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동. 가오리(加五里). 조선 초에 서울(한양) 영역을 정할 때, 도성(都城) 밖 10리 이내의 영역으로 전했는데, 이 곳은 특별히 5리(五里)를 더해 서울로 넣어 주었다는 뜻으로 붙은 이름.
도봉구에서 갈려 나간 강북구에는 미아동, 번동, 수유동, 우이동 등의 법정동이 있는데, 이 곳엔 '작은무너미가', '벌리,' '무너미(무네미)', '가오리(加五里)', '긴밭머리', '버덩굴', '빨랫굴', '소귀(쇠귀.우이)', '너럭굴' 등의 마을들이 있었다.
<가재울> (서대문구 등)
대개 '가장자리 마을'의 뜻. 갖=애(의)+울. 전국에 많은데, 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가좌동', '가좌리' 등이다. 서울의 '가좌동(남가좌-북가좌)'도 마찬가지. '모래내'라는 내의 가장자리에 있어 이 이름이 붙었다.
<검은돌> (동작구)
서울 동작구 흑석동(黑石). 검은 빛깔의 돌이 있어서.
<고분다리> (강동구)
'갑운 다리'가 변한 이름일 듯. 갑운다리=가운데 들. 서울 강동구 천호동 일부의 토박이 땅이름.
<곰달래> (양천구)
서울 양천구 신월동 일부의 옛이름. 고음월(古音月). 큰 들판의 내. 감+달(들)+내. '감'은 '큼(大)'의 옛말.
<구리개> (중구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의 고개. 한자로는 동현(銅峴). 굴+개. '굴'은 지형이 우묵한 곳을 뜻함 .
<굴레방다리> (서대문구)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굴레를 만들던 집이 다리 근처에 있어서.
<까치산> (강서구)
서울 강서구 화곡동. 가장자리 산. 갗+이(의)+산. 갗이산>가치산>까치산
<당고개> (노원구
서울 노원구 상계동, 용산구 신계동(천주교성지) 외. 당이 있던 고개.
<낙골-난곡동> (蘭谷洞) (관악구)
서울 관악구 난곡동의 토박이 땅이름. 낮골. 낮은 골짜기. 또는 길게 느러진 골짜기
지금의 신림7동쯤 되는 곳의 옛 이름은 '난곡'이고, 토박이 땅이름은 '낙골'이었다. 서울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잘 아는 땅이름이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법정동으로 쓰고자 하는 동이 없었다. 이유는 '난곡'이라고 하면 서울 사람들이 전부터 아주 못 사는 판자촌 동네로 알아서 그런 인식이 깔린 땅이름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관악구에선 96년 관내 지역이 거의 모두 숫자식 동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예부터 불러 왔던 새로운 고유 동명으로 고치고자 한 바 있는데, 당시 '난곡동(蘭谷洞)'을 그 어느 동에서나 법정동으로 정하는 것을 주민들이 몹시 기피해서 곤란을 겪었었다.
난곡 근처의 여러 행정동에선 마땅한 이름을 정해려 했지만, '낙골(난곡)'이라고만 불러 왔던 마을에서 알맞은 이름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만든 이름이 '난(蘭)'자를 붙인 금난동(金蘭洞.신림3동), 난향동(蘭香洞.신림7동), 난우동(蘭友洞.신림12동),-- 등이었다. 겨우 난곡동의 가장 구석 마을인 지금의 신림13동이 양보하여 '난곡'이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악구의 숫자식 동명 해소를 위한 노력은 시 지명 위원회의 소극적인 자세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이 지역을 다니는 버스들이 모두 '난곡'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독바위> (은평구)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마을.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옹암(甕岩).
<돌곶이> (성북구)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토박이 땅이름. 석관(石串). 돌+곶. 물이 돌아드는 곳.
<둔지미> (대전시)
대전시 둔산동. 외따로 떨어진 산.
<등마루> (강서구)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토박이 땅이름. 등촌(登村). 등성마루.
<떡전거리> (동대문구)
떡집이 있는 거리. '전'은 '가게' 전국 열러 곳 토박이 땅이름
<뚝섬> (성동구)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 옛 땅이름. 실제 섬은 아니나 중랑천(한내)과 한강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된 지형.
<마들> (강북구)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들. 마들(마평=馬坪) . 넓은 들. '마'는 '큼(大)'의 뜻을 지닌 말.
<마른내(길)> (중구)
서울 중구 인현동의 옛 한 마을 이름. 건천동(乾川洞). 비맘 오면 말라 버리는 내가 있어서.
<말죽거리> (서초구)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말죽을 쑤던 마을.
조선시대에 양재역(良才驛)에는 양재도찰방(良才道察謗)이 있어서 종6품 벼슬의 찰방이 경기도 남부 일대에 있는 광주, 용인, 수원, 안성 등의 12개의 작은 역(驛)을 거느리고 이 곳을 지나는 관원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
양재역 근처의 마을을 '역말', 한자로는 '역촌(驛村)'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선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딴 지방 사람들은 주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옛 지도를 보면 한강 남쪽에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는 표기로 나온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말죽거리'의 한자식 표기다.
이 근처의 '역삼동(驛三洞)'이란 이름도 말죽거리 때문에 나온 이름이다. 즉, 역 근처에 '역말(말죽거리)'과 '웃방아다리'와 '아랫방아다리'의 세 동네가 있어서 '역(驛)'자와 '삼(三)'자를 붙여 지은 것이다. '방아다리'는 들 가운데 방아가 있어서 나온 이름인데, 한자로는 '방하교(方下橋)'로, '웃방아다리'는 '상방하교(上方下橋)'라 하고, '아랫방아다리'는 '하방하교(下方下橋)'라고 했다.
본래 이 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일부였는데, 일제 때인 1914년에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역 근처의 세 마을을 합해서 '역삼리'라 하다가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어 '역삼동'으로 되었다. 이 곳이 광주군 관할이기 이전엔 과천 땅에 속해 있었다.
'말죽거리'란 땅이름은 이름 그대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거리'라 해서 나온 것이다. 말을 이용하는 행인들이 이 곳에 들르면 대개 말에게 죽을 먹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 유래와는 달리 '말'과 '죽'과 관련한 사실이 있어 이것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는 이설도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 2월 8일에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양재역에 이르러 기갈을 못 이기자, 유생 김이(金怡) 등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쪽으로 갔으므로,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시다'의 뜻으로 '말죽거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역사적 사실 하나를 '말죽거리'라는 이름에 결부시킨 것으로 보인다.
<모란> (성남시)
경기도 성남시 외. 성남에는 '모란장터'가 있음. 몰+안. 산 안쪽의 마을이란 뜻. '몰'은 '산(山)'의 뜻을 가진 옛말.
<모래내> (서대문구)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땅이름. 사천(沙川). 모래가 많은 내. 지금의 홍제천을 이름. 이 곳의 시장, 우체국, 도로 등이 이이름을 달고 있다.
<무너미>(길-고개) (강북구)
서울 강북구 수유동 등. 수유(水踰). '물넘이'가 변한 이름이라고 하나, 실제는 '뫼넘이'가 변한 이름일 듯.
