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의 끈을 끊어 주소서
핸드폰을 분실했다. 그것을 안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밤새 숙취로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눈을 뜨자, 갈증이 심하게 났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주방으로 갔다. 냉동고를 열자 한겨울 같은 시베리아바람이 얼굴을 확 감쌌다. 각얼음을 꺼내 입안에 물자 정신이 나면서 한 이름이 떠올랐다.
주호,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각별한 친구였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같은 해에 태어나 초등부터 대학까지 줄곧 같은 학교를 함께 다녔다.
취미도 같아 바로크음악에 심취했다. 매번 만나 음악을 들으며 토론까지 했다. 내가 헨델이라면 친구는 바흐였다. 헨델과 바흐는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성장환경은 달랐다. 의사인 아버지로 인해 큰 어려움 없이 자란 헨델과는 다르게 바흐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무료학교에 다녀야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런 바흐를 닮은 친구는 대신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았다.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엄마가 신뢰한 친구라서 한때 집에 데려와 한 식구처럼 생활한 적도 있었다.
학창 때는 같은 음악서클에도 가입했다. 그때 회원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은서였고 짧은 단발머리에 갸름하여 아주 예뻤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은서가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마침 은서도 바로크음악을 좋아하여 주호와 함께 셋이 자주 어울렸다. 오페라공연관람은 물론 커피와 맥주도 같이하고 방학 때 캠핑도 함께 갔다. 그때마다 밤샘하며 음악의 어머니 헨델과 음악의 아버지 바흐에 대해 열띤 토론도 나눴다.
어느덧 졸업반이던 해였다. 그해겨울 함박눈이 쌓이던 때였다. 주호와 단둘이 만나 주점에서 밤늦도록 만취했다. 주점에서 나와 걷다가 이불처럼 하얗게 쌓인 공원잔디밭에 벌러덩 누웠다. 하늘에서 휘날리는 눈발을 그대로 맞아가며 고해했다. 그때 은서에 대한 연민이 같았음을 서로 고백했다. 그로부터 둘 사이에 틈이 생겨났다.
젊은 시절 바흐와 헨델은 당대 최고의 대작곡자이자 오르가니스트이던 북스테후데를 흠모했다. 그의 공연을 보기위해 이백 마일을 걸어갈 정도였다. 마침 북스테후데도 헨델과 바흐의 천재음악성을 인정하여 둘 중에 하나를 그의 후계자로 삼으려했다. 당시 제도상 후계를 이어받기위해서는 그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반드시 혼인해야만했다. 사랑은 물론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그녀를 두고 피터지게 경쟁할 만도 한데 헨델도 바흐도 모두 사양하는 바람에 아무도 성사되지 못했다.
우린 그와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지켜온 특별난 우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배려나 양보할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친구인지 정녕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그에게는 내성적이거나 이기적이라거나 그렇고 그런 별 쓸데없는 말들이 따라다니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말수가 적고 감정표현이 없는 데서 나온 오해였다. 오히려 사랑 앞에선 무서우리만큼 저돌적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문학을 전공한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독어를 전공했던 주호는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그때 성악을 전공했던 은서는 베를린으로 유학을 갔다. 얼마 후 주호는 독일영사관으로 발령이 났다. 일 년이 지날 무렵 다시 본국으로 복귀한 주호는 갑자기 퇴직하더니 말도 없이 독일로 이민을 갔다. 그 소식을 접한 것은 동창회에서였다. 직접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덜 서운했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음악으로 빈 시간을 함께 채우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충격은 오래갔다.
바로 어제였다. 멀지 않은 곳에 텃밭을 구해서 한여름 방학동안 잡풀들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해질 무렵 동창회 총무인 민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오는 말일에 주호가 서울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너, 학교 다닐 때 주호랑 제일 친하지 않았니? 게가 이번에 서울에 온다는 거, 정말 몰랐어?”
민우로부터 오는 전화는 대략 주호와 사이가 틀어진 것을 이미 알고는 내 심정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베를린에서 대형마트를 운영하며 돈을 꽤 많이 벌었나봐. 이번 방문 때 동창회발전기금으로 거금을 내놓겠다는 기부식도 들어있어.”
민우는 주호와는 다른 내 신조를 알지 못했다. 이민은 절대 생각하지 않았고, 한번 배신당한 친구도 일체 생각하지 않았으며,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며 지냈다.
“그간 소식이 없어 나도 몰랐는데 베를린에서 비밀결혼을 했대. 이번에 와이프와 딸도 같이 온다더라.”
“.......”
듣고만 있던 숨이 순간 멈춰졌다. 뭔가 모룰 아픔이 바늘처럼 심장을 콕 찌르면서 지난기억이 파노라마로 떠올랐다.
“만약, 연인을 삼는다면 헨델과 바흐 중에 누굴 선택할거야?”
여름방학 때였다.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에서 셋이 함께 별을 세며 캠프파이어를 했다. 그때 은서가 누굴 더 좋아하는지 주호와 내기했다. 은서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한참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바흐는 영혼을 울릴 만큼 깊이가 있어 좋고, 헨델은 감각적이라 활달해서 좋아. 식사로 비유하자면 바흐는 담백한 집밥이고 헨델은 명랑한 외식인 셈이지. 자본주의 시대에 현대여성은 절제보다는 자유를 더 선호해.”
그때 주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주호는 날 경계했고 거리를 두었다. 겉으론 내색은 않았지만 내게 말을 잘 않고 감정까지 숨겼다. 그런 주호가 안쓰러워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은서는 나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
“주호가 독일에 간 것은 순 와이프 때문이래. 게가 한번 마음먹으면 꼭 해내는 집념이 있어. 사랑을 위해 인생을 바칠 만큼 참 대단한 녀석이야. 사업까지 성공했으니 축하해줘야겠지? 월말 동창회 때 꼭 같이 보자.”
민우의 마지막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풀밭에 던져버렸다. 땀범벅인 채 상사병에 걸린 마냥 능소화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호리듯 옛적 그리움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양주를 통째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때 풀밭에 묻혀있던 핸드폰에서 벨소리로 저장된 헨델의 오페라 라날도의 한 대목이 흘러나왔다. (ㄱㅅ)
*월말 동창회 때 두 친구는 만났을까? 해답은 다음에 있다. 바로크음악의 두 대가인 헨델과 바흐는 같은 해에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같은 음악을 전공했으나 평생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딱 한번 바흐는 자식을 헨델의 어머니에게 보내 헨델을 초대하였으나 헨델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마저 성사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