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의 예수동행일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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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서야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가 많고,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이제는 조심하게 됩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오히려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심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순교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육신이 죽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이 갖는 절대 주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쾌락과 안전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숭상하는 세상 문화에서는 매우 불경한 행동이며 신성모독과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잠재적으로 순교자의 삶입니다.
예수원의 고 대천덕 신부는 ‘성경보다 더 혁명적인 책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정말 옳습니다.
성경적 정신은 혁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였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 5)” 말씀했습니다.
이보다 혁명적인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혁명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스데반이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 일상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떤 기적보다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일, 어느 정당이 정권을 차지하느냐는 문제 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급하며 더 어려운 일은 하루의 삶에서 함께 웃고 울며,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가족이 화목하고, 물건을 사고팔 때 속이지 않고, 운전할 때 거칠게 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며 정의롭게 사는 삶입니다.
지금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지만 은혜의 문이 열렸다고 누구나 은혜받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담스러워할 만큼 우리를 몰아가신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나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육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끌려 살면 반드시 죽겠기에 우리가 성령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오직 기도’, 극단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겨우 기도를 조금 합니다.
‘오직 전도’, 그래야 겨우 전도를 조금 합니다.
‘사랑만 하며 살리라!’ 그래야 겨우 조금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말씀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죄의 종노릇 하는 옛사람으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길은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선택의 순간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행동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도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이 순교를 위한 준비이고, 그 자체가 일종의 순교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기 싫은 일에 순종하면 주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일상의 순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