<무쇠막> (마포구)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울 성동구 금호동 근처 물가 등의 옛 땅이름. 무수막. '뭇막(문막)'도 같은 듯의 이름.
<밤섬> (영등포구)
지금은 없어진 섬인 서울 마포구 밤섬(율도=栗島). 밤톨처럼 생겼었다. 지금은 영등포구 여의도동 관할이 되
었다.
<배나뭇골> (동작구)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뭇골'이라 했고, 한자로는 '이목동(梨木洞)'이라 했다.
'이수교(梨水橋)' 또는 '배물다리'라고 하는 다리가 근처에 있는데, 배나뭇골과 한강물 사이에 놓인 다리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옛날 이 다리는 '갯말'이라는 마을 앞에 놓인 다리로서 당시의 길 모습으로는 말죽거리와 과천길의 갈림목에 있었다. 이 다리가 서울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유명했던 것은 근처에 동작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오개> (종로구)
서울 종로 4가. 이현(梨峴). '뱃고개(밧고개)'에서 온 이름인 듯. '밧고개'는 '바깥쪽 고개'의 뜻.
<비개> (동작구)
서울 동작구 흑석동(국립묘지 근처). 원래는 '비탈깨'의 뜻인 '빗개'.
<빨랫골> (강북구)
'빨랫골'은 수유동(水踰洞)과 옛 삼양동(三陽洞)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수유동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에 속했다. 그런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수성책자 도성삼문분계총록(都城三門分界總錄)에 동부 숭신방(성외) 가오리계(加五里契), 수유촌계(水踰村契), 우이계(牛耳契)로 되어 어영청(御營廳) 전영에 소속되어 도성(都城) 방어에 큰 구실을 한 곳이기도 하다. '수유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풀면 물이 넘는다는 뜻이다. '물수(水)'자, '넘을유(踰)'자.
수유동 486번지 일대, 즉 수유동과 삼양동의 경계에 있는 이 마을은 북한산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많고, 빨래 널기 좋은 넓은 바위가 냇가에 깔려 있어서 이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인근 주민들뿐 아니라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도 이 빨래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사직골> (종로구)
지금의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삼양동>(三陽洞) (강북구)
전에 성북구 지역이다.
현재, 미아1-6-7동 등의 삼양동네거리와 대지시장 일대이다.
1955년 4월 18일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미아동 가운데 길음동(吉音洞), 인수동(仁壽洞), 송천동(松川洞)의 관할을 제외한 지역으로, '삼각산(三角山)의 양지바른 땅'이라는 뜻으로 '삼양동(三陽洞)'이라 하여, 1961년 이후 시내의 판잣집들을 없애고, 그들을 집단적으로 이 곳에 옮기어 인구가 폭증하여 동이 신설되었다. 1965년 1월 1일 삼양1동과 삼양2동으로 갈랐다가 나중에 '미아동'으로 붙임으로써 공식 동명에서 사라졌다.
이 곳에 삼양로(三陽路)와 솔샘길이 지나고, 이 곳을 통과하는 많은 버스들이 '삼양동'이란 땅이름을 달고 다닌다.
<새남터> (용산구)
'새나무터'의 준말.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새나무'는 '풀과 나무'의 뜻. 새=억새.
<새내>(신천=新川) (송파구)
지금의 서울 송파구 잠실 근처. 성내역 부근. 송파구의 신천동(新川洞)은 '새내'가 바탕인데, 이 이름은 원래 '사이 내'의 뜻을 가졌던 이름이다. 지금의 성내역과 둑섬 사이는 한강의 본줄기가 지나고 있지만, 옛날에는 작은 샛강이 지났을 뿐이었다. 물줄기가 작아 '샛강'이라 하지 않고 '샛내(새내)'라고 했기 때문에 이 이름이 한자로 '신천(新川)'이 되었다.
<선바위> (과천시)
경기도 과천시 등에 있는 마을 이름. 선바위(입암.立岩).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있어서.
<신당동>(新堂洞) (중구)
서울 시구문 밖이어서 엣날에 장례 행렬이 많이 이어진 곳이었다. 이 때문에 장례 예식 때 무당들을 불러 굿을 행하는 일들이 빈번하여 이 곳에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았다. '무당골'이란 이름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으로, 한자로는 원래 '신당리(神堂里)'라 했다. 이 신당리가 나중에 한자가 다른 '신당리(新堂里)'가 되고, 뒤에 '신당동(新堂洞))'으로 되었다. 자세히 더 알기
<신창동>(新倉洞) (도봉구)
서울 도봉구에는 '창동(倉洞)'은 있지만, '신창동(新倉洞)'이란 곳은 없다. 그러나, 창동 중에 창2동 지역 일대를 이 곳의 주민들이나 서울 시민들 일부 중에는 신창동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의 택시 기사들도 신창동 가자고 하면 대개 이 곳으로 간다. 현재 이 곳에는 '신창교'라는 다리가 있고, 신창초등학교, 신창유치원, 신창동교회 등이 있어 더욱 혼란을 준다.
이 곳이 신창동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인데, 당시 이 곳이 인구가 늘면서 '새로운 창동'이란 뜻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신창동'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 곳에서 서울 중심의 청계천으로 향하는 버스가 행선지 이름을 '신창동'으로 하면서 더욱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곳엔 법정동이 행정동에 그러한 동이름은 없으며, 지도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더욱 혼란을 주는 것은 서울 용산구에 이와 똑같은 '신창동(新倉洞)'이라는 법정동이 있는 것이다.
<아우내> (천안시)
츙남 천안시 병천면의 땅이름(내-마을). 아우른 내. '병천(竝川)'은 이 뜻을 살려 한자로 옮긴 이름.
<아우라지> (정선군)
물이 아우르는 곳.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리. 북한의 '아오지'도 같은 식의 이름.
<애오개> (마포구)
서울 마포구 아현동 땅이름. 작은 고개여서. 그 옆에 '큰고개(만리재)가 있다.
'아현동'이란 이름은 원래 '애오개' 또는 '애고개'라는 토박이 땅이름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애오개'라는 이름을 두고 대개 이 곳에 애 무덤이 많아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물론, 이 곳이 서소문 밖이어서 옛날 도성 안 사람들이 아이가 죽으면 그 소문을 나와서 여기에 많이 묻곤 했다는 사실은 맞는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이 곳뿐 아니라 서울 도성에서 어느 소문 밖이나 다 그랬었다. '시구문', '남소문'이라고 했던 '광희문'이나, '동소문'이라고 했던 '혜화문'이나 다 그 문 밖에는 아이뿐 아니라 아무나 무덤을 쓰는 일이 많았던 것. 이 곳이라고 특별히 애 무덤이 많아서 '애오개'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애오개 옆에 '만리현'이라고 하는 고개가 지금도 있지만, 이 고개를 사람들은 고개가 높아서 '큰고개'라고 한 일이 많았다. 그 큰고개 옆에 작은 고개인 이 고개가 있어서 이를 '애고개' 또는 '애오개'라고 했던 것.
