린(片鱗)으로 부서졌다.
문득 철엽상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그 답답한 복면을 쓰고 다닐 생각이냐?"
그렇다.
목욕할 때나 심지어, 자신의 침실에 혼자 잠들어 있을 때도 그녀의 얼굴에는 칙칙한 검은 복면이 껍질처럼 덮여 있었다.
얼굴에 보기 흉측한 상처라도 있는 것일까?
환요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백야대존 뿐이었다.
"저는 제 얼굴이 싫습니다."
쏴아아아아…….
검푸른 파도가 그녀의 발 밑에서 포말이 되어 흩날렸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도 싫고요. 아마…… 박쥐가 인간으로 잘못 태어났나 봅니다."
독백처럼 나직한 환요의 음성은 달빛을 타고 철엽상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언제나 그랬다. 환요는 자신의 얼굴 얘기만 꺼내면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철엽상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렀다.
"환요, 나는 어느 누구도 내 가문의 복수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설사 너의 눈 앞에서 죽는다 해도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
검은 복면 사이로 드러난 환요의 암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사형께서 원하신다면 절대로…… 차라리 돌아서서 눈을 감지요."
철엽상은 무심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건포를 씹기 시작했다.
넘실대는 파도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자꾸만 부딪쳐 와 철엽상의 두 발을 적셨다.
[2]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바다 위를 스치듯 미끄러져 나가는 철엽상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깨닫고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촤르르르르…….
통나무 배는 물살을 가르며 서서히 정지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자욱한 안개 뿐이었다. 사방을 뒤덮은 자욱한 안개가 철엽상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분명 햇볕이 한창인 신시(申時) 무렵이었다.
그러나 철엽상의 주변은 음습한 안개로 인해 이 장 앞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가르쳐 준 바에 의하면 절영도 주위에는 항상 광범위하게 짙은 안개가 맴돌고 있다고 했다. 이제 악마의 섬 가까이에 온 모양이군.'
유리의 표면처럼 잔잔해야 할 남해의 푸른 물결은 그 빛깔을 잃은 채 지하무덤의 대리석 기둥같이 차갑게 죽어 있었다.
폭풍전야의 고요같다고나 할까?
자욱한 안개 속에는 예측 못할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철엽상은 통나무 배에 고정되어 있는 가죽끈을 풀어 신형을 자유롭게 했다. 그는 통나무배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서히 전진해 나갔다.
대략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쿠르르르르…….
돌연한 굉음이 은은히 들려오면서 잔잔하던 수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짙은 안개도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철엽상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계속 앞으로 나갔다. 차츰 시야가 밝아졌다.
그로부터 일각 후.
철엽상의 눈 앞에 돌연 하나의 섬이 나타났다.
버섯 형태로 바다 위에서 불쑥 솟아오른 섬 주위로는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암초(岩礁)들이 칼날처럼 돋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일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파도가 섬의 사방을 쉴 새 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그 여파 때문인지 오백여 장이나 떨어진 이곳의 수면까지 깊은 계곡의 격류(激流)처럼 들끓었다.
철엽상은 내공을 주입시켜 십여 장 정도 전진했다. 그 순간 철엽상이 몸을 싣고 있는 통나무 배가 급류에 휩쓸리는 가랑잎처럼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철엽상은 빠른 속도로 배를 저어 안개 지역으로 후퇴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 섬까지 다가갈 수 있을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타고 있는 통나무 배를 이용해서 저 섬의 삼백 장 이내에 접근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집채만한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도 없을 뿐더러 자칫 파도에 휩쓸렸다가는 암초에 부딪쳐 그의 몸은 통나무 배와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 터였다.
'저 섬이야말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군.'
철엽상은 우선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섬 주위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섬과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먹물을 뿌려놓은 듯 어둠이 짙어가기 시작했다.
철엽상은 조각배 형상의 통나무 위에 엎드려 섬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섬의 후면 쪽이었다.
그는 도끼로 나무를 쪼개듯 파도를 가르며 무섭게 쏘아져 나갔다.
