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남한 침투, 접선 성공과 포섭 실패
“남조선에 남파된 ‘북악산’을 접선해 대동(帶同) 복귀하고, ‘백암산’을 접촉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라.”
1990년 4월, 공작 명령이 하달됐다.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차관급) 이원국이 조장 권중현-조원 김동식으로 구성된 2인조 남파 공작조를 찾아와 직접 지시했다.
“동지들에 대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신임과 배려가 큰 만큼 공작 임무를 성과적으로 완수해 반드시 보답하기 바랍니다.”
공작대호(코드 네임)는 ‘오성산’으로 명명됐다.
두 개의 격렬한 감정이 김동식을 지배했다.
해방감이 우선 몰려왔다.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4년, 밀봉 교육과·적구화 교육 5년 등 1981년부터 장장 9년에 걸친 세뇌적 사상무장과 냉혹한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그 인고의 세월에서 벗어나 실전에 투입된다는 자기실현감이었다.
남파 공작의 짐이 짓누르는 압박감이 교차했다.
공작대호 ‘북악산’과 ‘백암산’라고 불리는 생면부지의 낯선 인물들을 상대로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하는 28세 청년의 심리적 부담감이 무거웠다.
북악산·백암산 정체 담긴 극비 파일 열람
김동식은 대외비 파일에 접근했다.
북악산은 10년 동안 남한에서 암약해 온 여성 고정간첩이었고, 백암산은 북악산이 포섭했다는 남한 운동권 출신 30대 정치인 K라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김동식은 ‘남북 간첩전쟁’ 취재팀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공작 임무를 부여 받을 당시 공작부서에서 북악산과 백암산의 실명 등 인적 사항과 활동 내용이 기록된 인물파일을 가져다 줘 그들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공작대호는 포섭 대상 또는 공작원·공작조의 이름이나 조직 명칭을 대신해 보안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암호명, 즉 코드 네임이다.
북한은 ‘북악산’ ‘성남천’ 등 산과 강 이름을 자주 붙인다.
‘광명성’ ‘봉화1호’처럼 상징적인 명칭을 쓰기도 한다.
‘운동권’이란 표현은 당시 북한 대남공작부에서 사용하는 용어였다
김동식 공작조는 전술안, 즉 액션 플랜 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북악산과 백암산의 정체는 이 기사 뒷부분에 공개된다).
작은 빈틈에 자칫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
침투 시 직면할 각종 돌발 상황에 대비한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대응책을 반복해 실습했다.
신분 위장, 침투, 접선, 포섭, 지하당 건설, 무전 통신 등 공작 활동에 요구되는 필수사항부터 신분 노출 시 행동, 현지 물가를 고려한 하루 생활비 등 세세한 항목까지 챙겼다.
공작조가 세운 액션 플랜은 담당 지도원→과장→부부장 라인에서 단계별로 치열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됐다.
손글씨로 쓴 액션 플랜은 300여 쪽에 달했다.
장비가 지급됐다.
침투 복장, 총과 실탄, 수류탄, 공작금, 위조 신분증 등을 고무풍선에 하나씩 넣어 방수 포장을 마쳤다.
남파 D-Day만 남았다.
침투 장기화와 성적 욕구의 충돌
액션 플랜에 담기는 사항 중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여자 문제, 즉 성욕을 어떻게 자율적으로 통제할지다.
공작원들이 남한에 잠입하면 몇 개월씩 장기간 암약한다.
적구화(敵區化, 남한 사람 만들기) 교육에서 술집이나 사창가, 콘돔 사용법도 학습한다.
공작원도 인간이다.
자유분방한 남한 사회에 내려오면 성적 호기심이나 욕구를 참지 못할 수 있다.
그런 유혹에 빠져 ‘외도’하는 경우를 대비한 액션 플랜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공작원들은 남파됐다가 복귀하면 반드시 신체검사를 한다.
남한에 침투했던 공작원 중 퇴폐업소나 집창촌에 갔다가 성병에 걸려 돌아온 사례가 이따금 들려왔다.
그들은 비난과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조용히 사라졌다.
부부장과 반주를 하면서 식사하는 기회가 있었다.
성적 충동을 어떻게 조절할지 어렵게 운을 뗐더니,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남한 현지에 가서 여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공작조)”
“조르게처럼 하면 되겠소.(부부장)”
김동식은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였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944)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인가요?’(Qui êtes-vous, Monsieur Sorge?, 1961년 프랑스 등 합동 제작)를 본 적도 있었다.
‘스파이의 전설’ 조르게처럼 여성을 대하라
조르게는 독일 국적이었으나 공산주의에 심취해 소련으로 이주한 뒤 간첩으로 발탁됐다.
1932년 독일 신문의 특파원으로 위장,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 독일대사와 일본 권력층에 접근했다.
그러던 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9월에 들어서자 모스크바가 추풍낙엽의 위기에 처했다.
스탈린은 망설였다.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과 대치 중인 소련 극동군을 모스크바로 돌리고 싶었지만, 일본의 기습 침공이 두려웠다.
이때 조르게의 정보가 소련 정보부에 타전됐다.
일본군은 북방으로 진격하지 않는다.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동남아로 남진한다.
스탈린은 극동군을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했다.
독일군의 기세가 꺾이면서 퇴각했다.
소련은 기사회생했다.
조르게의 정보가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뒤집었다.
조르게는 독일 대사의 부인 등 고위급 인사 부인들과의 잠자리도 마다치 않는 등 여성들을 기밀 수집과 공작에 활용했다.
그는 44년 11월 일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동식은 ‘조르게처럼 하라’는 부부장의 말을 이해했다.
공작원들이 임무 수행 과정 중 불가피하게 여성과 접촉할 경우 능동적으로 활용하되 빠져들지는 말라는 뜻이리라.
[5부에서 계속]
첫댓글 모처럼 시간내어서 읽어보니까 재미있네요. 만화를 보는것 처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