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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후두두... 툭툭!
휘이이잉!
돌연, 사울림 위로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그것은 이내 물기를 머
금더니 곧이어 비로 변하고 있었다.
사울림, 일명 죽음의 숲. 엄청난 고목들과 기암괴석들이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며 빽빽이 자리잡고 있는 오지(奧地), 그 사이에는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산중 소로(小路)가 실낱처럼 이어져 있었
다.
그 산중 소로에 문득 사 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백리천 일행
이었다.
"호호호, 천오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쉴 곳이 나와요."
각금혜와 각금금은 백리천의 한팔씩에 매달린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쉴 곳...?"
"예! 폐찰(閉刹)이 하나 있어요. 그곳에서 비를 피한 후 다시 가
기로 해요."
각금금이 안기듯 매달리며 대답했다.
헌데 이때, 백리천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오빠! 왜 그러세요?"
백리천이 긴장된 빛을 떠올리자 각금혜의 얼굴이 굳어졌다.
"쉿! 태연히 걸음을 옮기시오."
순간, 백리천이 입도 열지 않은 채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헉! 이것이 무슨 무공이란 말이야...!'
각금금과 각금혜의 눈이 커졌다. 백리천은 분명 입도 열지 않았는
데 그의 생각이 그들의 뇌리에 동시에 전해져 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결코 음성(音聲)이 아니었다. 백리천이 발하고 있는 것은
불문의 혜광심어(慧光心語)와 흡사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상대
의 뇌리에 전달하는 고도의 기공인 것이다.
"...!"
"훗!"
모두의 눈에 의혹과 경탄이 어려 잠시 망연해 있을 때, 돌연 백리
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산아야! 이 두 거송(巨松)을 잘 보아라!"
"...?"
"이 두 거송만이 유독 비에 젖지 않았구나."
"아! 그렇군요."
백리천 일행이 나아가고 있는 좌측, 그곳에 두 그루의 나무는 다
른 나무들에 비해 깨끗했다.
"후후...!"
돌연, 백리천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었다.
"혈응십조사선(血應十爪死線)."
찰나, 그의 입에서 냉혹한 일갈이 터졌다.
쉬이이이익!
파파파파!
날카로운 파공음, 마치 악마의 호곡성같은 파공음과 함께 열가닥
의 혈광이 가공할 속도로 두 그루 거송을 향해 덮쳐갔다. 어느새
백리천의 열손가락이 마치 매의 발톱인 양 꼿꼿이 세워진채 거목
을 파고 들고 있었다.
우지직!
"크아아악!"
둔탁한 음향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성이 울렸다. 순간 거송으로부
터 피분수가 솟구쳤다. 놀랍게도 거송과 같은 무늬의 의복을 걸친
이 인이 그 속을 파고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쿠구궁!
두 구의 시체가 지면을 굴렀다. 이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
의 일이었다.
헌데, 아아, 두 구의 시체를 보라! 마치 악마의 이빨에 뜯긴 형상
이랄까, 아니면 흉폭한 야수의 발톱에 찢긴 형상이랄까! 이 인의
전신에는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손톱자국이 빽빽이
세 치 깊이로 패어져 있지 않은가!
"아아...!"
"저, 저럴 수가!"
각금혜와 각금금의 안색이 질려갔다. 실로 끔찍한 무공이었던 것
이다.
시신의 전신을 단 한 군데의 성한 데도 없이 갈가리 찢어버린 조
공(爪功), 이것이 바로 대막의 붉은 독수리라고 불리우는 대막혈
응신 강응차의 독문무공인 혈응십조사선이었던 것이다.
'으음! 죽음의 손톱자국이라는 가공할 무공, 혈응십조사선의 위력
이 이 정도인 줄은 나도 몰랐다!'
백리천의 얼굴에 역시 놀람이 스치고 있었다.
"으음... 으!"
이때 이 인 중 한 명이 겨우 고개를 들며 꿈틀거렸다.
"무서운... 놈, 같으... 니... 허나...."
그 자는 이제 곧 숨이 넘어갈 듯 힘겹게 입을 열고 있었다.
"허나... 너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너를 죽... 이기 위
해... 관부의 최고수 칠... 인이...."
"관부의 고수들?"
백리천의 눈에 새삼 한기가 떠올랐다. 겨우 저주의 말을 퍼붓던
자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며 그대로 지면에 얼굴을 묻었다.
쏴아아아...!
후두두두둑!
그의 시신 위로 더욱 빗발이 굵어지며 그들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지면 멀리 퍼뜨리기 시작했다.
"음! 생각보다 천군단의 공격이 집요하군."
