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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인들
에바 페론
Maria Eva Duarte de Peron
(1919년 05월 07일~ 1952년 07월 26일)
아르헨티나의 구원자
1947년, 20세기의 마지막 파시스트였던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스페인을 공식 방문한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영부인이자 노동복지성 장관인 에바 페론(Maria Eva Duarte de Peron)에게 스페인 최고의 훈장인 이사벨라 십자훈장(Cross of Isabel the Catholic)을 수여했다. 그러자 전 세계는 훈장을 수여한 사람과 받은 사람에 대해 동시에 문제 제기를 했으며, 과연 이들이 이사벨라 여왕이 부여하는 명예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한 논란이 널리 번졌다.
'에비타(Evita)'라는 애칭으로 더 친숙한 에바 페론은 신화라는 것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인 에비타는 '작은 에바(Little Eva)'라는 의미이다. 그녀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기간은 불과 8년 남짓이었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에비타는 전 세계에서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에비타의 자서전 《내 삶의 이유》 표지
에비타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가 '거룩한 악녀이자 천박한 성녀'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의 삶은 상당 부분 가려져 있지만, 열다섯 살 이후의 삶과 8년 동안의 공직생활, 그리고 그 기간의 어록은 스스로 구술한 자서전을 포함해서 여러 개의 전기에 의해 투명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녀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에비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내 삶의 이유(La Razon de Mi Vida)》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유년 시절의 생활은 물론 그녀의 고향이나 생일에 관한 것, 심지어는 어릴 적의 이름조차 빠져 있다.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도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할 정도로 이 시절 그녀의 삶은 악몽 그 자체였던 것이다.
평범한 여배우 에비타
에비타는 1919년 5월 7일생 으로 광대한 초원 팜파스에 위치한 로스 톨도스라는 작고 낙후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서너 시간을 달려야 도달하는 곳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며 지역의 영주 노릇을 하고 있던 후안 두아르테(Juan Duarte)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 살 때 그녀의 어머니 후아나(Juana Ibarguren)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후안과 후아나는 모두 다섯 아이를 두었지만, 후아나는 두아르테의 정식 부인이 아니라 내연의 관계만 맺고 있던 사이였다. 후안은 후아나를 버린 다음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에비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다. 부근의 후닌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사한 후아나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이웃사람들을 위해서 바느질을 했으며 농장의 주방에서 요리를 했다. 아직 십 대 초반에 불과했던 두 언니 엘리사(Elisa)와 블랑카(Blanca)도 어머니의 허드렛일에 동참해야 했다.
얼마 후 후아나는 오빠의 도움으로 허름한 집을 장만하여 그것을 하숙집으로 개조해 운영하면서 5남매를 키웠다. 그렇다고 두아르테 가족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빈민층에 속했으며, 후아나는 막내인 에비타의 현실이나 장래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어린 에비타에게는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대단히 힘든 환경이었다.
가족들의 가난이야 대다수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사생아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이며, 그 당시에는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이 더욱더 가혹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어린 에비타는 현실을 탈출하는 수단으로 자신이 유명한 배우가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미래를 꿈꾸곤 했다. 그리 오래 다니지 못한 학교에서도 연극부 활동만은 관심을 보였다.
1935년 초, 열다섯 살인 에비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과감하게 첫걸음을 디뎠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후닌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것이다. 당시는 전 세계적인 대공황의 시기였고, 농업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지방으로부터 유입된 인구가 집중되어 거대한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영화나 연극, 라디오와 같이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만이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다.
에비타는 열여섯 살이 되기 직전 코메디 극장(Comedias Theatre)에서 연극의 단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연기는 좋은 평판을 얻어서 그녀는 극단과 장기 계약을 할 수 있었으며, 다음해에는 극단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그녀가 대중적인 스타가 된 것은 아니었고, 꿈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최고가 되려는 야망 이전에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무명 배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저 그런 평범한 여배우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B급 멜로영화에 출연하고 모델로도 일하면서, 그 바닥에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여러 해를 바쁘게 살다 보니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여배우로서 '섹스어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연극무대에서 다져진 목소리 연기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 화면에서 승부하기보다는 라디오 드라마에 자주 출연하고 있었다.
