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욤감나무를 슬퍼함 / 나태주
고욤감나무 한 그루가 베어졌다 올봄의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나무를 안다 저나 내나 용케 오래 살아남았구나
고욤감나무 사이
아름다운 짐승 / 나태주
젊었을 때는 몰랐지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내 / 나태주
이 지푸라기 머리칼을 언제 또 쓰다듬어 주나
짧은 속눈썹의 이 여자 언제 또 들여다 보나?
작아서 귀여운 코 조금쯤 위로 들려 올라간 입술
이 지푸라기 머리칼을 가진 여자를 어디 가서 다시 만나나?
시 / 나태주
시계에게 밥을 먹인다 / 나태주
한밤중에 깨어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는다
아들방 문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몸을 앞뒤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기도를 한다
하느님 아버지, 어떻게 주신 아들입니까? 그 아들 비록 어둡고 험한 곳에 놓일지라도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채금져 주옵소서
도대체 아내는 하느님한테 미리 빚을 놓아 받을 돈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수금해주실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계속해서 채금(債金)져 달라고만 되풀이 되풀이 기도를 드린다
딸아이가 고3이 된 뒤로부터는 또 딸아이방 문앞에 가서도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들며 똑같은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아버지, 이미 알고 계시지요? 지금 그 딸 너무나 힘든 공부 를 하고 있는 중이오니 하느님께서 그의 앞길에 등불이 되어 밝혀 주시고 그의 모든 것을 채금져 주옵소서
우리 네 식구 날마다 놓인 강물이 다를 지라도 그 기도 나룻배의 노(櫓)가 되어 앞으로인 듯 뒤로인 듯 흔들리며 나아감을 하느님만 빙긋이 웃으시며 내려다보시고 계심을 우리는 오늘도 짐짓 알지 못한 채 하루를 산다.
안쓰러움 / 나태주
오늘 새벽에 아내가 내 방으로 와 이불 없이 자고 있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고 있는 내가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잠결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문득 아내 방으로 가 잠든 아내의 발가락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돌아왔다 노리끼리한 발바닥 끝에 올망졸망 매달려있는 작달만한 발가락들이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도 자면서 내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다른 방을 쓰고 있다
두 이름 / 나태주
이름은 딱딱하고 엄마란 이름은 말랑말랑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엄마란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였을 뿐, 할머니를 할매라 부르며 자랐다 그것도 외할머니 를 그렇게 부르며 자랐다 그러나 끝내 할머니 속에는 엄마가 없었고 어머니 속엔 할매가 없었다. 그 두 이름 사이를 오가며 어린 나는 자주 어리둥절했고 때로 미달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 아스므레 애달픈 마음을 살았다 하나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 이름이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며 불완전한 둘보다는 완전한 하나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마귀 / 나태주
오늘도 나는 한발 늦었다. 토요일 오후 퇴근길 통근버스 기다리는 시간. 사마귀 한 마리를 찾아낸다. 이른바 약찬 가을 사마귀다. 마음을 숨긴
악수 / 나태주
가을 햇살은
천천히 가는 시계 / 나태주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가족사진 / 나태주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 서울로 가게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 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 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쓰도 발라보고 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 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결혼 25년만에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김남조시인* 이근배시인* 나태주시인* 유자효시인
공생 / 나태주
빈 방에 들어와 목이 마르다
물 한 잔 따라 마시며 보니 창가에 꽂아둔 화분의 꽃이 시들어있다 이름도 낯선 덴드롱이란 꽃 어여쁘다 싶어 한 그루 얻어다 놓고 이렇게 며칠씩이나 물을 굶겨 시들게 했구나 금한 김에 먹다만 물 반 컵을 우선 화분에 쏟는다
미안한 마음이 많이 헐해졌다
사는 일 / 나태주
막판에는 나를 싣고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이제 날 저물려 한다
퇴근 버스를 놓친 날 아예
누가 나를 주워가 줄 것인가?
우포늪 왜가리 / 나태주
너무 크고 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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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시집 「대숲 아래서」「누님의 가을」「막동리 소묘」 「굴뚝각시」「아버지를 찾습니다」「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추억이 손짓하거든」「딸을 위하여」 「풀잎 속 작은 길」「슬픔에 손목 잡혀」 「섬을 건너다보는 자리」「물고기와 만나다」등 산문집 「대숲에 어리는 별빛」「절망, 그 검은 꽃송이」 「추억이 말하게 하라」 시화집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송수권·이성선·나태주 3인 시집「별 아래 잠든 시인」등
41년간 공주문화원을 지켜온 정재욱 원장의 퇴임을 위로하고 나태주 원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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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얘기하듯 텁텁하고 구수하게 전해오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