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간세탈출] 어제의 청와대(青瓦臺·BLUE HOUSE)와 오늘의 용승대(龍昇臺·DRAGON OFFICE) 탐방으로 내다본 대한민국 미래상(하편-1편)
■간세는 게으름뱅이라는 제주도 말이다. 이동호의 간세탈출은 움추림에서의 탈출,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오늘의 용승대'를 시작하면서●
사진=서울 용산구 지도
청와대 탐방을 마치고 용산 대통령 집무실을 탐방하려고 하니 6월26일까지 인터넷 신청자에 한해 집무실 인근에서 탐방이 가능한 기간이 지나 멀리서나마 대통령 집무실을 보려고 어제 7월2일 청와대 탐방을 마치고 연이어 7월3일 용산 대통렁 집무실과 그 주변 탐방을 시작했다. 지도상에 용산구를 살펴보면 필자는 한강대로를 기점으로 서쪽 용산역 방면을 용산 태크노밸리, 동쪽 대통령실 방면을 용산 컬쳐밸리로 양분한다. 그리고 대통령 집무실 네이밍을 용승대(龍昇臺·DRAGON OFFICE)라 네이밍할 것을 제안한다. 네이밍 제안 설명은 이렇다.
용은 동아시아 설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며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모두 나타난다.따라서 용이라 서설한다고 해서 중국 사대주의 사상이라고 편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용은 나라의 리더 현재의 우리나라 대통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용의 등장은 반드시 어떠한 미래를 예시해 주는 동물로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게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역사의 개술서라 할 《문헌비고》에 보면 신라 시조 원년으로부터 조선조 1714년(숙종40) 사이에 무려 29차례나 용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 뒤에는 거의 빠짐없이 태평성대, 성인의 탄생, 군주의 승하, 큰 인물의 죽음, 농사의 풍흉,군사의 동태, 민심의 흉흉 등 거국적인 대사(大事) 기록들이 뒤따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용승대에서 대통령이 집무를 본다는데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도 좋은 명칭이라 사료된다.
●전쟁기념관 탐방●
사진=윤석열 대통령이 들렸다는 옛집국수집, 윤대통령 식사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있다.
2022년 7월3일 6호선 삼각지역에서 내려 인근에 있는 옛집국수집에 들려 국수 한그릇 5000원 김밥 한줄 3000원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용산 대통령 집무실을 중심으로 용산 전체를 탐방하는 길을 나섰다.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가는 길 우측에 국방부 청사가 있고 건너편에 전쟁기념관이 있다. 국방부 청사 건물 정문이 이쪽으로 나 있었는데 지금은 후문이 되었다. 국방부 청사 들어가는 보도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어떻게 하면 대통령 집무실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느냐 하고 물으니 이촌역 국립중앙박물관 옆 용산가족공원으로 가면 입구가 있을거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려니 하고 오늘의 탐방 일정은 국방부 청사 후문 쪽 대로변에서 대통령 집무실 후면을 보고 맞은편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탐방한 후 이태원길로 향하면서 기존의 미8군 부지가 얼마나 반환되어 옛날과 다른지 보고 이태원 끝길에 있는 리움미술관을 관람하고 이촌역으로 이동해 인근의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용산가족공원을 통과해 대통령 집무실까지 접근해 보고 그 다음 신용산역 인근의 한강대로변에 있는 하이브 BTS본사 건물과 아모레페시픽 전시관까지 탐방을 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잡았다.
사진=전면 건물이 국방부컨벤션 건물, 후면 건물이 옛 국방부 청사 건물이 지금 대통령 집무실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국방부 청사 건물 맞은편에 전쟁기념관이 있다. 대통령 집무실 가까이에 전쟁기념관이 있는 것은 지도자의 안보의식이 제1의 덕목임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다.
사진=전쟁기념관과 광장 입구에 서있는 '6·25탑'
전쟁기념관은 1990년 9월28일에 기공하여 1994년 6월10일에 완공하였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 에 위치한 기념관으로, 대한민국을 지켜온 항쟁과 전쟁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보존하는 곳이다. 전쟁에 대한 교훈을 통해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적 통일을 목적으로 한다.