이 애오개는 전엔 마포에서 새우젓이나 조기 같은 물건을 받아 가지고 문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던 고개이다. 그러나, 장정들은 이 고개보다는 큰고개를 거쳐서 남대문을 통과해 문안으로 들어간 예가 많았다.
'애오개', 이를 딸리 '아고개'라고도 했는데, 이름이 한자로 바뀐 것이 바로 지금의 '아현동'이라는 이름의 바탕인 '아현'이다. 아현동- 옛날에 마포 짐들이 많이 넘어갔던 작은 고개였다.
<여의도> (영등포구)
travelevent.net의 서울 땅이름>영등포구>여의도 참조
<연신내> (은평구)
원래는 '연서내'. 서울 은평구 갈현동 근처. 이 곳에 조선시대에 '연서역(延曙驛)'이 있었다. '연서내'가 '연섯내'로, 다시, '연선내', '연신내'로 변해 간 이름이다.
<영동>(永洞) (강남구-서초구)
서울 한강 남쪽을 서울 사람들은 '영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곳엔 그러한 동이름이 없다. 그리고, 영동은 한자로 '영동(永洞)'이 아닌 '영동(永東)'이다.
이 이름은 서울 강남 지역을 아파트 단지나 주택지 등으로 개발할 때, 이 일대를 일컫는 광역(廣域) 지명이 필요하여 '영등포의 동쪽 지역'이란 뜻으로 '영동('嶺東)永그東러)'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
'이란 이름은 이제 우리 입에서 사라져 버려야 할 땅이름이다.
<영등포>(永登浦)
'긴등성깨(긴등개.진등개)'라는 우리 토박이 땅이름이 변한 이름인 듯하다. 뜻은 '긴 등성이가 머문 물가'인 것 같은데, 관악산의 낮은 산줄기가 한강가로 이어져 나온 이름일 것이다.
<용산>(龍山)
'용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하나의 산이름이었다. 북악산에서부터 뻗어내려온 한양 우백호 줄기가 구불구불 용이 용?임치며 내려와서 마포 한강가에서 머리를 숙여 물을 마시는 형상이어서 '용 모습의 산'이란 뜻으로 '용산(龍山)'이라 하게 되었다.
지금 산꼭대기에 아주 오래 된 성당인 '용산성당'이 있는데, 이는 이 산의 이름을그대로 딴 것이다.
용산 산마루를 용의 머리로 본다면 마포 공덕동에서 용산구청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용마루'는 바로 용의 목덜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장승배기> (동작구)
서울 동작구 상도동과 노량진동 사이. 장승이 박힌 곳. 장승은 지금의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의 '장승백이'는 이 장승 때문에 붙여진 땅이름이다. 옛날 남도 길손들은 한양에서 남문을 나와 노들나루를 건너 아차고개(지금의 사육신 묘 근처)를 넘어 이 장승백이 앞을 지나 시흥 땅을 거쳐 수원을 거쳐 갔다.
이 곳에 장승이 세워진 데는 나름대로 다른 곳과는 좀 다른 데가 있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그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인 정조는 1777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 아버지 사도세자를 잊지 못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원 병점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정조는 묘소를 갈 때엔 꼭 이 장승백이를 지나면서 쉬었다 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 곳은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으스스했다. 정조는 자신이 쉬어 가는 이 곳에 장승을 세우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곳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쓰인 두 개의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곳 장승백이는 판소리 <변강쇠전>에도 나온다.
변강쇠가 지리산에서 장승을 패어 나무 장작으로 써 버리자, 이 곳의 노들 장승이 팔도 장승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밤중에 노들 한강 새남터 모래밭에서 변강쇠 규탄 장승 궐기 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는 팔도 99만 9천 9백 장승이 다 모이는데, 여기서는 변강쇠에게 99가지 병으로 온 몸을 도배시켜 서서히 죽어 가는 벌을 내린다.
왕중왕(王中王)이듯이 장승 중의 장승은 이 곳 노들 장승백이의 장승이다. 이 곳이 한양에서 강을 건너와 첫번째로 길이 갈라지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의 장승을 팔도 장승의 우두머리로 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장승은 우리 공동체 문화의 표상이었다. 공동체적 상상력에 의해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神的)인 성격을 부여받아 온 장승은 동구 밖에 세워져 병액(病厄)이 드는 것을 막는 수호신 구실을 해 오기도 했다.
<진고개> (중구)
긴 고개, 진(물기 많은) 고개. 서울 중구 충무로2가의 옛이름
<창내> (서대문구)
서울 연세대학교 앞쪽. 창고 앞으로 흐르는 내. 이 이름이 변해 지금의 '창천동'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청구동>(靑丘洞) (중구 신당동)
전에는 없었던 땅이름이다.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에 따라 신당동 가운데 308-2를 기점으로 374-20을 지나 346-78에 이르는 길 동북쪽의 지역과 308-2에서 금호동에 이르는 길 남쪽의 지역을 이 동명으로 정했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의 신당4동인데, 당시는 성동구였다. 그러나, 이 곳은 뒤에 신당동에 합해짐으로써 공식 동명에서 사라졌고, 그 동이 중구로 들어감에 지금은 그 구의 일부로 들어갔다. 이 '청구동'이라 이름은 김종필씨의 자택이 있어 언론에서 흔히 '청구동 자택'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일반인들도 정식 동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청구초등학교'가 있어 이 곳이 그 옛날 일시적인 공식 동명이었던 청구동임을 알게 한다. 현재 지하철 청구역이 건설 중이다.
<탑골> (관악구)
서울 관악구 탑골공원 일대의 옛 마을 이름. 원각사의 탑이 있던 곳.
<학여울> (강남구)
옛 땅이름. 한여울(큰 여울). 학탄(鶴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양재천 물가. 옛날엔 이 근처로 한강의 본줄기가 지났다.
0509 서울00 강의 1400 땅강 경희대학교 한국어원학회 학술 발표회 `법정지명과 통용지명
법정지명과 통용지명
법정지명과 통용지명
한국어원학회 세번째 연구 발표회
-서울 일원을 중심으로-
땅이름은 어느 한 개인이 혼자 쓰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쓰는 사회의 공유물이다. 땅이름은 개인간의 의사 소통을 위해 쓰고 있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곳을 이렇게 부르자'고 하는 약속 밑에 쓰이고 있다.
따라서, 땅이름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그 어디를 가리킬 때 편리함을 느낀다. 만일 땅이름이 없다고 해 보자. 아마 다음과 같은 불편을 겪어야 할 것이다.
"우리 고향은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120리를 가서 두 강이 합쳐지는 부분에 있다. 그 두 강이 어우러지는 어름의 마을에서 내가 태어났고, 그 뒤에 있는 숲이 많은 산에서 내가 놀았다." ('어느 쪽으로, 어느만큼 가서, 어떠한 곳,---')
이렇게 말한다 해서 그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정확히 알 수가 있을까? 이럴 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서로 통할 수 있는 그 곳의 땅이름이 있다면, 이를 아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두물머리(양수리)에 있다."
이래서 우리 사람 사이에는 땅이름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정확한 약속 밑에 그 땅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의 편리를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그 약속이 잘 이루어지고 있질 않다. 지도에 표기돼 있는 이름이 단순히 '표기'로서 끝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엄연히 법정 땅이름이나 행정 땅이름이 있음에도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는 곳이 너무도 많다.
