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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寂滅寶宮)은 신라시대의 건축물이다.
신라시대인 647년경(진덕왕 재위 기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에 있는 상원사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이다.
5대 적멸보궁과 관련된 설화와 그 역사
각각의 보궁과 관련된 전설은 모두 자장율사가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진신사리 100여과, 경전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해동에 불법을 밝히라는 보살의 말을 들은 후 율사는 친히 신라로 건너와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알리는 일에 앞장 서게 된다. 각각의 적멸보궁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용과 봉황 등 전설의 동물들이 나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의 상징과 유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설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영축산 통도사
신라로 건너온 자장율사가 가장 먼저 세우게 된 절이 통도사이다.
통도사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은 절 내부에 있는 연못인 구룡지로부터 비롯된다.
예로부터 명당 자리였던 영취산 인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궁궐이나 탑을 세우려 했으나, 아홉마리의 용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후 절을 세울 터를 찾다가, 그가 직접 날린 나무 오리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칡꽃을 물어오는 것을 보고, 겨울인데도 생생한 기운이 살아 있는 명당임을 알아본다. 처음에 율사는 구룡지에서 용들을 설득하여 나가게 하려하지만, 용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화(火)자를 종이에 쓰고 연못에 넣은 후 진언을 외워 물을 끓게 한 후 용들을 쫓아낸다.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후 통도사는 남부의 대표적인 불교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며, 불,법,승, 중 불보사찰(佛)을 상징하는 불교의 3대 성지 중 한 곳이 된다. (법보사찰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절 외부의 전각이 손상되는 등 큰 피해를 입지만, 사명대사가 통도사에 있던 진신사리 중의 일부를 정암사로 옮겨놓으면서, 진신사리의 훼손은 막을 수 있게 된다.
2, 오대산 중대 상원사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개산한 이후로, 오대산에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하여 불교 성지로 추앙받았으나, 이 사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아, 신비로운 전설처럼 전해진다. 상원사는 이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령 역할을 맡은 절이며, 이 상원사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자면,
상원사는 선덕왕의 두 왕자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진여원이라 불렀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 그 이름을 빛내면 서 마침내 오류성중,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절을 짓고 난 후 두 왕자는 그 곳에서 수행을 했는데, 신문왕이 죽은 후 후계 문제로 다툼이 끊이질 않자, 오대산의 두 왕자를 찾아왔고, 그 중 하나가 왕이 된 후 진여원을 상원사로 개명했다.
고려시대에 들어 상원사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국교가 불교이니만큼 불교 성지에 대한 중흥이 일어날 법도 한데,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삼국 시대를 전후로 소실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려 후기 이색의 오대상원사승당기라고하는 기행문에서 나옹스님의 제자로 알려진 영로암 스님이 재건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상원사는 적어도 고려 말 이후의 것이다. 그 이후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상원사는 자칫하면 소외된 절이 될 뻔 했으나. 세조와의 인연으로 다행히 그 명성을 이어가게 된다. 현재 상원사는 월정사에 포함된다.
상원사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오대산 중대(中臺) 사자암 위쪽에 위치한다. 진신사리가 봉안된 정확한 지점은 모르며, 적멸보궁 뒤편에 사리를 모셨다는 증표로 탑 모양을 새긴 석비가 세워져 있다.