'6·25탑'은 2003년 6·25 전쟁 정전 50주년을 맞아 전후세대들의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설치한 조형물이다.
6·25탑은 청동검과 생명나무의 두 가지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청동검은 유구한 역사와 상무정신을 생명나무는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뜻한다.
사진=전쟁기념관에서 바라본 삼각지 일대 한강대로변의 고층건물 전경.
이미 한강대로 양변에 삼각지에서 한강대교까지 고층건물군이 형성되어 대한민국 미래의 정치중심지, 경제중심지, 문화중심지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진=전쟁기념관 앞에서 이태원 방면 전경
미8군 영내가 녹사평 이태원까지 이어진다.옛날과 다른 변화가 안보인디. 이는 아직까지 미8군 부지가 한국 정부에 이관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반환 받아야 할 미8군 부지를 총체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어 질 것인지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있는지 알고 싶다.
사진=전쟁기념관 전경, 하늘의 뭉개구름이 전사상자들을 위로하는 듯 하다.
2015년 유엔 창설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21개국 참전국에 감사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유엔참전기념비를 세웠는데 유엔기와 태극기를 중심으로 전쟁기념관 양쪽으로 원을 그리듯 검은 기둥이 서있는데 6·25전쟁 참전일자 순으로 기념비가 위치해 있다. 각각의 기념비에는 국가명, 월계관, 부대마크, 참전내용, 참전용사에게 바치는 추모의 글이 해당국의 언어와 한국어로 새겨져 있다.
사진=전쟁기념관 광장 전경, 정면에 국방부 청사와 대통령 집무실이 선명하게 보인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전쟁기념관 광장 한복판 동판에 새겨진 말이다. 우리나라 종북좌파 국민들에게 고한다. 전쟁기념관으로 와서 6·25전쟁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을 하라.
사진=광개토대왕릉비, 전쟁기념관 야외에 세워진 모조비이다.자녀들에게 역사 교육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현재 실제 비의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다. 비의 높이는 6.39m로서 4면에 177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모형은 실물과 같은 크기이며 1992년에 설치하였다. 비문의 번역은 2005년에 관련 학자의 자문을 받아 이루어졌다.
414년에 고구려의 19대 왕인 광개토대왕(374~413,재위391~4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394~491,재위413~491)이 세운 비이다.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에 세워진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 등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적혀 있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을 여러차례 격파했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1면9행의 신묘연조(辛卯年條)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잘못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비는 자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히는 열쇄가 되는 유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조선,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질못된 것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지도, 전쟁기념관 광개토대왕릉비 옆에 전시되고 있다. 자녀들에게 1600여 년 전의 우리나라 영토라고 가르쳐 줄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는 주몽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기원 전 37년에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운 고대국가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나라로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은 대외적인 정복 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북으로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남으로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해 임진강과 한강까지 영토를 넓혔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장수왕은427년에 압록강변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장수왕의 활약으로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진=전쟁기녕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고 있는 6·25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군용기와 전차 탱크와 함선.
실물이므로 비행기도 타보고, 탱크 속에도 들어가보고 함선에도 탑승해 배 안에 들어가보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6·25 전쟁을 어떻게 치루었는지를 체험시켜주는 좋은 체험장이다. 이날도 많은 부모들이 아들·딸 손을 잡고 비행기에도 오르고 배에도 승선하여 설명해 주는 가족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진=전쟁기념관 내부 중앙홀 전경.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대동하고 전쟁기념관을 관람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상이 전도 유망함을 보여준다.
사진=왼쪽 호국추모실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추모실 내부.
경건한 묵념으로 호국선열에 대한 추모를 했다.
6.25전쟁으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다. 주택과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기반시설과 공장 등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물적 피해액은 당시 2년치의 국민총생산액에 달했다. 여기에 군인 전사상자, 실종자가 62만 명, 민간인 사망, 부상, 실종자가 99여만 명이었으며, 유엔군 사상자 실종자가 15만 명에 달했다.
수십만의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하였으며 가족이 헤어진 이산가족이 1000만 명에 달하였다.
북한측도 많은 인명과 물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기간 동안 북한군의 전사상자 및 실종자는 64만 명에 달했으며,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던 중공군의 피해는 이보다 더해서 전사상 및 실종자가 97만 명에 달했다.
