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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1]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23,1-12
1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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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어릴 때 내 꿈은 <독서 : 에제 43,1-7ㄱ 또는 1테살2,2ㄴ-8 / 복음 : 마태 23,1-12 또는 요한21,15-17>
높은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 권력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높은 사람은 위가 아닌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높은 사람은 바라볼 위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가장 높은 사람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다스리게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인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에 온 정신을 모으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온 마음을 다 주는 것이 바로 참된 들음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순명 (順命) 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봉사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섬기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봉사는 잉여의 시간을 채우는 여가 활동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사람에게 순명하는 사람이자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섬기는 사람’ 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자료 : 한종민 신부(부산교구 울만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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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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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uline.or.kr%2Fdata%2Fcatholic%2Fimage%2Fcyber_pray_content%2F200808%2F080802_6.jpg) 우리들 가운데 가장 고약한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좋은 점이 있고,
우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고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은날개2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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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쉬는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당신과 늘 일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충만한 은총을 주소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들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시며, 당신만이 줄 수 있는 위로에 만족하게 하시어 신앙생활을 은혜로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마태23,1-12 또는 요한21,15-17
1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활기찬 토론
가톨릭 신자와 불교 신자의 서로 다른 사고방식 나는 어떤 특정 주제에 매이지 않는 가톨릭 신자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권위와 교리라고 생각한다. 경계선이 지극히 가변적일 때조차 ‘안이냐 밖이냐’식의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대놓고 제기하지는 않지만 ‘진리는 무엇이며 누가 쥐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부지불식간에 늘 존재하는 듯하다. 가톨릭교회에는 매우 명백한 가르침과 이런 가르침을 선포하고 지키며 옹호하는 이들 사이에 매우 뚜렷한 계급 체계가 자리한다. 불교도인들은 ‘안’에 있는 이들과 ‘밖’에 있는 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의 영적 목표는 만물이 무無요 그 무無가 만물이 되는 무한한 자비의 공간이다. 말 자체가 미심쩍은 소통의 도구로 간주되는데,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에 걸맞은 자리가 있을까? 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내어 줄 것은 참으로 많다. 하지만 대화 대신 만남이라는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말 또한 가장 창조적인 길을 함께 모색해 나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헨리 나웬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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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20주간 토요일(2010-08-21)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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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버리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여 그곳이 부패한 땅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백성이 정화되고 쇄신된 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가운데로 되돌아오신다.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현존 방식으로 낡은 제도를 없애시고, 백성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인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네 지식을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삼고 위선적으로 행동하면서 백성을 억압하는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을 꾸짖으신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약한 이들마저 구원의 은총을 입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겸손과 사랑의 봉사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말은 실행하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즉시 성전정화(21,12-17)를 통하여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심하게 논쟁을 벌이셨다(21,23-27). 이어서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21,28-22,14) 등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세금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을 통하여 그들의 감탄을 받아냈으며,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계명이 새롭게 선포되었다.(22,34-40) 예수께서는 자신이 육(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靈)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계시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총체적으로 책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청중은 갈릴래아 활동기에서와 같이 군중과 제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새로운 정의를 선포하셨다. 오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잘못된 정의를 책망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의가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표하신다.
