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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이신 황연옥 권사님은 강원고성신문에 전기소설 <화진포의 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올려둡니다.^^
강원고성신문 http://www.goseongnews.com/default/index.php
화진포의 성(1~12회)
화진포의 성 [13]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3]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8월 04일(화) 10:3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1894년 9월 15일,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청일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후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 청군은 1만 4천 명, 일본군도 만 명이 훨씬 넘는 병력이 참전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작전을 세밀하게 짜서 세 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하여 모란봉을 점령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후면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을 당한 청군은 당황하였다. 결국 을밀대에서 항복하고 일본군은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이 전쟁으로 평양 주민들은 청군과 일본군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일본은 전승국으로 부상했으며 청국은 조선을 물러갔다. 이 전쟁으로 시모노세키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청국은 일본의 요구대로 일본에 유리한 교역 약정과 일본에 네 개의 새로운 항구를 개항한다는 조건을 들어 주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나, 일본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일본은 즉시 조선 정부에 관여하여 이씨 왕조 정부의 구조를 개편하기 시작하였다. 우편, 철도, 전신이 일본 손으로 넘어갔다. 새로운 법규가 갑작스레 만들어졌으나 조선 사람들에게는 용납되지 않았고 오히려 저항을 일으켰다.
서울에서 환자를 돌보던 닥터 홀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병원과 교인들이 염려되어 서둘러 모펫목사, 리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갔다. 격렬한 전쟁 속에서도 병원과 감리교선교회 건물은 잘 보전되어 있었다. 전쟁 중 감사 민 씨는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의 가마가 구덩이 속에 뒤집힌 채로 뒹굴고 있는 걸 보며 그동안 박해 당하던 일들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닥터 홀은 전쟁을 취재하러 온 외국 기자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뉴욕 <월드> 지의 그린맨(Greenman)이었고, 또 한 사람은 <런던스탠더드>지의 프레더릭 빌리어스(Ferderick Viliers)였다. 닥터 홀은 그들에게 쉴 곳과 편의를 제공했다. 그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이렇게 기록했다.
“10월 8일 전쟁터 몇 곳을 갔었는데 아직도 청군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어떤 시체는 땅 위에서 부패되어 지독한 악취가 났다. 길가에는 많은 말과 가축들이 죽어 있었다. 군대 보급품들을 수송하는 데 쓰였던 가축들이다. 전쟁이 끝나자 텅 비었던 마을로 사람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km 위치한 황주에서 일본군 큰 부대를 만났는데 그들은 500여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있었다. 이 전쟁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닥터 홀도 두 목사와 며칠간 전쟁터를 둘러보았다. 전쟁의 잔해가 참으로 몸서리쳐질 정도다. 평양성 가까이 있는 시체들은 흙으로 덮어 놓았으나 성 외곽지대에는 총을 맞아 죽은 시체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만주의 기병과 일본 보병과의 살육전의 최후를 그대로 보는 거 같았다. 전투가 끝난 지 3주가 지났는데도 길가에 널려진 사람들과 말들의 시체가 수백 미터에 이르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 가축들의 죽은 잔해가 곳곳에 널려 있고 악취와 불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두면 전염병이 돌 텐데… 어쩌나? ”
닥터 홀은 의사로서 위생 교육과 부상자를 속히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히 병원으로 돌아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들것이 없어서 대나무 침대로 환자를 실어 날랐다. 조수가 없어서 교인들과 광성학교 학생들이 환자의 이송을 도와주었다.
처음에 13명으로 시작한 광성학교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갔다. 비로소 박해가 없는 평양에서의 의료선교와 기독 교육 활동이 시작되었다. 힘들어도 예배드리고 환자를 치료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들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렇게 계속된 강행군의 연속으로 닥터 홀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지난해 여러 번 평양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몸을 너무 혹사했다. 게다가 동학란과 청일전쟁으로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볼 여가가 없었다. 전쟁으로 인한 도시 안팎의 극히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한 저항력도 없었다.
닥터 홀의 우려대로 이질과 말라리아 질병이 돌았다. 그의 병원으로 전쟁 부상자뿐만 아니라 전염병 환자들도 몰려왔다. 모펫 목사와 닥터 홀도 말라리아에 걸렸다. 열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모펫 목사와 스크랜턴은 닥터 홀의 병세가 심해져 더는 진료 활동을 한다는 건 무리라 생각하였다. 서울까지 빨리 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다가 관리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서울까지 갈 수 있도록 조처했다. 대동강을 따라 65킬로미터쯤 내려가서 병든 군인들을 실은 큰 배를 탔다. 군인들도 이질이나 각종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을 실은 배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닥터 홀은 열이 조금 내린 것 같았다.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는 병세가 좋아진 것 같았는데, 서울로 가는 작은 기선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열이 올랐다.
배는 오후에 출항했다. 어두워질 무렵 강화도 건너편에 도착했는데 설상가상, 배가 암초에 걸렸다. 뒤집어지려는 배를 간신히 붙잡아 필사적으로 다시 항해를 시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열이 오른 닥터 홀은 계속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해안가 어느 오막살이 조선집을 얻어 닥터 홀을 잠시 눕혀 놓고 서울로 갈 수 있는 배를 찾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배를 구했다. 느린 항해로 서울에 도착한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닥터 홀은 발진티푸스에 걸렸고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사흘 가까이 길에서 병세를 키운 것이다.
1894년 11월 19일 아침, 홀 부인은 왕진 가려고 약을 챙기고 있는데 남편이 몸이 안 좋아 서울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로제타는 아기 셔우드를 안고 뛰어나갔다. 홀 부인은 깜짝 놀랐다. 닥터 홀의 얼굴과 몸이 너무도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아들 셔우드를 보자 기분이 좋아져서 첫날은 표정도 밟고 유쾌해 보였다.
“로제타, 건강할 때 집에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미 알고 있었소. 그런데 병이 나서 집에 돌아와 편히 누워서 사랑하는 의사 아내의 간호를 받는 것도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되었소.”
애써 농담을 건네며 아내의 손을 잡고 말하는 닥터 홀은 열이 40도를 오르내렸다. 다음 날은 병이 너무 위중해 혼자 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침에 종이와 연필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노블 목사에게 이번 여행에 쓴 비용을 적어서 알려 주었다. 그 외에 다른 회계기록은 그의 공책에 적혀 있다고 말했다. 그런 지경에서도 그는 이처럼 공적인 일에 철저했다.
“로제타, 그동안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했으니 죽든 살든 하나님의 뜻이오. 아, 그러나 나는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더 오래 일하고 싶소. 우리 셔우드, 당신의 뱃속에 있는 우리 아기랑 함께… 아가야, 미안하다. 아빠 얼굴도 못 보는 사랑하는 우리 아가…….”
닥터 홀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더니 로제타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배 안에 있는 아기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게 있었나 보다.
로제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남편을 안아 주며 힘주어 말했다.
“닥터 홀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꼭 나을 거예요. 힘을 내셔요!”
로제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글로 썼다.
“내가 그의 곁으로 갈 때마다 그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한 우리들의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걸 말하려 애를 썼다. 나에게 뱃속의 아기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건강하고 셔우드보다 더 심하게 움직이고 잘 논다고 하였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내 두 손을 꼭 잡기도 하였다.”
그렇게 치료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다음날 아침, 닥터 홀은 병세가 더 위중해져서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였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려는지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하였다.
