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3.10. ) 말씀/ 요한 21:22 주체적인 삶을 살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 지난 주에 우리는 풀어놓아 다니게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장자는 어떤 사람도 묶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야생 동물도 집뜰에 묶이다보면 야생으로돌아가지 못하고, 사람들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에 묶이면 더 이상 성장 발전하지 못하고 한계에 갇힌 인생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서 풀어 자유를 주셨음에도 율법이나 제도나 규칙 틀에 묶이면 비상하지 못하고 편협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밟고 세상 밖을 노닐어야 할 신의 자녀들이 땅에 발이 묶여서 가슴도 펴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런ㄹ 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주어진 특권을 우리는 누리고 넓게 우주적으로 나눌 수 있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줘도 누구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분명한 가치관과 삶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자유가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우물 안과 집밖에 몰랐던 사람, 거기서만 적응이 된 사람들은 내가 우주밖에 어디서 살라는 말인가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하고 떠나는 것을 오히려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 입은 야생동물을 집에 데려다가 사람이 키우고 먹이고 관리하다보면 어느새 야성을 잃어버리고 가축처럼 됩니다. 산으로 숲으로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야생에서 살아가는 적응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우주를 품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려면 그렇게 스스로 살 수 있는 적응 훈련과 체질을 갖추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듣고자 하는 말씀은 은 ‘네 자신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좋은 책을 읽거나 좋은 강의를 듣다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네 인생을 살라. 이제는 자기 삶을 살라.”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게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지만 자기가 삶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방식을 따르고,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 경쟁하며 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특하게 나를 창조하셨는데도 다 남의 인생을 베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삶이 기준이 되고 자기가 자신의 삶의 주체 자가 되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경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해야합니다. 과거보다 더 나은 나,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의 나와. 끊임없이 배우는 것도 결국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고 마침내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지만 남을 바라보고,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비참해집니다.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부족하고 적은 능력이라도 내가 삶의 주체자가 되어 살아갈 때 나만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최고의 가치가 창출 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더는 끙끙대지 말고, 남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남의 눈치 그만 보고 나만의 자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장자는 타인에 의해서 수동으로 끌려가며 아부나 하는 삶은 천하를 얻어도 무의미하다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초(楚)나라의 왕이 두 대부를 보내어 벼슬자리를 권했습니다. 그들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거북이가 왕 밑에서 금거북이 박제가 되어 참배를 바는 것이 좋소 아니면 시궁창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는 산 거북이가 되는 것이 낫소? 빨리 돌아가시오.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굴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諸侯)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철학자 최진석 교수님은 “나의 정체성, 나의 존재성, 나의 존엄을 침해하고 들어오는 것을 저항할 수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김정룡 박사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분이 1977년 B형간염백신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B형간염백신을 최초로 개발했는데 세계에서 사용한 것은 세 번째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그 때 우리나라 보건사회부에서 인증기준이 없어서 인증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81년 미국과 프랑스회사에서 상용한 다음에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나라도 인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한 번도 기준의 생산자, 기준의 창조자가 되지 못하고 외부의 기준으로 사는 습관이 되어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준의 추종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고, 기준이 남이 아니라 자기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외부에 두는 사람은 자신의 생산자로 사는 것을 두렵고, 남을 의존하고 따라가는 것이 편하다고 합니다. 그 동안 한국은 좋은 제품을 만들고도 기준이 되지 못하고 남이 하면 따라가는 2등 3등이 된 것은 기준자 주체자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계에 나가보면 한국 코리아의 위상이 높지 않습니까? 과거는 일본이나 미국 외국에 나가면 쇼핑하기에 바빴습니다. 무엇이든지 일제나 미제가 좋았습니다. 후진국으로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그 대는 어디를 가도 추한 어그리 코리안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서 코리아 하면 오우 코리아! 강남스타일 I love k-pop, 한국 드라마 나도 시청하고 있어요 합니다. 