^ 법정 땅이름과 행정 땅이름
원래부터 정식으로 붙여져 호적과 같은 공식 문서상에 표기되는 땅이름을 '법정 땅이름(法定地名)'이라 하고, 행정 편의로 일정한 구역을 나누어 그 구역 안을 일컫는 통일된 이름으로 붙인 것을 '행정 땅이름(行政地名)'이라 한다.
예부터 전래되어 온 우리 고유의 땅이름으로, 정부 기관의 모든 문서나 재산권 및 각종 권리 행사 등 법률 행위 때 이용되는 것이 법정 땅이름인데, 이 중 주소로 표시되는 최하 단위 행정구역 명칭이 법정동이나 법정리이다. 현행 법정동이나 법정리의 지번(地番) 체계는 1910년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반면,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확장, 인구 이동 등 지역 여건 변화에 쉽게 적응하고, 행정 능률과 주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치된 최일선 지방 행정 기관의 관할 구역은 행정동(도시의 경우)이 된다.
예컨대, 서울 종로구의 관철동, 인사동 등은 법정동이며, 그 동을 관할하는 동사무소 중심의 이름인 종로2가동은 행정동이라 할 수 있다. 행정동은 행정 위주로 정하기 때문에 대개 관할 구역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여 나누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법정동도 원래 인구에 따라 일정한 구역으로 나누어 정해진 것이긴 하나, 사회 변화에 따라 인구의 증감이 일어나 지금에 와서는 인구와 관계 없이 그 이름을 지니고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정동은 여간해서 그 이름이 바뀌지 않는 성질이 있으며, 행정동은 인구의 변화에 따라 자주 바뀌게 되는 특징이 있다. 대개의 경우, 도시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많아 행정동이 불어나는 수가 많다.
1998년 3월 현재, 서울시에는 472개의 법정동과 530개의 행정동이 있다. 이 중에서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경우는 44개이다.
중구나 종로구의 경우는 여러 법정동이 묶이어 하나의 행정동으로 된 곳이 많고, 관악구나 양천구 같은 곳은 그 반대로 법정동이 나뉘어 여러 개의 행정동으로 된 곳이 대부분이다.
원래부터 정식으로 붙여져 호적과 같은 공식 문서상에 표기되는 땅이름을 '법정 땅이름(法定地名)'이라 하고, 행정 편의로 일정한 구역을 나누어 그 구역 안을 일컫는 통일된 이름으로 붙인 것을 '행정 땅이름(行政地名)'이라 한다.
예부터 전래되어 온 우리 고유의 땅이름으로, 정부 기관의 모든 문서나 재산권 및 각종 권리 행사 등 법률 행위 때 이용되는 것이 법정 땅이름인데, 이 중 주소로 표시되는 최하 단위 행정구역 명칭이 법정동이나 법정리이다. 현행 법정동이나 법정리의 지번(地番) 체계는 1910년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반면,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확장, 인구 이동 등 지역 여건 변화에 쉽게 적응하고, 행정 능률과 주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치된 최일선 지방 행정 기관의 관할 구역은 행정동(도시의 경우)이 된다.
예컨대, 서울 종로구의 관철동, 인사동 등은 법정동이며, 그 동을 관할하는 동사무소 중심의 이름인 종로2가동은 행정동이라 할 수 있다. 행정동은 행정 위주로 정하기 때문에 대개 관할 구역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여 나누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법정동도 원래 인구에 따라 일정한 구역으로 나누어 정해진 것이긴 하나, 사회 변화에 따라 인구의 증감이 일어나 지금에 와서는 인구와 관계 없이 그 이름을 지니고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정동은 여간해서 그 이름이 바뀌지 않는 성질이 있으며, 행정동은 인구의 변화에 따라 자주 바뀌게 되는 특징이 있다. 대개의 경우, 도시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많아 행정동이 불어나는 수가 많다.
1998년 3월 현재, 서울시에는 472개의 법정동과 530개의 행정동이 있다. 이 중에서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경우는 44개이다.
중구나 종로구의 경우는 여러 법정동이 묶이어 하나의 행정동으로 된 곳이 많고, 관악구나 양천구 같은 곳은 그 반대로 법정동이 나뉘어 여러 개의 행정동으로 된 곳이 대부분이다.
<예> 행정동>법정동 (한 행정동 안에 여러 개의 법정동) ※서울 종로구의 한 예
·'종로1-2가동'이라는 한 행정동 안에 종로1가, 종로2가2가, 청진동, 서린동, 수송동, 중학동, 공평동, 관훈동, 견지동, 권농동, 운니동, 경운동, 익선동, 관철동, 인사동, 낙원동, 와룡동 등의 법정동들이 있다.
<예> 법정동>행정동 (한 법정동 안에 여러 개의 행정동) ※서울 관악구의 한 예
·'신림동'이라는 한 법정동 안에 신림1동, 2동, 3동, 4동, 5동, 6동, 7동, 8동, 9동, 10동, 11동, 12동, 신림13, 신림본동 등의 행정동들이 있다.
실제 법정동도 행정동도 아니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전혀 딴 이름으로 부르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을 '통용지명'이라고도 하는데, 서울만 해도 그러한 곳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그 예로 장승배기, 모래내, 말죽거리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그 예를 들어 보자.
^ 통용 지명의 예
+ 청구동(靑丘洞)(중구)
전에는 없었던 땅이름이다.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에 따라 신당동 가운데 308-2를 기점으로 374-20을 지나 346-78에 이르는 길 동북쪽의 지역과 308-2에서 금호동에 이르는 길 남쪽의 지역을 이 동명으로 정했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의 신당4동인데, 당시는 성동구였다. 그러나, 이 곳은 뒤에 신당동에 합해짐으로써 공식 동명에서 사라졌고, 그 동이 중구로 들어감에 지금은 그 구의 일부로 들어갔다. 이 '청구동'이라 이름은 김종필씨의 자택이 있어 언론에서 흔히 '청구동 자택'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일반인들도 정식 동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청구초등학교'가 있어 이 곳이 그 옛날 일시적인 공식 동명이었던 청구동임을 알게 한다.
지하철 청구역이 이 곳에 있다.
+ 난곡동(蘭谷洞)(관악구)
지금의 신림7동쯤 되는 곳의 옛 이름은 '난곡'이고, 토박이 땅이름은 '낙골'이었다. 서울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잘 아는 땅이름이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법정동으로 쓰고자 하는 동이 없었다. 이유는 '난곡'이라고 하면 서울 사람들이 전부터 아주 못 사는 판자촌 동네로 알아서 그런 인식이 깔린 땅이름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관악구에선 96년 관내 지역이 거의 모두 숫자식 동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예부터 불러 왔던 새로운 고유 동명으로 고치고자 한 바 있는데, 당시 '난곡동(蘭谷洞)'을 그 어느 동에서나 법정동으로 정하는 것을 주민들이 몹시 기피해서 곤란을 겪었었다.