그들이 예수의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모세의 율좌(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위선자(僞善者)’들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위선자’는 원래 연극용어로서 배우들을 지칭한다. 배우들은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가면 뒤에 숨기고 각본과 배역에 따라 연기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배역이 주어지면 각본에 따라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동은 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마나 팔에 성구(聖句)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교회 안에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이 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당신 한 분뿐이시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임을 가르치신다. 예수님만이 가르치시는 선생(先生)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는 학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전해야 하고 다시금 가르쳐야 하는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그들 또한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늘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11-12절)는 오늘 복음의 역설을 지워지지 않는 글씨로 마음에 써 넣어야 하는 것이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거나 남 앞에 자주 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고, 말이 많으면 행동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료로부터 신부(神父)와 조폭(組暴)의 세 가지 공통점을 듣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세 가지 공통점인즉, 첫째는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는 것, 둘째는 ‘밥 먹고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 셋째는 ‘아무한테나 반말한다.’는 것이었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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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위선
오늘부터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 속에 마지막 종착지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먼저 성전으로 가셔서 장사꾼들을 쫒아내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민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소요가 일어나서 로마 군대가 개입하게 되면 예루살렘을 관할하던 자신들이 문책당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올가미에 걸어 처벌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자신의 신적인 신분을 제시하면서 자신을 믿기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완악한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유다종교지도자들에게 엄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I. 말과 행동이 다른 거짓 지도자들
1. 모세의 자리에 앉은 종교 지도자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마태 23,1-2)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주님의 마지막 권고마저 거부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과,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제자들과 순례자들을 향해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끝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밝히 드러내시고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거짓된 종교의 정체에 대해서 밝힐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주님은 거짓 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여 그들이 경계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이 거짓 지도자를 분별하고 그들을 따르지 않도록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주님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전한 위대한 예언자이며, 또한 위대한 영적 스승이었습니다. 당시에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모세가 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매 주일마다 백성들에게 모세가 쓴 율법을 가르쳤으며, 그 율법을 준행할 수 있도록 다른 법들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거짓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했지만, 그릇된 해석과 가르침으로 인해 백성들을 길을 잃게 하고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도 그들의 위선을 따르다가 올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2. 말하는 것은 실행하고 지키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위선된 행동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율법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르친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대로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주님은 그들의 거짓된 해석과 행동을 반대하신 것이지, 결코 진리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는 한 반드시 그 가르침을 행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행위는 결코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참된 종교는 반드시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은 잘했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이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올바르게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이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참된 영인지 시험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도자는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군중들도 삶에 나타난 열매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3.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는 종교 지도자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주님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거짓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백성들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백성들이 지기 어려운 의무를 부과하여 부담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들은 하느님의 말씀 외에 다른 법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의 책임을 무겁게 만듭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 중에 일부를 제거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필요 없는 전통과 의식을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그것을 지키게 만듭니다.
이러한 일들은 백성들을 피곤하고 무거운 중압감에 시달리게 합니다. 원래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고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사들은 진리로 백성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인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그릇된 율법 해석과, 인위적으로 만든 법을 가지고 백성들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를 부여하고 나서, 자기들은 그 짐을 지려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를 싫어했습니다. 참된 스승은 백성들의 짐은 가볍게 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인 남에게는 무거운 의무를 부여하고, 자기는 그 의무를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한 지도자였다면,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고 자유롭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율법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압박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강제로 말씀을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여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가르침은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동은 결코 본받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II. 위선자 바리사이파 사람들
1. 겉 모습을 꾸미는 위선자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이제 주님은 구체적으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지적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거짓 교사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경문을 넓게 만들어서 차고 다녔습니다. 경문은 가죽으로 된 성구함으로서, 그 안에는 중요한 성경 구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성구함을 지니고 다닌 것은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라는 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사들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은 성구함을 만들어서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별되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건함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옷술을 크게 하고,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보통 세마포로 된 통옷과 백색으로 된 긴 두루마기를 입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보통 물감을 들인 옷을 입었기 때문에 율사들의 옷은 금방 구별이 되었습니다. 그 두루마기는 발까지 닿았으며, 그들은 그 옷 끝에 넓은 옷자락 술을 달아서 다른 사람들의 옷과 구별되게 만들었습니다.
