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명채에게 충성을 다하는 애마인 검은색 도요타 승용차가 사립문 앞에 섰다.
아이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인 하얀 쌀밥과 돼지고기 주물럭과 무채에 홍어를 썰어
넣은 회무침, 콩나물도 함께 가져 왔다.
“아따 참말로 우리 아그덜이 포식하겠다니까요!”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밥이 담아진 소쿠리를 명채에게 건네받으며 산동댁이 말했다.
“큰아버지하고 아버지는 뒤에 타십시오.”
덕형과 자신의 아버지는 뒷좌석에 태웠다.
아이들에게 밥상을 차려 주고는 덕형과 정원은 뒷자리에 앞에 비서 자리에 앉고
산동댁이 막내를 안고 탔다.
앞뒤 차창은 감게 코팅되어 있었고 어디를 다녀오는지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명채의 애마가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자 멈춤 없이 동네 가운데 이르렀다.
구석 돔 쪽에서 모퉁이를 차 불빛이 비치자 남해댁이 손으로 눈을 가린다.
단 몇 초만 늦게 왔어도 맞닥뜨릴 뻔했다.
드디어 새로 지은 김정원의 새 보금자리 마당으로 차가 들어섰다.
이어서 서울댁이 대문을 걸어 잠갔다. 차에 탄 사람이 모두 내렸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정원이 아직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한 것은 아니고 운전석 뒷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한동안 정원이 차에서 내리질 않았다.
김정원은 울고 있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와 뒷문을 열다 서 있는 아내에게로 눈물이 옮아갔다.
그리고 차를 한 바퀴를 빙 돌아 울고 있는 서울댁 부부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산동댁 부부에게도 눈물 무리는 스스로 건너왔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정원이 차에서 내리자 종채가 쫓아와 아버지 품속을 파고들었다가
아무 말도 없이 빠져나왔다. 정원도 “종채야.” 한마디 불러 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젯밤에 명채가 재떨이에 살며시 얹어 놓았던 백두산담뱃갑에는 달랑 두 개비만 남았다.
담배 두 개비를 꺼내 덕형에게 한 개비 건네주고 한 개비는 자신의 입에 물었다.
덕형이 재빨리 지포 라이터를 꺼내 정원이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고는
자신도 불을 붙였다. 이윽고 아무 말도 없이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볼 요량이었다.
덕형 부부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서울댁도 명채도 뒤를 따랐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정원이 명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명채야 수고했다. 글고 고맙다.”라며 명채 어깨를 두어 번 다독였다.
“명채 즈그 어무이도 집 짓느라고 욕봤네! 글고 고맙네.” 명채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했다.
“나도 명채 아버지에게 고마워요.” 남편이 고맙기는 아내 서울댁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덕형이 자네도 고맙네. 글고 산동떡도요.”
“이 사람아! 나도 자네가 고맙다니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서로서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새로 지은 보금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모두가 감개무량했다.
“막내야! 이리 올래.”
엄마 등에 업혀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기만 했던 막내가 스스럼없이 정원에게 안겼다.
오늘 낮 동안 두 사람이 정이 끈끈해졌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종채가 오라고
손을 벌리자 자연스럽게 안긴다. 막내가 사람들의 분위기를 딴 판으로 바꿔 버렸다.
“어이 덕형이 방으로 들어가세.”
이미 서울댁과 산동댁은 현관문을 들어섰고 두 사람도 명채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종채에게 안겨 먼저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 막내가 자신이 돌아다니며 뛰놀던 마당처럼
느껴졌는지 동(東)에서 서(西)로 뛰고 서에서 동으로 뛰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종채하고 친해졌다.
고무공 차기를 하며 놀고 있다.
널찍한 거실 바닥을 장판지를 깔았고 싱크대가 설치된 주방과 안방도 널찍했다.
이불이 윗목에 놓여 있었다. 가구가 없어서인지 황전국민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다.
제일 먼저 산동댁 눈에 띈 것은 욕실 욕조였다. 좌변기도 샤워기도 얼마 전에 영산댁
집에서 보았던 것들과 색상이나 모양이 비슷했다.