난곡 근처의 여러 행정동에선 마땅한 이름을 정해려 했지만, '낙골(난곡)'이라고만 불러 왔던 마을에서 알맞은 이름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만든 이름이 '난(蘭)'자를 붙인 금난동(金蘭洞.신림3동), 난향동(蘭香洞.신림7동), 난우동(蘭友洞.신림12동),-- 등이었다. 겨우 난곡동의 가장 구석 마을인 지금의 신림13동이 양보하여 '난곡'이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악구의 숫자식 동명 해소를 위한 노력은 시 지명 위원회의 소극적인 자세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이 지역을 다니는 버스들이 모두 '난곡'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 신창동(新倉洞)(도봉구)
서울 도봉구에는 '창동(倉洞)'은 있지만, '신창동(新倉洞)'이란 곳은 없다.
그러나, 창동 중에 창2동 지역 일대를 이 곳의 주민들이나 서울 시민들 일부 중에는 신창동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의 택시 기사들도 신창동 가자고 하면 대개 이 곳으로 간다. 현재 이 곳에는 '신창교'라는 다리가 있고, 신창초등학교, 신창유치원, 신창동교회 등이 있어 더욱 혼란을 준다.
이 곳이 신창동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인데, 당시 이 곳이 인구가 늘면서 '새로운 창동'이란 뜻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신창동'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 곳에서 서울 중심의 청계천으로 향하는 버스가 행선지 이름을 '신창동'으로 하면서 더욱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곳엔 법정동이 행정동에 그러한 동이름은 없으며, 지도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더욱 혼란을 주는 것은 서울 용산구에 이와 똑같은 '신창동(新倉洞)'이라는 법정동이 있는 것이다.
+ 영동(永洞)(강남구-서초구)
서울 한강 남쪽을 서울 사람들은 '영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곳엔 그러한 동이름이 없다. 그리고, 영동은 한자로 '영동(永洞)'이 아닌 '영동(永東)'이다.
이 이름은 서울 강남 지역을 아파트 단지나 주택지 등으로 개발할 때, 이 일대를 일컫는 광역(廣域) 지명이 필요하여 '영등포의 동쪽 지역'이란 뜻으로 그러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영동이란 이름은 이제 우리 입에서 사라져 버려야 할 땅이름이다.
^ 흔히 불리는 토박이 땅이름
정식 동이름이 아니면서 흔히 불리는 땅이름도 무척 많다. 이러한 이름은 우리가 택시를 이용 중 행선지를 말할 때 많이 사용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행선지가 정확하고 보다 자세하여 편리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수유동으로 가자고 하면 수유동 중에서도 어디인지 몰라 조금 막연할 수 있으나, '빨랫골' 가자고 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도 그 작은 마을까지 정확히 갈 수가 있다는 점이다.
+ 삼양동(三陽洞)(강북구)
전에 성북구 지역이다.
현재, 미아1-6-7동 등의 삼양동네거리와 대지시장 일대이다.
1955년 4월 18일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미아동 가운데 길음동(吉音洞), 인수동(仁壽洞), 송천동(松川洞)의 관할을 제외한 지역으로, '삼각산(三角山)의 양지바른 땅'이라는 뜻으로 '삼양동(三陽洞)'이라 하여, 1961년 이후 시내의 판잣집들을 없애고, 그들을 집단적으로 이 곳에 옮기어 인구가 폭증하여 동이 신설되었다. 1965년 1월 1일 삼양1동과 삼양2동으로 갈랐다가 나중에 '미아동'으로 붙임으로써 공식 동명에서 사라졌다.
이 곳에 삼양로(三陽路)와 솔샘길이 지나고, 이 곳을 통과하는 많은 버스들이 '삼양동'이란 땅이름을 달고 다닌다.
+ 빨랫골(강북구)
'빨랫골'은 수유동(水踰洞)과 옛 삼양동(三陽洞)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수유동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에 속했다. 그런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수성책자 도성삼문분계총록(都城三門分界總錄)에 동부 숭신방(성외) 가오리계(加五里契), 수유촌계(水踰村契), 우이계(牛耳契)로 되어 어영청(御營廳) 전영에 소속되어 도성(都城) 방어에 큰 구실을 한 곳이기도 하다. '수유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풀면 물이 넘는다는 뜻이다. '물수(水)'자, '넘을유(踰)'자.
수유동 486번지 일대, 즉 수유동과 삼양동의 경계에 있는 이 마을은 북한산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많고, 빨래 널기 좋은 넓은 바위가 냇가에 깔려 있어서 이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인근 주민들뿐 아니라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도 이 빨래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 가오리(강북구)
도봉구에서 갈려 나간 강북구에는 미아동, 번동, 수유동, 우이동 등의 법정동이 있는데, 이 곳엔 '작은무너미가', '벌리,' '무너미(무네미)', '가오리(加五里)', '긴밭머리', '버덩굴', '빨랫굴', '소귀(쇠귀.우이)', '너럭굴' 등의 마을들이 있었다.
`가오리→서울동네
+ 배나뭇골(동작구)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뭇골'이라 했고, 한자로는 '이목동(梨木洞)'이라 했다.
'이수교(梨水橋)' 또는 '배물다리'라고 하는 다리가 근처에 있는데, 배나뭇골과 한강물 사이에 놓인 다리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옛날 이 다리는 '갯말'이라는 마을 앞에 놓인 다리로서 당시의 길 모습으로는 말죽거리와 과천길의 갈림목에 있었다. 이 다리가 서울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유명했던 것은 근처에 동작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 밖에---
모래내, 연신내, 곰달래, 애오개, 말죽거리, 장승백이 등은 서울 사람들이 익히 부르고 있는 이름들이고, 비개(흑석동), 살피재(상도동), 돌곶이(석관동), 굽은다리(천호동), 마들(상계동), 당고개(상계동), 먹골(묵동), 광나루(광진동) 등도 택시 지하철이나 택시 행선지 안내 때 많이 이용하고 있는 이름들이다. ///
흔히 불리는 토박이 땅이름
정식 동이름이 아니면서 흔히 불리는 땅이름도 무척 많다. 이러한 이름은 우리가 택시를 이용 중 행선지를 말할 때 많이 사용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행선지가 정확하고 보다 자세하여 편리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수유동으로 가자고 하면 수유동 중에서도 어디인지 몰라 조금 막연할 수 있으나, '빨랫골' 가자고 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도 그 작은 마을까지 정확히 갈 수가 있다는 점이다.
모래내, 연신내, 곰달래, 애오개, 말죽거리, 장승백이 등은 서울 사람들이 익히 부르고 있는 이름들이고, 비개(흑석동), 살피재(상도동), 돌곶이(석관동), 굽은다리(천호동), 마들(상계동), 당고개(상계동), 먹골(묵동), 광나루(광진동) 등도 택시 지하철이나 택시 행선지 안내 때 많이 이용하고 있는 이름들이다. ///
980313 서울00 강의 1900(2시간) 땅강 땅이름 연구 연세대 사회교육원 `지하철의 역이름들
지하철의 역이름들
지하철의 역이름들
^ 지하철의 역이름들을 붙이는 단계
지하철의 역이름을 붙이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노선의 경우
노선 정하기-역 위치 정하기-역이름 정하기(서울시 지명위원회)
·철도청에서 운영하는 노선의 경우(주로 1호선)
노선 정하기-역 위치 정하기-역이름 정하기(중앙 지명위원회의 자문을 얻음)
공사 기간 중에 역이름이 불합리하다고 인정된 때에는 역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역이름이 정해지면 우선 공사장에 '지하철 ○○역 공사 중' 같은 역이름을 달고 공사를 해 나간다.
