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누가복음 15:20-24
제목 : 예수님의 비유강해 23 -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Father)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귀한 날 복된 날 허락하시고 주의 전에 나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며 경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 하나님,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님들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 임재하시고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들어가는 말 : The Prodigal Father
우리는 지금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흔히 "탕자"를 영어로 The Prodigal Son라고 하는데
여기서 "Prodigal"이라는 형용사는 "낭비하는", "아낌없이 주는", "마구 소비하는"이라는 뜻입니다.
* 팀 켈러 목사는 이 단어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하는 뜻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아버지의 재산을 마구 낭비한 둘째아들에게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라
이 아버지를 보여주는 단어로 더 적합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이 비유에 의하면 이 아버지의 사랑에는 끝이 없고,
그의 용서에는 경계선이 없었고, 그의 기쁨에도 절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잃어버린 두 아들에게 낭비하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낭비라고 하는 점에서 보면 사실은 탕자보다 이 아버지의 사랑의 낭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는 이 탕자의 비유에 대한 책 제목을 아예 "The Prodigal Father"(탕부 하나님)이라고 책 제목을 잡은 것이고,
로이드 오길비 목사는 『하나님의 자서전』이라는 그 책에서 이 비유를 낭비하는 사랑의 비유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부 하나님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 아낌없이 낭비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고,
그러기에 이 비유는 사실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 비유에는 성육신과 속죄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므로 복음이 없다고 지적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죄를 깨달은 죄인(탕자), 또 끝까지 죄를 깨닫지 못했던 죄인(맏아들),
즉,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아낌없는 구속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복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탕자를 통해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의 낭비
그렇다면, 아버지의 그 아낌없이 낭비하는 사랑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까요..
먼저, 탕자를 통해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의 낭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본대로 그 당시 중동지역에서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는데 유산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동의 모든 문헌에는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 계신데도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아들에 관한 예는 (이 비유를 제외하고는) 한 곳도 없다"
- 케네스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
케네스 베일리는 중동문화의 대가입니다.
이 사람이 그 책에서 자기가 다 뒤져 봤다는 거예요. 없대요. 이런 이야기가 없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이 둘째아들은 아버지에게 소유권과 처분권을 다 요구했어요.
아버지가 소유권을 주어도,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한 그는 소유권은 가지고 있는진 몰라도 처분권은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탕자가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까지 요구한 것은 그건 뭔가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거지요. 그가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여긴 것과 같다라는 겁니다.
이는 중동문화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고,
아버지는 탕자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아니면 그를 내쫓아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파격적으로 탕자에게 소유권과 처분권까지 주었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재산을 헐값으로 며칠내에 다 처분하고 멀리 떠날 수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취한 행동은 과거 어느 아버지도 행하지 않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낭비였습니다.
중동문화권에서 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모습이었지요.
그 다음, 탕자는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비참하게 되자
아버지 집으로 가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오지요.
그때 그에겐 심각한 문제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과연 아버지와 형님과 가족들이 자기를 맞이해 줄까?
둘째는 마을 공동체가 자신을 용납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였지요.
그 중에서도 이 두번째 문제는 보다 심각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중동문화에 있었던 '케자자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케자자 의식'은 자식이 부모의 유산을 가지고 외지에서 다 탕진하고 돌아오면,
마을공동체는 '아무개가 그의 기업에서 끊어졌다'라고 선언하면서
온갖 조롱과 멸시를 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쫓아버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탕자는 아버지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을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수치와 비방과 조롱을 당하고 문전박대를 당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먼 발치서 탕자를 한 눈에 알아보고는 아들을 향해 운동선수가 달려나가듯이 달려갔어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중동문화에서는 창피한 모습이고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당해야 할 그 봉변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측은히 여겨(측은히 여긴다는 그 단어는 창자가 뒤틀리는 통증을 말한다)
창자가 끊어지는듯한 아픔으로 그 아들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받아야 할 그 수치와 수모를 당신이 달려와서 떠맡아 당한 겁니다.
즉, 아버지는 그 당시 집안에 가장이나 어른은 결코 행하지 않은 행동,
즉 달려내려가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함으로서 아들을 대신해서 그 수치를 다 감당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봐야 될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가 집을 떠나 노상(길)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것은
죄인 된 인간의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집으로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달려 내려가 그 댓가를 치루고 죽었던 아들을 소생시켰어요.