1942년 초, 〈역사 속의 위대한 여인들〉이라는 일일 라디오 드라마 시리즈가 당시 아르헨티나 최대의 민간방송사였던 라디오 엘 문도(Radio El Mundo)를 통해 방송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와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후 알렉산드라 역을 맡았다. 드라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에비타는 이 시리즈를 통해 일약 대중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에비타는 최고의 소득을 올리는 연예인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라디오 방송국의 지분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의 인기를 배경으로 다시 한 번 영화에 도전해서 그 시대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여배우였던 라마르크(Libertad Lamarque)가 주연한 영화 〈격차(La Cabalgata del Circo)〉에 상당히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했지만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후안 페론과의 만남
에비타는 뮤지컬 〈에비타〉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무명 배우였다가 후안 페론과의 결혼을 통해 어느 날 갑자기 신분 상승한 것이 아니었다. 후안과 에비타가 만났을 때 에비타는 이미 사회적으로 저명한 여류인사였다. 그녀는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후원자들을 찾고 있었다. 그녀의 사업 분야가 정치적인 후원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비타는 새로 구성된 아르헨티나 라디오 신디케이트(ARA, Argentine Radio Syndicate)의 설립 멤버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군정체제하에 있었으며, 어떤 사업을 하던 군부와의 긴밀한 관계는 필연적이었다. 더군다나 ARA는 공공의 소유인 전파를 독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ARA를 설립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에비타의 운명은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하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르헨티나의 역사에서 1930년대는 '치욕의 10년(Decade Infame)'이라고 불린다. 독립한 지 한 세기 남짓한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전 세계에서 4위에 오를 정도로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번영은 광활한 대농장에서 대규모의 방목과 노동집약적인 곡물 경작을 통해서 이루어진 전근대적인 경제 시스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인종과 사회 계층 간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질적인 신분 격차는 봉건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선거권은 소수의 특권층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특권층은 보수적인 정책을 강력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서히 산업화가 진행된 이 시기에 유럽 각국에서 대량의 이민이 유입되면서 이들과 함께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같은 급진적인 사상도 함께 들어왔다. 이에 완고한 아르헨티나 사회에도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12년 최초로 모든 남성들에게 선거권이 개방되었으며, 4년 후에는 국제 사회주의 연맹(Socialists International)의 일원이기도 했던 급진 시민 연합(UCR, Union Civica Radical)이 정권을 잡았다.
그렇지만 이 좌파 정권은 그 자체로도 혼란스러웠고,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견제를 받아 의도하던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1929년 불어 닥친 대공황의 거센 바람은 취약한 사회주의 정권에게는 치명타였다. 결국 1930년 좌파 정권은 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무너지고 극우파인 아르헨티나 애국자 동맹(Liga Pariotica Argentina)이 정권을 잡았다.
군부와 우파가 정권을 잡았던 이 시대가 바로 '치욕의 10년'이다. 이 기간 중에 상상할 수 없는 모든 부도덕한 권력형 비리가 자행되었다. 정권은 부정선거에 의해 연장되었고, UCR 지도자들에 대한 불법적인 체포와 처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번진 부정과 부패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했다.
'치욕의 10년'은 1943년 일단의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서 13년 만에 종식되었다. 에비타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정월 육군 대령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을 처음 만났다. 당시 후안은 마흔여덟 살, 에비타는 스물네 살이었다. 후일 에비타는 자서전을 통해 이 '기적의 날'에 후안이 내뿜는 중후한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어 자신이 먼저 접근했다고 고백했다.
1944년, 아르헨티나는 비극으로 그해를 시작했다. 1월 15일 산후안을 덮친 지진으로 6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노동성 장관인 페론 대령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보수적인 군부 내에서 특이하게 하층민의 이익을 대변하며 친노조 노선을 걷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서 모금 활동을 전개하면서 예술계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 연예인들은 일주일 동안 예술제 형식으로 모금 운동을 벌였고, 일정이 끝나자 마지막 날 저녁에는 갈라 쇼를 열었다. 바로 이 갈라 쇼에서 후안과 에비타가 처음 만났다. 에비타는 쇼가 끝난 다음에도 새벽 두 시까지 수다를 떨며 후안을 놓아 주지 않았다. 후안은 첫 부인인 아우렐리아(Aurelia Tizon Erostarobe)를 자궁경부암으로 잃은 지 5년이 지난 홀아비였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후안이 임명된 노동성 장관은 아무도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직이었다. 그런데 후안은 이 한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역사가 대략 10년 남짓한 사회주의 계열의 노조 연합체 아르헨티나 노동 총연맹(CGT, Confederacion General del Trabajo de la Republica Argentina)과 손을 잡고 노동 관계 법률들을 제정했다. 이 법률들은 노동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것들이었다.