^ 지하철의 역이름들을 이중으로 붙이는 이유
학교나 정부 기관 등에서 자기네가 쓰는 기관 이름을 원할 때는 지하철공사나 철도청에서는 그 타당성을 검토하여 그것을 주역명(主驛名)으로 넣어 주기도 하고, 그 주역명 외의 병기(倂記)의 역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월곡역' 근처에 동덕여자대학교가 있어 주역명으로 '월곡역'을 넣고, 따로 또 '동덕여대역'을 병기하는 식이다. '갈월역'이 '숙대입구역'과 함께 쓰는 것도 같은 경우이다.
경우에 따라선 학교 같은 기관 이름이 주역명이 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숭실대입구역'이 주역명으로, '살피재역'이 부역명이 되는 식이다.
'한성대입구역'과 '돈암동역', '고려대역'과 '종암동역' 등도 그런 식이다.
학교 같은 데서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면, '입구'라는 말을 넣어 사용하기도 한다. '서울대입구역' 같은 것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 지하철의 역이름들은 대체로 한자식 일색
지하철의 역이름들은 대개 한자식으로 붙는다. 그것은 우리의 땅이름들이 대개 한자 일색이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의 땅이름들은 순 토박이 땅이름에서 출발했으나, 지금에 와서 통용되는 땅이름들은 거의가 한자로 된 것이 많아 그 흐름대로 이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상당히 많은 지하철의 역이름들이 우리 땅이름으로 옮겨진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 중에는 주민들이 현재까지도 그러한 이름으로 많이 부르고 있어 그 이름으로 붙여진 것도 있으나, 실제, 주민들 사이에서 그렇게 많이 불리는 땅이름이 아니더라도 우리말 땅이름으로 붙여진 것도 많다.
^ 지하철의 역이름은 우리 땅이름을 살리는 중요한 매체
지하철의 역이름들은 우리 땅이름을 살리는 중요한 매체가 되고 있다.
실제, 사라질 뻔한 땅이름들이 새로 붙여진 지하철의 역이름으로 인해 다시 살아 나고 있는 것이다. 아현동에 있던 한 역의 이름인 애오개나 상계동에 있는 마들역의 이름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하철의 역이름을 붙이는 단게에서 우선 주민 편의 위주로만 가고 있는 경향과 우리 땅이름에 관한 지식의 부족 등에서 간혹 지하철의 역이름들이 잘못 붙여지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예컨대, 한여울역이 학여울식으로 옮겨진 것 등은 그 예하 할 것이다. ///
·역곡(驛谷) : 역말. 옛날의 역은 여러 마리의 말을 마련해 두고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꾸어 주던 일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전국에는 '역말', '역촌', '역곡' 등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다. 그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역이 있던 곳이었다.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이름도 옛날에 역이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교통에 큰 구실을 했던 옛날의 역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어도 '역'자가 들어간 땅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 곳이 옛날에 역이 있었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차가 없었던 옛날에는 말은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교통 수단이었다. 옛날 관리들은 나라의 일로 먼 길을 갈 때 말을 주로 이용하게 마련이었는데, 말이 먼 길에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길 중간중간에 말을 바꾸어 주는 역을 마련했다. 역에는 역마(驛馬)가 상비되어 있었고, 역졸들이 있어서 말을 교환해 주고 먹여서 보호해 주는 일을 했다.
·노량진(露梁津) : '노량진'이란 이름은 당시 한낱 나루에 불과했던 '노들나루'를 한자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노들나루'의 '노들'은 넓은 들'의 뜻인 '너들(널들)'에서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고, '물 가장자리'란 뜻의 '노돌'이 변한 이름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노+돌→노(鷺)+돌(량.梁)→노량(鷺梁)
·종로(鐘路) : 종루가(鐘樓街)
·석계(石溪) : 석관동+월계동
·창동(倉洞) : 창골. 창고가 있었던 마을
·방학동(放鶴洞) : 방하골(방앗골)
2호선에서
·방배(方背) : 우면산(牛眠山)을 등지고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
·서초(瑞草) : 서리풀(서리풀이). 풀이 서렸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
·삼성(三成) : 본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의 일부로, 일제 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서 이 곳에 있는 세 마을을 합해서 '삼성동(三成洞)'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그 세 마을이란 '봉은사마을'과 '무동도마을', '닥점마을'이다.
·신천(新川) : 새내. 샛강이 지나갔던 마을이다. 일제 때는 이 지역까지가 공양군에 속했었다.
·잠실(蠶室) : 조선시대에 동잠실, 서잠실, 남잠실이 있었는데, 그 중 동잠실(東蠶室)이 있었던 곳.
·성내(城內) : 성안말. 풍납토성 안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나온 이름이다.
·신당(新堂) : 무당말. 본래는 신당(神堂)'
·아현(阿峴) : 애오개(애고개). 그 옆의 '큰고개'의 대비 개념에서 나온 이름
·신촌(新村) : 새말(새마을). 원래 이 마을은 연세대학교 동문 근처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도 '신촌동('新村洞)'이란 법정동이 있다.
·합정(蛤井) : 조개우물이라 불러 왔던 곳이다.
·당산(堂山) : 당뫼. 지금도 그 곳에 큰 느티나무와 함께 당집이 있다.
3호선에서
·지축 : 싸릿골(싸리말)
·구파발(舊擺撥) : 조선시대엔 역참의 하나로 중요한 도로에 파발을 두어서 선전관의 통행을 편하게 했는데, 이 때 이용된 말이 파발마이다. 이 파발은 원래 선조 38년(1605)에 국토 북쪽이 소란해져 중앙으로의 신속한 연락이 필요해짐에 따라 설치한 것이었다.
·연신내 : 역말(역촌) 앞으로 흐르는 내는 지금의 '불광천(佛光川)'이다. 이 내는 연서역 근처를 흐른다 해서 '연서내' 또는 '연서천(延曙川)'이라 불러 왔다. 그 '연서내'라는 말이 나중에 달리 불려져 오면서 '연선내'가 되고, 이것이 또 변하여 '연신내'라는 이름에까지 오게 되었다. 불광천 근처의 마을을 '연신내'라 부르고, 지하철 역이름까지 그 이름으로 되었다. 근처에 '연신내시장', '연신내우체국', '연신중학교', '연신내역' 등 '연신' 또는 '연신내'라는 이름을 딴 기관이나 시설물이 많다. 다만, 이 곳을 지나는 큰길의 이름만이 '연서로(延曙路)'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이다. 연신내는 증산동(繒山洞)에 이르러서는 '까치내'가 되어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 '불광천(佛光川)'이라 부른다.