북한 민간인 피해자는 150만 명에 달했다. 6·25전쟁 전 남한보다 월등했던 북한의 산업시설과 주택, 건물, 기반시설도 전쟁 중에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 엄청난 손실과 피해 사실을 보면, 북한 공산정권이 무력 공산 통일을 꾀한 것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재난을 초래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남한의 일부 전교조에 속한 선생들은 6·25 전쟁을 남한이 북한을 침공한 전쟁이라고 가르키고 있다. 이런 식의 교육으로 자라난 우리의 후세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 이념에 편향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교육혁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사진=미국 워싱톤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설치된 '추모의 벽' 제막식을 하루 앞둔 지난 26일(현지시간) 6·25전쟁 전사자의 유족들이 하얀 장미꽃을 전사자의 이름 위에 올려두고 있다. 추모의 벽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3만6634명)과 한국인 카투사(7174명) 4만3808명의 이름이 하나 하나 새겨져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7월27일 6·25전쟁 정전 69주년을 맞아 이 공원에서 7000여 명의 6·25전쟁 참전 용사와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의 벽(Wall of Rememberance)' 제막식이 열렸다.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던 6·25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기리기 위해 미국 참전 용사들이 건립을 추진한지 18년 만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기념공원 참전비에는 전사자 이름이 있는데 이제서야 6·25 참전 기념공원 '추모의벽'에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다. 건립비 확보 문제로 5년 넘게 첫 삽을 못떠다가 한국정부가 90% 부담 결정에 작년 5월 착공하여 7월27일에 '추모의 벽' 제막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한국참전 기념공원에 한국전쟁박물관 건립도 추진하자는 국민제안에 많은 국민들이 영원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성원을 보내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 내부에 호국전시실 전경, 6·25전쟁 당시 활약했던 비행기·전차 탱크 모형들, 전투기들은 북한 전투기도 전시되고 있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계속해서 도발을 해왔다.북한 도발 관련 전시물이 2009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북한의 도발 존(Zone)'이란 별도의 공간으로 통합 관리되어 전쟁기념관에서 도발 사례들을 연대별로 볼 수 있어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하지만 2018년 문재인 정부 때부터 각 진열장들의 전시물을 한 진열장에 모으는 방식으로 전시공간을 크게 축소시켰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6월 이곳을 방문하여 "왜 6·25전쟁 이후 북한의 도발을 다룬 전시관이 없느냐"고 관계자에게 질문을 했다고 한다. 알게모르게 문재인 정권에서 지워버린 역사 현장을 하루빨리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
향후 '북한 도발관'은 연대별,주제별로 각각의 사건과 관련한 설명과 정보사의 기증유물, 수장고 보관유물을 추가해 전시해 줘야 한다. 특히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2020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202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해전 등 중요 도발 사건은 물론이고
1993년 5월부터 현재까지 북한 미사일 도발 관련 전시공간도 마련해서 국민들에게 실상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사진=위는 한강철교 폭파 장면, 노량진쪽에서 국군들이 도하해 오는 북한군의 적선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모형물 앞에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장면이 시연되고 있다.
아래는 폭파된 한강철교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피난민 행렬을 찍은 사진이다. 목숨을 건 민간인들의 탈출 모습이다.
1950년 6월28일 새벽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진입하자 육군본부는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한강의 다리를 폭파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폭파로 시민은 물론 병력의 대다수가 한강 이북에 남겨지고 말았다.
필자가 네살 때 일이었다. 필자의 부모님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1·4후퇴 때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모습, 기차곡간(기차지붕) 위에 웅크린채 검은 기차 연기를 마시면서 피난길에 나섰다.