속도가 빠를 수록 파도의 영향을 적게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섬으로의 접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칼날처럼 돋은 암초(岩礁)들을 피하며 전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한 가지, 그는 납작하게 엎드려 있기 때문에 솟구치는 파도 속에서 전방을 식별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산처럼 덮쳐오는 파도를 뚫으며 느닷없이 나타나는 삼십여 개의 암초를 위태롭게 지나 백여 장 정도를 전진했을 때였다.
철엽상의 신형이 거대한 파도에 잠겼다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집채만한 암초가 철벽처럼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충돌하면 죽는다!'
절박감이 철엽상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그는 쾌속하게 우측으로 통나무배를 틀었다.
쿠르르르…… 릉!
산더미 만한 시커먼 파도가 철엽상의 신형을 강타했다.
철엽상은 검푸른 바다 깊숙이 거꾸로 처박혔다가 다시 허공 높이 퉁겨져 올랐다.
엄청난 파도의 위력으로 사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으면 끝장이다!'
바로 그때였다.
전신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등줄기에 전해졌다.
'욱!'
그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거무튀튀한 암영이 철엽상의 흐릿한 동공을 가득 메워왔다.
'암초!'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순간 철엽상은 전 내공을 손가락 끝에 집중시켰다. 이어 양 손을 칼날처럼 빳빳이 세우는 동시에 바위 깊숙이 꽂으며 암초에 달라붙었다.
성공이었다.
세찬 파도가 암초를 할퀴고 지나갔으나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철엽상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흩어진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찬 파도가 연속해서 암초를 강타했기 때문에 중심을 잡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호흡도 곤란했다. 세찬 파도가 다시 한 번 그를 후려쳤다가 밀려나갔다.
철엽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가는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철엽상은 한 손을 매끄러운 암초 위쪽으로 옮겨 박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대략 일각 정도 지났을 때, 철엽상은 수면 위에서 십여 장 정도 솟아오른 암초의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가죽끈으로 허리띠에 연결해 놓은 통나무 배가 암초 아랫쪽에서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간신히 통나무를 끌어 올리자 그의 전신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가까스로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암초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철엽상은 품 안에서 오령환 두 알을 꺼내 입에 털어넣은 후 운공조식을 시작했다.
대략 반 시진 정도 지나자 철엽상은 운공조식을 끝내고 눈을 떴다.
무척이나 짧은 운기조식이었지만 평상시의 진기(眞氣)를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
들리는 것은 암초를 후려치는 파도소리 뿐, 사방은 칠흑 같이 어두웠다. 오로지 하늘의 별들만이 뿌우연 빛줄기를 지상으로 흩뿌릴 뿐이었다.
철엽상이 서 있는 암초는 절영도와 삼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섬에 침투할 것인가?'
그는 냉철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내공이 지순하다고 해도 삼백여 장이나 되는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섬은 깎아지른 채 백여 장 높이로 치솟아 있었다.
꽈르르르…… 르릉!
수십 마리의 묵룡이 일시에 용틀임을 하듯 광란하는 파도는 쉴 새 없이 섬의 주위를 후려치고 있었다. 천연적인 요새 치고는 너무나도 완벽한 요새였다.
그러니 섬 주위에 경비나 매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끝이란 말인가?'
철엽상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은 철엽상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마흔 아홉 마리의 짐승 중에 한 마리가 저 섬에 있다!'
철엽상의 동공 깊숙이 차가운 한광(寒光)이 찰나간에 스쳤다.
문득 철엽상은 주먹을 불끈쥐었다.
'방법은 있다!'
그는 품 안에서 천금사 한 타래를 꺼냈다. 그리고는 흑장화 측면에서 한 자 길이의 단검(短劍)을 꺼내 천금사 끝에 묶었다.
일단 방법이 결정되자 철엽상의 움직임은 눈부시게 빨랐다. 천금사의 다른 한쪽 끝을 자신의 손목에 묶은 그는 암초에서 섬의 꼭대기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삼백 칠십 오 장 정도다. 천금사의 길이가 충분하기를 바랄 뿐이다!'
철엽상은 내공을 모아 절영도의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둥그런 바위를 목표로 단검을 날렸다. 단검은 빛살보다 빠르게 바위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조준이었다. 헌데 이게 웬 일인가?