3, 사자산 법흥사
사자산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흥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흥녕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적멸보궁 중 가장 오래 머물던 곳으로 직접 율사가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율사가 절을 세운 후에 신라의 선승들이 모여 사자산에 신라 말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연다. 이 사자산문은 특히 흥녕선원으로 불리며, 한국불교사의 명맥을 이어가는 선원 중의 하나로 자리잡으며, 불법의 계승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흥녕사는 고려 의종(1163)년에 중창하였으며,조선 영조,정조,헌종 때까지 적멸보궁, 선문의 역할을 다해왔다. 하지만 워낙 오랜 역사를 견뎌왔기에 절의 형태는 폐사지에 가까웠다. 1902년에 대원각사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4, 태백산 정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
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창건에 얽힌 전설 외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세워져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는 근년에 완공된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오른쪽에는 고색(古色)의 적멸보궁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마노탑을 등에 지고 있다. 중간 도량가에 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자장각(慈藏閣)·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이 중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이 보궁 안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錦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의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은탑·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밖에도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 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다시 오신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5, 설악산 봉정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길지를 찾던 도중, 봉황이 한 마리 나타나서 율사의 눈을 끌었다. 날아가는 봉황을 자장율사는 계속해서 따라갔고, 그러던 중 부처님을 닮은 바위를 찾게 되었다. 봉황은 부처님을 닮은 바위의 이마부분으로 사라졌고, 율사는 곧 그 주위가 수려한 산들로 둘러싸인 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마를 닮은 부분에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하고 암자를 세우니, 이 것이 봉정암의 유래다. 봉정암은 말 그대로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봉정암은 암자나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자장율사가 봉정암을 세운 이래로, 원효, 보조 등의 국사가 수행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공부를 위해 봉정암을 찾았다. 워낙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봉정암이 현재의 모습처럼 절의 모양을 갖추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건에 앞장 선 후 고려 명종에 이르러 지눌국사가 다시 재건하였으며, 6.25이전까지 여러 스님들과 불교 신도들이 7차례에 걸쳐 절을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모금 활동을 했다.
1, 내용 두 번째~
승려의 계받는 '승보사찰' 영축산 통도사(선덕여왕 15년, 서기 646년)
‘삼보(三寶)사찰’이라는 것이 있다.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사찰이다.
불가의 으뜸 사찰들이다. 불보사찰은 적멸보궁이 있는 통도사, 법보사찰은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간직한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은 수많은 대승을 길러낸 순천의 송광사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통도사이다.
통도사 불이문(不二門)에는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籃)’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땅 불교의 근본이 되는 절’이라는 뜻이다. 옛날 자장율사는 서라벌(경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산 땅에 부처의 분신을 모시고 우리 불교의 정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통도사가 들어있는 산 이름도 부처가 마지막 설법을 했던 영축산(영취산이라고도 함)을 그대로 빌려왔다.
2, 끝없는 순례자의 발길들 설악산 봉정암 (선덕여왕 12년, 643년)
설악산에서 가장 험한 능선 중 하나가 소청봉 아래의 용아장성능이다.
이름 그대로 ‘용의 이빨’처럼 생겼다. 과거 암벽 등반가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코스였지만, 사고가 빈발해 결국 일반인들의 능선 종주가 금지됐다. 봉정암은 그 이빨의 잇몸쯤 되는 위치에 들어있다. 해발 1,244㎙로 꽤 높다. 높을 뿐 아니라 가는 길도 무척 험하다.
봉정암 순례는 힘들다. 힘든 만큼 아름다운 순례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제 용대리에서 백담계곡으로 든다.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면 수렴동 계곡. 계곡의 끝자락부터 길은 하늘로 향한다. 지금은 붉은색 철다리와 계단이 계곡과 절벽에 놓여 있지만 옛날에는 첨벙거리며 계곡을 건너고 네 발로 절벽을 기어올랐을 것이다. 마지막 관문은 깔딱고개. 최근 험한 곳에 계단이 놓였지만 젊은 기운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
봉정암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80%는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나 할머니다.
동네 시장에 가려고 해도 택시를 잡아야 할 나이에 험한 산길을 거의 날다시피 오른다. 아이의 대학합격을 위해, 집안의 평안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러 가는 길은 그렇게 기운이 펄펄 나는가 보다.
옛날 자장율사는 헬리콥터라는 것을 예측했을까. 몇 년 전만 해도 봉정암은 석가사리탑과 본당, 요사채가 전부였다. 기도하는 신도가 많아지면서 대규모 불사를 했다. 자재는 모두 헬리콥터로 날랐다. 이제는 제법 큰 사찰이 됐다. 100명 이상이 잠을 잘 수 있는 신도들의 숙소도 만들었다.
공양(식사) 시간이면 신도들에게 스님들이 ‘질서’를 외칠 정도이다.
봉정암 참배의 정점은 석가사리탑이다.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해서 ‘불뇌보탑’이라고도 한다. 적멸보궁 뒤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있다. 평범한 5층 석탑이다.
그러나 아래로 펼쳐지는 설악 능선을 배경으로 한 석탑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1,300년 동안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다람쥐 채바퀴 같은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어찌 번뇌가 있겠는가.