케네스 베일리는 『십자가와 탕자』라고 하는 그의 책에서
아버지의 이런 행동들은 중동문화의 맥락에서 볼 때에,
분명히 성육신과 속죄의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분명히 이 비유는 그의 집에서 달려내려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담당하는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이 비유는 집에서 내려와 탕자에게로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성육신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입맞추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낭비하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는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낭비하는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빌립보서 그 유명한 말씀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죠.
(빌 2:7-8) "그는(하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이 비유에는 이렇게 성육신과 구속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아버지가 굴욕을 감당하면서 보여주신 그 낭비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는 탕자에게 계속해서 엄청난 사랑의 낭비를 퍼부어 주시지요.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다 입히라고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은 뭘까요? 비싼 옷일까요? 비단으로 된 옷일까요?
여기서 아버지가 말하는 제일 좋은 옷은 곧, 아버지의 가장 좋은 옷을 말합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서를 보면, 왕이 어떤 사람에게 영광을 주려 할 때에는
그에게 왕의 옷을 입도록 했어요. 그리고 그를 세워 줬어요.
탕자는, 이제 곧 베풀어질 잔치 자리에서 아버지의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참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잔치에 참여한 모든 마을 사람들은 그 옷을 알아볼 것이고,
아들이 입고 있는 그 옷으로 말미암아 탕자가 아들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한 것을 알게 되겠지요.
그러면 탕자를 아버지의 아들로 예우하게 될 겁니다. 아버지의 낭비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라 그랬어요.
이 가락지는 인장반지를 말하는데, 인장반지란 가문의 도장을 새긴 반지를 말해요.
이것은 거래를 할 때, 공식 문서에 찍는 도장과도 같은 것이었고,
옛날에는 인장반지가 도장의 역할을 했어요. 심지어는 유언장에 날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시그넷 링(signet ring)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버지가 탕자에게 권위를 주고 신임한다' 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들이 그 인장반지만 있으면 어떤 거래든 다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겁니다.
권위죠. 또 한번의 아버지의 사랑의 낭비였습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는 탕자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랬어요.
그 당시에 신을 신는다 하는 것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당시에 종들, 노예는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어요.
그러나 아들은 신을 신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신겼다는 것은
이제 그를 더이상 노예나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신분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이예요.
또 한번의 사랑의 낭비였죠.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그랬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을 초청하는 큰 잔치를 연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엄청난 기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아버지의 또 다른 깊은 뜻이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탕자를 마을 공동체 전체와 화해시키려는 아버지의 사랑의 의도가 있었어요.
이제 탕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잔치에서 아버지의 옷을 입고 참석할 겁니다.
그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탕자가 입고 있는 옷을 한 눈에 알아볼 것이고,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인장반지와 그의 신은 신발을 통해 탕자가 아들로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탕자를 다시 찾은 아들로 인정하고 예우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의도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또 한번의 아낌없는 사랑의 낭비였죠.
3. 맏아들을 통해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의 낭비
이제 맏아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낭비, 아버지의 사랑을 볼까요..
맏아들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이 맏아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듯이 그는 사실 탕자보다 더 멀리 아버지를 떠나있던 아들이었어요.
그는 집 안에 있던 탕자였고, 아직도 오늘까지도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은 아들이죠.
사실 이 맏아들은 처음부터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탕자가 아버지에게 그 당시 문화에선 있을 수 없는 요구를 할 때에 맏아들은 이를 말리거나 중재했어야 합니다.
분명히 대가족 제도였던 그 당시에 둘째가 자신의 분깃을 요구함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탕자가 되려고 할 때에,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과의 관계가 깨어지려고 할 때에,
그는 큰아들로서 당연히 나사서 그 사이를 화해시키고 중재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침묵했다는 것은,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탕자가 이제 재산을 다 처분하고 집을 떠나려고 할 때에도 맏아들은 또 다시 아무 말이 없었어요.
정상적인 큰아들이라면, 그는 당연히 동생을 권면하고 말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상기시켜 주어야 했지요.
"사랑하는 동생아,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으신데 네가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아버지를 뵐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우리도 네가 떠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 그러니 너 다시 한번 생각하면 안 되겠니?"