백리천의 눈에 의혹에 가까운 빛이 스치고 있었다. 백리천은 시신
들을 내려다 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천공은 먹구름과 어둠으로 인해 흑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④
인적이 없는 깊은 숲 속의 폐찰.
비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 채 폐찰이 왠지 음산한 사기(邪
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예의 폐찰로부터는 한 가닥 불빛이 흘러나와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음? 누군가가 있나봐요."
어둠 속에서 문득 의혹에 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바로 각금혜의
음성이 아닌가. 동시에 사 인의 모습이 폐찰 앞에 나타났다. 백리
천과 천해산, 그리고 각씨자매들이었다.
"호...!"
백리천이 조용한 눈으로 폐찰을 쓸어보았다.
"저곳에 있는 사람은 분명 나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오.
대담하게 불을 밝힌 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무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듯하구료!"
이때 폐찰 안으로부터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무아미타불...! 그렇소. 시주, 노납은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이다."
'나무아미타불... 노납? 승인이란 말인가?'
모두의 눈에 의아로움의 빛이 스쳤다.
"어멋! 스님이...?"
각금금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백리천을 죽이
기 위해 천군단의 사주를 받아 출동한 관부의 고수가 의외로 불문
의 사람이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도련님! 어떤 병장기를 드릴까요?"
천해산이 백리천을 바라보았다. 기실 천해산은 천병해전의 모든
병장기의 삼분지 일 가량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백리천을
위한 것이었다.
"필요없다!"
백리천은 손을 저은 후 천천히 폐찰을 향해 다가갔다.
"도련님! 뒤에도 웬 자들의 기척이 있군요."
문득 천해산이 자신들의 뒤로 기이한 인기척을 느끼고 입을 열었
다.
백리천 일행의 삼십여 장 뒤쪽, 초립을 쓰고 등에 봇짐을 멘 이십
여 명의 흑의인들이 비호(飛虎)처럼 산을 타며 은밀히 그들의 뒤
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십여 명이 마치 산고양이
처럼 소리도 없이 질주해 오고 있었으며, 그 질서정연한 행동은
그들이 보통의 훈련을 거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지
어 낙엽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동작은 은밀한
가운데 민첩했다.
"알고 있다!"
백리천이 태연히 말한 후 폐찰로 한 걸음 다가들었다.
이때였다. 흑의인들의 선두에서 한 거구여인이 나타나며 입을 열
었다.
"우리들은 적이 아니예요."
태산같은 거구, 보통사람의 세배는 될 듯한 펑퍼짐한 몸집, 바로
청도의 저잣거리에서 생선을 팔던 여인 장돌뱅이가 아닌가! 천해
산에 못지 않은 덩치 큰 여인, 바로 저육화였던 것이다.
"이분들은 유천낭대(流天浪隊)라고 해요. 저희 구주종횡천에 소속
된 떠돌이 장사꾼들을 보호하는 사람들이에요."
저육화가 천해산을 향해 부드러운, 허나 징그럽게만 보이는 미소
를 던지며 말을 이었다.
"아! 모용대인이 도련님을 위해 보낸 사람들인 모양이군요."
천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유천낭대.
무림인들이 아니었다. 허나 구주종횡천의 보부상들을 보호하는 임
무를 맡고 있느니만큼 그들의 무공은 이미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허나 세인들은 이 유천낭대의 존재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스스스스!
휘익!
이십여 명의 유천낭대가 소리도 없이 폐찰을 포위해 들었다.그들
이 포위하고 있는 형세는 단 한 마리의 개미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엄밀한 것이었다.
다음 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유천낭대는 품 속에서
각기 얇은 연도(軟刀)를 꺼내고 있었다.
쏴아아아...!
무서운 긴장감이 떠도는 가운데 비는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유천낭대가 폐찰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백리천 일행이 서서히
폐찰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게! 소시주...."
순간 폐찰 안으로부터 창노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백리천이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폐찰 안을 둘러보았다. 폐찰의 정
중앙, 한 인물이 조용히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단전까지 늘어진 흑염(黑髥), 마구 산발된 채 휘날리고 있는 긴
흑발, 놀랍게도 폐찰 안의 인물은 분명 승인들이 입는 회색가사를
걸치고 있었으나 이와같이 머리를 기른 괴승(怪僧)이었던 것이다.
그의 안색은 붉은 기가 감돌고 있는 가운데 전신에서 상대의 마음
을 억압하는 무서운 기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흑발괴승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흥! 땡초로군!"
각금금이 조소를 던졌다.
감겨 있던 흑발괴승의 두 눈이 떠졌다. 무서운 신광이 뇌전처럼
백리천 등에게 치달렸다. 그의 눈은 각금금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
고 백리천을 직시하고 있었다.
"허허허, 소시주는 일신에 놀라운 절기를 지니고 있구료."