율사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주로 백색 세마포를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사제, 레위인, 그리고 율사들이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이런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매우 존경했고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귄위 있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좋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비난하신 것은 그들이 진정한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않고, 겉 모습을 통해서 존경을 이끌어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모를 꾸며서 존경을 이끌어 내려 하는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가증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진정한 교사는 외모보다 속 사람을 단장하는 법입니다(1티모 2,9-10 ; 1베드 3,3-5). 그러나 실속이 없는 사람일수록 겉모습을 꾸며서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워 보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 역시 내실보다는 겉모습에 치중하는 전형적인 거짓교사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명예욕에 사로잡힌 위선자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6-7)
또한 율사들은 매우 교만했으며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으며, 시장에서 인사 받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라삐"라고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율사들이 거리나 장터를 지나가면 백성들은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이 거래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일어나서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율사들은 남에게 주목받기 쉬운 장터나 거리에서 흰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외식적인 태도를 증오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유지나 세력가들은 잔치를 할 때에 명성있는 율법학자나 그의 문하생들을 초대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으례히 율사들을 초청하곤 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된 율사들은 연장자나 그 집안의 부모들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또 회당에서도 율사들은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앉는 자리는 율법이 놓인 맨 앞자리에 있는 긴 의자였습니다. 그 자리는 온 회중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으기 때문에, 율사들은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와 같이 세상의 명예욕에 사로잡힌 그들을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율사들은 자신들을 높이는 칭호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율사들에게 말을 할 때에 존경을 표시하는 "라삐", "아버지", "선생"과 같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주후 1세기에 와서는 "라삐"라는 칭호는 안수받은 율법학자들에게만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러한 칭호로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느님의 대리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위선적이며 외식적인 율사들의 태도를 크게 비난하셨습니다.
3. 탐욕과 외식으로 기도하는 위선자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
또한 율사들은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 외식적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율사들은 탐심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1세기의 율사들은 보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보조금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구걸하는 율사는 없었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율사들은 주로 영세민에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은 율사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경건한 일로 권장했습니다. 특히 어느 율사가 생활고로 고통을 당할 때에 그를 도와주는 일은 백성들 사이에서 큰 공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재산이 많은 유대인들 중에 일부는 자기 재산을 율사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인해서 여러가지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율사들은 재물을 뜯어내기 위해서 과부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봉헌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법으로 얻은 재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과부의 재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짧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기도를 고의로 길게하여 영적인 우월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서 장시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율사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III. 바리사이들의 교만을 조심하라
1.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바리사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높임을 받기를 원했으며, 스승, 아버지, 또는 지도자라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스승(라삐)이나, 아버지, 그리고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남들보다 더 큰 자로 인정 받으려는 바리사이들을 단죄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신자들의 선생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아버지가 되시고, 자신만이 그들의 지도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을 "라삐(스승)"라고 불렀고, 그들을 크게 존경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의회 의원들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사도 7,2). 또한 백성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지도자", 또는 "인도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칭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존경을 표시하는 매력적인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간적인 칭호나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경을 받으실 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바오로 역시 자신을 코린토인들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1코린 4,15). 또한 티모데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1디모 1,2). 그러나 이러한 칭호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으로부터 나온 칭호였습니다. 이러한 칭호는 바오로와 티모데오가 마치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녀과 같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단죄하신 것은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칭호가 아니었고, 스스로 자신을 남보다 높이려고 교만한 마음으로 이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태도였습니다. 사실 신자들이 경건한 지도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도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낮추어서 자신을 신자들과 동등한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은 "너희는 모두 다 한 형제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선생과, 아버지와 지도자는 오직 하느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2. 위대함의 비결은 겸손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주님은 하느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길은 섬김에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존경과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은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주님과 같이 모든 것을 드려 신자들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자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섬김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수건으로 그 발에 묻은 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한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높임을 받으려던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그들이 거짓 지도자(교사)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인정받는 지도자는 종이 되어 신자들을 섬기려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친히 이러한 일에 모범을 보이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도 그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교만과 겸손의 결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주님은 계속해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은 성서 전체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진 가르침이었습니다(욥기 22,29 ; 잠언 29,23 ; 루카 14,11. 18,14 ; 야고 4,6 ; 1베드 5,5 등).
