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앞부분의 줄거리 ‘나’는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8년 만에 제주를 방문했다가 순이 삼촌이 자신의 옴팡밭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순이 삼촌은 일 년 동안 서울 ‘나’의 집에서 부엌일을 도와주다가 두 달 전에 귀향한, 집 안의 아주머니이다. 이를 계기로 ‘나’는 삼십여 년 전에 고향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에 관해 집안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삼십여 년 전 군경은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벌여 마을 사람들 오륙백 명을 사살했다. 그때 순이 삼촌은 자기네 옴팡밭에 끌려간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지만 자식들을 잃고 말았다. 순이 삼촌은 온갖 고초를 겪은 후, 공비들의 약탈에 대비하여 세운 전략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국민학교 3, 4학년에서 일 년째 쉬고 있던 나와 길수 형도 대창을 하나씩 들고 막(幕)을 지키러 나가곤 했다. 순이 삼촌도 만삭의 몸인데도 우리 초소에 대창 들고 막 지키러 나왔다. 사건 날의 그 무서운 공포를 겪었는데도 아기는 떨어지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사건 날 오누이를 한꺼번에 잃은 삼촌에게는 배 속의 아기가 유일한 씨앗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아기를 가진 삼촌은 먹을 것을 구하느라고 그야말로 눈이 벌게 있었다. 만삭의 몸이라 물질은 못하고 하루 종일 땡볕에 갯가를 기어 다니며 굴, 성게를 까 먹고, 게, 보말(갯우렁이) 따위를 잡았다. 밤에 초소막에 나올 때는 보말 삶은 것 한 채롱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는 우리에게 먹어 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밤새도록 혼자서 걸귀처럼 까 먹어 대곤 했다. 여자가 아기를 배면 사정없이 먹어 댄다는 걸 몰랐던 나는 순이 삼촌이 걸신들려 실성하지 않았나 생각할 지경이었다.
이런 전략촌 생활은 거의 일 년 넘게 계속되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공비의 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밤중에 성문께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모두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알고 보니 낮에 들에서 놓친 누구 집 소가 밤에 제 발로 성까지 걸어와서 부스럭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해안 지방의 축성은 과잉 조처라는 게 판명된 셈이었다. 이미 몇 십 명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든 입산 폭도들은 해안 지방을 약탈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부락민들은 일 년이 넘도록 한 번도 써먹어 본 일이 없는 무용지물의 성을 다시 허물고 제각기 제 집터로 돌아갔다. 성을 허문 돌을 날라다가 다시 울담과 벽을 쌓고 새로 집을 지었다. 집이라고 해야 방 하나에 부엌 딸린 두 칸짜리 함바집이었다. 못이 없어서 대신 굵은 철사를 잘라 썼으니 오죽한 집이었을까? 순이 삼촌도 우리 큰집에서 몸을 풀고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불탄 집터에다 조그만 오두막집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일가족이 전부 몰살되어 집을 세우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집터도 더러 있었다.
그 무렵 내 또래 아이들은 사람 죽은 일주 도로변의 옴팡밭에서 탄피를 주워다 화약총을 만들기가 유행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옴팡밭의 비극을 까맣게 잊고 사람 죽인 탄피를 주워 모았다. 그렇다. 무럭무럭자라는 데 도움 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편리하게 잊어버리는 게 아이들의 특성이 아닌가. 그러나 어른들은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팡팡 쏘아 대는 화약총 소리에도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그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어디서 났는지 불에 타서 엿가락처럼 휘어진 총신만 남은 구구식 총을 끌고 다니다가 제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빼앗겼는데, 총의 그 푸르딩딩한 탄 쇳빛은 꼭 죽은 피 빛깔을 연상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 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순이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 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더운 여름날 당신은 그 고구마밭에 아기구덕을 지고 가 김을 매었다. 옴팡진 밭이라 바람이 넘나들지 않았다. 고구마 잎줄기는 후줄근하게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대낮, 사위는 언제나 조용했다. 두 오누이가 묻힌 봉분의 뗏장이 더위 먹어 독한 풀냄새를 내뿜었다. 돌담 그늘에는 구덕에 아기가 자고 있었다. 당신은 아기구덕에 까마귀가 날아들까 봐 힐끗힐끗 눈을 주면서 김을 매었다. 이랑을 타고 아기구덕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이랑을 타고 돌아오곤 했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 나오고 녹슨 납 탄환이 부딪쳤다.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은 자주 일어났다. 눈에 띄는 대로 주워 냈건만 잔뼈와 납 탄환은 삼십 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을 밭담 밖의 자갈더미 속에다 묻었다.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 년, 삼십 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렇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 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 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마무리짓고 나자 나는 문득 담배 피우고 싶은 충동이 조바심치듯 일어났다. 좌중은 어느 틈에 나만 빼놓고 농사 얘기로 동아리져 있었다.
“올해는 제발 작년모냥 감저 시세가 폭락하지 말았이면 좋을로고…… 빌어먹을, 그눔의 가을장마는 금 없이 터져 가지고는 썰어 말리던 감저에 곰팽이 피어 부렀이니……”
나는 밖으로 나와 마당귀에 있는 조짚가리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당에 얇게 깔린 싸락눈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고 있었다. 음력 열여드레 달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지만 주위는 희끄무레 밝았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마 두어 집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 현기영, 「순이 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