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식민사학의 기자들
문화일보 | 임대환기자 | 입력 2010.12.13 14:51
이것도 기사란 말인가, 고려 청자에 상감을 제작하는 원천기술이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청자 상감을 제작하는 원천기술은 없었지만
송나라(960~1279년)의 청자 상감기법을 도입해새로운 고려청자를 탄생시켰습니다." ?
상감기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을뿐더러, 칠기에 사용되는 은입사 기법이
고려(918~1392년)청자의 상감기법의 창안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여겨진다. ?
고려유약은 그릇의 문양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
고려의 투명한 유약과 퇴토의 빛깔이 어우러져 세상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고려청자는 중국청자와 확연히 구분되는 고려청자만의 특징이었다.
중국청자와 확연히 구분되는 고려청자만의 특징이었다.
<고려 청자는 청자의 장식기법 중 고려특유의 독창적 장식기법>
또한 고려청자의 빛깔의 비밀은 가마에 있었다.
벽돌로 쌓은 중국가마와 달리 고려의 강진가마는 흙가마였다.
중국의 청자는 불과 공기와의 싸움이었으나 고려청자는 불과 흙이 만들어내는 마법이었다.
그래서 고려청자는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려만의 독특한 상감기법으로
중국청자와는 달리 그 문양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국청자는 불투명한 유약때문에 투명하지 않아, 명나라때 청자의 손잡이의 용문양이 제대로 들어나지
않았다는것과 기존에 통상 소극적으로 제시되는 12세기로 추정하는 고려,고려청자의 상감,유약기법이
15세기 명나라 시대 중국 관요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면
이는 곧 송나라때 상감,유약기법이 발달하지 못하여 상감, 유약기법이 송에서 명으로 전수된게 아닌
고려시대 고려청차의 음각문양,상감,유약기법이 명나라시대 관요가 영향을 주었다는 인과관계로 봐야지
상감, 유약기법을 송나라 960~1279년시대의 상감기법으로 소급해 주객을 전도시키는 이런 해석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인과관계 파악의 사실인식조차 일부러 외면해 버리는 동북공정 식민사학자들과 관련 매체보도 기자들.
상감기법이란 세계 각지에서 이미 기원을 전후로 하여 목칠(木漆)·금속공예품·유리공예품 등에 사용된 시문기법으로써
이미 낙랑의 목칠기법,
삼국 시대 신라와 서양의 교류(금속 장신구,트리카아 지방의 연관성과 관련된 황금보검 등등)로 볼때
유리,금속상감 시문기법에도 사용 일반화되있었으며
그것이 고려로 이어지면서 도자기 상감기법에 쓰였거나
고려시대 이전의 목칠,금속,유리공예 등의 상감 시문기법과 고려시대 도자기 상감 시문기법으로 기술적 연관성이 없다라면
당시 이것은 고려만의 도자기 상감 시문 유약기법으로써
당시 중국,일본과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어쨋건 고려시대 고려청자만의 도자기 상감시문 유약기법이
오히려 중국에 명나라 관요로 영향을 준 것이라 봐야한다는것이다.
1. 상감기법 시기에 관한 기존 학설
-우리 문화재 속 숨은 이야기-
* 상감기법은 시문구로 자기의 표면에 나타내고자하는 문양을 새긴후
그안을 백토나 자토로 메운 후 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백토는 희게 자토는 검은색을 띠게 되는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하고자하는 문양을 선명하게나타내는 기법이다.
(상감청자는 청자의 장식기법 중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려특유의 독창적장식기법이었다)
상감 기법은 청자의 그릇 바탕에 무늬를 넣기 위해 예리한 칼로 파낸 후백토나 자토를 음각 무늬에 메워 넣은 것으로
불에 구워 내면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 색으로 발색되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드러내는 기법을 말합니다.
상감 기법의 출현은 원래 나전칠기에 사용되던 목(木)상감 이나 금속 공예에서 사용되던 은입사 등 금속상감 기법에서
기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려 상감청자의 기법 상감기법이란 도자기가 마르지 않았을 때 문양을 음각(陰刻)하고,
그 부분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자토니(裏土泥:붉은 흙)를 메꾸고 처음 구은 다음< 예번(豫燔)>한 다음
다시 청자유(靑瓷釉)를 바르고 본번(本燔)하는 자기(瓷器) 장식 기법이다.