성경에서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잠언 16,18). 이러한 일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체험했고(참고, 2역대 32,14.21), 네부카드네자르도 체험했습니다(참고, 다니 4,30-33).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드높고 뛰어나신 분, 영원히 좌정하여 계신 분 그 이름 ‘거룩하신 분’께서 정녕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드높고 거룩한 곳에 좌정하여 있지만 겸손한 이들의 넋을 되살리고 뉘우치는 이들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뉘우치는 이들과 겸손한 이들과 함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사 57,15). 또 겸손한 태도로 인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겸손한 태도로 주님을 찾아왔던 백인대장(마태 8,8.10.13)과, 겸손하게 주님께 간청했던 가나안 여인(마태 15,27-28), 그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청한 세리(루카 18,13-14)들이 이러한 예에 속합니다.
주님은 겸손과 온유에 있어서 친히 제자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필리 1,6. 4,13.19 ; 마태 20,25-28, 루카 22,27, 요한 13,1-15, 필리 2,5-8 등). 성경을 보면 겸손한 곳에 구원과 하느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은총을 구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신자일수록 더욱 더 겸손한 성품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영광은 겸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위대함의 기준도 겸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약 성경에는 겸손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겸손하고 온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지도자(교사)들은 항상 자기를 높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지도자는 남보다 자신을 더 낮추고, 그들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을 숨기고 하느님과 그리스도만을 높일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겸손은 참된 지도자와 거짓 교사를 구별하는 명확한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참된 지도자이며, 교만한 자는 거짓 교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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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거꾸로 보이는 하느님의 거울
우연히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꾸로 보이는 거울'이라는 만화였습니다.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서 한번 읽어 봤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신기한 거울이 있는데, 이 거울에 비취면 모든 것이 다 거꾸로 보입니다.
아주 못생긴 여자가 이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절세미인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미인이 이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더없이 못생겨 보입니다. 키다리가 이 거울로 자기를 비추면 난쟁이로 보입니다. 난쟁이가 이 거울로 자기를 비추면 아주 멋진 키다리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거울을 가리켜서 '거꾸로 보이는 거울'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거울 저한테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같이 키 작고 못생긴 사람에게 이 거울 있으면 날마다 비춰보면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거울이 바로 이런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거울이 거꾸로 보이는 거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수의 진리가 그렇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Paradox라고 합니다. 역설적인 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거울로 비춰보면 매우 크고 위대하게 보이던 것이 하느님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매우 작고 시시하게 보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그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하느님의 거울로 비춰보면 매우 하찮고 추한 것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사람의 거울로 비추어 볼 때 매우 작고 보잘 것 없는 그것이 하느님의 거울 앞에서는 아주 크고 위대하게 보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도 하찮고 무가치하게 보인 것이 하느님의 보시기에는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하느님의 거울입니까? 사람의 거울입니까? 하느님의 거울이 중요하지 사람의 거울이 도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하느님의 거울에 잘 보여야지 사람의 거울에 잘 보여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느님 앞에서 귀하게 보이고 인정받지 못하고서 사람 앞에서 귀하게 보이고 인정받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귀한 것입니까. 오히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전혀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두고 보세요. 그게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적어도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게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항상 '하느님의 전,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라는 말을 자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사를 하느님의 앞에서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귀하게 보시고 하느님이 인정하시는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울에 잘 보여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함께 묵상해 봅시다. 무엇이 하느님의 거울에 잘 보여지는 것일까요? 무엇이 하느님의 거울에 거꾸로 보여질까요?