15년 전에 남편을 만나 진주로 피신해 살기 전에 오빠와 함께 여관과 대중음식점을
경영했던 집에서 따듯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몸을 담가 보고는 그만이었다.
진주에 살 때도 사흘이 멀다고 대중탕에 몸을 담그기는 했었다.
“서울떡요, 욕조랑 좌변기가 영산떡 집에 있는 거랑 색깔도 그렇고 연분홍색
붉으스름헝 거가 똑같으네요.”
“그 집에 설치해 놓은 거로 나도 고르고 싶었거든요.”
영산댁이 대대적인 집수리를 감행한 것은 남편 김영규 때문이다.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대변을 배설하기 위해 아래채에서 사다리를 타고 2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었다.
장영팔은 영산댁을 짝사랑하면서 그녀의 취향을 연구해 지리산 산장에 거실 커튼이며
집 안에서 입는 가운 색깔도 그리고 욕실 안에 욕조부터 시작해 좌변기, 샤워기 등
모든 물건을 영산댁이 좋아하는 색상으로 갖추어 놓고 있었다고 본동댁과 산동댁에게 고백했었다.
영산댁에게 들었던 말을 산동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집 안 구조를 현대식으로 개조하면서 영산댁 자신이 운영하는 지리산 산장 안채에
있는 것들처럼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색상인 연분홍 색깔로 선택했다.
화장실 겸 욕실을 집 안에 만들면서 욕조와 샤워기, 좌변기까지 그리고
싱크대까지 온통 연분홍이었다.
사람의 심리란 남이 소유한 물건은 자신도 똑같이 갖고 싶어 한다.
남이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가져야 하고 열을 가지면 자신도 열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가! 산동댁이 맘속으로 되뇌었다.
“우리 집은 언제쯤이나 이러케 해 놓고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라고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현대식 주택을 짓고 집 안에 욕실에 욕조와 좌변기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연분홍
색깔인 걸 보고 영산댁 취향을 서울댁이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닌가.
부러운 맘으로 구경하던 산동댁이 잠시 착각에 빠져있었다.
“아버지 안방으로 와 보세요.”
집 안 구조를 살피고 거실로 나온 정원을 명채가 불렀다.
“저기 담요를 위쪽으로 들어보세요.”
“어, 담요가 뭐에 달라붙었는가 보다.”
안방으로 들어온 아버지에게 아들이 윗목에 놓여 있는 담요를 들어 올려보라 했다.
정원이 무심코 시킨 대로 들어 올리려 했으나 담요가 들어 올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힘을 줘 들어보세요.”
정원이 힘을 줘 위로 들어 올리니 장판지가 붙은 널빤지 문이 열렸다.
반 평쯤 되는 공간이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덕형도 산동댁도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들어가셔서 누워보세요.”
길이는 발이 벽에 닿을 듯했고 넓이는 두 사람이 누울 만한 공간이었다.
“명채야! 니가 아이디어가 기똥차다.”
직접 누워보고 나오면서 훌륭한 아이디어라며 아들 명채를 칭찬한다.
새로운 환경을 접한 막내가 신이 났다. 이방 저방을 뛰어다니더니 욕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자,
덕형이 들여다봤더니 좌변기에 고여 있는 물에 손을 씻고 있었다.
“명채야! 니가 어찌 저런 생각을 했냐?”
막내를 들고 나오며 덕형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입산했던 아버지가 돌아와 사용하리라는 염두로 집 구조를 설계했었다.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 위한 소송준비를 하는 기간에 유사시에 사용할
비밀공간을 어젯밤 새, 명채가 구상했다. 부랴부랴 이 집을 시공했던 사람들에게
부탁해 만들었던 걸, 자신 있게 공개했다.
“저거가 만약을 대비한 거제, 경찰이 방에까지 들어와 뒤진다 해도 알 수 있것능가?”
“정원이 자네 말이 맞네만, 저렇게 해 놓으믄 비상시에 안심하고 지낼 수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을 위해 만들어 놓을 뿐이지. 경찰이 안방에 들어와 수색하겠느냐고 정원이 말했다.
덕형이 정원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고 했다.
비밀공간이 있으므로 유사시를 대비하는 것이며 안심하고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