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와 날개
이상(李箱) 약전(略傳)
우리 나라 천재문인이라는 칭송을 받는 이상은 원래 화가의 꿈을 꾸었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다.
아주 독특한 성격인 그는 친구에게서 오얏나무 미술도구함을 선물받아 흡족한 나머지 이름까지도 오얏나무 상자라는 의미인 이상 (李箱) 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활동한 한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 화가.
1910년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김연창(金演昌)[18]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곧바로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 유교적인 가풍 아래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양어머니(백모)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구박받던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풀었으며, 이상을 입양한 지 얼마 안 되어 친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홀대하였다고 한다. 백부 또한 어린 조카 김해경을 입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상은 화가를 지망했지만 백부가 "세태가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를 곯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환쟁이는 안 된다"고 반대해서 결국 백부의 바람대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가 되었다.
이상(李箱) 1910.9.14~1937.4.17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 지에 발표
1932년 동지에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발표. 이 때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씀.
필명(筆名) ‘이상’은 공사장 인부들이 잘 모르고 ‘이상(李樣)' 부른 대서 연유했다고 보통 알려져 있지만, 1929년의 경성고공 졸업앨범에도 이상(李箱) 이라는 필명이 나온다고 한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배천온천(白川溫泉)에 가 요양.
요양지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옴
1934년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한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 같은 해에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고 폐결핵 치료를 위해 동경에 가나 불온사상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남.
1937년 4월 동경대 부속병원에서 병사.
오감도(烏瞰圖)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상의 난해시이다.
원래 30편을 계획했으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편 만에 조기중단되었다.
오감도(烏瞰圖) : 시 제1호
오감도의 첫 작품으로 1934년 7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지금 읽어도 난해(難解)하니 시(詩)가 발표 된 1934년에야 독자(讀者)들의 항의가 빗발 쳤을 것은 당연한 일로 연재가 도중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태준’의 회고 (당시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
이상의 ‘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어.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문선부에서 「烏瞰圖」가 鳥瞰圖(조감도)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어왔어. 오감도란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글자라는 것이야. 겨우 설득해서 조판을 교정부로 넘겼더니 또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나중에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갔지만 결국 시는 나갔어. 그 다음부터 또 문제였어.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에 가서 오감도의 원고뭉치를 불살라야 한다, 이상이란 작자를 죽여야 한다…신문사에 격렬한 독자투고와 항의들이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즘(sur-realism)이니 다다이즘(dadaism)이니 하는 해설을 들어도 잘 모르겠고 꿈 보다 해몽이 좋다고 미친 사람이 되는 대로 쓴 것을 괜히 복잡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당대인에게 모독 당했던 「오감도」연작은 그 뒤 구태의 한국문학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더니즘 문학의 진경을 보여준 ‘앞서간 문학’으로 이상 문학을 한국문학사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역작으로 평가된다. 천재(天才)던 광인(狂人)이던 오감도에는 시인(詩人)이 자란 동네가 배경으로 투영(投影)되었을 것 같다. 시인의 골목을 찾아 나선다.
현재 이상의집 내부
이상의집 외부 전경
이상의 어린 시기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金海卿)(1910-1937)의 어릴 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상의 증조부는 정삼품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살펴 볼 때 중인(中人) 집안이 아닌가 한다. 이상이 난 사직동과 자라는 누각동 일대-인왕산 아랫동네는 조선 시대 ‘우대’로 부르던 곳으로 (아래대는 동대문 광희문 일대 즉 도성의 동남쪽) 중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현 배화여고 자리 필운대(弼雲臺)는 중 중인문학-위항문학(委巷文學)이 꽃 피던 곳이었다. 현대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육당 최남선 (六堂 崔南善 1890-1957)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1901-1891)는 모두 중인출신으로 위항문학의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필운상화 (弼雲賞花), 영조 26년 (1750)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 x 18.5 cm, 개인소장
선비들이 모여 있는 필운대(弼雲臺)아래 마을은 지금 누상동 누하동 일대니 곧 이상이 나서 자라고 시(詩)를 쓴 동네다. 그림 위 왼쪽으로 솟은 봉우리는 꼭대기가 잠두(蠶頭-누에머리) 같으니 남산이며, 그 오른 쪽 먼 산은 우면산, 또 우면산 오른 쪽은 관악산이다.