단검이 바위에 꽂히기도 전에 천금사가 팽팽히 당겨지며 손목에 쓰라린 통증이 오는 것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천금사의 길이가 삼 장 정도 짧은 것이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철엽상은 단검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천금사를 잡아당겼다.
단검은 수중에 돌아왔으나 철엽상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천금사를 이용하는 방법마저 불가능하단 말인가? 가만…… 그렇다!'
철엽상의 뇌리에 곧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천금사를 섬의 중턱까지 연결시키고, 나머지 높이는 다른 방법으로 충당한다!'
단검이 다시 철엽상의 손바닥을 벗어났다.
단검은 정확하게 섬의 꼭대기에서 삼십여 장 밑에 떨어진 절벽에 자루까지 깊숙이 박혔다.
철엽상은 손목에 묶었던 천금사를 풀어 암초의 돌출 부분에 묶어 팽팽히 고정시켰다. 뒤이어 통나무 배도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고정시킨 후 깊은 호흡을 들이마셨다.
암초와 섬의 중턱을 일직선으로 연결시킨 천금사는 별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철엽상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천금사 위로 뛰어 올랐다.
표표히 철죽립 아래로 드러난 흑발을 나부끼며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천금사 위를 걷는 철엽상의 모습은 마치 허공을 밟으며 걷는 천신(天神)같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절벽 깊숙이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오른발로 힘껏 찍으며 야조처럼 날아 올랐다.
"후후훗!"
섬의 꼭대기에 가볍게 내려서는 철엽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방법으로 섬에 오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철엽상은 잠시의 흥분을 떨쳐 버렸다.
그는 곧 빽빽이 솟아있는 기암괴석들의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곳에도 경비무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놈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는 섬의 중심부로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펑…… 퍼펑!
돌연한 굉음이 어둠을 찢으며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뒤이어 칠흑 같이 어두운 하늘이 대낮처럼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철엽상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급을 알릴 때 쓰는 신호용 폭죽이 까마득한 허공에서 불꽃을 터뜨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아뿔사! 놈들이 벌써 내 움직임을 포착했단 말인가?'
철엽상은 경악했다.
이곳은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만일 그들에게 발각된 것이 사실이라면, 철엽상의 퇴로는 광란하는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길 뿐이었다.
[3]
노련한 사냥꾼은 점찍은 사냥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타인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악조건 하에서도 목표물의 숨통에 독화살을 꽂을 완벽한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
철엽상은 티끌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살수가 아니던가?
바위 뒤에 신형을 은폐한 철엽상은 현재 자신이 위치한 주변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매복자나 경비무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느 순간에 적에게 발각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는지 곱씹어보았다.
'한 치 앞도 가리지 못하는 안개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가까스로 올라갔던 암초 위? 광란하는 파도 때문에 내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철엽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금사를 던질 때와, 그것을 타고 섬으로 접근하던 때다. 그때가 아니라면…… 절벽 중턱의 어느 한 곳과 이 근처라는 얘긴데…….'
철엽상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이 안된다. 내 이목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인물이 따분하게 경비를 서고 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신호탄은 우연이란 말인가?'
철엽상은 아직도 허공에 높이 걸려 휘황한 빛을 뿌리는 불꽃을 쳐다 보다가 문득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신호탄은 섬의 반대쪽에서 쏘아 올려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또 다른 인물이 이곳에 침입한 것일까?'
철엽상은 신형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기거할 만한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철엽상은 대략 이백여 걸음을 전진했을 때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느닷없이 길이 끊어지면서 눈 앞에 커다란, 광장처럼 움푹 패인 분지(盆地)가 나타난 것이었다.
사방 수십 리에 달하는 거대한 섬인 절영도는 전체가 하나의 분화구(噴火口)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철엽상이 서 있는 곳에서 대략 오십여 장 깊이 정도인 분지의 중앙에는 울창한 송림(松林)으로 둘러 싸인 광대한 연무장(練武場)이 펼쳐져 있었다.