첫째는 내가 나를 작게 볼 때 하느님의 거울 앞에서는 크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복음을 보십시오. 오늘복음에 보면 바리사이들의 행위가 나옵니다. 그들은 스스로 크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바리사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열심 있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성서에 능통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경건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하느님과 천국과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들을 가장 싫어하고 질책하고 가장 작게 보셨습니다. 세리보다도 창녀보다도 더 하찮게 시시하게 보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도 바리사이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거절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신앙이 제일이고 자기들의 행위가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경문을 넓게 해서 몸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옷술을 크게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잔칫집이나 회당에서는 언제나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시장과 거리에서는 문안받고 선생소리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크게 자기들을 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거울에는 가장 작게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사이들을 싹 무시해 버렸습니다 은총주시기를 거절합니다. 차라리 죄 많은 세리와 창녀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실지언정 그들에게는 은혜 내리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 눈에 내가 작게 보일 때 하느님의 거울에 크게 보입니다. 내가 나를 초라하게 미약하게 볼 때 하느님이 나를 귀하게 보십니다. 나의 부족을 나의 가난을 인정할 때 하느님은 나를 부요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런 나를 사랑하시고 좋아하시고 은총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세요. 하느님이 크게 보시고 일평생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유가 뭘까요? 시편 23편1절이 그 이유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작게 여기는 아주 겸손한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 그는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매우 큰 사람입니다. 그는 천하무적의 용장입니다. 그리고 일국의 왕입니다. 위대한 시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기를 바라보기를 철없는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동물 가운데서 가장 나약하고 철없는 어린양, 그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나는 비록 철없는 어린양같이 부족하고 나약할지라도 그러나 야훼 하느님이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다윗은 자신의 절대 무능을 하느님 앞에서 선언합니다. 그리고 야훼 하느님의 절대 능력을 고백하고 노래합니다. 이렇듯 다윗은 언제나 자신을 작게 보았습니다. 초라하게 나약하게 보았습니다. 어리석고 무능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느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렇기에 또한 하느님은 그를 크게 보셨습니다.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을 더하십니다.
사도 바오로 또한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도 역시 세상적인 거울로 볼 때는 결코 작지 않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대학 출신입니다.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 최고의결기구인 의회 회원의 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학자입니다. 명문대가 출신입니다. 부귀와 영화, 권세와 공명을 누리는 자였습니다. 신앙경력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대사도였습니다. 선교사였습니다. 성서기자였습니다. 삼층천의 체험을 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지극히 작은 자, 미천한 자라고 고백했으며, 죄인의 괴수 중의 가장 죄많은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느님의 거울에 크게 보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를 크게, 귀하게 보시고 날마다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모세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도 사람 눈으로 볼 때 매우 큰 사람입니다.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40년 동안 황실교육을 받은 학문과 지성을 겸비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로 삼으려고 하실 때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하느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이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같은 저입니다. 어떻게 제게 그 일을 맡기십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 주소서." 이렇듯 스스로 자기를 작게 여기는 겸비한 모세를 하느님이 크게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기필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고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과 은총을 주셨습니다.
한 때 사울 임금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도 처음에는 자기를 지극히 작게 여겼던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끝까지 자기를 작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 겸손한 모습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스스로를 크게 여겼습니다. 오만 불손한 행위로 하느님을 거역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그에게서 은혜를 거두십니다. 마침내 그를 버리십니다. 그의 왕위를 빼앗습니다. 블레셋 전투에서 패전하게 하십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신 것입니다. 교만은 사울왕에게 무서운 폭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교만을 품고서야 차라리 핵폭탄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아무리 들추어 봐도 교만한 자가 망하지 않는 역사는 없었습니다. 진실로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였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작고자 하면 커지고 스스로 크고자 하면 작아집니다. 내가 나를 작게 보면 하느님의 거울 앞에서 커 보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음으로 내가 나를 밉게 볼 때 하느님의 거울에 예쁘게 보여집니다. 내가 나를 추하게 볼 때 하느님께서 나를 아름답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오늘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태도, 다시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을 너무도 예쁘게 보았습니다.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의롭게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마음과 행동,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아주 의롭고 순결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자기들보다 더 거룩한 사람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바리사이파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밖에 다른 사람들은 다 불결한 죄인으로 단죄했습니다. 그리고 상종도 안했습니다. 같은 동족끼리도 세리나 창녀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과 만나면 얼굴을 돌리고 지나치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제야 너희는 못된 짓을 하고 좋지 못한 일을 했던 것이 기억되어, 왜 그런 못된 짓을 하고 역겨운 짓을 했던가 싶어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잘 대접해 주겠지만, 그것은 너희가 훌륭하기 때문이거니 생각하지 마라. 주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이 여겨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의 모든 죄악을 씻어 너희를 깨끗하게 해주는 날, 그 날에 폐허가 되었던 성읍들을 재건하게 하리라."