큰아들은 이렇게 탕자의 가출을 만류하고 설득했어야 됐어요.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와 동생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거죠. 원래부터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본 것처럼, 그는 집에서 늘 아버지와 함께 살고 겉으로는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잇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노예로서 살고 있었고,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은 의무감이요 두려움으로 했던 것이었지,
아들로서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가 스스로 그랬잖아요. 노예로 섬겼다 그랬어요.
이런 맏아들의 속마음과 태도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탕자가,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한 모든 것으로 인해서 분노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초청한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절함으로 공개적으로 아버지에게 모욕을 줬지요.
관계를 훼손한 자가(탕자가) 응분의 불이익과 처벌을 받지 않고 그대로 그 모든 신분이 회복된다는 것은
아들의 의의 기준으로 볼 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공개석상에서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고
아버지에게 불평과 불만을 터트림으로 아버지에게 모욕을 가하고 망신을 주었습니다.
중동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모습이죠.
심지어 맏아들은 아버지와 이야기할 때에,(대답할 때) 29-30절을 보면 아버지라는 호칭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요.
우리 말 성경에 29-30절에 아버지라고 번역을 했는데, 성경 원문(헬라어 원문)에는 아버지란 단어가 없어요.
그저 수(당신)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29절에, "당신의 명" - "아버지의 명"이 아니예요. "당신의 명"으로 써 있고,
또 30절에 "당신의 살림" -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번역했는데, 아버지란 단어가 없어요. "당신의 살림"예요.
"당신의 이 아들" - "아버지의 이 아들"이 아니고 "당신의 이 아들"로 돼 있어요.
이렇게 맏아들은 의도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습니다.
기분 나쁘다 그거지요. 그 마음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맏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반응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예요.
그날 두번째로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굴욕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누구도 예기하지 못한 사랑의 낭비를 보여 주십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고 그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했던 것처럼 맏아들의 언행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또 다시 아버지는 그 모든 모욕과 수모를 참아내는 자세와 자기를 비우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또 한번의 사랑의 낭비였죠.
28절 보면, 아주 간단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고 되어 있지만,
그 말은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옆에서 호소했다 그 말예요. 아버지는 아들과 나란히 서서 사정을 한 겁니다.
아버지로서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거나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다정하게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란히 걸어가며 잔치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 거예요.
그는 종들을 시켜서 아들을 강제로 끌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앞서서 탕자를 위해서 자기를 비우는 사랑을 베풀었듯이
이번에도 반항하는 맏아들을 얻으려고 자기를 비우는 사랑으로 그에게 친히 다가가 호소한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자신을 비우고 아들의 입장으로 내려가서 만나고 있는 성육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아버지는 또 한번 값비싼 구속의 은혜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 것, 얼마나 큰 모욕이고, 사실 왜곡, 부당한 비난(탕자가 창녀와 재산을 말아먹었다는)
그 아들의 비난은 부당한 비난예요. 그 내용은 사실에 없어요, 팩트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이 아버지는 다 묵과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심판도, 그 어떤 질책도, 내쫓음도 없고, 다만 사랑만이 부어집니다. 사랑의 낭비입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무한한 사랑의 낭비를 보여주는 이야기요, 복음 중의 복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아버지는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는 자세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랑의 낭비를 아들들에게 아낌없이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낭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십자가에서의 사랑의 낭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낭비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서 지금 이 복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멘!
4. 이철환의 『연탄길』에 실려 있는 "아빠의 눈물"
여기, 이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낭비를 쪼끔이나마 보여주는 한 작은 실화가 있습니다.
이철환씨의 『연탄길』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아빠의 눈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명지라는 이름을 가진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명지가 열다섯살 때였습니다. 명지의 가족을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경포대로 갔습니다.
바다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곳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명지네 가족은 경포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명지는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날 이후로 명지는 두 개의 보조다리가 없이는 몇 걸음도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불행은 명지에게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명지보다는 덜했지만, 명지의 아빠도 보조다리 없인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명지의 아빠는 하시던 약국을 계속 경영했습니다.
명지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명지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오직 그녀의 아빠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엄마도 늘 기도와 격려를 보내고 있었지만, 엄마가 해주는 위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지 아빠는 달랐습니다. 아빠는 누구보다도 명지가 느끼는 아픔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말할 수 없는 명지의 마음 속 깊은 아픔까지도 아빠는 낱낱히 알고 있었습니다.