연무장 중앙으로는 팔두마차 다섯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드넓은 청석대로(靑石大路)가 곧게 뻗어 있었다.
게다가 유리의 표면처럼 반질반질한 절벽의 아랫부분에 무수히 많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동굴의 입구는 마치 고루거각(高樓巨閣)의 앞면을 잘라서 붙여 놓은 듯 웅장했다.
한 마디로 말해 섬세하게 건축된 고루거각들 통째로 들어다가 절벽에 박아놓은 형상이었다.
"으음!"
철엽상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야혈존 전리백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군. 십지마련의 일개 총단에 불과한 사해율무도가 이 정도라면……!'
그렇다.
십지마련 사해율무도는 철엽상이 여태까지 보아온 강호의 그 어떤 문파도 따를 수 없는 엄청난 규모였다.
바로 그때였다.
연무장을 비롯한 분지 곳곳에서 커다란 횃불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섬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뒤이어 수만 명을 헤아리는 혈포인(血袍人)들이 날렵한 동작으로 중앙의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곧게 뻗은 청석대로의 양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도열했다. 삼만여 명에 이르는 혈포인들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으나 말소리는 커녕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 혈포인들의 행동은 사해율무도의 규율(規律)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혈포인들의 도열이 완전히 끝났을 때였다.
쿠르르…… 르릉!
철엽상이 서 있는 곳의 맞은 편 절벽이 육중한 굉음을 토해내며 좌우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갈라진 절벽 사이로 바다까지 이어지는 웅대한 계단의 통로가 드러났다. 그러자 계단 끝에 있던, 수면 위로 불쑥불쑥 치솟았던 암초들이 바닷속으로 침몰하며 일직선으로 뱃길이 열렸다.
정녕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할 가공할 기관장치였다.
잠시 후, 거대한 철갑선 한 척이 산더미처럼 광란하는 파도를 찍어 누르며 훤히 트인 절벽 사이의 통로로 진입해 들어왔다.
철갑선은 계단 아래서 멈추었다.
뒤이어 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철갑선에서 내려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하나같이 막강한 기도(氣道)를 풍기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곧 청석대로로 들어섰다.
일행 중에서 가장 앞서 걸어오는 회의인(灰衣人)이 최고 직위의 인물인 듯했다.
그 순간, 철엽상이 신형을 은폐하고 있는 절벽의 밑부분, 즉 사해율무도 내에서 가장 웅대한 규모의 고루거각 입구에 구 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때였다.
숨소리조차 없이 대로 양쪽에 도열해 있던 삼만여 명에 이르는 혈포인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사해율무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혈포인들이 일제히 외치는 함성은 우레처럼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절도 있는 행동은 칼로 자르듯 엄격했다.
절벽 위에서 보자니 사람들의 모습은 손가락보다 작게 보여, 제대로 생김새를 분간할 수 없었다.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군.'
철엽상은 청각을 곤두세워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였다.
철갑선을 타고온 회의인은 마중나온 사람들 중 적색곤룡포(赤色袞龍袍)를 걸친 인물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도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적색곤룡포의 노인은 장중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대외총령(大外總領) 어서 오시오. 그간 편안하셨소?"
그들은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 받은 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대한 동굴 대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부터 혈포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갑선에서 단단히 포장된 짐꾸러미를 내려 어느 한 동굴 전각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철엽상은 혈포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대외총령이라 불리운 자의 행동으로 보건대…… 사해율무도주보다 고위직에 있는 자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회의인은 십지마련보다 더 막강한 문파(門派)에 소속된 인물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저토록 엄청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십지마련 뒤에는 또 다른 강대문파(强大門派)가 도사리고 있다니…….'
철엽상은 안개 속을 더듬는 맹인처럼 막연했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짐꾸러미를 나르는 행렬 중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와 울창한 수림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철엽상으 놓치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는 나무 사이로 교묘히 신형을 은폐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침입자?'
철엽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는 사해율무도 도주와 회의인이 들어간 바로 그 동굴 안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귀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은밀하면서도 민첩한 행동이었다. 혈포인들 중에서 검은 그림자의 침입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당히 대담한 친구로군.'
철엽상은 내심 감탄했다.