국군은 소형 화기만 휴대한 채 소부대 단위로 강을 건널 수 밖에 없었다. 철수한 병력이 어느 정도 집결한 6월29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병력을 재편하여 영등포, 노량진, 신사리 지역에 각각 부대를 배치하였다. 북한군은 부분 파괴된 한강철교를 수리하여 전차를 건너 보내려고 하였으며,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도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7월3일 철교를 복구해 전차를 진출시키고 열차로 한강을 건너왔다. 결국 한강 방어선은 6일 만에 붕괴되었지만, 미 지상군이 파병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강철교 폭파 장면을 보고 있는데 초등학생 두 명이 "저 한강다리 이승만이 도망가려고 폭파를 했다"고 하지 않는가.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5·6학년 쯤 보이는 학생들이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는 전교조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학생들의 부모님이 어디 있나 찾아보았으나 주위에 보이지를 않아 한숨만 쉬웠다.
사진=전쟁기념관 한강철교 폭파 장면을 볼 수 있는 전시실에 김홍일 중장 흉상이 서있다.
김홍일 장군(1898.9.23~1980.8.8)은 평북 용천 출생으로 중국군(장개석 총통 휘하)에 편입되어 해방후 1949년 준장에 임관되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시흥지구 전투의 사령관으로서 북한군 한강 도하를 지연시킨 6일 간의 사투로 미 지상군의 참전 시간을 획득하였다.
국군 제1군단을 창설·지휘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낙동강 방어시 기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김홍일 장군에 얽힌 일화는 많이 전해져 온다. 소개하면 이렇다.
6·25전쟁 초기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시흥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김홍일은 김종오의 6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괴군 2군단을 저지하고 있을 때, 후퇴하는 백선엽(白善燁)의 1사단, 유재흥(劉載興)의 7사단, 이형근(李亨根)의 2사단 장병들을 대대 단위로 재편, 한강 방어에 투입하였다. 공황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를 수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밥을 먹여야 했다. 김홍일은 부녀자들을 동원, 주먹밥을 만들어 허기를 달래도록 했다. 그러고는 문짝을 떼어내어 ‘미군 참전’이라는 플래카드를 큼지막하게 내걸었다. 배가 채워지고, ‘미군 참전’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은 장병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되었다.
미군 참전 일화도 있다.
6·25전쟁 발발 후 3일이 지난 6월 28일 영등포에 비래(飛來)한 맥아더는 한국군이 궤산(潰散)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 지상군의 투입만이 이 사태를 막아낼 수 있다고 트루먼에게 건의하였다. 이때 맥아더는 노량진 언덕에서 분전하고 있는 한국군 병사에게 “귀관은 언제까지 이 언덕을 사수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명령이 있을 때까지”라는 단호한 답변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청년들이 있는 한국은 지켜줄 가치가 있다’고 결심한 일화다. 이는 한국군 장병의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강선 방어의 주장(主將) 김홍일 장군의 불굴의 정신을 보여준다.
사진=왼쪽은 9·28수복 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는 장면, 오른쪽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병사 조형물 앞에 어린이 관람객이 마스크를 쓴 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9·28 수복'은 6 ·25전쟁 과정에서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같은 해 9월 28일 탈환한 일을 두고 일컫는다.
같은 달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그동안 열세에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서울탈환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상륙작전의 선봉에 선 미국 해병 제1사단과 한국군 해병대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너 그 일부는 영등포와 여의도비행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 방면을 공격, 서울의 동쪽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그 일부는 시흥·안양·수원 방면으로 진격하여 낙동강 전선에 있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19일 행주 방면에서 강습도하를 감행한 한·미 해병대는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21일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안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한·미 해병대는 북한군의 필사적 저항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다가 함재기와 포병의 강력한 화력 지원하에 돌격을 감행, 24일 오후 연희고지를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 부근에서도 한강도하작전이 이루어져 미군은 남산·왕십리 방면을 제압하고, 한국군은 망우리 일대를 탈환하였다.
이와 같이 북쪽의 의정부 방면을 제외하고 서울 시가지를 3면에서 포위한 한·미 연합군은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 밤이 깊어가면서 점차 서울 중심부로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26일을 고비로 해서 북한군의 저항은 기가 꺾여 다음날 오전 6시 10분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28일 수도 서울은 90일 만에 완전 수복되었으며, 다음날 정오 의사당에서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되었다.
대통령의 특명 '중앙청을 탈환하라' 서울의 상징인 중앙청은 반드시 국군의 손으로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9월27일 오전 국군 해병대 제6중대 1소대가 중앙청을 점령, 소대장 박정모 소위가 양병수, 최국항 대원과 함께 중앙청 옥상에 올라가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달았다.