·불광(佛光) : 불광사(佛光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금호(金湖) : 조선시대에 지금의 한강변 일대에는 선철(무쇠)을 녹여서 무쇠솥과 농기구 등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파는 장인들과 솥장수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 때문에 '무쇠막'이라고 불렀다는 것이고, '무시막', '무수막'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옛 지도에서 이 곳을 나타내는 땅이름을 보면, 한자로 '수철리(水鐵里)' 또는 '무수막(無愁幕)'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 이름은 바로 '무수막' 또는 '무쇠막'의 한자식 표기인데, 이것에 따르면 '무쇠막'이라는 것은 무쇠솥을 만들었던 곳이라 나왔던 이름이기보다는 한강 물가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 '뭇'이나 '무수'는 땅이름에서 곧잘 '물'의 뜻으로 나오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압구정(狎鷗亭) : '압구정('狎鷗亭)'이라는 한명회의 정자가 있었다.
·신사(新沙) : 새말(신촌.新村)+사평(沙坪)
·양재(良才) : 조선시대에 '양재역('良才驛)'이라는 큰 역이 있었다.
·도곡(道谷) : 독구리(독굴. 독굴)
·대치(大峙) : 한티. 그리 높지 않은 긴 고개가 있었다.
·학여울 : 원래는 '한여울'. 뒤에 '학여울'이라는 이름으로 변하면서 '학탄('鶴灘)'이라는 한자식 이름까지 나왔다. 약 40여 년 전만 해도 이 지역으로 한강의 본줄기가 지나갔다.
4호선에서
·창동(倉洞) : 창고가 있었던 창골
·상계(上溪) : 언래 '웃한내'로 불리던 곳. 이것이 한자로 '상한계('上漢溪)'가 되었다가 '상계('上溪)'로 줄었다.
·당고개 : 당이 있었던 고개 당현(堂峴)이러고도 한다.
·쌍문(雙門) : 쌍갈문이. 쌍갈래로 갈라진 곳에 이문(里門)이 있었다.
·수유(水踰) : 무넘이(무너미, 무네미)
·회현(檜峴) : 회나뭇골. 큰 회나무가 있었다.
·삼각지(三角地) : 일제 시대에 나온 이름. 일제 때 한강통(漢江通)'이란 길을 내면서 세 갈래가 되어 나왔다.
·신용산(新龍山) : 구용산(舊龍山)의 상대적 이름.
·이촌(二村) : 원래 중촌동(中村洞)이 있었던 곳. 이 마을은 을축 장마 때 폐동이 되었다.
·동작(銅雀) : '동재기'로 불러 왔었다. 비탈을 돌아가는 곳이라 해서 '돈재기'였던 것이 변한이름으로 보인다.
·이수(梨水) : 배나뭇골과 물골(갯말)이 합쳐 이루어진 이름. 이 곳에 원래 '배물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것을 나중에 고쳐 놓으면서 한자로 '이수교('梨水橋)'라 하였다. 배나뭇골은 한자로 이목동(梨木洞)이었고, 물골은 '수촌('水村)' 또는 포촌(浦村)'이었다. 이목동+수동=이수
5호선에서
·송정(松亭) : '솔쟁이('소쟁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정(亭)'은 땅이름에서 마을을 나타내는 접미사 형태로 많이 쓰인다.
·발산(鉢山) : '발뫼라는 산이름에서 나온 이름. '발뫼'에서 '발'은 '벌'의 의미로 나온 듯하다.
·화곡(禾谷) : 볏골
·목동(木洞) : 못골. 비만 오면 큰 물이 자주 들어 못이 군데군데 생기곤 했다.
·오목교(梧木橋) : 오목내다리. 오목내는 안양천의 다른 이름. 지형이 오목해서 나온 이름이다.
·여의도(汝矣島)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밤섬과 여의도가 붙은 한 섬으로 '잉화도(仍火島)'로 돼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에는 '나의도(羅衣島)'로 돼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여의도(汝矣島)'로 돼 있다. 이 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의도는 '너른 벌의 섬'의 뜻인 '너벌섬'으로 불러 온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의 소리빌기이고, '의(衣)'는 '벌'을 취한 한자 표기일 것이다. '옷'의 옛말이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羅衣)'는 '나벌' 또는 '너벌'의 표기로 보인다. '잉화도'에서 '잉(仍)'도 '너' 또는 '나'의 옮김으로 보인다. 이 '잉(仍)'은 '니'로도 읽어 왔는데, 예부터 땅이름에서 '너', '니' 등의 소리빌기로 많이 써 온 글자이다. '잉화'의 '화(火)'는 '불'로, '벌'과 음이 근사하니, '잉화도'는 결국 '너벌섬' 또는 '니벌섬'의 한자 표기라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여의도', '잉화도', '나의주'는 모두 '너벌섬'의 다른 표기이다. '여의도'를 쓸모없던 땅이라고 해서 '너나 가질 섬'의 뜻에서 나왔다고 하는 얘기는 한낱 얘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근거없는 말이다.
·마포(麻浦) : 삼개
·청구(靑丘) : 전에는 없었던 땅이름이다.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에 따라 신당동 가운데 308-2를 기점으로 374-20을 지나 346-78에 이르는 길 동북쪽의 지역과 308-2에서 금호동에 이르는 길 남쪽의 지역을 이 동명으로 정했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의 신당4동인데, 당시는 성동구였다. 그러나, 이 곳은 뒤에 신당동에 합해짐으로써 공식 동명에서 사라졌고, 그 동이 중구로 들어감에 지금은 그 구의 일부로 들어갔다. 이 '청구동'이라 이름은 김종필씨의 자택이 있어 언론에서 흔히 '청구동 자택'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일반인들도 정식 동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청구초등학교'가 있어 이 곳이 그 옛날 일시적인 공식 동명이었던 청구동임을 알게 한다. 현재 지하철 청구역이 건설 중이다.
·장한평(長漢坪) : 장한산(長漢山)에서 나온 이름.
·오금(梧琴) : 오금골. 지형이 오목한 곳이라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인조 임금의 남한산성 피신시에 이 곳에 이르러 오금이 아프다는 말을 해서 나온 이름이라고 하나, 원래 이름에 역사적 의미를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개롱(開籠) : 임경업 장군이 칼을 넣어 둔 장롱을 열었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방이(芳荑) : 방잇골
·거여(巨餘) : 겟골.
·길동(吉洞) : 기리울
·굽은다리 : 곡교리(谷橋里). 굽어진 다리가 있었다고 하나, 이 이름은 '갑은다리'가 변한 이름으로 보이는데, 이 이름은 '가운데의 들'이라는 의미로 씌어 온 듯하다.
·명일(明逸) : '명일원'이라는 원(院)이 있었다.
·고덕(高德) : 고데기
·상일동(上一洞) : '게내'라는 마을에서 위쪽에 있었던 마을
6호선에서
·역촌(驛村) : 역말. 이 곳에 '연서역('延曙驛)'이라는 역이 있었다.
·독바위 :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응암(鷹岩) : 매바위가 있었다.
·새절 : 이 곳에 '새절'이라는 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이름을 역이름으로 붙인 것은 동이름이 '신사('新寺)'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뜻으로 풀어 낸 것이다.