화진포의 성 [14]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4]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9월 11일(금) 14:22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닥터 홀은 숨을 몰아쉬며 로제타를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종이에 쓴 글씨를 읽으라고 손짓을 했다.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뿐이오. 그분이 당신과 셔우드에게 훗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오.”
닥터 홀은 너무 힘이 없어서 이젠 말하고 글씨 쓰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다섯 명의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최선을 다 했으나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나려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가장 큰 좌절감은 가슴이 벅차도록 마음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닥터 홀은 슬픔이 가득 한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말했다.
“당, 신, 을, 사, 랑, 하, 오- !”
‘아, 제임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로제타는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은 책임감이 강한 진실한 사람이었고 그의 믿음은 어린아이 같이 순수했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 라고 불렸던 그였는데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 셔우드와는 말 한마디 못하고 영원한 작별을 하고 있었다.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서 편안히 잠들 듯이 그는 죽음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하나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로제타는 남편의 임종을 지켜보던 일을 훗날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가 떠나던 날, 그의 두 눈은 계속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손짓으로 나에게 내손으로 눈을 감기게 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남편이 숨을 거둔 후에 뜨고 있는 그의 두 눈을 감겼다. 그러나 그의 맑고 깊은 눈빛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제임스 눈을 다시 뜨게 하고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너무나 맑아서 마치 평소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셔우드를 안고 와서 아빠의 얼굴에 입술을 대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나에게 약속한 것을 꼭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15개월 된 셔우드는 아빠가 자는 줄 알고 있는 같았다.”
로제타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오열했다.
“아, 어떻게 당신께 이런 일이……. 당신과 조선에서 환자들 병을 고쳐주며 많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내 사랑 제임스, 편히 가세요. 당신이 정말 사랑한 조선에서 하려고 했던 일을 제가 대신 할게요. 우리 이다음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로제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 기진맥진하면서도 닥터 홀 곁을 떠나지 않았다.
1894년 11월 27일 배재학당의 강당에서 노블 목사의 주례로 닥터 홀의 추도식이 있었다. 그의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남았다. 은둔왕국 조선에 와서 의료 선교사로 봉사하며 평양 선교지를 개척한 그의 헌신은 그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 뜨겁게 남아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노블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34살의 짧은 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형제 제임스 닥터 홀과 이 땅에서 잠시 이별합니다. 그를 조선식 관에 넣고 아름다운 한강의 둑(양화진)으로 가서 땅에 묻었습니다. 그 곳은 육신이 잠들기에 평화로운 장소였습니다. 그는 생명을 바쳐 일한 조선 땅, 먼저 간 사람들 사이에 묻혔습니다. 그는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아내와 자녀들과 조선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남편 추도식과 장례를 마치고 홀 부인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첫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셔우드를 돌보며 조선에서 둘째아기를 출산하는 일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홀 부인은 임신 7개월이었다. 셔우드를 데리고 뉴욕 주 리버티의 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일단 미국에 가서 힘든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둘째를 낳아 키운 후, 기회가 되면 남편이 묻힌 조선에 다시 돌아와 의료선교의 일을 할 마음을 먹었다.
미국으로 갈 짐을 꾸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스더가 방문을 열고 들어 왔다.
“선생님, 저도 미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가서 선생님 곁에서 일을 하며 의학공부를 하고 싶어요!”
홀 부인은 에스더가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의학 공부를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부탁을 승낙하였다. 그러나 에스더를 남편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에게 의향을 물으니 미국으로 같이 가겠다고 하여 두 사람을 함께 데려가기로 하였다. 선교회에서도 승낙을 하였고 친구들도 잘 되었다며 약간의 경비도 모아 주었다.
홀 부인과 아기 셔우드, 박유산 부부는 서울의 친구들과 작별을 하고 미국으로 가는 기선을 타기 위해 제물포로 떠났다. 서울을 떠나는 로제타의 마음은 일파만파로 착찹 했지만 이런 저런 것을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제물포 조지 히버 존스 댁에 도착을 하였는데 갑자기 셔우드가 열이 40도 넘게 올랐다. 모두들 긴장 하였다.
‘혹시 아버지한테서 발진티푸스가 전염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엄마의 정성된 치료와 간호덕분에 열이 내렸고 아이는 보채지 않고 잘 놀았다. 다음날 아침 배를 타려고 준비하는데 셔우드 몸에 반점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로제타는 셔우드의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것 같아 승선을 연기하였다.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아들 셔우드까지 열병이 나자 그녀는 막막하였다.
‘아,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우리 셔우드를 보살펴 주십시오……!’
다행히 셔우드의 열이 내리고 몸에 반점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에 가서 배를 타야하는데 어제 제물포에서 일본으로 떠난 배는 이미 미국으로 출발하였을 거라 생각하니 걱정되었다. 다시 배편을 구하는 일은 시일도 오래 걸리고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밤에 꿈을 꾸었는데 큰 배가 아직 나카사키항에 정박해 있었다. 홀 부인은 꿈 이야기를 하며 아직 큰 배가 일본에 머물러 있을지도 몰라 서둘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으로 항해하는 50시간 동안 파도가 너무 심해서 어른들은 멀미로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셔우드는 보채지 않고 잘 참아 주었다.
배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일행이 홀 부인에게 뛰어오며 말했다.
“당신 꿈이 맞았어요. 차이나 호는 아직 부두에 정박 중입니다. 오늘 오후 미국으로 떠난답니다!”
승객들을 심하게 멀미나게 했던 간밤의 그 폭풍 때문에 차이나 호는 출범을 연기하였다. 그들 일행은 안도의 숨을 내 쉬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달 정도의 긴 여행 끝에 로제타는 미국 뉴욕의 리버티 옛집에 도착하였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아! 그리운 나의 집, 남편과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로제타는 이 집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집안과 마당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옛 추억에 잠겼다. 조선에서 돌아 온 지 2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로제타는 자기가 태어난 그 집에서 셔우드의 동생, 둘째를 낳았다. 예쁘고 파란 눈을 가진 딸이었다.
아기의 이름은 이미 닥터 홀이 살아 있을 때 ‘에디스 마거리트’ 라고 지어 주었다.
셔우드가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누이동생은 1만 6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뉴욕의 리버티에서 태어난 것이다. 참 이상하였다. “동쪽과 서쪽에서 너의 씨앗을 데려오고 불러 모을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로제타는 남편 닥터 홀이 살아서 예쁜 딸 에디스 마거리트를 보았으면 얼마나 좋아하였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화진포의 성 [15]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5]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09월 23일(수) 13:37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홀 부인 로제타는 고향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게 되었다. 친정아버지 로즈밸트 셔우드(Rosevelt R. Sherwood)는 손자 셔우드와 함께 지내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외할아버지 생일날 셔우드가 태어났다. 그는 외손자의 생일이 자기 생일과 같은 날이라는 데 어떤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손자와 함께 찍은 사진 밑에 ‘아흔 살과 한 살’이라고 써 붙이고 즐거워하였다. 셔우드도 외할아버지를 잘 따랐다.
새 학기가 시작 되었다. 홀 부인은 에스더를 불렀다.
“사랑하는 에스더, 이제 당신도 공부를 시작해야지.”
“선생님, 감사합니다. 학비가 많이 들겠지만 제가 장학금을 받도록 열심히 노력 할게요. 시간 날 때 일해서 학비도 모으고요.”