동굴 속으로 스며든 검은 그림자, 그는 바로 천화대부인의 밀서를 지닌 잔혈마랑 살가륵이었다.
살가륵은 망설이지 않고 사해율무도 도주 혈해천신(血海天神) 모발격(毛拔擊)의 처소인 해룡대전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천락궁을 떠나기 직전 천화대부인으로부터 사해율무도주의 처소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가 구룡항에서 지체하지 않고 사해율무도로 향하는 철갑선에 숨어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혈해천신의 처소로 숨어든 살가륵은 품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는 서찰을 혈해천신의 눈에 가장 쉽게 뜨일 수 있는 곳, 즉 태사의 좌측 탁자에 놓았다.
"이제 됐다. 남은 것은 백사낭혼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흐흐흐!"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던 살가륵은 곧 혈해천신의 처소를 벗어났다.
꾸물거리다가 발각이라도 된다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4]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철엽상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 세 개를 집어들고 다시 절벽가로 다가섰다.
섬 전체를 환히 밝히던 횃불들은 대부분 꺼진 상태였다. 군데군데 꽂혀 있는 백여 개의 관솔 불만이 희미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개미떼처럼 바쁘게 움직이던 혈포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해율무도에는 깊은 정적과 함께 짙은 어둠만 무겁게 내리덮혀 있었다.
'바닥까지의 깊이는 대략 오십 칠 장(丈) 정도…… 그 정도의 높이를 단숨에 뛰어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엽상은 잠시 후를 대비해서 퇴로(退路)를 만들 작정이었다.
그는 세 개의 나뭇가지를 양손에 나누어 쥐고 두 팔을 활짝 펴 박쥐처럼 날아 내리기 시작했다. 이십 장 가까이 떨어져 내렸을 때였다.
철엽상은 비룡번신(飛龍蒜身)의 수법을 전개해 허공에서 한 바퀴 선회하며 나뭇가지 하나를 절벽에 단단히 박았다. 그와 같은 수법으로 그는 세 개의 나뭇가지를 이십 장 간격으로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절벽에서 십 장 가량 앞으로 돌출된 대전의 지붕 위로 사뿐히 내려 섰다.
철엽상은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주위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동굴의 입구에만 대 여섯 명의 경비무사가 있을 뿐,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해율무도의 사람들은 천연적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외부에서 어느 누구도 잠입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오히려 철엽상이 활동하는 데 많은 편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철엽상은 전각의 지붕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울창한 송림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 곳은 사해율무도주가 들어간 대전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서 보다 완벽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다. 유비무환이야말로 그가 지난 사 년 간의 청부살인을 해오면서 경험으로 터득한 필살(必殺)의 비결이었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철엽상은 거무튀튀한 철문으로 입구가 봉쇄된 동굴 앞에 도착했다.
철갑선에서 하역한 짐꾸러미를 이곳으로 운반해 논 것으로 짐작컨대 식량창고인 듯했다.
철엽상은 아름드리 노송 뒤에 몸을 숨긴 채 동굴의 입구를 살폈다.
철문의 양쪽 벽에 굵은 관솔불이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철문 좌우로 세 명씩, 여섯 명의 혈포인이 핏빛 섬뜩한 청룡월도(靑龍月刀)를 움켜쥔 채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 장검을 등에 메고 체격이 우람한 혈포인 한 명이 뒷짐을 진 채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도합 칠 인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붉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청룡언월도를 쥐고 있는 여섯 명의 이마에는 흑룡(黑龍)이 그려져 있고 장검을 메고 있는 혈포인의 이마에는 청룡(靑龍)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 미루어 보건대 청룡이 그려진 복면을 쓰고 있는 혈의인이 파수대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철엽상은 허리띠에서 탈명철환 여섯 개를 꺼내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욱!
여섯 개의 탈명철환은 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것보다 미약한 소리를 흘리며 날아갔다.
"……!"
청룡언월도를 쥐고 경비를 서던 육 인의 혈포인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절명했다. 이마에 엄지 손가락만한 철환이 박힌 채.
"웬 놈……?"