월드 클래스 k 방산, 초정상 상성 엘지 전자. 심지어 라면까지 세계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외국에 가도 이제는 물건을 별로 살 것이 없습니다. 강남 스타일 하면 물건도 깍아줍니다. 선두 주자, 주체자가 창조자가 되면 이렇게 세계가 따라오고 인정과 대우도 받습니다. 국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체 자 주인이 내가 될 때 비로소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존귀하게 여겨지고, 행복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체자로서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가 이사야는 이렇게 말 합니다. “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창세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만물의 주인이으로 삶아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하셨습니다. 그런데 국민 의식 속에는 아직도 비굴함을 느끼게 하는 행위가 남아 있습니다. 사대주의 사고입니다. 여전히 미국을 구세주로 여기고 미국이 한국을 지켜줘야 한다, 미국이 지켜주지 않으면 한국은 공산주의 가 된다는 생각. 일본이 아니면 한국 경제 쓰러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 북한 종북이라고 입에 침을 튀며 진영논리에 쌍루태세를 갖춥니다. 주인이면서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것, 능히 할 수 있으면서도 할 수 없다는 생각하고 의존하는 것, 이것은 노예근성이며 정말 부끄럽고 챙피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 민국은 세계 문하 주도국이 되었습니다. 방산도 이미 북한을 압찌른지 오래고 세게 치강 6위입니다. 자원이 없는 국가이면서도 경제 규모도 세게 10위입니다. 못할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 먹으면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함평의 나비축제도, 신안의 퍼플교도 세계적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남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을까요? 그동안 의존하며 살아왔던 습관의 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나오고 법대 의대 나왔다고 하면 스스로 우러러보는 꾸부려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무 가난하게 살아오다보니 부자를 보면 주눅이 드는 사람들, 외제차 타고는 자신이 무엇인양 하는 사람드, 잘 사는 것도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공부하고, 이렇게 외부의 기준을 두는 삶은 설령 바라는 꿈을 이루어도 그 인생은 초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풍부한 내면의 가치를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급 자족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구나 전자제품도 이사를 가겠다고 꾸려 골목 길에 내 놓으면 초라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나만의 집에서 살 때는 갑진 골동품이 누구나 다니는 골목길에 내 놓으면 초라한 항아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사 할 때 그랬습니다. 니아까나 용달차에 실어서 이사를 했는데 이블, 책상, 책꽃이, 밥통...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챙피할정도 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삶도 보편적인 기준과 이념에 내어놓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기준과 이념에 비추어 보면 부족하지 않은 인간이 없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푸른초장교회가 만일 보편적인 기준으로 다른 교회와 비교하며 사역한다면 수도 작고 정말 초라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역의 주체자가 되어 섬길 때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 적은 능력이지만 충성된 교회, 시골 변방이지만 베풀고, 나누는 행복한 교회가 되고 오히려 세계를 먹이고 선도하는 작지만 큰 우주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과의 비교가 안 합니다. 할 필요도 없고, 나만의 줄 것이 있는 자로 성장해 가면 됩니다. 그렇게 나 아니면 어디서 얻을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갖추고 살아갈 때 통속에 살아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중에 자기가 보편적 이념을 밟고 서서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월등한 성취를 이룬 철학자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니체를 든다면 양에서는 장자입니다. 장자가 쓴 책 편도편에 수레바퀴를 깍는 윤편이라는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은 책을 읽고, 윤편은 수레바퀴를 깍고 있습니다. 왕에게 겁도 없이 말을 겁니다. 그 책에는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까? 성인들의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그 성인들은 살아있습니까? 그 성인들안 다 죽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있는 것은 그 성인들이 남낀 찌꺼기일 뿐입니다. 성인의 책을 찌꺼기라니 왕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니가 한말을 정당하게 설명 해봐라, 그렇지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 윤편이 말을 합니다. 저는 수레바퀴 가는 일만 평생 해 왔는데 조금만 느슨하게 깍으면 수레바퀴 측이 헐렁해서 쓸모가 없게 되면, 또는 조금만 빡빡하게 깍아도 수레바퀴 축이 들어가지 않아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 적당히 깍는 이것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 손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내 손에서 나오는 감각이 맞추어주는 것이지 그것을 어떻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에게도 전해주지 못해서 아직도 수레바퀴를 깍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왕은 윤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면 윤편이 왜 성인들의 말씀을 찌꺼지라 했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삶의 주체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윤편의 이야기는 왕이 읽은 진리는 그것이 아무리 성인 군자의 말씀이라도 머리에 있는 보편적 지식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말씀이 움직여 생산하는 순간에만 진리이고 지식 그 자체는 찌꺼기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론을 진리로 생각하는데 진짜 진리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레바퀴는 더 느슨하게 깍아도 되지 않고 더 많이 깍아도 되지 않고 정확하게 깍아야 하는데 정상적으로 깍는 완성도는 결국 자신의 머리가 아닌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술을 아들에게 차 전달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짜 지식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직접 실천해서 터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헷세의 싯타르타에서 마지막 장면에 살아있는 부처를 만나고 고빈다는 거기에 머무는데 싯타르타는 반대로 떠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부처를 만나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말, 당신의 글, 당신의 몸짓 모든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해탈에 이르게 된 것은 누구한테 이론적으로 배워서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떠납니다.” 