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총신대 하광민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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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 증진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관계권을 중심으로
서론
한반도의 대결 국면은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이 되는 올해까지도 여전하다. 국제사회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자국민에 대한 인권 탄압을 지속하고 있으며, 코로나19 봉쇄 기간을 지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간 한국 정부는 북한인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사회가 선제적으로 나섰으며 지금도 선도적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북한 내의 인권 문제는 오래된 일이지만 1990년 중반 이후 북한이탈주민들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이들의 증언으로 국제사회는 북한인권레짐을 구축하면서 책임 규명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인권 증진을 위해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인권 문제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인 동시에 기독교가 안고 있는 종교자유의 문제와 밀접히 연결되는 사안이다.
북한인권의 두 가지 측면
북한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국제적 기준점은 1948년에 유엔이 발표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권선언 제1조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라며 인권의 천부적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보편성에 근거하여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입장 등으로 인한 차별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회는 유엔을 중심으로 인권 메커니즘을 작동시켜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점검하고 인권 증진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 안에서도 인권의 보편성과 개별 국가의 특수적 상황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어 왔다. 특히 사회주의권 국가에서는 자신의 사상과 문화적 특수성을 내세워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인권 개념의 발전은 3세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제1세대 인권은 시민적, 정치적 권리인 자유권으로 분류된다. 제1세대 인권(자유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현한 개념으로 시민으로서의 권리, 정치적 이유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로서 모든 사람이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제2세대 인권(사회권)은 사회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제기된 인권 개념으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경제적 권리는 의식주를 비롯한 경제적 혜택을 누릴 권리를 뜻하며, 사회적 권리는 정치적 참여나 단체의 구성 등 사회적 존재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문화적 권리는 스포츠, 여가, 오락 등 각종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은 국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제3세대 인권은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제3세계 국가들이 출현하면서 인도주의적 원조, 자결권, 발전권, 평화권 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대두된 인권이다. 북한인권 문제는 자유권과 사회권을 포함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를 지나면서 개인, 국가, 국제사회 등의 다양한 층위에서 형성된 문제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북한인권 문제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강조한 인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북한이 처한 특수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이화여대 윤우 교수는 인권과 관련된 논쟁을 4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인권의 보편성 대 문화상대성, 둘째, 시민적·정치적 권리(자유권) 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사회권), 셋째, 외부 간섭 가능 대 국가주권 침해·내정 불가 주장, 넷째, 인류 공유 사상론 대 서유럽 중심 사상론이다.1 통일연구원 김수암 박사 역시 비슷하게 두 가지 견해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상대주의가 대립한다고 보고 있다. 문화상대주의에서는 인간의 가치가 문화적 시각에 따라 각기 다르게 평가된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듯이 인권의 다원주의를 주장한다.2 더 나아가 그는 인권의 보편성과 아시아적 가치가 충돌한다고 규명한다. 중국이 주장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중국의 고유한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공동체와 질서를 중시하는 아시아의 건강한 사회에서 나오는 인권을 말한다.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범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권이며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해서이다.’라고 본다면서 국가가 주도하는 인권 보호를 강조한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에서는 개인 인권의 자유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권의 아시아적 가치와는 충돌하게 된다.
국내의 진보 진영에서는 한반도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북한인권 문제를 등한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국내 인권 문제에 있어서 진보 진영은 과거 인권 개선의 주요한 동력을 이끌었으나, 현재의 북한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은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북한의 인권을 악화시키고, 더 나아가 현실적 수단이 없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한국의 민주·진보 세력에게는 남한의 민주화를 주장하던 ‘남한’ 인권의 의식을 넘어서는 ‘한반도’ 인권 개념이 부재하다고 진단한다.3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은 한국 사회 내에 엄연히 존재하고 각자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기에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북한인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한국교회 대부분은 북한인권 문제를 종교자유에 의거한 자유권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입장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공산당에 의해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민들에 의해 형성된 정서에 기인한다. 그 정서는 강한 반공주의이며, 그 핵심은 북한 공산당에 대한 피해의식과 무너진 북한교회의 회복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에서는 인권의 사회권적인 측면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가 해석하는 새로운 인권 사상- 관계권
최근 기독교를 중심으로 기존의 두 가지 인권관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인권 문제를 다룰 때, 자유권과 사회권(경제권)의 갈등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갖는 인권이 형성되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인권을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관계권’(relational rights)이라고 한다.
1) 관계권의 정의와 출현 배경
‘관계권’이란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처한 삶의 정황 속에서 “인간은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며, 인간의 권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 관계권은 영국 기독교 학자들을 중심으로 대두된 개념인데, 기존 서구 중심의 개인주의적 인권사상을 반성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개인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관계와 상호 의존성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가지는 존재로 본다.