에스더의 눈빛은 강렬했다. 미국까지 오게 한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에스더는 리버티의 공립학교에 입학하였고 그녀의 남편 박유산은 셔우드가의 농장 일을 도우며 에스더의 학비를 마련했다. 조선학교에서는 선교 위주의 학습이라 내용이 단순했지만 미국에서는 학습 분량이 많고 교육과정도 다양해 매달 과외비용을 지불하며 친구 집에 합숙시키거나 기숙사에 보내서 공부를 해야 했다.
에스더는 총명하여 학습에 많은 진전을 보였다. 그해 9월, 뉴욕시 유아병원에서 근무하며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찾아서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그 이듬해 가을, 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당당히 입학하였다.(현재 존스 홉킨스 대학교) 조선최초의 여학교(이화 학당)에서 만난 어린 소녀 김점동, 그녀는 에스더 박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한국여성이 되었다.
홀 부인은 두 돌이 되어가는 셔우드와 생후 6개월 된 아기 에디스 마거리트를 데리고 캐나다 글렌뷰엘에 있는 남편고향을 방문하였다. 시부모님과 남편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무척 반가와 하였고 크게 환영해 주었다. 어릴 때 제임스(닥터 홀)가 자란 통나무집도 그대로 있었다.
닥터 홀의 부모는 며느리와 손주들의 방문을 아주 기뻐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선교사가 되어 극동의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이라는 나라에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하늘나라로 갔지만 며느리가 귀여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찾아 온 일에 대하여 무척 기뻐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여행에 박유산도 동행하였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상투를 틀고 그 위에 중절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모습은 서양인들에게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캐나다 글렌뷰엘 교회에서는 특별한 환영예배를 마련해 주었다. 홀 부인은 그들의 따뜻한 환영사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이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동안 당신의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우리는 당신의 가족들과 조선에서 함께 온 형제자매도 한 가족으로 환영합니다. 여건이 어려운 외국에 가서 예수님을 전하고 다른 민족을 섬기다가 돌아온 당신들을 존경하고 환영합니다. 닥터 제임스는 조선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가 보내온 편지에는 저 먼 나라 백성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맺은 아름다운 결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제임스는 하늘나라에서 아내와 아들딸이 이곳에 온 것을 아주 기뻐할 것입니다.”
로제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남편의 혈육들에 대한 애정이 샘솟았다. 이처럼 따뜻하고 애정 어린 표현을 보며 남편 제임스는 이 캐나다의 고향에 잊히지 않는 추억을 많이 남긴 게 틀림이 없었다. 그를 기념하는 액자가 글렌부엘 교회에 걸려 있었다. 남편의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 자신보다는 타인을 향한 헌신을 남편 고향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에 큰 감동을 받았다.
홀 부인은 시댁 식구들의 사랑을 받고 배웅을 받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남편이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에 닥터 홀을 기념하는 병원을 짓기로 하였다.
그 일을 꿈 꾼 지 2여 년 후, 선교회로부터 아무런 경제적인 원조를 받지 않고 로제타와 친지들, 조선의 선교사들과 친구들의 노력으로 1897년 2월, 평양에 ‘닥터 홀 기념병원’이 세워졌다.
닥터 더글라스 포엘은 닥터 홀의 후임으로 평양에 온 의사이다. 그는 이 병원을 짓는 일을 매우 성스러운 사업으로 여겼다. 이 시료원(병원)은 조선식 건물로 평양성 서문 안쪽의 지대가 높은 곳에 지어졌다. 중심지에서 도보로 7분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고 대기실, 진료실, 약제실, 의사 사무실이 들어가도록 설계하여 지었다.
닥터 포엘은 조이스 감독과 조선 선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닥터 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의 아내의 노력으로 홀 기념 병원이 평양에 개원되었습니다. 이제 환자들을 수용할 방과 필요한 의료 기구를 구입할 기금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요즘 나는 수술해야 할 환자들이 와도 돌려보내는 일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수술에 필요한 기구와 입원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망치나 못, 톱이 없으면 목수가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외과 의사는 수술기구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장비가 부족해서 실패할 수도 있는 수술을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성공적인 수술 결과가 나오는 수술만 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필요한 의료 기구들을 평양에서 사용하며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 이듬해 수술기구를 구입할 자금이 모금 되었다. 닥터 포엘의 보고서에 의하면 3개월 동안 수술하여 치료받은 환자는 1300명이 넘었고, 일반 환자도 1000여명 치료 했다고 한다. 환자 수는 매일 평균 60여명이라고 하니 당시 홀 병원의 유명세를 짐작 할 수 있다.
홀 부인은 미국에서 평양 홀 병원의 후원금을 마련하면서 『월리엄 제임스 홀, M.D의 생애』 라는 남편의 전기를 출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많은 노력 끝에 1897년 8월, 뉴욕 감리교계통의 출판사 에서 닥터 홀의 전기를 출간하였다. 그 책은 많이 팔렸고 특히 신앙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홀 부인은 시동생인 클리포드 홀에게 그 책의 캐나다 판매 임무를 부탁했다. 책을 판매한 대금은 닥터 홀 병원설립 기금과 관리기금으로 보냈다.
홀 부인의 머리에 항상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숙제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조선의 맹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던 자신과의 다짐이었다. 그녀는 맹인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알아보았다. 1892년에 프랑스 파리의 맹인 교사인 루이 브라이가 개발한 점자책이 있었다. 또한 1860년 뉴욕의 맹인 교육학원의 원장인 월리엄 웨이트가 개발한 “뉴욕 포인트”라는 점자책도 있었다.
여러 가지 점자 구조를 비교해 본 그녀는 ‘뉴욕 포인트’가 조선어 구조에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웨이트 원장을 직접 찾아가서 점자의 구조를 배웠다. 평양에서 남편과 자신을 많이 도와주던 착한 오 씨와 앞을 못 보는 딸 오봉래가 생각났다. 하루 속히 조선에 가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의 맹인들에게 점자를 가르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에서 그가 하지 못했던 의료 계통의 일들을 이제 조금씩 시작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홀 부인은 다섯 살, 3살 된,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1897년 가을, “Empress of India” 라는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하였다.
‘아, 또 어떤 일들이 내 앞에 전개될까?’
남편이 평양 개척을 하며 위험한 지경에 있을 때 모펫 목사가 전보로 보내준 여호수아 1장 9절의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도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니라!”
홀 부인은 갑판에 나와 뱃머리에 부서지는 세찬 물살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화진포의 성 [16]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6]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0월 08일(목) 09:0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홀 부인은 1897년 11월 10일 또다시 조선으로 왔다. 첫 번째는 처녀의 몸으로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이 땅을 밟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남편도 없는 조선 땅을 찾아온 것이다.
셔우드의 네 번째 생일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날에 자신이 태어난 땅을 다시 찾아온 셔우드, 그러나 지금은 그를 반겨줄 사랑하는 아빠도 없었다.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 먼 여정이 힘들었는지 셔우드와 에디스가 기침을 하며 열이 높더니 백일해에 걸렸다. 동행한 분들은 마중 나온 분들과 서울로 먼저 가고 홀 부인은 제물포에서 머무르며 두 아이를 치료하였다.
에디스의 병세는 폐렴이 되었다. 바람이 심한 항구여서인지 아이들은 제물포를 경유할 때마다 열병을 알았다. 아픈 마음을 진정시키며 치료와 간호에 최선을 다했더니 열흘 정도 지나자 두 아이의 병세가 회복되었다. 서둘러 배를 구해 타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올라갔다.