길을 다닐 때 명지는 사람들의 동정어린 눈빛이 싫어서 늘 땅만 쳐다보고 다녔습니다.
어느 겨울엔가는 얼어붙은 땅위를 걷다가 미끌어져서 얼굴이 온통 까진 채
아빠의 약국으로 간 적도 있었고 명지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한참씩 울었습니다.
'아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보는게 너무 싫어요.'
'명지야, 아빠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 같은 거야. 그걸 알고 나서 아빠는 그들의 눈빛이 고맙기만 한 걸.'
명지 아빠는 이렇게 말하며 명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약을 발라 주었고, 아빠의 붉은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아빠는 우리 명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아빠 말 좀 들어봐. 물론 아빠와 명지가 그들보다 더 불행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의 불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거고, 명지야 조금만 더 견뎌. 아빠가 네 곁에 있잖아.'
그 후로도 명지 아빠는 명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들어와 언제나 그녀를 그렇게 위로하고 또 지켜 주었습니다.
명지는 아빠의 그 사랑으로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죠,
대학교 입학식 날, "아빠는 명지가 너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고, 명지 역시 아빠가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입학식장에서 아빠는 두 개의 보조다리에 몸을 기댄 채 가슴 가득한 꽃다발을 안고 있었습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 그들 의 눈 앞에서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 한쪽으로 한 어린 꼬마가 급하게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순간, 앞서가던 명지 아빠는 그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습니다.
명지의 눈 앞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명지 아빠는 보조다리를 팽개치고 아이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명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빠!' 명지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팔에 끼고는 서둘러 앞을 향해 가 버렸습니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뛰는 거...'
그때 명지 엄마는 담담하게 이렇게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명지야,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사실 아빠는 보조다리가 필요없는 정상인이야. 그 서고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그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너 혼자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고..
성한 몸으로는 누구도 널 위로할 수 없다고 말이야.'
'왜 아빠까지 왜 그랬어요?' 명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울지 마!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아빠는 견디지 못하셨을 거야.
불편한 몸으로 살아오시며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빠는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데,
오늘은 그 어린 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봐서 아빠도 모르게 달려나가신 거야.'
멀리 보이는 명지의 아빠는 여전히 보조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지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죠. 명지의 아빠는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딸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서 스스로 장애인 아닌 장애인이 되어 보조다리를 한 채 5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명지의 상처와 눈물을 온 몸과 마음으로 치유하고 닦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보조다리를 하면서 장애인처럼 꾸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연약한 우리 인간, 비천한 우리 인간, 100% 연약한 인간 되어 이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한한 인간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육신이라는 감옥 아닌 감옥 안에 갇히셨어요. 여러분, 그것이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 위에서 아낌없이 내어 주셨어요. 온 우주 역사 최대의 사랑의 낭비였지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 될 수 있었고 이 놀라운 은총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5. 나가는 말 :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버지의 낭비하는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지난 번에 이 비유는 결론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듣고 있던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이 비유의 결론을 내려야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는 오늘의 탕자인 우리들, 오늘의 맏아들인 우리들이 결론을 써 내려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비유의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
그 한없이 낭비하는 사랑을 먼저 받고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그 신분이 회복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분명하지요.
그것은 우리 주변의 탕자들과 우리 주변의 맏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 낭비하는 사랑을 전하고 나누어 줘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결단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보내는 선교사 나래 선교사가 되어서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는 거죠.
감사한 것은, 제가 어제까지 확인해 보니까 3,032명이 나래 선교사로 지원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공산주의 독재자 푸틴의 광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는 우크라이나와
동해안과 울진 지역의 산불화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제가 역시 지난 목요일까지 확인해 보니까, 여러분들이 많은 금액을 구제헌금에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낭비하는 사랑이 흘러보내질 줄 믿습니다.
또,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학교에서 우리 자신을 비우고 양보하고,
또한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눔을 통해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선교적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각자가 이제부터 이 비유의 결론을 써내려간다는 마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이 아버지의 놀라운 낭비하는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탕자도 아닌, 맏아들도 아닌, 제3의 아들과 딸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 기쁘게 해 드리는 믿음의 자녀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
아버지, 우리를 아낌없이 낭비하는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그 아낌없는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 모두가
우리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나 자신을 비우고 양보하며
또한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눔을 통해 구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선교적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