에비타가 후안을 처음 만났을 때가 바로 그와 CGT의 연대가 서서히 강화되던 시기였다. 후안은 노조의 강화와 CGT 조직의 전국 확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노동자들뿐 아니라 치욕의 세월 동안 권력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에 빠져 있던 서민들은 후안에게서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의 초기에는 에비타가 적극적이었고 첫 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후안은 미적지근했지만, 잦은 만남을 유지하면서 관계는 점차 깊어졌다.
다음해 2월, 후안이 노조의 적극적인 지원과 대중적인 인기를 얻자 파렐(Edelmiro Julian Farrel) 대통령은 그를 부통령 겸 전쟁성 장관에 임명했다. 그를 후계자이자 권력의 제2인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군사 평의회 멤버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군부란 원래 보수적인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하층 빈민들,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주의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인데도 후안은 바로 그들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스카미사도스 집회에서의 에비타
1945년 10월 9일 보수적인 군사 평의회는 무장 병력을 동원해서 군부의 이단아인 후안을 체포했다. 그러자 대대적인 시위가 발발했다. 25만에서 35만여 명의 사람들이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Casa Rosada) 정문 맞은편 광장에 모여 후안의 석방을 요구했다. 아르헨티나의 엘리트 계급은 경멸의 의미를 담아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데스카미사도스(Descamisados)라고 불렀다. '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였다. 후안은 수감된 지 8일 만에 석방되었다.
바로 이 일련의 사태가 에비타와 후안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계기였다. 이 시위에서 에비타가 후안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던 사실은 분명하지만, 시위를 조직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후안은 석방되고 나서 나흘 후에 에비타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1945년 10월 17일의 시위가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치욕의 10년'과 군부 통치의 긴 세월 동안 줄곧 억눌려 왔던 아르헨티나의 민중이 최초로 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후안 페론은 다음해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에비타가 정치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4개월 정도 전개된 이 민선대통령 선거 캠페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행하던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페론이 제창한 '정의주의(Justicialismo)'에 동참할 것을 대중들에게 호소했다. 또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공개하며 그들과 동질감을 조성했다.
에비타는 후안과 동행하여 방방곡곡을 순회하면서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에비타가 선거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자 대중들은 환호했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여성에게는 참정권도 부여하지 않고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였다. 에비타가 공개석상에 바지를 입고 나타나자 그 사실까지 비난받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에비타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후안보다도 그녀가 경쟁자들의 공적이 되고 말았다.
에비타와 후안
에비타에 대한 공격은 그녀가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험담, 여배우 시절의 사생활 등과 같이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비열한 인신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에비타에 대한 적대적인 전기들은 일찌감치 그녀가 죽기 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는데, 그 전기들에 수록된 기사들 중 상당 부분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 기간 중 상대 캠프에서 찍어낸 팸플릿에서 인용한 내용이었다.