하릴없이 서성거리던 혈포인은 자신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오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는 순간 재빨리 장검을 뽑으며 외쳤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달빛 아래 싸늘한 냉기를 발산하는 차디찬 검날 하나. 철엽상의 혈우검이 어느새 그의 목줄기를 그어버린 탓이었다.
장검을 뽑으려던 혈포인의 오른 팔이 힘없이 밑으로 처졌다.
숨은 끊어졌으나 끝내 소리를 못 지른 것이 억울하다는 듯 혈포인의 두 눈은 부릅떠져 있었다.
철엽상은 재빨리 쓰러지는 혈포인의 마혈(麻穴)을 짚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혈포인의 신형이 똑바로 섰다. 그 상태에서 철엽상은 혈포인의 손을 뒷짐을 지어주었다.
비록 시체가 되긴 했지만, 그의 모습은 두 눈을 부릅뜨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갔다.
철엽상은 재빨리 땅 위에 쓰러진 육 인을 차례로 일으켜 몇 군데의 혈도를 두드렸다. 그러자 곧 그들도 두 눈을 크게 뜨고 허수아비처럼 꼿꼿하게 섰다. 이마에는 검은 철환을 하나씩 박은 채로 말이다.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무엇인가를 찾던 철엽상은 즉시 우측 벽에 돌출된 철문의 기관장치를 눌렀다. 손때에 절어 반질반질한 기관장치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육중한 철문은 기름칠한 마차 바퀴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울퉁불퉁한 벽면에 드문드문 횃불이 꽂혀 있는 동굴 속은 안개낀 계곡처럼 침침했다.
철엽상은 철문을 닫은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대략 이십여 장을 전진하자 동굴은 세갈래 통로로 나뉘어졌다.
철엽상은 중앙 통로로 쾌속하게 신형을 날렸다.
동굴 내부에는 경비무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식량을 훔치기 위해 이 절해고도까지 오는 도둑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세 곳을 모두 살피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앙통로 끝에는 식량창고가 있었다. 좌측 통로의 동굴 속에는 피복과 옷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우측 동굴 속에는 각종 생활 필수품이 산더미처럼 저장되어 있었다.
철엽상은 송아지 몸통만한 기름통 네 개를 꺼내 식량창고와 피복창고에 각각 두 개씩 뿌렸다. 그리고는 다시 세 통을 더 꺼내 두 통을 생활필수품이 쌓여 있는 창고에 뿌렸다.
마지막 한 통은 동굴 바닥에 뿌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철엽상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후후……. 인간이란 극도로 흥분했을 때 가장 많은 허점을 노출시키는 법이지.'
세 통로가 갈라지는 곳부터 철엽상의 기름 뿌리는 동작이 더욱 신중해졌다.
'도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통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줄기는 지렁이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그는 동굴의 길이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구석에서 구석까지 갈지(之)자로 기름을 흘리며 뒷걸음질쳤다.
동굴 입구에 우뚝 선 철엽상은 우측 벽면에 타고 있는 횃불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기관장치의 단추를 눌렀다.
철문이 겨우 사람 하나 빠져나갈 정도로 열리는 순간 그는 급히 기관작동을 멈추었다.
밖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칠 인의 파수무사들은 철엽상이 손 본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철엽상은 바닥에 뿌린 기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밖으로 빠져나와 철문이 완전히 닫히기를 기다려 기관장치를 부셔 버렸다.
'이제부터 최대한으로 빨리 움직여야 한다!'
철엽상의 신형은 퉁기듯 쏘아져 올라 빛살보다 빠르게 숲속을 가로 질렀다.
잠시 후 철엽상은 처음 내려섰던 그 대전의 지붕 위로 되돌아 왔다. 그는 지붕에 내려서는 순간 식량창고가 있던 방향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
지붕 위에 낮은 자세로 엎드려 식량창고 쪽을 주시하는 철엽상의 무심한 얼굴에 은은히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5]
혈해천신 모발격.
천년마벽 수인번호 : 팔만사천구십구번(八萬四千九十九番).
모발격은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독패천하(獨覇天下)의 야망을 품고 강호를 혈해로 만들었던 암천구유마계(暗天九幽魔界)의 지존이었다.