시편 51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시니..." 또 산상수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와같이 진실로 내 눈에 내가 밉고 추하게 보여질 때 하느님의 눈에는 아름답고 의롭게 보여진다는 말씀입니다. 내 눈에 내가 아름답고 의롭게 보이는 한 그 누구도 행위로서 하느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다 부끄러운 죄인들입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통회하는 자만이 하느님 앞에 용서받고 올바르다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에게서 내장 썩은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내장 썩은 냄새와 같은 추한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뼈아프게 참회해야 합니다. 그때만 하느님의 거울에 어여쁘게 비춰지고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화 되어질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자기를 미천하게 봄으로서 하느님의 눈에 어여쁘게 보여지고 풍성한 은총을 받은 이가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역시 다윗왕이었습니다. 그는 부지 중에 실수로 한 여인을 범하게 됩니다. 그때 하느님은 나단 예언자를 보내서 그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케 하십니다. 그 책망을 받은 다윗은 자신이 한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을 미천하게 여기고 통렬히 회개합니다. 옥좌에서 내려앉아서 나탄 예언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무릎 꿇고 회개합니다. 다윗의 이 모습, 하느님께서 아주 예쁘게 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진노를 푸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사죄의 은총뿐만 아니지요, 영육간에 모든 은혜와 복을 더하십니다.
만약에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예언자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무슨 소립니까. 임금은 무치라 하지 않았습니까. 임금이 여인 하나 범했다고 해서 그게 뭐 대수입니까?"하고 말했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그는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인간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밉게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통렬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거울에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그리고 풍성한 은총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밉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울에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내가 나를 낮게 볼 때 하느님의 거울에는 높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문의 바리사이의 태도를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를 얼마나 높이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은 언제나 스승이고 지도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제자들이라고 착각합니다. 자기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아야 할 자들이고 다른 이는 언제나 대접을 하고 섬겨야 할 자라고 착각합니다 .
그래서 언제나 잔칫집과 회당에 가면 상좌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시장과 거리에서는 문안 받고 선생소리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게 바로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 맞습니다. 내가 나를 낮게 볼 때 하느님은 높이 보시고 내가 나를 높이 볼 때 하느님은 나를 사정없이 낮추어 버리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럼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우리는 바로 여기 바리사이들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스스로 자기를 높이 생각지 않습니까? 나는 상전처럼 높임 받고 대접받고 섬김을 받을 자라고만 생각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여기 바리사이들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추하고 쓸모 없는 사람들입니다. 불행하고 저주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느님의 거울에서 가장 낮고 비천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머물 수가 없습니다. 여지없이 하느님이 그들을 낮추어 버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귀하게 보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으려면 자기를 사정없이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바로 자기를 낮추시는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자 예수. 하늘의 영광 버리시고 사람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땅으로 오셨습니다. 마구간 짐승의 자리로까지 낮아 지셨습니다.
그 귀하신 성자 예수께서 이렇게 당신을 낮추셨거늘 하물며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겠습니까. 도대체 뭐가 그리 잘났습니까? 뭐가 잘난 것이 있다고 낮아지기를 주저합니까?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아주 소중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필립비서 2.6-9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필리피서 2,1-5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낮출 때 하느님의 거울에 높이 보여지는 비밀입니다.