1946년 2월 격렬한 선거 캠페인 끝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는 최초의 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득표율 1, 2위가 최종적인 결선 투표를 하는 제도였다. 당시 선거에서는 여러 명의 대통령 후보가 난립해 있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선 투표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론은 첫 선거에서 과반수를 훨씬 상회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대다수 아르헨티나 국민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페론에 대한 군부와 가톨릭 교회, 기득권층으로 이루어진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국제 사회의 시각도 착잡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힘겹게 막 끝낸 연합국, 특히 미국은 불안한 시각으로 페론의 아르헨티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후안 페론이 사회주의자 아니면 파시스트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국제 사회에는 후안 페론이 명문가의 후계자라는 것 외에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명문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르헨티나 원주민들에게 헌신했던 의사인 아버지와 19세기에 백인들에 의해 거의 인종청소가 된 원주민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으며, 어린 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박해받는 원주민들 틈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소외받는 계급에 대한 애정은 그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런 면에서 후안이 에비타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퍼스트레이디 에비타
훗날 '페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정의주의(Justicialismo)는 권위주의적인 독재, 국수주의에 가까운 민족주의, 포퓰리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와 같이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정의주의에 바탕을 둔 페론의 개혁은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곧바로 시작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과 주축국 양쪽으로 모두 식량을 수출하면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로 국가의 외채를 모두 조기상환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다음해에 페론은 여러 개로 난립해 있던 철도회사를 모두 국유화하면서 국영 철도회사 FA(Ferrocarriles Argentinos)를 설립했다. 철도는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었다. 이어서 바로 그해에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화를 목표로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1947년부터 아르헨티나는 제트전투기의 개발에 착수해서 풀키 1호(Pulqui 1)와 풀키 2호(Pulqui 2)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제트기의 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지만 페론 정권의 핵심은 이러한 경제 개혁과 정책의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바로 대통령 부인인 에비타였다. 대통령 선거가 끝날 무렵부터 대중들은 그녀를 에바 페론이 아니라 어릴 적 이름인 '에비타'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비타는 대통령이 된 후안에게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라고 강하게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후안은 1946년 6월 그때까지 자신이 겸임하고 있던 노동복지성(Ministry of Labor & Social Welfare) 장관직을 에비타에게 인계하면서 동시에 건강성(Ministry of Health)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 시기까지도 에비타는 후안의 측근들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이 공직 생활로 인해 행정부 내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으며, 동시에 대중적인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녀는 노동성과 건강성 두 개의 부처에서 하루에만 수천 건이 접수되는 민원에 대해 일일이 답장을 보냈으며,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르헨티나의 대중들은 그녀에게 열광하고 있었지만, 기득권층이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은 정도가 아주 심했다. 그들에게 에비타는 팜파스의 외진 작은 촌에서 태어나 빈곤 속에서 자란 사생아, 반반한 얼굴과 호리호리하고 탄력 있는 육체를 무기로 삼아 남자들을 홀려 철저하게 이용하고는 유효기간이 지나면 매몰차게 차버리고 출세가도를 달렸던 창녀였다.
에바 페론 재단
에비타에 대한 기득권의 반감은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성공한 자선기관인 에바 페론 재단(Eva Duarte de Peron Foundation)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상류층 부인들의 배타적인 모임인 자선회(Sociedad de Beneficencia)라는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단체의 회장은 대통령 부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단체의 구성원들은 에비타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단체에 가입하는 것마저도 거부했다. 일종의 모욕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개인 재산 1만 페소를 들여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다. 처음에 이 재단은 자선회에 지원되는 정부의 지원금과 페론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노조로부터 자발적인 후원금을 받아 운영되었고, 점차 대중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후원금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CGT에 소속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1년 치 봉급 중 사흘 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에바 재단에 기부했다.
에비타는 노동복지성과 건강성의 장관으로 임명됐다.
기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보수주의자들과 다시 충돌하는 사태가 불가피했다. 에비타가 그동안 정부가 가톨릭 교회의 자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급하던 보조금을 에바 재단으로 돌린 것이다. 사실 그동안 일부 가톨릭 교회에서는 보조금을 자선이 아니라 불분명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보조금이 없어지니 교회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재단의 기금은 순식간에 약 2억 달러 정도로 증가했다.
1950년 연말 결산 때 에바 페론 재단은 26명의 성직자를 포함해서 모두 1만 4천 명 이상의 인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재단은 1947년부터 빈민층을 위해 아예 도시 하나를 건설하고 있었고,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택과 무산자들을 위한 병원을 건설하기 위해 건설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직원 숫자가 늘게 된 것이다. 또한 재단은 그해에만 모두 사십만 켤레의 신발과 오십만 대의 재봉틀, 이십만 세트의 조리 기구를 구입해서 전국에 배분했다.
재단은 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의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공급했으며, 전국에 많은 고아원을 지었다. 에비타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노동복지성과 건강성으로 쇄도하는 민원 중 정부의 시스템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모두 이 재단을 통해서 해결했다. 또한 그중에서 많은 부분을 직접 결재하고 직접 중재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새벽 일곱 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하루에 스무 시간에서 스물두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는 날들도 허다했으며, 주말을 함께 하자는 후안의 제의를 번번이 거절하곤 했다. 이 와중에 그녀는 여러 번의 자연유산을 겪었다. 원인은 언제나 과로였다.