그러나 능력이 뒤따르지 못하는 야망이란 언제나 비참한 종말로 끝나는 법이 아니던가.
그는 결국 정도연합에게 대패하여 무공이 완전히 폐지된 상태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삼천 칠백 오십 삼 명의 수하들과 함께 천년마벽에 갇힌 마지막 거물급 수인(囚人)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발격은 천년마벽을 탈출한 이후 사해율무도라는 방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다시 한번 중원대륙을 질타할 웅비(雄飛)의 그날을 꿈꾸고 있었다.
혈해천신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철갑선을 타고온 회의인과 함께 자신의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는 회의인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바다 가운데 고립된 섬이라 대접이 소홀했네. 이해해 주시게나."
"개념치 마십시오, 도주님. 저에게는 과분한 식사였습니다."
회의인은 지극히 겸허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중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였다.
하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회의인의 눈빛은 천하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듯했다. 한 마디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비밀을 모조리 통달한 듯한,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런 눈빛이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대 초반 쯤 되어 보였다.
대전으로 들어선 회의인은 자리에 앉기 직전 태사의 좌측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밀봉된 서찰을 발견했다.
회의인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도주님, 대단히 중요한 문서가 들어있나 보군요?"
"문서?"
도주 혈해천신은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집어 들었다.
"오늘 반입해 들어온 하역 물품의 목록인가 보군."
혈해천신은 서찰을 뜯었다.
서찰을 읽어내려가던 혈해천신의 입에서 느닷없이 앙천광소가 터졌다.
"크하하핫!"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혈해천신은 손에 든 서찰을 회의인 앞으로 내밀었다.
"하하핫! 대외총령도 한번 보시게."
회의중년인은 그의 돌연한 웃음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서찰을 건네받았다. 서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백사혼이라는 광적인 살인마가 도주를 암살하기 위해 근일간 사해율무도에 잠입할 것이오. 놈은 일인군단이라고 불리울 만큼 가공할 능력을 지닌 초특급 자객이오.
만반에 준비를 갖추어 불미스러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 주기 바라오.
-도주를 생각하는 친구.>
사람이란 누구나가 어이없는 일을 당할 경우 그 황당함을 무마하거나 상쇄시키기 위해 허허롭게 웃는다. 혈해천신도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여타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허허허헛……."
혈해천신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천하에 그 어떤 인물이 감히 사해율무도에 잠입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부터 날개를 달고 태어난 새가 아닌 바에야…….'
이것이 혈해천신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회의중년인은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갔다.
"도주, 이것은 가볍게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하하핫! 대외총령,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없소. 보아하니 삼대 총수(總首) 가운데 어느 한 녀석이 장난을 한 것 같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소. 본좌의 침실에 이빨을 뺀 독사(毒蛇)를 넣는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본좌를 놀래키려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 말이오."
서찰의 한귀퉁이를 만지작거리던 회의중년인의 눈빛이 돌연 예리하게 빛났다.
"도주님, 이것은 절대로 섬 내에 있는 인물이 쓴 서찰이 아닙니다. 이 종이를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하하핫! 대외총령은 모든 일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 탈이라니까."
"제 설명을 들어 보십시오."
회의인의 음성이 단호해졌다.
혈해천신은 그때서야 웃음을 멈추고 회의인을 주시했다.
"대체 무슨……?"
"이 종이는 소주(蘇州) 지방에서 생산되어 대부분 황궁(皇宮)으로 납품되는 최고급 한지(閑紙)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본 사해율무도에 들어오는 종이는 모두 광동(廣東)지방에서 생산되는 중급(中級) 한지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렇…… 긴 하오만……."
"때문에 이 서찰은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혈해천신의 얼굴에 그때까지 피어 있던 웃음기가 싸악 사라졌다.
회의인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럽시다."
혈해천신은 어두운 신색으로 대전 뒤쪽 두터운 휘장을 젖혔다.
벽인 줄로만 알았던 곳에 작은 석문 하나가 있었다.
석문을 열고 들어선 두 사람 앞에 자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무거운 안색으로 계단을 올랐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