3, 산전체가 부처님의 나라 사자산 법흥사(선덕여왕 12년, 643년)
강원 영월 땅에는 특이한 지명이 있다. 주천(酒泉)면이다. 이름 그대로 술샘이다.
술이 솟았다고 한다. 양반이 술잔을 놓으면 청주(맑은 술)를, 평민이 잔을 대면 탁주를 냈다. 은근히 부아가 난 평민이 양반의 옷을 입고 술잔을 놓았다. 술샘은 속지 않고 탁주를 넘치게 부었다. 화가 난 평민은 술샘을 아예 부숴버렸다. 이제 술은 솟지 않지만 샘의 흔적은 있다.
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물. 인근에 수주(水周)면이 있다. 물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이다. 정말 마을을 뺑뺑 돌아 물이 흐른다. 법흥사는 수주면의 끄트머리에 있다. 물 기운과 산 기운이 만나는 곳이다. 산의 이름은 사자산이다. 자장율사는 산 어딘가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 그래서 산 전체가 부처의 나라이다.
법흥사(옛 이름 흥녕사)는 한때 융성했다. 산의 이름을 딴 사자산문이 활기를 띠었고
그 중심 도량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물 기운을 빈 법흥사는 반대로 불 때문에 고초를 많이 겪었다. 891년 불에 탔다가 944년 중건됐다. 이후 다시 불에 타 1,000년 가까이 명맥만 유지하다가 1902년 비구니인 대원각이 중건해 법흥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다가 1912년 다시 불에 탔고 1930년에 중건됐다가 1931년에는 산사태로 일부가 유실됐다. 대규모 주차장을 갖춘 지금 새 청사진을 갖고 큰 불사를 벌이고 있다.
법흥사의 적멸보궁은 절터의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여러 번 고초를 겪은 만큼 새 단장을 한 적멸보궁이다. 5대 적멸보궁 중 가장 깔끔하고 단청도 새롭다. 운치는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옛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이 많다. 절 입구에 있는 징효대사탑비는 보물 612호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이다. 탑비에서 바라보는 극락전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4, 탁트인 사방… 가슴도 '탁' 오대산 상원사
오대산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오대산이다. 그리고 자장율사가 중국(당ㆍ唐)에서 수도를 한 산이 오대산이다. 지형으로 봐서는 전자가, 자장율사가 적멸보궁을 세운 곳이라는 점에서는 후자가 맞을 듯하다.
풍수학적으로 오대산 적멸보궁은 땅의 힘이 대단하다고 평가 받는다. 그 자리에 부처의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승려들이 먹을 것 걱정 없이 수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정말 터가 좋다. 뒤로는 비로봉이 호위하고 앞으로는 오대산의 육중한 능선이 펼쳐진다. 풍수에 문외한이라도 속이 확 트인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오대산 적멸보궁 가는 길은 즐겁다. 볼 것이 워낙 많다. 처음 만나는 것은 월정사 큰 절이다. 조계종의 강원도 대부분 사찰을 호령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전나무숲은 너무 유명하다. 숲 사이에 좌정하고 있는 월정사 부도군, 우리 사찰에서 만나기에는 다소 화려한 8각9층탑, 적광전 뒤의 야산에 펼쳐진 잣나무숲 등은 산사 여행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원사는 월정사와 적멸보궁의 중간에 낀 사찰이었다. 월정사의 스님들이 수도를 하는 곳이자 적멸보궁을 보필하는 선원이었다. 조선 세조가 이 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고, 이후 조선 왕조의 아낌을 받았다. 월정사에서 비포장도로로 약 8㎞ 떨어진 상원사는 이제 작은 절이 아니다. 지금 옛 청량선원인 본체의 청기와를 걷어내고 동(銅)기와로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옛 절 옆에는 동기와를 얹은 멋진 새 청량선원을 지었다.
적멸보궁은 상원사에서 산길로 약 40분(1.5㎞) 거리에 있다. 지그재그로 난 계단과 돌길을 걸어야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다. 가벼운 겨울 산행으로 제격이다. 월정사와 상원사를 들렀다면 꼭 찾아야 할 곳이다. 산에서 느끼는 비속(非俗)의 느낌. 가슴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5, 날 비우고 가라하네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1,300년 넘도록 부처님 전신사리 모신곳 고색깃든 절집·빛바랜 단청 '시간 멈춘 듯'
절가운데로 청정옥수 시름·번뇌 씻어줘
열반의 기운을 담은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7세기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당)에서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모셔와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등 이 땅의 다섯 곳에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적멸’은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높은 경지’를 일컫는다.