마지막 단계는 내가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내 삶의 주체자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말씀을 읽고, 듣고, 알고 있습니다. 수 십번 수백 번 성경을 읽고 아에 암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행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 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선생이 되지 말고 바비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식이 아닌 선생 노릇을 해야 선생 이고, 아비 행실을 해야 아비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은 찌꺼기라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인정하더 안 하던, 실천하던 안 하던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말씀이 문자로 종이에, 이론으로 내 머릿속에 머물러만 있다면 그것은 그냥 지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우리 일상의 삶에 녹아 스며들어 움직이는 생명이 될 때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냥 말씀으로 있다면 더 이상 진리도 생명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철학적 관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매일 말씀만 읽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아직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자는 이념과 일상의 삶의 경계에 서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일상의 삶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주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기 위해서, 듣는 사람은 말하기 위해서, 읽는 사람은 쓰기 위해서 읽는 그런 자세의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왜냐? 모든 이론은 실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60이 넘었는데 자신은 배우는 재미에 빠졌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분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창의적이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배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만 배우세요, 이제는 자기를 표현하세요“ 아니 배우는 것이 왜 나쁩니까? 우리는 평생 배워야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실천 없이 단지 배우는 것을 즐거움으로만 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공부 해 보세오 정말 재미있고 은혜스럽습니다. 어디 산속 깊은 굴에 들어가서 평생 성경만 읽고 기도하라 해도 할 사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말 그것을 원하실까요? 저도 그런 말을 자주했습니다. ”아니 지금 목사님들 60이 넘고 70이 넘어 어디를 그렇게 쫓아다니며 배웁니까? 매일 인터넷 강의 좋은 설교만 듣고 있습니까? 그럼 언제 말씀을 살렵니까? 그 많은 지식의 말씀 평생 배우기만 할 것입니까? 살기도 바쁜데 이제는 머리가 아니라 살면서 삶으로 말씀을 풀어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말씀도 이제 누구 주석이나 베끼고 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하나라도 배우고 체험한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 말씀이고, 내가 삶으로 푸는 주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흉내도 따라서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나 홀로 서서 ‘나 력’을 키우고 그것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행동하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갈리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만나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런 으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 그 때 베드로가 요한을 쳐다보면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에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체적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제까지는 12제자들이 똑같이 생활하면서 똑같이 말씀을 동일하게 함께 배웠지만 이제 앞으로 가는 길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길은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나만의 소명과 삶이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주체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살던 자유이고 행복이고 나만이 살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제는 남을 보지 않고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만 나만의 삶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바로 어딜 가서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목표를 두고 성실하게 배우는 삶을 착실하게 살면서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가다보면 점점 주체적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 안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나 주님의 부르심의 절대적 소명을 따라 크던 작던 나의 삶의 공간에서 말씀을 적용하며 실천하는 나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처럼 주 안에서 나만의 멋지고 아름답고 위대한 주체적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