마태오복음 20장에 보면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결단하십니다. 거기서 원수들에게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인류의 구원을 완성시키려는 결단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제자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착각합니다. 이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 이스라엘 왕이 될게 분명한데 그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자리다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기막힌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3,14에 보면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높고 낮음의 기준을 세속적인 것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가치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고 방식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남을 지배하고 대접받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계는 결코 그게 아닙니다. 그와 반대입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며 대접하는 사람, 이게 진짜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몸소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봅시다. 저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의 생애를 봅시다. 그는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아닙니까? 20대에 모든 학문에 통달한 신학자요, 철학자요, 의사였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그를 전후 독일의 지도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행방 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의사 가방 하나 들고 저 아프리카 밀림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서 일생동안 흑인들의 피고름을 빨며 그들을 섬기는 흑인들의 종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슈바이처의 이 행위 하느님의 거울에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의 작은 빛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신앙의 대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고의 대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사회를 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싸움 아닙니까? 더 많은 섬김과 더 많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바로 그 싸움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변화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진정 무엇이 크고 높은 것인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보여 주여야 합니다. 내가 나를 낮게 볼 때 하느님의 거울에 높게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적으로 지는 자가 하느님의 거울 앞에서는 진정한 승자이고 세상적으로 자기를 죽이는 자가 하느님의 거울 앞에서는 영원히 사는 자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오복음 10장39절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느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 이해됩니까? 세속적인 사고 방식 가지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인 복음과 진리입니다. 어떻게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얻습니까? 어떻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영생하도록 그 생명을 보존합니까?
여러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해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서 확신시켜 주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철저한 패배자입니다. 철저하게 망한 사람입니다. 죽도록 좋은 일만 하고서도 사람들로부터 미움, 배척만 받으셨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불의한 자들로부터 재판받고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흉악범들이나 받는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그리고도 변명 한마디 없이 묵묵히 당하기만 합니다. 그 누구도 위로하고 동정하는 자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승리입니까? 철저하게 패배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거울에 비춰진 모습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거울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거울에 비춰진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망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제3일의 부활의 사건이 증거합니다. 그분이 바로 인류의 구세주였다는 사실이 확증하고 있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에 심취된 일본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아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불행한 청년이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이 청년은 마침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청산가리 한 봉지를 들고 공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공원에 가서 거적을 펴놓고 그 청산가리를 먹으려고 봉지를 여는 순간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그 봉지를 날려 버렸습니다.
봉지를 주으려 가다가 이 청년 이상한 종이 하나를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이 버리고 간 전도지였습니다. 그 전도지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글을 읽은 그는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세상에 이런 진리, 이런 삶도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잠시 죽음을 보류합니다.
이 진리를 실천해 보고자 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는 희생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낮에서 산동네에 올라가서 남의 화장실 청소를 해주면서 보냅니다. 밤에는 공원에 어린이들을 모아다가 공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기쁨도 행복도 찾아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알의 죽은 밀알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일본의 성자, 세계적인 성자 '가가와 도요이꼬'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가치를 너무 세속적인 것으로만 따지지 마세요. 너무 세상적으로 밑지지 않고 살려고 하지 마세요. 너무 남에게 지지 않고 살려고 하지 마세요. 너무 남을 이기기만 하며 살려고 하지 마세요. 남을 지배해야만 잘 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결코 하느님의 거울로 비춰본 참된 인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거울에 나타난 잘 사는 인생, 때로는 세상적으로 밑지는 인생입니다. 바보같이 남에게 져주는 인생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고, 참 승리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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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복음은 말만 번드르게 하면서 실제로는 행동을 하지 않는 위선자,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말씀이 핵심 내용입니다.