감리교 해외 여성 선교회는 홀 부인을 전에 진료하던 보구여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 병원, 현 이대부속병원의 전신 )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두 아이와 함께 해외 여성 선교회의 독신 여성 숙소에 기숙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홀 부인은 가마를 구하여 타고 숙소를 향했다. 예전에 일하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 다행이었다. 궁궐 앞을 지날 때 명주로 싼 등불이 늘어서 있었다. 왕비가 돌아가셔서 상을 알리는 등불이고 장례식은 다음날이라고 한다.
1890년 로제타가 처음 조선에 도착한 날도 왕비의 장례가 있어 똑같은 등불이 줄을 서서 매달려 있었다. 그때는 대비 조 씨의 상이었고 7년 후의 지금은 시체도 찾지 못한 명성왕후의 장례를 치르는 등불이었다.
신정왕후 조 대비는 이 희(고종황제)를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세우고 이 희의 아버지에게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주어 나라 정치를 섭정하게 한 장본인이다. 섭정이 시작되자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왕후 사이에는 계속해 권력 쟁탈전이 있었다. 이 싸움은 1895년 10월 8일 며느리 명성왕후가 일본의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무참히 살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살인자들을 명성왕후의 시체를 불태웠다. 어떻게 죽였는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한 짓이었다. 일본인들은 명성왕후를 격하시키기 위해 나쁜 소문을 내고 거짓 칙령을 왕이 내린 것처럼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당시 서울 주재 일본의 고급 관리 ‘미우라 고로’가 대원군과 결탁하여 꾸민 사건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대원군은 명성왕후에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려 했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목적에 명성왕후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왕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한동안 궁중에서 주는 음식은 모두 거절하고 선교사들의 집에서 준비한 음식만 먹었다. 왕과 세자는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열흘 정도를 지냈다. 일본이 국정을 장악하려 했는데 왕이 옥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정은 아직 왕의 손에 있었다.
조선을 차지하려고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외세의 강압에 고종은 결단을 내렸다. 1897년 10월 17일, 조선은 ‘대한 제국’으로 나라의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국왕의 칭호는 황제로 불리었고 민비는 명성왕후로 추서되었다. 조선의 관습으로 왕비가 죽으면 백일이 지나야 국장이 있고 그 후 3년간은 전국이 상중에 있게 된다. 그러나 명성왕후의 시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정치적인 격동 때문에 장례식이 연기되었다가 1897년 11월 21일에 비로소 거행된 것이었다.
이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이 다시 조선 땅에 온 것과 남편 닥터 홀의 죽음이 더욱 뚜렷하게 회상되었다. 셔우드와 에디스는 병세가 좋아져서 별로 기침을 하지 않게 되었다. 홀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양화진으로 남편 산소를 찾아갔다. 남편이 이곳에 묻힌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편의 장례식이 있던 그날을 회상하며 홀 부인은 언덕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셔우드와 에디스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곱게 물든 나뭇잎을 주워서 하늘로 날리며 즐거워하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담장 너머로 복숭아, 살구, 앵두꽃이 만발하고 산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북쪽 지방으로 가기에 좋은 계절이다.
홀 부인은 남편이 일하던 평양으로 가겠다고 희망하였고 오랫동안 갈망해온 평양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서울의 일을 정리하고 출발하여 1898년 5월 1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가족들이 기거할 집을 돌아보았다. 조금만 손질하면 될 정도로 집은 아담하고 깨끗하였다. 집이 수리될 때 까지 노블 선교사 댁에서 함께 있기로 하였다. 에디스는 마당가에 핀 하얀 민들레꽃을 한줌 꺾어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셔우드는 그런 에디스를 따라다니며 즐거워하였다. 홀 부인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이었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곳을 여행하여 적응력이 약해져서 세 식구 모두 이질에 걸렸다. 어린 에디스가 증상이 가장 심했다. 3주일이 지나도록 에디스는 설사와 구토를 하고 열이 40도가 넘었다. 좋은 치료 약은 다 쓰고 극약처방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홀 부인은 안절부절 했다.
“에디스, 에디스, 정신 차려! 어서 병이 나아야 해!”
“엄마, 안, 아, 주, 세, 요!”
홀 부인은 에디스를 팔에 안고 낮잠을 재울 때처럼 살살 흔들어 주며 자장가 같은 조용한 찬송을 불러 주었다. 고통스러워하던 작은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몰아쉬던 숨소리도 부드러워지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얼굴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크게 뜬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네 살짜리 이 작은 천사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평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된 5월 23일 아침이었다.
‘아, 하나님은 내게 왜 이런 심한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지…….’
또 한 번의 엄청난 슬픔이 닥친 것이다. 남편 닥터 홀이 떠나고 위로가 되었던 보석같이 귀하고 예쁜 에디스, 그 아이를 낳아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던가? 아빠가 하던 일을 하며 새롭게 살아갈 평양의 새 집에 정착하기도 전에 에디스는 엄마와 오빠의 곁은 떠나갔다.
흐느껴 울며 실의에 차 있는 엄마를 보며 6살이 된 셔우드가 말했다.
“엄마, 울지 마세요. 엄마 말대로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셔서, 에디스가 아빠한테 갔나 봐요.”
홀 부인은 셔우드를 안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에디스를 양화진의 아빠 닥터 홀 옆에 묻어 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하였다. 그레이엄 리 목사님은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홀 부인은 너무 지쳐서 서울의 양화진까지 갈 수가 없었다.
언제나 충실하고 힘이 되어주는 김창식 형제가 에디스의 시신을 서울로 운반해 주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나 지금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마운 가족 같은 그다.
에디스의 장례식을 마치고 아펜젤러 목사가 홀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홀 부인, 당신이 에디스를 아빠 산소 옆에 묻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오전 내내 에디스와 김창식 형제가 도착하길 기다렸습니다. 아내가 하얀 장미로 화환과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피어스가 사온 한 다발의 붉은 모란과 장미 화환을 에디스가 누워 있는 관위에 올려놓고 나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님의 품에 잠들라, 축복의 잠을 들라.”
그리고 주님과 당신의 가족을 그토록 사랑한 김창식 형제에게 기도를 인도하게 했습니다. 매장 예식을 마치고 작은 봉분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꽃을 올려놓았습니다. 모든 의식은 경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신의 딸 에디스는 지금 아빠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잠들고 있을 것입니다.”
에디스를 잃은 슬픔과 아픔으로 허탈감에 잠겨있던 홀 부인은 아펜젤러 목사의 편지를 읽고 몸을 추스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네 식구 중,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갔네. 남편은 발진티푸스, 딸은 이질 병으로. 나도 언젠가는 그 나라에 가야 하는데 병이나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이 조선 땅에서 진정 내가 남편 대신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홀 부인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었다.
화진포의 성 [17]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7]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0월 29일(목) 13:54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에디스가 하늘나라로 간지 일 년이 지났다. 홀 부인은 환자를 돌보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로는 깊은 회의도 밀려왔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아픔을 참으며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제임스. 당신은 전쟁부상자를 돌보다가 하늘나라로 갔고 사랑하는 딸 에디스까지 질병으로 내 곁을 떠나갔어요. 의사인 엄마가 딸을 지켜주지 못했어요. 너무나 슬프고 외로워요. 그러나 조선에 와서 제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겠지요? 그 일이 무엇인지 기도하고 있어요. 다행히 우리 아들 셔우드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홀 부인과 아들 셔우드는 평양 여성치료소에서 살고 있었다. 여성치료소는 1898년 6월에 문을 열었고 홀 부인의 환자는 대부분 여성 환자들이었다.
