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북한의 미인계에 걸린 정보사 공작단 장교
96년 초여름 김영수 반탐과장은 북경 량마허 호숫가에 자리잡은 위양판덴 바로 옆의 북한 그림 판매소에서 박채서에게 조선족 아가씨를 한명 소개해주었습니다.
박채서도 잘 아는 아가씨였습니다.
박채서가 북경에 오면 통역 겸 가이드를 해준 조선족 아가씨의 학교 친구였습니다.
김영수의 권유로 그녀가 근무하는 위양호텔 근처릐 아파트촌에 따라갔으며 아파트 출입문 바로 옆 책상위에 낯익은 흉상과 침실에서 골프백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조XX 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습니다.
조XX소령은 박채서가 공작단 902정보대에 근무할 때 인간정보 담당인 공작단 공작2과에 근무하였습니다.
그가 북경에 조그만 오퍼상을 차려놓고 신분을 위장해 공작원으로 와 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오퍼상의 사무원으로 채용된 그녀는 조소령의 정보원이자 북한 정보요원들과 가까웠습니다.
국가안전보위부 반탐과장 김영수는 조XX가 사무실 직원 겸 정보원으로 채용한 조선족 아가씨를 역포섭해 훤히 들여다 보고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준비할 즈음 조소령은 정보원 아가씨를 여행객으로 위장해 평양을 방문해 첩보를 수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방법은 우스꽝스러웠으니 조선족 아가씨 정보원은 주위에 이렇게 묻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번 군사퍼레이드는 어떤 단위 부대가 참가하는지 새로운 무기들은 얼마나 참가하는지 김정일은 참가하는지 등등.
군사지식이라고는 전혀없는 조선족 젋은여성에게 군사정보수집을 시켰으니 금방 스파이인게 들통나 정보기관은 그녀의 단체여행객에서 떼어내 1주일동안 안가에 연금을 하며 젋은 요원3명을붙여 매일같이 발정제 마약을 주입하고 밤낮으로 섹스 윤간고문을 자행하였으며 몰래카메라로 이를 녹화한뒤 그녀를 돌려보낼때는 적당한 군사자료와 선물을 주며 포섭하였습니다.
조소령은 자신의 정보원이 포섭된줄도 모른채 '성과 거양'으로 포장해 포상케하고 보름간 국내여행을 시켜주는등 극진한대접을 하였다고합니다.
조소령의 위장 사업 아이템은 북한산 농수산물을 국내에 수입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신원을 파악한 북한 당국이 농간을 부려 6천만원 가량 개인채무를 지게 만들었습니다.
현장 경험이 부족한 공작관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해 발생한 과오였으며 안기부에서 정보사에 지급되는 공작자금은 중간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빼먹는 것이 관행이던 시절에 소령봉급으로는 감당키 어려웠습니다.
훗날 그가 채무관계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몰라도 조소령은 대령으로 진급하였습니다.
6. 산허우이와 정보사의 갈등 (보복살해 위협을 받은 국방무관)
97년 5월경에 안기부,기무사,외교부,경찰 외사국의 베이징 주재원들이 각각 본국의 소속 기관에 긴급 보고를 타전하였습니다.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 육군무관보좌관 이XX중령의 신변위협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이중령은 초급장교시절에 홍콩유학을 다녀온 군대 중국통이었습니다.
그는 북경주재 육군 무관보좌관을오 정보수집 공작 활동을 의욕적으로 하다가 중국의 대표적인 폭력조직 삽합회 산허우이와 북한당국간의 마약 거래선을 침범한 것입니다.
96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안기부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북한 정부는 회화난을 극복하기 위해 '슈퍼노트' 라고 불리는 100달러짜리 초정밀 위조지폐를 찍어내고, '백도라지' 같은 위장 명칭을 사용해 양귀비 재배면적을 2천200만평까지 늘려, 해외공관이나 당 소속 무역회사가 당시 50개 조직 15만명에 이르는 삼합회 조직을 통해 밀매하였던것입니다.
이에 구역을 침범당한 삼합회 측에서 보복 살해를 공언하자, 관련 첩보를 입수한 각 기관의 주재원들이 본국에 타전한 것이었으며 각 기관의 정보를 접한 한국정부는 대사관에서 마련한 특별 비상루트를 통해 이중령을 긴급히 국내로 도피 송환시키며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05년 9월 초 박채서는 중국 허베이성 샹허의 한 골프장에서 산허우이 회주와 라운딩을 하다가 그로부터 다시 이중령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회주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한국대사관 무관 이대령을 죽이겠다."고 호언 하였습니다.