기존 서구 중심의 인간관에는 인간의 삶의 정황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이 깔려 있다. 이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로부터 시작하는데, 루소가 주장하는 ‘자연의 상태’란 인간 존재가 남들과 구별되며 자기 존재만으로도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인간관은 결국 ‘자아 심리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서구 사회에서 주관적 판단을 중요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개인적 인간관은 ‘표출하는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로 이어졌는데, 이는 타인과 상관없이 개인의 자유를 표출할 권리를 의미한다. 또한 개인주의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이 ‘개인의 소유권을 갖는다’(possessive individualism)는 것을 강조하였다. 즉, 개인이 사회에서 어떤 소유권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서로에게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비록 개인이 소유권을 가짐으로 인해 서로 간에 많고 적음의 불평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소유 자체가 자유로우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등함을 추구하는 토대가 되는 것으로 본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인권은 결국 개인과 국가에 책임이 귀결되는 현상을 낳았으며, 이러한 인권은 가족이나 공동체와 그 안에 연결된 수많은 관계를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관계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서구의 개인주의적 인권을 보호하다 보면 관계적으로는 책임질 수 없는 행동들을 법적으로는 보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하면 핍박을 받는 어떤 사람을 법적으로 보호하였지만 정작 그 피해자는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경우(여성, 노인 등)가 있다. 이런 경우 인권은 보호했으나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더 좋지 않은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국가에서 한 여성이 성적 희롱을 당했을 경우 이 여성을 보호하는 행동으로 가해자 처벌에 집중하여 이 여성의 신원을 공개하거나 기타 다른 공적인 조치를 과도하게 취할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이 여성은 공동체로부터 받아야 할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사회적 관습으로 인해 낙인이 찍히고 공동체 내의 관계에서 끊어져 버림으로 더 큰 피해를 겪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더 나아가서 서구의 개인주의적 인권을 강조하여 그것을 법적 테두리에서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한다는 약점이 있다. 법적 판결을 받으면 한쪽은 승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패자가 되어 승자독식의 원리가 작용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패자를 비롯한 다양한 구성원들을 품어내는 총체적인 회복에 실패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관계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인간의 관계에 집중하며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권리(인권)를 세워가는 일에 집중한다. 건강한 관계는 다음의 다섯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상호적 의무와 책임, (2) 충성과 신실함, (3) 긍휼, 자비, 친절함, (4) 공정, 정의, 진실, (5) 상호 관용과 존경.
이상과 같은 가치에 근거한 관계적 인권을 추구하면, 나라, 문화, 종교 등에 상관없이 건강한 관계를 정립할 수 있고, 이러한 관계들은 착취나 탄압에 사용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관계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보다는 상대방의 이익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관계권론자들은 인간의 권리를 좀 더 큰 차원에서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그에 따른 책임의 관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관계권론자들은 인권을 ‘승리’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모든 당사자들의 다양한 상황과 관계 가운데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려고 하며, 그 결과가 상호 이해 및 관계 회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관계권은 한 사회에서 억압에 대한 변혁적인(transformational) 해결책을 모색한다. 왜냐하면 ‘관계’란 추상적이고 모호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공유된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관습들은 관계권과 양립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관계권론자들은 중국이나 기타 권위주의적 국가들이 내세우는 ‘아시아적 가치’ 또는 북한이 내세우는 ‘우리식 인권’과는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유엔의 인권선언에는 자유권과 사회권, 그리고 제3세계가 요구해서 들어간 발전권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인간 존재를 관계적 측면에서 이해하여 인권을 관계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처음 시도되는 일이다. 이에 관계권론자들은 향후 유엔 총회에 인권에 대한 정의 부분에 관계권을 추가 삽입하는 청원 절차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한 각 나라별로 관계권에 의거한 인권 입법 작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2) 기독교에서 보는 관계권
관계권론자들은 관계권적 인권이 기독교 세계관에서 출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인간을 고유하고도 평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관계적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뜻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함하는 의미이다. 삼위(성부, 성자, 성령)는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상호 깊은 사랑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역시 이러한 연합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결코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으며, 복합적이고 상호 의존 관계에서 존재한다. 그 누구도 그 자신만으로서 충분한 개체가 될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한다. 예수는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하고 대답하셨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성육신) 이 땅에 내려오셨다.(엡 2장) 예수를 통해 세워진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 곧 관계 중심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모든 어그러진 관계들을 바르게 잡아간다.(엡 2장) 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역시 인간이 사회 속에서 맺는 관계에서 드러나는 덕목들이다.(갈 5장)
이처럼 기독교는 인간을 관계 가운데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태도’(빌 2:4)를 갖는 존재로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관계권은 기독교적 시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인권 부분에 어떻게 접목되어 적용될지는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향후 관계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날 때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점이다.