어느 날 평양감사로부터 아내가 병이 났으니 급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몇 번의 왕진치료를 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긴 감사부인은 병이 나았고 몸도 회복되었다. 조 감사는 기뻐하면서 수고비로 달걀 100개와 닭 3마리를 보내왔다.
얼마 후 여성치료소가 개원하는데 홀 부인은 치료소 이름을 평양감사에게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환자들이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올 것 같았다.
“감사님, 평양에 여성들을 치료하는 시료소를 개원하려 합니다. 감사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감사는 쾌히 승낙하였고 <광혜여원>(廣惠女院,Women’s Dispensary of Extended Grace)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서신까지 보냈다.
“내 아내가 이 치료소의 착한 사람들에 의해 병이 나은 것처럼 앞으로 많은 여성 환자들이 이곳에서 좋은 의료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지었소.”
평양감사의 배려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서양인을 배척하여 처형까지 감수하며 평양에서 진료를 시작했던 남편 제임스 홀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이렇게 우호적인 의료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 부인은 진료활동 이외에도 더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여성병원과 어린이 병동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여성선교위원회에서도 이 사업을 돕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 있었다. 친척들과 친구들도 후원하였고 에디스 이름으로 저축해 놓은 저금도 합쳤다.
1899년 8월, 병원건축을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의 모든 건물들과 선교사들이 사는 집들도 한옥이었다. 이 어린이 병동이 평양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나무판자로 누비듯 벽을 만들고 양철 지붕과 벽돌로 굴뚝을 세운 것도 평양에서 처음 보는 건축물이라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병원 건물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홀 부인은 이 병동의 이름을 “에디스 마거리트 기념병동”이라고 지었다. 이 기념 병동에 등장한 명물은 커다란 ‘물탱크 저수장’이다. 평양에서 처음 보는 깨끗한 물의 공급원이었다. 이질 병의 가장 큰 원인은 오염된 물이다. 이질은 그토록 사랑하던 딸 에디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홀 부인은 식수에 많은 신경을 썼고 좋은 수원지와 물 저장고를 만드는 일은 병동을 짓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관청에 물탱크 건축허가를 신청했는데 관료들과 주민들이 심하게 반대하였다.
“평양은 지형이 배처럼 생겼는데 저수탱크를 만들기 위해 땅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을 것이오.”
관료들도 미신이나 풍수지리를 믿는 주민들과 마음을 같이 하며 건축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홀 부인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 일이이야 말로 평양 주민의 건강을 지켜 줄 수 있는 길이다. 무지한 그들을 원망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이런 실상을 바로 알려 마음이 열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관료들을 만나러 갔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강물을 떠다 먹어도 괜찮지만 몸이 연약한 아이들이나 병자에게는 깨끗한 식수가 필수입니다. 식수가 불결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그 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물 저수탱크 구멍을 시멘트와 벽돌로 단단히 막을 것이므로 평양은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홀 부인의 얼굴에 이질 전염병으로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이 묻어 있는 것을 그들도 눈치챘는지 결국 끈질긴 설득 끝에 구멍을 튼튼하게 막는다는 조건으로 관리들은 청을 들어주었다.
“하긴, 저 서양 여의사는 남편과 딸을 잃어버리고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양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있으니 주민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이번 시설은 허락해 주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여 깨끗한 식수 저장고가 완성되었다. 비가 오면 양철 지붕으로부터 물탱크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미국에서 수입한 특수 금속 파이프가 설치되었다. 커다란 탱크 위에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셔우드를 시켜 비가 올 때마다 파이프의 특수 레버를 움직여서 먼지 섞인 물을 제거한 다음 흐르는 빗물을 물탱크에 보내는 일을 맡겼다. 단순한 일이라서인지 셔우드는 책임지고 잘 해냈다. 그 일이 재미있었는지 은근히 비가 오길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병원 일을 하면서도 홀 부인은 남편과 에디스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낸 아픔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에디스를 보낸 지 2년이 지났는데도 밤이면 괴로움으로 눈물짓는 날이 많았다. 홀 부인은 마음을 달래려 셔우드를 데리고 상해로 잠시 휴가를 떠났다. 그때의 감정들을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요즘 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 때도 있고 내 인생의 아픔이 점점 깊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내 심정을 차마 글로 쓰기조차 두렵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내게 주어진 이 아픔이 주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사할 수가 없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이런 시련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의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이런 심정은 기독교 선교사의 입장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가장 두려운 시련이다. 나는 머리를 식히려고 셔우드를 데리고 상하이에 갔었다.
상하이에서 피치 부인에게 내 심정을 말하였다. 피치 부인은 나의 이러한 아픔은 당연한 감정이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닥터 홀과 에디스가 떠나간 일을 몹시 애석해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주님의 뜻으로 돌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피치 부인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다시 힘을 차리도록 위로와 여러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닥터 홀은 나를 지극히 사랑했으므로 내 영혼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이 편안하길 원할 것이다. 나는 2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신이 무분별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계속 나를 지켜주시고 성령께서 부족한 내 믿음이 다시 회복되고 감사가 충만하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믿으며 다시 평양으로 왔다.”
선교사 일지라도 인간적인 깊은 고뇌가 깃든 홀 부인의 일기를 아들 닥터 셔우드 홀은 훗날 어른이 되어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겉으로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어린 자신을 데리고 이렇게 큰 아픔을 삭이며 신앙으로 그 어려운 시절을 이겨 내셨구나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고 숙연해졌다고 한다.
휴가에서 돌아온 홀 부인은 마음을 추스리고 맹인들을 위한 점자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병동에 눈먼 소녀들을 위한 점자 교육 장소를 마련하고 주변에 눈먼 소녀들이 있으면 병동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점자 교육 장소를 개소한 이튿날, 밖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오봉래 에비 오 씨예요”
“아, 오 씨!……. 어서 들어오세요.”
화진포의 성 [18]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8]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1월 11일(수) 09:13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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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닥터 홀이 처음 평양에서 병원을 매입하는데 이름을 빌려주었고 신앙의 박해를 받으며 함께 어려움을 겪은 오 씨였다. 오 씨는 눈이 먼 딸 오봉래의 손을 잡고 들어 왔다.
“어서 오세요. 그러잖아도 뵙고 싶었어요.”
홀 부인은 오 씨를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오 씨는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 후 봉래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홀 부인은 오봉래에게 점자 교육을 시작했다. 교재는 ‘뉴욕 점자’를 조선말에 맞게 고쳐서 사용하였다. 처음 이 점자 교육은 진도가 느리게 나가고 지루하였으나 봉래가 점자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해득한 후에는 진도가 빨랐다. 오봉래는 점자책으로 교육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 맹인이었다.
그해 겨울, 홀 부인은 여가를 이용해서 조선어 점자교재를 다시 만들었다. 빳빳한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작은 구멍을 뚫어 키보드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교재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 존스 여사가 지은 ‘조선어 기도서’, 그리고 ‘십계명’이었다.
놀랍게도 오봉래는 일 년 만에 홀 부인이 만든 모든 교재를 읽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놀라워했다. 총명한 그녀는 점자로 글을 쓸 수도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받아 맹인 친구들에게 초보적인 점자를 가르쳐 주기까지 하였다. 홀 부인은 봉래에게 뜨개질도 가르쳤다. 손끝의 감각이 남달라 잘 따라 하였고 목도리를 떠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하였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장님인 제가 글을 읽고 뜨개질도 할 수 있다니…….”
