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를 떠나는 처녀들 박래여
이십대 처녀들이 왔다.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다. 거침없이 웃고 떠드는 것을 지켜본다. 네 사람이 2박 3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했단다. 농부가 운전기사를 하기로 했다. 젊음이 좋다. 배낭을 메고 다니던 젊은 날을 떠올린다. 지리산 장터목과 세석 평원에 텐트를 치고 종주를 한 추억을 떠올린다. 이맘때면 세석 평원은 분홍과 연한 살색, 흰색의 철쭉꽃으로 황홀했었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한 철이든 지리산 사계는 아름답다.
나이 든다는 것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인가. 접혀있던 젊은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참 좋은 시절이었지.’ 노인들이 하던 말이 내 말이 되었다. 늙어가는 과정,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노정에 들어선 우리 부부 마음을 젊은 그들은 알 수 없으리라. 늙는다는 것을 깨치기에는 한참 먼 나이니까. 그냥 나는 피곤하고 쓸쓸하다. 살아있는 동안 조용히 관조하는 삶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삶의 굽이굽이 생각지도 않았던 복병이 도사리고 있어서 살아지게 되는 것인지.
이층에서 처녀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중국 당나라 시절 수사 극을 본다. 처녀들은 각자 배낭에 넣을 품목을 나누어 배낭을 싸 놓고 잠자리에 든다. 이층에 불이 꺼졌는데도 나는 잠이 안 온다. 저녁에 마신 차 탓일까. 딸은 늦은 찻잎을 따서 차를 덖었다. 아홉 번 덖고 비볐다는데 덜 덖은 것 같고, 덜 비벼진 것 같다. 차 맛의 맑기가 덜 한 것 같다. 손아귀 힘이 약해서 그런가. 지난해는 탄 맛이 났는데. 올해는 탄 맛은 안 나니 먹을 만 하단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다. 차 맛을 즐기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각자 취향에 맞는 차 맛을 내기는 쉽지 않다. 나는 빙긋 웃으며 차를 음미했다.
차를 덖는 방법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기본만 익힌 후에는 자신의 손맛과 정성이 차 맛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정성을 들였으니 차가 며칠 숙성되면 맑은 맛이 나지 않을까. 밤에 차를 마셔서 그런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보니 날이 밝았다. 여섯 명이 식탁에 앉았다. 손님대접하려면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 있는 반찬에 밥만 지어 차렸다. ‘엄마, 내가 할게.’ 미안해하는 딸이지만 ‘빠뜨린 거 없는지 점검해봐라.’며 등을 밀었다.
요즘 사람은 일흔이 넘으면 실버타운을 찾는 현실이다. 자식이 있어도 부부 혹은 혼자 살다 죽어야 하는 현실이다. 요양원 안 가고 싶으면 혼자 거동하고 끼니도 챙겨야 한다. 음식도 소식을 하게 된다. 자식 오라 가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면 마음 준비 단단히 해야 한다. 자식과 살기도 힘들고, 혼자 살기도 힘든 세상이다. 어떻게 살다 죽어야 하는지. 정해진 답은 없다.
하룻밤 자고 네 사람은 2박 3일 지리산 종주 길에 올랐다. 농부는 일행을 지리산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사흘 후 데리러 가기로 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시작해 법계사로 천왕봉으로 장터목으로 세석으로 반야봉, 노고단으로 내려 와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성삼재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지리산 사계를 배낭지고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며 처녀들을 배웅했다. 봄은 등산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기억에 남는 산행이 될 것이라 믿는다. 여행이든 산행이든 다리 튼튼한 젊은 시절의 행복 아닐까.
모두가 출발하고 나니 푸른 초원 속에 나만 남았다. 드디어 편안해졌다. 빨래를 씻어 널어놓고 컴퓨터 나들이를 한다. 사람들이 있으면 조용히 글 쓸 짬이 없는 것도 문제다. 며칠 만에 연 컴퓨터가 어색하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자꾸 헐거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