"...!"
"소시주의 모든 행동, 심지어 한 걸음을 내딛는 행동에도 일체의
허점이 없으니 말이오...!"
"훗!"
백리천은 그저 미소만을 보냈을 뿐이었다.
"음! 더구나 시주의 전신에는 일체의 살기도 없으니 정녕 대단하
외이다."
"후후, 그것을 알아보는 눈도 보통은 아니군요."
백리천이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관부칠인의 고수 중 한 명...?"
"허허허, 그대의 몸에서는 풋풋한 바다내음이 나는구료."
흑발괴승은 백리천의 말에 엉뚱한 대꾸를 하며 서서히 몸을 일으
켰다.
"관부칠인의 고수 중 한 명이냐고 물었소이다."
백리천의 눈에서 한기가 뻗어났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나는 이같
은 위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허허...!"
괴승이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납은... 굉천(轟天)이라 하오. 관부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
겠지... 한때는 국사(國師)로서 활동했으니 말이오."
백리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 굉천대선사(轟天大禪師).
소림장로원(少林長老阮)의 이십대 원주를 지낸 바 있는 소림기승
(少林奇僧). 그는 말년에 황궁의 황사(皇寺)까지 지낸 바 있는 소
림 최대의 기인이었다.
"굉천... 대선사!"
각금혜의 눈이 커졌다.
"저, 저 사람은... 이십 년 전 황궁의 역모에 관련되어 처형되었
다고 알려진 사람인데...?"
그녀의 음성에는 강한 불신과 의혹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소림의 일대기승 굉천은 이십 년 전 황궁의 역모에 휘말려 처형되
었다고 소문나 있었고, 그 이후로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허허허, 아직도 노납의 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었구료."
굉천대선사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난 세월에 대
한 회한같기도 했고, 또 자신의 이름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해주는데 대한 기쁨의 빛같기도 했다.
"그, 그렇다면... 스님이 진정 굉천대선사란 말입니까?"
각금금이 외치듯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말투는 이제 곧 대적해야
할 사람에게 질문하기 보다는 죽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살아 남았
느냐가 더욱 궁금한 그런 것이었다.
"허허허, 노납의 지기인 천군께서 황상께 탄원하였던 것이오.천군
덕분에 노납은 두 다리와 두 무공만을 잃었을 뿐이지요."
각금혜와 각금금의 눈이 커졌다. 굉천대선사는 두 다리를 잃었다
고 하나 그는 분명 두 다리로 서 있었고, 무공을 잃었다 하나 그
의 전신에서 풍기는 절대고수의 풍도는 실로 숨막힐 정도인 것이
다.
"허허허, 이 두 다리는 의족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나의 무공은
천군의 대제자께서 회복시켜 주었소이다."
각금혜와 각금금은 할 말을 잊었다.
각금혜는 긴장된 얼굴로 백리천을 향해 전음(傳音)을 보냈다.
(천오빠! 저 사람이 정말 굉천대선사라면 그는 일백이십만 건흥군
(建興軍)의 교두(敎頭=무술사범)를 지낸 바 있는 인물이니만큼 조
심하셔야 해요.)
백리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만 해도 족히 오갑자(五甲子)에 이를 정도예요.)
각금혜는 못내 불안한 듯 재차 전음을 보냈다.
'으음! 천군의 지기라? 놀라운 인물임에는 틀림없겠군!'
이때 굉천대선사가 다리 밑에서 서서히 오척 길이의 강철봉(强鐵
烽)을 꺼내 들었다.
"허허허, 소시주!"
굉천대선사가 천천히 봉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노납을 야속타 하지 말게. 노납의 무공은 대제자에 의해 회복되
었으니 그를 위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네."
'천군의 대제자?'
"자! 시작해 보세! 이 천불강봉(天佛强棒)은 눈이 없으니 조심 하
게나. 더구나 이 천불강봉에서 펼쳐지는 것은 소림에서도 이미 맥
이 끊긴 실전비예(失傳秘藝)이니 더욱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
붕... 붕붕!
천불강봉이 서서히 그의 손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팔랑개
비가 돌아가듯 회전하기 시작한 봉은 이내 그 모습을 감추며 무서
운 파공음만을 발출하고 있었다.
헌데 회전에 의해 천불강봉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굉천대선사
의 신형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무서운 파공음만이 허
공을 떠돌고 있을 뿐 어디에도 굉천대선사의 모습은 없었다.
허나 그 순간, 백리천의 입가에 돌연 괴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
었다.
'후후, 천불성승(天不聖僧)의 불선구십구봉(佛禪九十九棒) 중 제
육십구봉이로군. 회강파천봉(回剛破天棒)이라 했던가?'