봉래가 글을 읽고 뜨개질을 하며 행복해한다는 소식이 병원 안과 밖에 널리 퍼졌다. 직원이나 환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맹인 소녀들도 받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홀 부인은 맹인 소녀들도 정상적인 소녀들과 함께 배워야 하며 가능하면 여러 놀이나 운동에 똑같이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그 시절에 조선에서 첫 번째 ‘맹인학교’가 생기게 되었고 평양 여학교가 설립된 후에 맹인반이 추가되었다.
초보 학생을 위한 특수교사들을 훈련 시켜서 교사진에 합류시키는 일도 필요하였다. 홀 부인은 봉래를 교사로 훈련 시키기로 하였다. 여러 훈련과정을 거쳐서 결국 봉래는 특수교사가 되어 앞을 못 보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어려운 점을 알고 있어 더 섬세하게 가르치게 되었고 배우는 학생들도 편안하게 배울 수 있었다. 맹인학교는 계속 커져서 후에 ‘청각 장애인’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평생 보고 듣지 못하며 힘겹게 살아가야 할 그녀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게 되었다. 조선에 아직 신문화가 들어오기 전인 1899년 여성들에게는 어두운 은둔의 시절에, 어려운 시련을 참으며 의료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한 닥터 로제타와의 만남으로 앞을 못 보는 소녀들은 새로운 광명의 삶을 살게 되었다.
병원 일이 조금씩 안정되자 로제타 홀 부인은 의료선교 초청을 받아 지방교회를 방문 하게 되었다. 닥터 홀이 평양에서 교회를 시작한 후 8여 년 만에 지방에 스물아홉 개의 교회가 생겼다.
이제 7살이 된 아들 셔우드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셔우드는 조랑말도 잘 타는 용감한 꼬마였고 성격도 활발하고 진취적이었다. 홀 부인과 간호사 수잔, 셔우드, 마부, 선교 일을 돕는 일행은 세 마리의 조랑말에 의약품을 싣고 길을 떠났다. 조랑말의 등을 중심으로 양쪽에 의약품과 짐을 실은 상자를 걸쳐놓고 한가운데는 짚을 갈아 푹신하게 하여 그 위에 셔우드를 앉혔다. 어느 한쪽으로 쓰러질 때 잡을 수 있는 난간 같은 것을 만들어 주어 등을 받칠 수도 있었고 급할 때 손잡이 역할을 하게 해주었다.
셔우드는 이 선교여행이 무척 재미있었나 보다. 조랑말들의 목에 방울 종이 달려있어 움직일 때마다 종소리를 냈다. 마을을 지날 때면 종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고 치료와 약품을 받을 때는 서로 먼저 받겠다고 소란을 피우기도 하였다. 일과가 끝나면 여인숙에서 잤는데 빈대, 벼룩, 이가 들끓어 살충제 가루를 뿌리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주를 통과한 후, 운산으로 가기 위해 밑이 납작한 나룻배에 조랑말까지 싣고 청천강을 건넜다. 운산에서 10km 떨어진 곳에 ‘동양연합광산회사’가 있었는데 ‘미국금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벙커 목사는 운산 지역의 선교사로 있었고 운산은 평양보다도 여성을 격리시키는 풍습이 엄격하여 여성들을 전도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 광산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조선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본국 사람들의 방문은 마치 가족을 만난 듯 기쁜 일이었다. 꼬마 셔우드는 귀여움을 독차지하였고 선물도 듬뿍 받았다.
광산 주변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이삼 층으로 지어진 건물, 서양식 유리창과 지붕들, 벽돌로 만든 굴뚝, 기계들이 돌아가는 분주한 소리 등등 평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고 같이 갔던 마부들도 얼굴에 신기한 표정이 가득하였다.
광산의 테일러 소장은 일행들이 돌아갈 때 무장한 호위병을 한사람 동행시키겠다고 하였다. 길이 험난해 도둑과 호랑이가 가끔 행인을 습격한다고 하였다. 거절하였지만 테일러 소장의 강력한 호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른 마을도 들려 낮에는 진료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예배를 드렸는데 마을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홀 부인은 감동했고 남편 닥터 홀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제임스, 당신이 조선에서 뿌린 복음의 씨앗이 이렇게 많은 싹을 틔우고 잘 자라고 있어요! 저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당신을 보듯 저도 행복해요.”
홀 부인은 이번 여행에서 돌아와 비로소 마음에 평안을 찾았고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병원 일과 환자를 돌보는 일에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
꼬마 셔우드는 친구들과 놀이를 하며 잘 자랐다. 대부분 친구는 선교사들의 자녀였는데 노블 목사의 딸 루스와 그녀의 남동생과 함께 놀았다. 가끔 노블 목사의 젊은 비서가 아이들의 놀이에 합세하였다. 아이들은 그를 좋아하였다. (훗날 셔우드는 그 비서의 안 좋았던 행동을 광산 소장께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울면서 애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놀며 영어 회화를 배우려고 하였다. 영어를 배우는 대신 선교사 자녀들에게 조선 민속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연싸움’을 여자아이들에게는 ‘널뛰기’를 가르쳐 주었다.
연싸움은 하늘은 날고 있는 상대방의 연을 떨어뜨리고 자기의 연을 높이 날려야 이기는 경기이다. 연을 만든 후 깨진 유리 조각을 잘게 부셔서 그것을 풀에다 섞어 연 가까운 부분의 실에다 묻힌다. 이 날카로운 부분으로 바람에 날리는 연을 얼레로 조종하며 상대방의 연줄을 끊어야 한다. 이 놀이는 상당한 인내심과 연을 만들고 날리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였다.
그밖에도 겨울에는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눈사람 만들기’, ‘팽이치기’ 놀이를 하였다. 봄철에 평양에서는 조선 전통의 ‘돌 던지기시합’이 있었는데 이 경기가 열릴 때면 서양에서 권투시합에 군중이 몰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두 편이 알맞은 돌멩이를 골라서 가장 멀리 던지는 것을 겨루는 경기이다. 소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위해 돌멩이를 윤기가 나게 갈고 닦았다. 경기 장소는 성 밖이었지만 위험한 경기라 홀 부인은 셔우드를 데리고 성 위의 편안한 곳에 가서 시합을 관람하였다.
“선수들이 던진 돌멩이가 관중들 위에 떨어질 경우도 있으니 성 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 성 위에서 구경하거라!”
어머니가 타일러도 모험심이 많은 셔우드는 몰래 성 밖을 빠져나가 군중 속에서 응원하며 열광을 하여 홀 부인은 걱정하며 찾아 나설 때가 빈번하였다.
“셔우드가 학교공부를 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 저렇게 놀게만 해서는 안 되는데 어쩌나?”
홀 부인은 셔우드의 교육문제로 많은 고심을 하게 되었다.
화진포의 성 [19]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19]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1월 11일(수) 16:25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셔우드의 교육 문제로 고심하던 홀 부인은 주변 국가의 외국인 학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중국 내륙지방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영국식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서해를 건너 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아직 일곱 살 밖에 안 된 셔우드를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낼 수는 없어….’