·증산(`繒山) : 원래 '시루뫼(시루미)'로 불렸던 곳. 한자가 나중에 달리 되었다
·수색(水色) : 물치. 한강물이 치밀어올라오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
·성산(城山) : 성미(성뫼)
·망원(望遠) :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나온 이름
·합정(蛤井) : 조개우물
·광흥창(廣興倉) : 광흥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이태원(梨泰院) : 조선 성종 때 기록인 <용재총화>에 보면, 목멱산(木覓山.남산) 남쪽 이태원 들에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의 동쪽에 큰 소나무들이 무성하였고,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찾아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모여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예부터 이태원 사람들은 특수 작물인 홍차(紅茶.乾茶)를 많이 심어 생업을 삼았다고도 했다. 홍차는 고려 때 귀화한 거란족이나 조선 초에 역시 귀화한 여진족들의 영원한 생업이었고, 특히 이 귀화인들을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에 이주시켰던 것으로 미루어 그 귀화인들이 이 곳에 많이 모여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타인(異他人) 또는 이태인(異胎人)들이 와서 산다 하여 '이태원'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왜란 뒤에 귀순한 왜인들을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루어서 '이타인(異他人)'이라 일컬었으므로 동네 이름이 되었는데, 그 뒤에 부르는 음(音)에 따라 '이태원(梨泰院)'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한강진(漢江津) : 한강나루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이의 표기가 한강진(漢江津)이다. 한강(漢江)은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지금의 한남동 부근 일대에서만 부르던 이름이었다.
·버티고개(벌아령) : 부어치, 버터고개, 벌아령이라고도 한다. 서울 중구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는 길이 좁고 무인 지경이 되어 도둑이 들끓어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라는 농담이 있다.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하고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버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처리가 되었다 한다.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서쪽에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꾀어 머무르게 하며, 또는 남쪽에 벌아령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때리겠다고 을러대어, 그 아이가 못 나가도록 막는다는 뜻이라 한다.
·돌곶이 : 물이 돌아드는 곳이어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이름이 돌곶이가 되다 보니 '돌'이 연상되었는지, '석('石)'자가 들어간 석관동(石串洞)이 되엇다.
·석계(石溪) : 석관동(石串洞)+ 월계동(月溪洞)
7호선에서
·마들(마평) : 큰 들이 있어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이 들판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바로 한내(한천, 한계) 사람들이다.
·중계(中溪) : 한계(한내) 마을 중에 가운데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하계(下溪) : 한계(한내) 마을 중에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먹골 : 먹골이라 해서 먹과 관련지어 말하기도 하나, 원래 '물 마을'의 뜻인 '먹골'에서 나온 듯하다.
·면목(面牧) :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의 일부로서, 말 목장의 뜻을 따서 면목리(面牧里)라 하였다. 갑오경장 후에 한성부 남부 두모방의 전관중계, 전관하계가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따라 고양군 뚝도면에 편입되고, 1949년 8월 15일 서울 특별시 구역 변경에 따라 뚝도면에서 갈라져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면목동이 되었다.
·사가정(四佳亭) : 서거정(徐居正)과 관련된 지역이어서 그의 호인 사가정(四佳亭)을 딴 것이다.
·중곡(中谷) : 간뎃말(가운데말)
·군자(君子) : 본래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의 군자리이었는데, 갑오경장 후 한성부 남부 두모방의 전관계가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의하여, 고양군 뚝도면에 편입되고, 1949년 8월 15일,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군자동이 되었다. 큰 산이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자'는 땅이름에서 대개 산을 가리킨다.
8호선에서
·석촌(石村) : 돌마리. 돌이 많아서 나온 이름이거나 물이 돌라 흐르는 곳이어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가락시장(가락동) : 가락동은 원래 '가락골'이었다. 물이 많은 곳의 땅이름에 '갈'자가 많이 붙는데, 이 곳도 '갈+앗+골'에서 이 이름으로 변한 것 같다. 갈+아+골>갈앗골>가랏골>가락골>가락리(가락동)
·문정동(文井洞) : 문정리, 연화동이러고도 불러 왔던 곳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의 일부로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다가, 이 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매우 좋으므로,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의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지형이 연꽃과 같다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문정골, 헤경머리를 병합하여 문정리라 하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문정동이 되었다.
·장지(長旨) : 잔버드리, 장지리라고도 불러 왔던 곳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의 일부로서, 잔(작은) 버들이 많이 있으므로, 잔버드리라 하였다 하나 원래 '작은 들'의 의미로 부텨진 땅이름이 아닌가 한다.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주막거리, 새말, 웃구석, 웃말과 매착이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지리라 하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장지동이 되었다.
·복정(福井) : 복정-동(福井洞)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동이다. 본래 광주군 세촌면의 지역으로서 큰 우물이 있어서 복우물 또는 복정(福井)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가마절, 기와골, 안골을 병합하여 복정리(동)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고, 1975년 그 옆의 창곡동을 합하였다.
·단대(丹垈) : 단대동(丹垈洞)에서 나온 이름으로, 단대골, 던데라고도 불렀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있다. 본래 광주군 세촌면의 지역으로서 붉은 고개 밑이 되어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었다.
·모란 : 모란장은 처음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동네 시장'이었었다. 이 곳에 장이 들어선 것은 재향군인 단지가 들어서고, 거기에다 서울에서 온 철거 주민들이 근처에 자리잡게 됨에 따라 인구가 갑자기 늘어 물건 거래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남시의 인구 증가에 따라 장은 계속 커져 갔고, 특산물 판매 등으로 다른 도시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됨에 따라 지금과 같은 큰 장을 이루게 된 것이고, 5일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모란장'에서의 '모란'은 '모란꽃'과는 관계가 없다. 어떤 이는 시장 이름이 꽃이름과 같아 꽃시장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모란'은 '몰안'으로 단순히 '산의 안쪽'이란 뜻을 담고 있다. '몰'은 옛말로 '산(山)'이기 때문이다. 장터가 들어선 곳은 남한산의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뻗어 마지막 산머리를 살짝 솟구다가 탄천 앞에서 그 냇물의 물을 먹듯이 물을 먹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곳이다. 그 용머리의 안쪽에 자리한 곳이 지금의 모란장이다. 어떤 이는 '모란장'의 '모란'이 북한의 실향민들이 이 곳에 많이 와 살면서 대동강 가의 모란봉을 생각해 그 이름을 붙였다고도 하지만, '모란'이란 땅이름은 실제 그 이전부터 있었다. 물론 '모란'이란 마을은 없었고 산 옆으로 빗긴 작은 들이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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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신가 칭구들
청주는 어제 천둥 벙개까지 치면서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은 뜨거운 햇빛이 아침부터 내리 ?다네
칭구들 부탁하나 하세나
우리 딸 학교 숙젠데 예쁜 우리말 이름을 찾아 오는것인데
(간판.마을이름.상호등)예쁜 우리말 이름 아는 칭구들 좀 알려 주면
대단히 고맙겠어
나중에 내 만나면 한턱 쏘겠네
즐겁운 하루들 보내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