이러한 상감기법은 다른 나라의 도자기 제품에는 유례가 없는 기법으로, 의종대(毅宗代:1147∼1170)에 창안되어 고려 청자에 응용되었다. 상감청자의 문양으로는 운학(雲鶴)·양류(楊柳)·보상화(寶相華)·국화(菊花)·당초(唐草)·석류(石榴) 등 여러 가지가
쓰였으며, 특히 운학무늬와 국화무늬가 가장 많이 쓰였고, 국화무늬는 조선 시대에도 애용되었다.
상감청자의 특징은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는 데 있으며, 상감문양을 전면적으로 쓴 경우에도 배경으로서의 공간은 여유있게
남기고 있다. 또한 문양이 단일문양의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죽(竹)·유(柳)·화(花) 등이 중심이 되는 문양을 전경(前景)에 크게 내세우고, 수(水)·조(鳥)·암(岩)·인물 등을 배치하여 하나의 화폭과 같은 화면의 효과를 내고 있다. 운학무늬의 경우에도 문양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
또한 모란꽃이나 보상화의 경우에도 넓은 화판(花瓣)을 백토상감(白土象嵌)하고 배경을 흑토상감해서 흑백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대표적인 상감청자로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소장된 죽문병(竹文甁),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모란문매병(牧丹文梅甁),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천학문매병(千鶴文梅甁) 등이 있다.
고려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세련되고 많이 생산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고려 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
중국 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고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에 특색이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도 한두 점 악센트로만 강한색 [銅彩發色] 을 쓰면서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 언제나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상감기법의 시기가 앞당겨지는 상감기법 변천과정의 발굴>
2. 상감 청자에 대해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12세기 중엽), 국보 제115호, 입지름 16.9cm, 개성 개풍군 ...
상감기법은 세계 각지에서 기원을 전후로 하여 목칠(木漆)·금속공예품·유리공예품 등에 사용된 시문기법으로 일반화되어 있던 것이지만,
자기질(磁器質) 청자에 유약(釉藥)을 입히기 전에 시문한 것은 고려시대에 창안된 독자적인 기법이다.
상감청자는 상형된 기명(器皿)의 표면에 우선 문양을 음각하고 그 부분을 퇴토의 성분과 유사한 백토니(白土泥)나 자토(土泥)로 메운 다음 표면 위로 넘친 백토와 자토를 제거하면 음각으로 파여진 부분에 백토의 색과 자토의 흑색이 남아
의도했던 문양이 나타난다. 그후에 1차 번조(燔造)를 하고 유약을 씌운 다음 2차 번조를 하면 상감청자가 완성된다.
따라서 청자는 표면에 두께의 차이가 생기거나 문양이 탈락되는 경우가 없다.
상감청자의 발생시기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북송(北宋)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의<선화봉사고려도경 宣化奉使高麗圖經〉에 비색청자(翡色靑磁)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상감청자에 관한 기록은 없고,
인종(仁宗:1123~46 재위)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청자류 중에 상감청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전반까지는 상감기법이 발생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가장 시대가 앞서는 편년자료인문공유(文公裕:1159 죽음)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紋:국보 제115호)을 발생기의 것으로 보고
12세기 중반에 상감기법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던 것이 종래의 학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진행된 청자요지의 조사에서 상감기법의 발생시기를 재고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고려백자 요지의 퇴적층에서 10세 기의 특징을 보이는 층위(層位)에서
12세기의 전형적인 상감문양과는 다르지만 백자와 청자 의 표면에 흑토나 백토로 상감한 예가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 있는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전반의 청자요지에서 흑상감이 확인되었다.
또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 사이에 철화청자(鐵畵靑磁)와 녹청자(綠靑磁)의 생산지인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요지에서 흑상감이 발견되었고,
상감청자의 최대생산지인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서도 11세기의 양식적 특징을 갖는 청자요지에서 흑·백상감이 채집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고려 왕릉 발굴조사에서 경종(景宗:976~981 재위)의 영릉과 문종(文宗:1047~83 재위)의 경릉에서
상감청자대접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종래 12세기 중반으로 추정했던 상감청자의 발생시기를
10세기 후반(900년대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으로 편년할 수 있게 되었다.
<상감기법의 변천과정>
10세기 후반(900년대 후반) 발생기의 서리·양재리·진산리, 대구면요지에서 발견된 상감문양은
시문의 솜씨가 정교하지 못하고 문양의 배치도 공예의장화되지않은 초보적인 단계를 보이며
문양 소재도 특수한 것으로 고려상감청자의 전형적인 것과는 크게 다르다.