스웰렌 목사도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스웰렌 목사는 닥터 홀이 처음 평양에 병원을 시작한 후 평양에 온 장로교 선교사이다. 부인이 두 아이에게 직접 학습지도를 하고 있었다. 셔우드도 그들과 함께 공부를 시키기로 하였지만 정상적인 교육과정에 의한 공부를 시켜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이런 교육 방법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어요.”
“아이들을 중국까지 보내지 않고 정상적인 교육과정에 의해 교육시키는 방법은 없을 까요?
“그렇다면 합법적인 교육기관이 있어야겠어요. 교사도 있어야 하겠구요.”
홀 부인과 스웰렌 부인은 선교사들의 자녀를 위해 평양에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 무렵 평양에 장로교 선교사로 있었던 월리엄 베어드 박사 부부도 합세하였다. 그때 베어드 가족은 미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미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를 모셔오는 임무를 맡았다.
스웰렌 박사는 미국에 가서 안식년을 보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선교활동 사례들을 알렸다. 어느 집회에서 설교를 하며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와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18살 된 루이스 오길비(Louise Ogilvy)양이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큰 감동을 받았다.
“아빠, 엄마, 제가 조선에 가서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그 뜻은 기특했지만 18살 밖에 안 된 딸을 멀리 보낼 수 없어 오길비의 부모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스웰렌 박사 가족이 안식년 휴가가 끝나고 조선에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도 조선의 외국인 학교 교사직을 맡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자 결국 오길비의 강한 의지는 부모님을 설득하였고 어린 처녀 선생님은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평양 외국인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후에 조선의 선교사 자녀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다른 아시아 지역의 선교사 자녀들까지 유학을 왔다.
홀 부인은 학생들이 훗날 미국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뉴욕 교육심의회에서 제정한 교육과정을 그대로 적용하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모든 교재나 교과과정을 그대로 이수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 ‘평양 외국인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은 본국에 가서 중퇴자 없이 대부분 상급학교로 바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후, 오길비 선생님은 평양의 감리교선교사로 있는 모리스(Charles D. Morris) 선교사와 결혼 하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이 뜻깊은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모리스한테 시집가려고 젊고 예쁜 선생님이 조선으로 오게 된 것 같다며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겨울철 놀이로 아이들은 팽이치기 즐겼다. 손으로 깎아서 만든 나무 팽이를 얼음판 위에서 회초리로 치면 팽이는 뱅뱅 돌아갔다. 이 팽이가 멈추지 않고 오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이 이긴다. 조선 아이들은 채찍 같은 끈을 가느다란 나무에 묶어 팽이를 치면 팽이는 잘 돌아갔고 선교사의 자녀들도 서툰 대로 팽이놀이를 즐겼다.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이에 열중하다가도 가끔 운산에 있는 ‘미국 금광’으로 가는 짐을 실은 조랑말들을 몰고 지나가는 일행을 만나면 팽이 놀이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 일행 중 말 한 마리는 처음 보는 튼튼한 나무상자를 싣고 있었는데 호위병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었다. 이 상자들은 언제나 선교사의 집으로 옮겨졌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상자 속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조선인 일꾼들에게 지불할 은화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 평양에는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의 집에 보관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조선 일꾼들은 지폐보다 은화를 더 원했다. 그래서 일꾼들의 수고비를 줄 때가 되면 부피가 큰 은화를 보관하고 옮기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 말썽 없이 잘 보관되었는데 어느 날 미국인 금광의 간부가 보관했던 짐을 다시 말에 실으려 했을 때 문제의 상자가 가벼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상자를 열고 은화를 세어 본 결과 예상대로 은화의 일부가 없어졌다. 이 상자는 오는 도중 경호를 받았고 선교사의 집에서도 문단속을 잘 했는데 도난사고가 난 것이다.
도둑을 찾아낼 수 없자 금광 관계자들이 대책을 의논하였다. 광산에서 곰이나 산짐승을 잡는 ‘덫’을 가져와서 상자 안에 몰래 넣어 도둑을 잡자고 하였다. 다음 달 다시 은화상자를 이곳에 가져올 때 그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산짐승을 잡는 ‘덫’으로 도둑을 잡는다는 것은 극히 위험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노불 목사를 비롯한 몇몇 선교사들은 이 계획이 위험하다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돈을 찾아야겠다는 금광 관계자들의 강한 주장으로 선교사들의 의견은 묵살 되고 말았다.
다음 달 일꾼들의 품값을 운반하는 날이 되었다. 선교사의 집에 보관한 은괴 나무상자 뚜껑에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만들었다. 구멍을 뚫은 후 상자에 은화를 가득 넣은 후 그 위에 덫을 살짝 올려놓은 후 뚜껑을 닫았다. 상자를 보관한 벽장 속은 캄캄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상자 속에 손을 넣기만 하면 덫에 걸리게 해 놓았다. 도둑은 필시 흉악범일 거라고 말했다.
그 날 밤, 모두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특히 노블 목사는 입을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덫에 잡힌 도둑은 노블 목사가 아끼는 조선인 비서였다. 그는 덫에 걸린 채로 상자를 끌고 달아났지만 피를 많이 흘려 얼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무장한 감시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잡아왔다. 감시인들이 상자를 열고 덫을 풀었을 때 그의 손은 끔찍하게도 이미 반쯤 잘려져 있었다.
출혈이 심한 그는 급히 홀 부인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외과 닥터인 홀 부인은 응급으로 출혈을 막고 그를 정성껏 치료하였다. 한동안 기절하였다가 의식이 돌아오자 그는 큰 소리로 울며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는 손이 잘린 상처의 아픔보다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준 노불 선교사와 부모님을 속인 배은망덕한 사실을 더 가슴 아파하였다. 놀람을 진정시킨 노블 목사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금광 직원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저 사람을 관아에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 훔친 돈은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제가 그를 책임지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노블 목사의 간청으로 금광 직원들은 그를 관아에 넘기지 않기로 하였다. 어린 셔우드도 눈물을 흘리며 아저씨를 붙잡아 가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 민속놀이와 영어를 서로 가르쳐 주며 정이 들었나 보다. 그 비서가 손이 나은 후에도 노블 목사는 그를 잘 보살펴 주었고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길 기도하였다.
그즈음 (1902년경), 하와이에서 조선인들에게 설탕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으로 갈 노무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노블 목사는 그가 충분히 마음을 돌이켰지만 얼굴에 항상 그늘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 부부를 하와이로 보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여 의사를 물었다.
“목사님, 하와이로 가겠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형제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주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세요!”
노블 목사는 그들 부부를 웃으며 환송하였다.
“아저씨, 잘 가셔요! 언젠가 미국에서 만나면 좋겠어요. 우리가 가르쳐 드린 영어 잘 사용하셔요”
셔우드의 말에 그는 눈물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셔우드는 비서아저씨가 자기들과 영어 공부한 것이 하와이에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노블 목사 비서가 하와이로 떠나간 후 어느 날, 미국에서 반가운 전보가 왔다. 홀부인은 상기된 목소리로 커다랗게 말했다.
“에스더가 온대요! 의과 대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의사가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온대요!”
화진포의 성 [20]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0] / 삽화 윤광자 화가
2020년 11월 25일(수) 12:0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1900년 봄, 에스더 박이 미국에서 의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녀는 조선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한 조선 최초의 여의사였다. 남편 닥터 홀이 하늘나라로 간 뒤 미국 친정으로 둘째 에디스 마거리트를 출산하러 갔을 때, 에스더는 의학 공부를 하겠다고 함께 미국으로 갔었다. 이화학당의 소녀 제자 에스더가 이렇게 훌륭한 의사가 되어 귀국한 일이 홀 부인은 정말 대견하고 기뻤다.