사진=전쟁기념관 입구에 서있는 6·25탑이 정면의 대통령 집무실인 용승대(龍昇臺·DRAGON OFFICE) 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외국 관광객이 전쟁기념관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일본은 국가적 영웅을 문인들이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쟁을 경험한 나라로서 분명히 영웅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치 않다. 재기발랄한 문인들이 군에 관한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국민소설을 그려내 우리에게도 영웅이 탄생되게 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하는 지사, 장군을 영웅화 하여야 한다.
이미 소개한 지연전의 대가 김홍일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성(五星)장군의 휘호를 받았을 정도로 우리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외에도 우리의 영웅을 소개해 본다.
6.25전쟁 초기 지연전에 성공한 김종오 장군(1921~1966). 일본 학도병 출신으로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나 해방으로 귀국해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된다. 6사단장 김종오는 6·25 전쟁 당시 춘천, 홍천 방면에 집중하는 적의 공격을 3일 동안 저항함으로써 김홍일 장군의 시흥전투사령부가 한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춘천전투는 오늘날 '춘천회전'으로 불리운다. 우리가 잘 아는 백마고지 전투의 주인공도 김종오 장군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장군은 '대부동의 300 용사' 백선엽 장군이다.
스파르타의 300 용사가 마케도니아 해안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역사는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다.
1950년 북괴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 전투는 한국의 테르모필레였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한국은 김일성 치하에 들어가 한반도 전체가 공산국가로 전락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러한 중차대한 대한민국의 운명을 살려낸 분이 백선엽 장군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한민국 구국의 영웅을 친일파라는 플레임에 씌워 홀대하는 나라가 진정 나라인가, 아니면 미개한 야만 국가인가.
한국에 부임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이 부임 초기에 가장 먼저 챙기는 일은 백선엽 장군을 찾아 인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미국 그들이 전설처럼 섬기는 맥아더,리지웨이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백선엽은 미국 그들에게는 이미 신화적 존재인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국립묘지에 묻힌 묘까지 파헤쳐 내겠다고 나서는 자들을 막지 못하는 나라란 말인가.
김대중 정부 시절 이준석 등이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일본 만주군에 복무한 것을 두고 백선엽을 친일군인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 있다.
제정 러시아의 기병 중장이었던 필란드 출생 마네르헤임(Mannerheim)은 그의 군사 경력을 활용하여 러시아 통치에서 필란드가 독립하는 전쟁을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마네르헤임은 1939년 스탈린이 침공해오자 지형과 스키를 이용한 절묘한 기동전으로 소련군을 몰아낸다. 스탈린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되고 이것이 히틀러가 소련을 얕보고 소련을 침공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마네르헤임은 후에 필란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나가는 것이 야만적 국가가 아닌 현명한 국민이 선택한 정부에 의해 현명한 국민이 될것이냐를 결정할 시점이 왔다.
다시한번 묻는다. 우리는 중국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사경력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백선엽 장군을 일제 잔재로 보고 정당한 평가를 보류한 채 폄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 종북좌파들의 행태를 그대로 보고 있을 것인가?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도 분간 못하는 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우리 국군의 대부라고 칭하거나 애국자라고 부르는 행태를 계속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외에도 6·25 전쟁 영웅이 만들어낸 스토리는 많이 있다.
포항 방어로 전공을 세운 카이젤 수염의 김석원 장군,
맥아더도 극찬한 전술가 김백일 장군, 그는 흥남 철수시 북한 동포 10만명을 구출한 장본인이다.
용문산 전투의 용장이며 5·16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도영 장군, 타이거 송으로 알려진 수도고지 전투의 용장 송요찬 장군,
헬기 타고 가다 식량보급 점검하는 군 부패척결에 앞장 선 한신 장군,
사병묘역에 묻힌 유격전의 명수 채명신 장군,
도솔산 전투의 명장 공정식 등이 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영웅들을 찾아내어 전쟁기념관에 흉상과 기록물이 잘 전시되어 국민들이 누가 영웅인지를 배우게끔 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자.
(다음은 하편-2편 리움미술관 탐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