박채서는 그로부터 얘기를 듣기전까진 한국대사관 무관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에따르면 과거 자신들의 보복을 피해 도망간 자가 다시 베이징에 나타난것은 산허우이 조직을 무시하는 처사이므로 묵과할수 없다하였습니다.
골프 핸디가 프로급인 박채서는 우연한 기회로 그를 알게 되었으며 그의 골프선생이 되었고 그가 산허후이 회주란 사실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뒤에야 알았으며 그의 보복의지는 삼합회의 생리와 과거의 유사한 보복살해로 헛소리로 치부할수없었습니다.
96년경 귀국을 한 달 앞둔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 문화 참사가 새벽2시경 화두호텔 앞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당시 중국 공안 당국과 대사관은 단순 뺑소니 고로 간주하였지만 실상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이었습니다.
문화부 참사는 북경에 근무하면서 한 중국인 여성과 교제했는데, 이 여성은 참사를 따라 한국에 가고싶어 했으며 ,이에 참사는 귀국을 앞두고 그녀에게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약속하는등 실제로 수속을 밟고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녀는 산허후이의 중간 간부 애인이었고 뒷조사를 통해 불륜의 사실을 알자 부하들을 시켜 뺑소니로 처리한 것이었습니다.
산허후이 회주는 태연하게 박채서에게 들려주며 처리하는건 일도 아니란식으로 얘기하였으며 박채서는 곧장귀국하여 국방정보본부 해외운영처장인 고영일 준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박채서는 왜 이런 장교를 중국에 보냈는지 국방부의 처사를 이해할수 없었다고 하자 당시 고영일 장군은 자신과 무관하며 중국에 나가려고 윗선에 손을 썻으며 무관관리책임자인 자기자신도 모르게 명령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여튼 산허후이라는 조폭조직에게 한국군장교가 죽는것은 개망신이라 판단한 당국은 정보본부 소속 장교를 베이징으로 보내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대사관 이외의 바깥활동을 일절 하지말라고 지시했으며 신변안전을 위해 이대령에게 귀국하라 하지만 이대령은 본국 소환을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고영일 장군은 그해 장군 진급심사에 정보병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데 이미 청와대에서는 이대령을 장군심사에서 제외하라는 지침을 내렷으며 사유는 이대령은 산허우이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보복 살해 위협을 모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관 전역후 북경 현지에 사단법인 한중XX포럼 사무실을 차려 대표로써 활동했다고합니다
7. 정보사의 실패 금창리 핵시설 의혹
정보사의 정보 실패와 빼놓을수 없는 것이 금창리 핵시설 의혹 사건으로 미 정부는 98년 정보사 첩보를 바탕으로 북한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며 사찰단까지 보내었으나 지하시설이 핵시설이 아님을 밝혀 망신을 샀습니다.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은 98년 8월17일 뉴욕타임스가 의혹을 제기하며 시작되었고 사실이면 북한이 미국의 정수로 건설지원을 조건으로 핵동결에 합의한 94년 '제네바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한것이라고 하였으며 당시 4차례의 회담끝에 북한은 아닐경우 '모욕에'대한 보상을 하라며 사찰을 허용하라 하였습니다.
통상 군 관련 공작은 국정원이 직접 하지않고 정보사를 통해서 합니다.
금창리 핵시설 확인도 정보사가 포섭한 조선족 공작원을 투입해 금창리 부근의 토양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핵시설로 판명되었고 미정부는 한국과의 정보 협조를 근거로 금창리 지하시설이 핵시설로 확신하였으며 한국정부도 금창리 토양채취 공작을 수행한 정보사와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훈장을 주고 포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역공작으로 흑금공작원 박채서가 북한에 침투해 파악한 바로는 북한은 국정원-정보사의 조선족 활용공작을 꿰뚫고 있었으며 북한은 한-미대북공작의 혼선을 주기위해 조선족을 역포섭 자료와 핵물질이 든 토양까지 제공해 역용하였으며 국정원-정보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대어를 낚은것처럼 반겼던 것입니다.
이일로 사찰후 식량30만톤을 제공하였다고합니다.
당시 공작단장은 이XX준장으로,역공작에 말려든 그의 부하들이 핵시설 의혹을 확인한 대북공작을 수행한 공로로 훈포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