특히 초기 상감이 시문된 기종(器種)이 병(甁)이나 장고(長鼓)와 같은 입체적인 대형기명(大形器皿)에 제한되고,
백상감보다는 흑상감 중심으로 시문되고 있어서 이러한 현상을 상감기법 발생기(변천과정)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발전기의 상감청자상감기법의 발전기는 음양각기법이 세련되고 유태(釉胎)의 색이 비색에 도달하는 11세기 후반에 해당된다.대부분의 양질 청자에는 음양각기법이 시문되고 흑백퇴화문(黑白堆花紋) 기법과 철화(鐵畵) 기법 등이 사용되었으나,
상감 기법은 실험단계로서 발생기에 흑상감을 중심으로 소량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계축년(癸丑年:1013 또는 1073)에 제작된 청자상감문자명발(靑磁象嵌文字銘鉢: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외면에 흑상감으로 '계축년조상대성지발'(癸丑年造上大聖持鉢)이라는 문자를 새겨 넣었다.
유태는 담녹갈색(淡綠褐色)으로 조질이지만 흑상감은 선명하게 기법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상감기법은 세련기에도 시문기법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문양 자체가 두드러지지 않는 음양각기법은 유태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흑백으로 나타나는 상감기법은 당시로도 파격적인표현방법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세련기에 들어선 상감기법은 양질 청자 음양각문양의 주변에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속문양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종전에는 대형기면이나 특수기종에 나타났지만 보편적인 완()과 대접에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청자음각연당초상감국화절지문대접(靑磁陰刻蓮唐草象嵌菊花折枝紋大:보물 제1032호)은 유태가 양질이며
투명하고 내면에 3송이의 연당초무늬를 채워 음각하고, 상감기법으로 외면의 3곳에 작은 국화절지를 새겨넣었는데
문양의 비중은음각문보다 작다. 청자양각연당초상감시명표형병(靑磁陽刻蓮唐草象嵌詩銘瓢形甁: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전면에 양각으로연당초무늬를 시문한 다음 능화형(菱花形)을 구획하고 서명을 흑상감했다.
이러한 양상은 12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7호요지 발굴조사에서 〈고려사〉 세가(世家) 의종 11년(1157)조에 기록된 청자와(靑磁瓦)와 함께
음양각이 시문된 대접의 종속문으로 상감이 새겨진 예가 발견되었다.
이 상감문은 기법적으로 완성되고, 문양은 주문양(主紋樣)이 아닌 종속문양에 지나지 않지만
전형적인 고려상감청자의문양 소재와는 큰 차이가 없다.
12세기 중엽에서 후반 사이에는 상감문이 주문양으로 등장하면서 12세기 전반에 시작된 내외면을 모두 시문하는 경향이
자리잡아가고 문양의 비중이 커진다. 음양각문 중심에서 상감문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음양각문은 종속문양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상감 중심으로 변모한 예이다. 내면의 상감문양 소재는 음양 각무늬와 같은 소재이며 형태도 큰 차이가 없다.
구연부 아래에 당초문대가 돌려지고 측면에는 보상화당초무늬가 역상감(逆象嵌)되고, 내저에 큼직한 국화판문이 새겨져 있다. 외면에는 단순한 구름무늬와 당초문대가 백상감되어 있으며 3곳에 비중이 작은 국화절지문이 흑백 상감되어 있다. 음각문은 저부에 연판문대를 작게 돌렸을 뿐이다.
전성기의 상감청자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는 상감청자의 전성기로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양질 상감청자는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상감청자는 공예의장 화한 문양 소재에서 회화적인 소재로 변모한다.
명종(1131~1202)의 지릉(智陵)에서 출토된 청자류 중에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은 내외면이 모두 상감기법으로 되어 있으며
기이(己已:1269)라는 간지가 새겨진 청자상감간지명대접(靑磁象嵌干支銘大) 등이 이 시기에 속한다.
14세기부터 상감청자는 조질화되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다량생산되었다.
정해(丁亥:1347)명청자와 지정(至正:1341~67)명청자는 조질화되어가는 상감청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공민왕비(?~1365)의 정릉(正陵)명상감청자대접에서 쇠퇴기의 상감청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청자의 조형미에서 12세기까지 음양각 중심의 비색청자가 맑고 조용한 불교적 이상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상감청자는 밝고 명랑한 현실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감청자의 기술적 전통은 조선시대 상감분청사기와 상감백자로 계승되어 15세기까지 한국도자의 특징적인 장식기법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http://chunmavrc.com/zeroboard/zboard.php?id=pottery10&no=29
현대 도자기에 적용된 황금 상감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