그녀에게는 분명히 양면성이 있었다. 에비타는 그 시대의 패션 아이콘이었으며, 전 세계의 퍼스트레이디 중 가장 젊고 아름다운 여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크리스천 디오르(Christian Dior)와 같은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었다. 그녀는 대가들이 디자인한 옷과 보석, 시계와 구두를 누구보다도 먼저 착용하는 행운을 누렸으며, 이러한 것들을 대단히 즐겼다.
에비타는 크리스천 디오르가 파리에서 공수해 준 새 디자인의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새벽에 재단 사무실에 출근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그들 중에는 한센씨 병이나 매독으로 피부에 진물이 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의 손을 직접 잡고 위로하면서 그들에게 키스를 했다. 점차 그녀의 독실한 신앙과 맞물려 노인들과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 사이에서 그녀를 '성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르헨티나에서 누구보다도 에비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1946년 선거 직후 에비타는 후안에게 여성들에게 '일할 권리'와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상원의원들을 직접 들볶아서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다음해에 하원을 통과해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해 에비타는 여성 페론당(Feminist Peronist Party)을 창당했다. 1951년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여성 페론당의 당원 수는 오십만을 넘었다.
에비타의 마지막
1951년 8월 22일 약 이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부 청사의 맞은편 광장에 모여들었다. 에비타의 노력으로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보장되고 나서 처음으로 치러질 차기 대통령 선거가 예고된 시점이었다. 이들은 후안과 에비타의 거대한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페론 부부가 청사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잠시 후 후안은 짧은 연설을 했다.
에비타를 부통령으로
후안이 연설을 마치자 이백만 인파가 일제히 에비타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구호는 '에비타를 부통령으로!'였다. 에비타가 머뭇거리면서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에비타, 지금!(Ahora! Evita, Ahora!)"
그러나 에비타는 민중의 부름에 응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치명적인 악성 종양에 침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에비타가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실신한 시기는 1950년 초였으며, 이때 이미 자궁암은 치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백만 인파가 모였던 이날 즈음에는 극도의 무력증과 자궁 출혈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에비타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51년 8월 22일의 사진에도 에비타가 대중들에게 응답하는 동안 후안이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허리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에비타는 그날 저녁에 다시 쓰러졌다. 그녀는 후안이 다음해에 치러진 재선에 성공할 때까지 극단적인 수술을 받으면서까지 간신히 버텨냈다. 1952년 6월 4일 후안의 재선을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에비타가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공개행사였다.
후안의 부축을 받고 있는 에비타
이 퍼레이드에 참가했을 때 그녀의 체중은 36킬로그램에 불과했으며, 커다란 코트 속에 지지대를 감추고 그것에 의지해서 서 있었다. 며칠 후 그녀는 공식적으로 '조국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1952년 7월 26일 오후 8시 25분, 에비타의 죽음이 방송을 통해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는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한 듯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깊은 슬픔에 빠졌다.
에비타는 그녀가 없었더라면 무미건조했을 페론주의에 화려한 색깔을 입힌 사람이었다. 그녀와 후안 페론이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페론주의의 핵심도 아니고, 현재 한국에 팽배한 신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그러한 비판은 체 게바라가 수술용 메스를 집어던지고 AK-47 소총을 들었다고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페론 부부는 아르헨티나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선진국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는 제3세계에 속한다고 보았으며, 대다수의 고통받는 국민들을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에게 기생해서 부와 권력을 독점했던 국내의 기득권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우선적인 목표를 두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후안과 에비타는 체 게바라나 젊은 시절의 피델 카스트로와 같은 순수한 혁명가들과 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에비타 이후의 아르헨티나
에비타를 잃은 제2기 페론 정권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미국 CIA가 개입한 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무너졌다. 새로 들어선 군부는 아르헨티나에서 에비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구보존 처리되었던 그녀의 시체는 모독당하고, 이탈리아에 16년간이나 숨겨졌다. 1972년 페론이 재집권하면서 그녀의 시신도 귀국했으나, 1년 만에 페론이 죽고 다시 한 번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영원한 안식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 최종적으로 가족묘지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군부의 우선적인 목표는 페론 부부를 모략하는 작업이었다. 미국의 유력한 언론들도 이 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들은 후안과 에비타를 파시스트로 매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페론 정권 시절 나치 전범들에게 이민 문호를 개방했다고 주장했다.