다른 말로 ‘열반(涅槃ㆍNirvana)’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진정한 ‘비움’의 가르침을 티끌만큼이라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강원 정선군 고한, 국내 유일의 카지노인 강원랜드가 이 곳에 있다. 과거엔 석탄 산지로 유명했다. 한국 근대화의 에너지 구실을 했던 곳으로 아직도 몇몇 곳엔 탄광이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곳의 풍광은 복합적이다. 아니, 혼란스럽다. 그 혼란스러움의 한 가운데에 진흙속의 연꽃 같이 맑은 절이 있다. 정암사이다.
절 아래로 흐르는 개천의 바위가 온통 붉은 색이다. 폐광에서 흘러내리는 물 때문이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철골구조물을 훑고 내려온 물은 계곡의 돌과 모래에 잔뜩 녹을 입혀 놓았다. 이제는 빈집이 되어버린 산기슭의 오두막집, 죽은 자의 썩어 들어간 눈처럼 시커먼 창문을 드러낸 아파트, 쉰 듯한 탄차의 기적소리….
정선의 사북, 고한 땅에 탄광이 들어선 것은 1948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면서부터이다. 50년이 넘게 제 땅과 살을 파내 국가 산업화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곳의 산천은 마구 무너져내렸다. ‘막장’으로 내몰렸던 많은 광원들의 눈물어린 삶도 곳곳에 묻어있다.
고한에서 만항쪽으로 뚤린 414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르면 왼편으로 호젓한 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의 현판에 태백산 정암사(淨岩寺)라고 씌여있다. 석탄을 캐기 전까지 깨끗한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흘렀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온통 탄가루로 뒤덮였던 때에도 이 절은 그 깨끗함으로 이 곳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탄때와 눈물때를 씻어주었다.
이 절에 적멸보궁이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마지막으로 만든 보궁이고 율사는 이 곳에서 입적했다. 새로 단장한 일주문에 들어서면 티끌 하나 없는 마당이 펼쳐진다.
우람한 축대 위에 세워진 육화정사가 왼쪽으로 보이고 범종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적멸보궁은 범종각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가슴 높이의 야트막한 돌담이 에두르고 있는 적멸보궁과 그 앞뜰은 차분하게 단장된 정원처럼 운치가 흐른다.
고색이 깃든 기둥과 단청이 하얗게 날아간 서까래, 귀퉁이가 비바람에 깎여 둥글 넙적하게 된 돌계단…. 보궁은 파란 기와를 올린 지붕을 제외하고 옛 세월 속에 멈춰 선 듯하다.
왼편으로는 작지만 위엄 있는 나무가 솟아있다. 자장율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싹이 나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설명이 쓰여있다. 사실이라면 수령이 1,300살이 넘는다.
부처의 사리는 보궁 뒤에 있는 천의봉 절벽 위 20㎙ 지점의 수마노탑에 봉안돼 있다.
마노석이라는 이름의 석회암 벽돌을 채곡채곡 쌓아올리고 상륜부를 청동장식으로 씌운 수마노탑은 한반도에서 보기드문 7층 모전석탑(돌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다. 보물 제410호로 지정돼 있다.
탑에 가려면 보궁 오른편으로 난 비탈 계단을 200㎙ 정도 올라야 한다. 계단이 정겹게 만들어져 있다. 탑에 오르면 정암사의 전경이 고즈넉하게 내려다 보인다. 아담한 산신각과 여전히 푸른 소나무, 그리고 깨끗하게 정돈된 장독대…. 참배객은 묵상에 잠긴다.
정암사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 절 가운데로 흐르는 냇물이다. 얼음이 성기게 언 사이로 하얀 포말이 흐른다. 아주 맑다. 이 곳에는 열목어가 산다. 그래서 이 냇물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73호다.
단순히 열목어가 산다고 해서 독특한 것이 아니다. 절 바깥의 개천에는 쇳물이 흐르지만 절 안의 물은 열목어가 살만큼 청정옥수이다. 부처의 세계여서 그럴까. 다시 묵상에 잠긴다.
자료출처: 한국일보
[출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작성자 원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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