관계권으로 보는 국내 기독교계의 북한인권 증진 활동
1) 북한 내 신앙의 자유를 위한 활동
한국교회는 북한인권을 증진하려는 노력에서 북한 주민들의 신앙의 자유를 가장 중시해야 한다. 북한 지역은 한국 기독교의 뿌리와 같은 곳으로,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근간을 형성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독교를 비롯한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탄압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고 있다.
정부가 발행한 『2023 북한인권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명문화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북한에서의 종교는 거의 기독교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북한 주민들은 종교(기독교)를 접하는 것 자체를 무섭게 여기고 있다.
아울러 반종교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에는 평양에서 비밀리에 교회를 운영하던 단체가 붙잡혀서 5명은 공개 처형되고, 7명은 관리소로 보내졌으며, 30명은 노동교화형을 받고 가족을 포함한 50여 명은 강제 추방되었다.5 이처럼 북한에서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채 숨죽여 살아가고 있다.
관계권에서 볼 때 북한 내에서 일어나는 신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탄압과 차별은 북한 주민의 사회적 관계를 제약하고 파괴하는 행위이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구금하고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관계권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기존에 애써왔던 신앙의 자유 또한 관계권 차원에서 충분히 옹호하고 북한에 요구할 수 있다.
2) 이산가족 문제
관계권 차원에서 본다면 이산가족 문제를 북한에 더욱 강하게 요구할 수 있다. 가족이 흩어져서 지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권을 훼손하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남한이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요구하는 모양새이지만,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 정부 공동의 책임이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이산가족 1세대를 위해서는 물론이거니와, 2세대의 상봉이라도 남북 정부가 책임 있게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 분단 이후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에서였다. 전후 20년이 지나면서 월남민들의 이산가족 문제를 남북 정부가 논의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들도 넓은 의미에서 이산가족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북한 정부는 자신의 체제를 탈출하여 남한으로 넘어 온 북한이탈주민에 관한 사항을 이산가족 상봉 의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넘어왔든지 간에 남한 정부는 관계권 차원에서 다시금 가족과의 만남을 추진하도록 북한 당국에 제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나서야 할 것이다. 2014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북한이탈주민들이 국내에서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기독교로 나타났다. 2007년 이후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1만 2,777명에게 현재 종교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을 때, ‘무종교’가 가장 많은 비율(58.5%)을 차지한 가운데, ‘기독교’라는 응답은 34.8%로 나타났으며, 이어 불교(3.1%), 천주교(2.9%) 순이었다.6 실제로 북한이탈주민 중에 여타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으며 탈북민 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도 적지 않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신뢰하는 한국교회가 우리 정부에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여, 북한 당국이 이산가족 상봉 의제로 채택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된다-안 된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당위의 문제이다.
3) 북한 주민 돕기
관계권 차원에서 북한 주민을 돕는 인도적 지원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사회권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사회권에서는 북한 정권의 안정이 주민의 인권 개선과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관계권에서 보는 북한 주민 돕기는 불의한 정권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가정이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을 말한다.
관계권에서 바라보는 북한 주민 돕기는 북한 정권의 비도덕성과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존을 돕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권의 불의함을 지적하는 것에만 치중하다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이 위협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 생명이 사라지면 인간의 자유라는 기본 권리도 사라진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북한 주민을 돕는 방법을 모색하고 앞장서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결론
북한인권 문제 해결은 한반도를 넘어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인권 유린이 다시금 발생하지 않도록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인권 유린이 일어나고 있고, 북한의 인권 상황은 세계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인권의 변화는 단기적 변화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다가가야 한다. 2013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의 보고서가 발간된 지 10년이 지났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지난 시간은 인권의 중요성을 북한 내부에 일깨운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인권 증진을 위해 기독교계도 한국 사회에서 장기적인 호흡으로 대내외적인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가야 한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성서적 관점에서 북한의 억눌린 주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계속 연구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때가 되면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거두는”(시 126:6) 날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낙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북한인권 증진을 위해 지속해 나아가길 소망한다.
주(註)
1 윤우, “EU 및 유엔의 북한인권 개선노력과 과제,” 「북한학보」 35 (2010): 83.
2 김수암, “인권논의의 세계적 흐름과 북한인권,” 『북한인권 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한울, 2010), 74.
3 박명림, “한국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접근: 반성과 대안 모색,” 『북한인권 개선 어떻게 할 것인가』(한울, 2010), 37.
4 Michael Schluter 외, Relational Rights A world-inclusive and relationships-affirming understanding of the rights of every human person (Relational Research, 2021), 8.
5 통일부, 『2023 북한인권보고서』(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2023), 185.
6 남북하나재단, 『2014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남북하나재단, 2014), 141. 남북하나재단의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에서 종교실태 조사 항목은 2014년 이후 실시되지 않고 있다.
하광민|미국 남침례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남북통합목회의 물결』이 있다.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총신대학교 통일개발대학원 교수, 서울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