오늘복음 2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보다도 사람의 눈을 의식했습니다. 그리고 6,7절을 보면 그들은 지나친 명예욕과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으로만 끝난다면 성경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 꾸짖음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 가정의 지도자들 아니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회당에 설치된 돌좌석인 모세의 계승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돌좌석에는 주로 율사와 같이 학식과 권위를 겸비한 선생이 앉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모세의 권위를 계승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오늘 예수님께 준엄한 꾸증을 듣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세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
첫째는 진실성의 부족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지적한 가장 중요한 첫째 항목이 위선주의, 즉 진실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율법의 가르치기는 잘 했지만, 행동은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연극배우라는 말입니다. 연극배우는 자기 마음속에 아무리 슬픔이 있어도 그 시나리오대로 웃어야 하듯이 자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중심과 겉(행동)이 불일치할 때에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또 그들은 허영심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 외식주의는 겉으로 보면 아주 경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적인 생활은 이 가르침과 전혀 부응되지 않고 너무나 진실성이 부족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문제점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점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부족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짐만 지우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복음에 '무거운 짐'이라고 했는데 때때로 종교가 무거운 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울타리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구약성서로부터 613개의 율법을 찾아내고도 마치 우리가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쳐 놓듯이 율법마다 전부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안식일 율법에다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의 규정을 또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사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잔뜩 만들어 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면서 교인들을 달달 볶았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겸손의 부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경건을 밖으로 나타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머리에 네모난 상자 같은 경구갑이라고 하는 것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옷에는 613개의 율법을 늘 기억하고 지킨다는 뜻으로 옷자락 술을 크게 만들어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이나 경건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은 전혀 겸손이 없었음에도 남에게 인정 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서 기도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네거리에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또 자선을 할 때는 나팔을 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들은 존경 받는 자리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이나 결혼식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또한 랍비나 아빠와 같은 영광스러운 칭호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선생님하고는 다른 굉장한 칭호입니다.또 이들이 좋아하는 '아빠'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 사제를 신부라고 하는데 그 부자가 아버지 부(父)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부를 때는 아버지(father)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영적인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생이나 아빠와 같은 참 모습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인 삶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 종교계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사탄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바로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최초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대등해지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정통 교회와 정통 실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분명히 정통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리만 정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를 실천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정통이어야 합니다.
2. 오늘복음이 주는 교훈
첫째로 종교의 거짓된 허울을 벗기지 않으면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다시말하면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 너무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된 허울을 벗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꾸 무엇을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고달픕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남이 보든 안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우리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힘이 되고, 정말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종교적 삶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안에서 높은 칭호를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나 부제나 평협회장이나 무슨 단체의 장...이것은 교회 안에서 높은 칭호라면 높은 칭호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봉사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봉사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존경 받기 위해서, 인정 받기 위해서, 그래서 그 칭호를 좋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그것을 욕심을 내어 너무 탐하면 안됩니다.
셋째로 행함 없는 교훈을 위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은 말과 입(혀)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통해서, 행동함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야고 2,14-26). 여러분은 항상 행함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과 행위가 일치되고 그래서 은밀히 하느님만 아시도록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늘에서 풍성한 상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율법의 목적은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이웃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바르게 가질 수 있느냐는 방법의 제시(가이드,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보아도 제1계명에서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갖는 비결입니다. 또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인간관계를 바르게 가질 수 있느냐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후견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은총의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사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함과 기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겸손해야 됩니다.
이 겸손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 주실 때에 그 사람의 마음 그릇을 보고서 그만큼 축복을 주십니다. 마음 그릇이 큰 사람은 하느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마음 그릇을 다른 말로 하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본연의 위치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오로가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꼈고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은총을 주시고 또 주시고 또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보면 조금만 은혜를 받고도 팔딱팔딱 뛰며 막 휘젓고 다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은 사람은 덕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상을 받았다가 교만해서 그것을 다 빼앗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과 벨사차르 왕,그리고 사울 왕과 헤로데 왕이 그 대표자입니다.
벨사차르 왕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지요? 어느날 벨사차르가 교만하게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성전기물들로 술을 마시며, 손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할 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므네 므네 트켈.' 그 다음은 '파르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트켈이라는 말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라는 그런 뜻입니다.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날 밤에 벨사차르는 죽임을 당하고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할 때에는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의 그릇이 다른 어느 사람들 보다도 더 커서, 다시 말해서 더 겸손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제 복음산책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영광의 상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저울에 우리를 한번 달아봅시다. 내게 진실성이 정말 있는가, 내가 정말 사랑이 있는가, 내가 혹시나 교만하지는 않는가, 나의 부족은 무엇일까, 내 가정의 부족은 무엇이며 우리 교회의 부족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저울에 우리 자신을 달아보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풍요롭게 받아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쓰고, 베풀고, 나눠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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