제2차 대전 이후 나치 전범들이 아르헨티나에 자리를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페론이 그들에게 문을 연 이유는 나치 독일이 가지고 있던 과학기술과 숨겨진 자금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의 유명한 항공 공학자이자 파시스트였던 에밀 드보아틴(Emile Dewoitine)을 비롯한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은 아르헨티나 항공 산업의 산파 역할을 했다.
더욱이 에비타는 나치의 입국에 관여하지도 않았거니와 기본 정서상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론자라면 몰라도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페론 부부를 파시스트로 모는 일이 잘 되지 않자, 아르헨티나 군부는 공격 방향을 바꿔 그들 부부의 부도덕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후안과 에비타가 스위스 은행에 거액을 예치해 놓고 있으며, 후안이 망명할 때는 무려 7억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파나마 정부에서는 후안의 망명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린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은 5만 달러가 전부였다. 그 돈은 에비타가 죽기 직전 발행한 자서전 《내 삶의 이유》에 대한 인세로 받은 돈이었다.
후안은 파나마에서도 축출되어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결국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에 정착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 삶의 이유》가 전 세계적으로 꾸준한 스테디셀러였다는 사실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에게는 애당초 스위스 은행의 계좌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며, 에비타가 쓴 책의 인세를 수입원으로 해서 망명 16년 동안 근근이 살았다.
에비타의 포퓰리즘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가지고 그녀를 모방한 남미 국가들이 모두 망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파이를 키우려고 하지는 않고 나누어 주기에만 바빴다는 논리다. 그러나 경제학적인 통계자료는 이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이 집권했던 10년 동안 130퍼센트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실질적인 평균 임금은 세 배 이상 올랐다.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친 원흉은 페론 정권이 아니라 그 정권을 무너뜨린 군부 독재 정권이었다. 그들은 국민이 페론 시절보다 더 잘살게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허황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단기 외채를 들여와 국민들에게 풀었으며, 국민들은 잠시 벼락부자가 된 듯한 환상에 빠졌다. 그러나 단기외채라는 달콤한 유혹은 머지않아 이자율 150퍼센트라는 치명적인 독이 되어 아르헨티나 경제를 아예 죽이고 말았다.
아르헨티나의 구원자 에비타
1952년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르헨티나의 국가 외채는 80억 달러 선으로 정리되었고, 10년 동안 그 수준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경제에서 단물이 빠지자 외국 자본은 하루아침에 철수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450억 달러의 갚을 수 없는 외채뿐이었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IMF의 긴급 구제 금융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정치가들은 이 사태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1990년대에 페론주의자이면서도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메넴(Carlos Menem)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페론이 국유화했던 기업들을 모두 사유화하고 친미적인 정치 노선과 극도로 개방적인 경제 정책을 드라이브하면서 이것을 개혁이라고 불렀다. 그의 정책은 서구 여러 나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지만, 그의 개혁이 낳은 최종적인 결과는 다시 한 번 국가경제가 붕괴되는 것이었다.
2007년부터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법률가 출신의 정통적인 페론주의자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andez)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녀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녀의 이미지가 에비타와 많이 닮았다는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대중 연설을 할 때의 모습은 에비타와 아주 흡사하다.
신화라는 것이 만들어질 때에는 항상 만들어지는 근거가 존재한다. 에비타의 신화도 마찬가지다. 에비타는 '에바 페론'이라는 공식적인 이름과 '에비타'라는 애칭 중에서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그에게 '에비타'로 써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이 나를 보고 '에비타!'라고 외치면 나는 그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노동자들이 나를 보고 '에비타!'라고 부르면 나는 그들과 동료라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소외받는 여성들이 나를 보고 '에비타!'라고 부르면 나는 그들의 자매가 되어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가족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에비타에게서 구원을 발견했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그 후손들은 에비타에게서 구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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