이상의 생부(生父)는 궁내부(왕실 살림을 맡던 기구) 활판소에 근무하다가 활판기계에 손가락 세 개를 잘린 뒤 이발소를 차리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으며 얼굴이 얽었다고 한다. 어머니 또한 곰보에 성도 생일도 모르는 고아였다고 한다.
이상은 두 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伯父)에게 양자(養子)로 들어 간다. 총독부의 기술관리였던 큰아버지는 생활이 넉넉했다고 한다. 그러나 큰 어머니에게는 초혼에 실패하면서 데리고 온 자식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와 큰어머니와 이상과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되 관계가 복잡한 것은 틀림없고 이런 사정이 시인의 성장환경에 어두움을 드리웠던 것은 아닐까?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
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오감도 시제2호))
두칸 장방에 볕 좋은 안방은 백부, 백모,백모가 데리고 온 아이가,
좁고 햇볕이 연중 들지 않는 건넌 방은 이상과 할머니가 지냈다고 한다.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해지면서 나가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웃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 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날개’ 중에서)
위 구절은 이상의 어릴 적 경험이 틀림없을 것 같다.
오감도(烏瞰圖)의 골목
이상은 학령기가 되어 신명학교를 다닌다. 이상과 구본웅은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던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두 분 모두 신명(新明)학교 1921년도 졸업생이 틀림없었다.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 취급 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동아 2002년 11월호 : ‘구본웅과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중에서)
이 신명(新明) 학교 옛 자리를 체부동, 누각동, 옥인동 일대를 돌며 물었지만 ‘진명 아니고요?’ 하고 반문할 뿐 옛터는 커녕 이름도 아는 사람이 없다. 신명(新明)은 누상동에 있다가 그 뒤로 폐교되었고 그 터는 배화여고가 육영수 여사 후광을 입어 배화여대로까지 확대될 때 그 구내로 들어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신명(新明) 학교
백호정터 전경
정면 위에 보이는 건물이 현 배화여고로 시인(詩人)이 다니 던 신명학교는 그 구내 어디에 있었을 것이다.
날개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천재(天才)'를 아시오?
나는 유쾌(愉快)하오. 이런 때 연애(戀愛)까지가 유쾌(愉快)하오.
………
그 돈 오 원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 넘어졌을 때에 느낄 수 있었던
쾌감을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객들이 내 아내
에게 돈 놓고 가는 심리며 내 아내가 내게 돈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을 나는 알아낸 것 같아서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
집으로 가야겠다. 아내에게 불행히 내객이 있거든 내 사정을 하리라.
사정을 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아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까 그러나 아내에게는 내객이 있었다…. (날개 중)
우리나라 최초의 심리소설이란 단편 ‘날개’를 이상은 죽기 전해 1936년 ‘조광(朝光)’에 발표한다. 이 소설-매춘부 아내와 사는 남자의 이야기 뒤에는 작가의 실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오감도(烏瞰圖)’ 나 ‘날개’ 같이 헷갈리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 월급쟁이-총독부 건축기사 일을 차분하게 할 리가 없다.
이상은 백부가 물려 준 유산으로 청진동에 다방 ‘제비’를 연다. 배천(白川)온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동거를 시작한다. 행복했던 이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금홍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나는 금홍이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 (아마도 박태원)의 집에 가 잤다’ 는 것은 이상의 고백이다. 이런 이상을 금홍은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 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그냥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 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죽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 아름에 덥석 안아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다….
(날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