그러나 에스더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돕겠다고 함께 미국으로 갔던 남편 박유산이 미국에서 폐결핵으로 병사 한 것이다. 박유산은 아내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볼티모 식당에서 열심히 일하며 아내 학비를 보탰다. 그러던 중 폐결핵에 걸렸다. 에스더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현재 존스 홉킨스대학) 졸업반이던 해에 박유산은 이국땅에서 병사하였다.
“당신은 특별한 재능을 받았으니 훌륭한 의사가 되어 홀 부인처럼 우리나라의 어려운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어야 해요. 내가 당신을 돕고 당신 곁에서 힘이 되어 주겠소.”
이렇게 말하며 매일 격려해주던 남편이었다. 이국땅에서 고생만 하고 아내가 의사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릴게요.”
에스더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였고 당당히 의과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병원의 좋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도 있었는데 홀 부인을 도와 고국의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최초의 조선인 여의사가 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에 돌아온 에스더는 홀 부인의 의료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홀 부인과 함께 일한 10개월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였다. 병원 사람들은 그녀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에스더는 홀 부인 집에서 함께 살았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셔우드는 에스더를 이모라고 불렀다. 에스더는 매우 감미로운 선율이 있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노래도 잘 부르고 가끔 셔우드에게 시를 낭송해 주거나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그런 에스더를 셔우드는 아주 좋아하였고 친 이모처럼 따랐다.
닥터 에스더가 귀국하고 병원도 차츰 안정되자 홀 부인은 기도하던 중 낙후된 환경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고생하는 오지에 있는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을 치료해주는 의료선교를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에스더와 상의하였다.
“그런 의미 있고 귀한 일은 선생님 아니면 할 분이 없어요. 환자들은 제가 돌볼 테니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에스더는 사랑이 가득한 격려의 말을 하였다. 홀 부인은 힘을 얻어 병원 일과 셔우드, 어린이 병동까지 잠시 에스더에게 맡기고 간호사와 함께 의료선교 여행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주님, 저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 이 일을 계획하시나요? 이번 선교 여행에서 어떤 환자를 만나게 해 주시려는지요?”
선교 여행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노블 목사가 불길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을 15일 이내에 다 죽이라”는 비밀 지령이 관청에 내려졌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언더우드 박사가 모펫 목사에게 라틴어로 보낸 것인데 노블 목사가 해주에서 평양으로 가져온 소식이다. 노블 목사는 선교 여행을 반대하였다.
그 전에도 북쪽 지방에 그런 벽보가 붙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홀 부인은 염려되고 망설임도 있었지만 영국 영사로부터 공식적인 시달도 받은 일이 없는데 소문만 가지고 자신을 기다리는 조선인 환자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영사는 중국에서 반기독교적인 봉기에 대한 경험이 많은 분이므로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경고해 주었을 텐데 영사관에서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홀 부인은 고심하며 망설이다가 의료 선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노블 목사께 송구함과 염려해 준 것에 감사드리고 기도를 부탁드렸다. 닥터 포웰, 리 목사, 모리스 선교사와 일정을 의논한 뒤 필요한 의약품과 그 밖에 진료할 때 필요한 짐을 꾸리고 말도 준비했다.
“주님, 이 선교 여행을 무사히 잘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환자들의 질병에 맞는 약을 주어 그들의 병이 낫게 하시고, 제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홀 부인은 일행과 함께 시골로 떠났다. 그렇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기독교인들 살상을 시작한다는 날짜 이전에 돌아올 수 있도록 여정을 이틀 정도 줄였다.
그 날 오후 첫 번째 마을에서 진료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을 그들을 환대하였고 고마워하며 약품을 받아갔다. 그 다음 날은 다른 마을을 방문했다. 마을마다 여자들이 한 방 가득 차게 모였고 남자들도 더러 있었다.
세 번째 마을에 방문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그 마을에 정신병 환자가 있는데 그 여자를 고쳐 달라고 홀 부인에게 데려왔다. 너무나 처참하고 불쌍한 이 여자는 34살 된 미인 과부로 남편을 잃은 지 3년이 된 두 아이의 엄마였다.
‘하나님이 이 여자를 만나게 하려고 나에게 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 여행을 시키신 것은 아닐까?’
홀 부인은 여자를 찬찬히 살펴보며 이렇게 심하게 정신병이 생기게 된 이유를 물었다.
사람들은 몇 달 전 이 여인이 평양을 다녀온 후 정신이 돌았다고 하였다. 그 후 여자를 넉 달 동안이나 작은 골방에 가두어 놓았다고 했다.
방은 작고 컴컴하였으며 벽은 도배도 하지 않은 흙벽이었다. 창문이 없어 습하고 불결했고 작은 출입문 하나가 있었다.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안에 조롱박 바가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음식을 갖다 주었나 보다. 먹다 남은 음식이 담겨 있었다. 돼지들의 먹이와 다름없는 불결한 음식물이었다. 방안에서는 돼지우리에서 나는 것 같은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이 여자가 병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20일 동안이나 떠들썩하게 굿을 하였다고 한다. 무당들은 귀신을 쫓아낸다고 여자를 때리고 몸을 불로 지져서 몸 여러 군데가 상처가 심하게 헐어 있었다. 이렇게 해도 병이 낫지 않아 여자를 골방에 가둔 것이다.
‘아, 주님, 어찌 이럴 수가…….’
홀 부인은 그 가족들을 불러 말하였다.
“멀쩡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비위생적인 어두운 골방에 가두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입니다. 어서 밝은 방으로 이 여인을 옮기도록 하세요.”
이 여인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어쩌자고 여자의 성기를 6일 동안 매일 뜨거운 불로 지지고 머리 정수리와 뒤통수까지 불로 지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기적 같았다.
여자를 진찰하였다. 약물을 투여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시키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홀 부인은 이 여인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방법을 생각하였다. 치료하면서 차츰 그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홀 부인은 예전부터 적절한 시설, 장소, 보조 인력이 구비 될 때까지는 정신병 환자들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처참한 상황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저들도 인격을 가진 소중한 생명이 있는 사람들인데…….’
에스더가 의사가 되어 도와주고 에스더의 여동생까지 병원 일을 돕고 있으니 병원의 한 병동만 개조할 수 있다면 불쌍한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병동을 지을 후원금만 마련할 수 있다면 두 개의 병동을 더 지어, 하나는 전염병 환자 병동으로, 하나는 정신병 환자 병동으로 사용하면 좋을 텐데…….”
홀 부인은 어려운 가운데 이번 선교 여행을 다녀오게 하신 주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마을을 더 들려 예정대로 의료 활동을 한 후 평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땅이 너무 질어서 힘들었다. 11월의 가을비가 내리고 날씨도 점점 추워졌다.
“엄마, 잘 다녀오셨어요?”
셔우드가 병원 마당에서 뛰어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엄마가 며칠 없었는데도 이 용감한 꼬마는 활기차게 잘 지내고 있었다. 셔우드는 일행보다는 함께 다녀온 조랑말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조랑말 목을 껴안기도 하고 등을 토닥이며 문질러 주기도 하였다. 겁도 없이 호기심 많은 아들을 바라보며 아빠 닥터 홀을 많이 닮은 것 같다고 말하여 모두들 웃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병원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모처럼 편안한 가을 저녁을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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