백리천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굉천대선사가 펼치고
있는 무공은 바로 백리천이 이미 익힌 바 있는 천불성승의 봉법이
었던 것이다.
"후후, 해산!"
"예!"
"나에게도 봉을 다오."
"예!"
천해산이 품 속에서 한 개의 봉을 꺼냈다. 굉천대선사가 어찌 짐
작이나 할 수 있으리오. 백리천이 들고 있는 오 척 길이의 묵봉
(墨棒)이 바로 그의 조사 천불성승이 남긴 명기임을....
백리천이 서서히 묵봉을 수평으로 눕혔다.
"회강파천봉(回 破天棒)!"
부우웅!
이때였다.
허공에서 대갈이 터지며 일진의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세가 백리
천에게 짓쳐 들어왔다. 무서운 공세가 회오리치며 백리천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파고 들었다.
"훗!"
백리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고, 동시에 낭랑한 일갈이 터졌다.
"회강파천봉!"
아아! 놀라운 일이 아닌가! 백리천이 전개한 무공 역시 굉천대선
사가 펼친 것과 똑같은 봉법이었다.
카카캉!
카앙...!
두 개의 강봉이 허공에서 격돌음을 토했다. 단 한 번의 격돌같았
으나 기실 두 개의 강봉은 십여 번 이상 부딪치고 있었다.
"헉!"
"후후...!"
경악성과 나직한 조소가 엇갈리며 두 사람의 신형이 드러났다.
"소, 소지주가 어, 어떻게... 본사의 실전절예를 알고 있단 말이
오?"
굉천대선사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후후...!"
백리천은 작게 미소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굉천대선사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지며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백리천의 태
도가 실로 광오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굉천대선사는 오척 길이의 강봉 가운데를 힘주어 누르
자 강봉은 미세한 음향과 함께 두개로 분리되고 있었다.
"시주! 이번에는 노납의 절기인 쌍봉마불환(雙棒魔佛環)을 받아
보시게."
굉천대선사의 음성에 살기가 담겨 있었다.
붕... 붕붕...!
파파파파!
굉천대선사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단봉(短棒)은 무섭게 회전하며
이내 작은 환을 이루고 있었다.
"호! 스스로 창안하신 절기인 듯하군. 좋은 수법이오."
백리천이 조소같기도 하고, 진정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후 재차 묵봉을 수평으로 누이고 있었다.
찰나, 굉천대선사의 손에서 보이지도 않는 두 개의 환이 가공할
기세로 덮쳐들었다.
허나 그 순간, 백리천의 묵봉끝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가공할 진기
를 뻗어내기 시작했다.
"일검도(一劍道)!"
우렁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백리천의 신형이 번개치듯 두
개의 환 사이를 뚫고 굉천대선사에게 쏘아져 갔다.
실로 전광석화라고나 할까? 단 한 방향으로만 뻗어내는 공세가 의
외로 두 개 환이 연출해내는 무수한 변식(變式)을 간단히 뚫고 있
었던 것이다.
"으흡!"
답답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두 개의 환을 이루고 있던 두 개의
봉이 바닥을 굴렀다.
아아, 백리천, 그의 당당한 신위(神威)를 보라! 어느새 굉천대선
사의 목줄기에 묵봉을 관통시킨 채 우뚝 서 있지 않은가!
굉천대선사의 목에 관통된 채 백리천의 한 손에 쥐어져 있는 묵봉
의 끝을 타고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섬뜩한
광경이었다.
쓰윽!
백리천이 묵봉을 잡아뺐다. 굉천대선사의 목줄기로부터 핏기둥이
뻗쳐 나왔다. 동시에 굉천대선사의 신형이 고목 쓰러지듯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엄, 엄청나다! 저 계집애같이 나약해 보이기만 하던 천오빠가 저
런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니?'
각금혜와 각금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떠졌다. 그녀들은 자신들
이 이미 깊이 마음주고 있는 백리천이 이같이 놀라운 무공을 지닌
것에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허나 또한 그의 패도적인 기질에는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흠...! 검법을 봉으로 대신 사용하였는데도 그 위력은 여전하구
나!'
이때 백리천은 내심 자신이 펼친 검법의 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
고 있었다.
"그대는 출가한 승인의 몸으로 세사(世事)에 너무 깊이 인연을 맺
고 있었다."
백리천은 굉천대선사의 시신(屍身)을 향해 담담히 중얼거리기 시
작했다.
"이미 그대는 이십여 년 전에 헛된 욕심으로 죽을 목숨인데도 아
직 그같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 죽는다 해도 나를 욕할 수는
없으리라."
백리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으카카카...! 굉천땡초를 죽이다니 제법 한 가닥 하는 꼬마로구
나!"
헌데 이때, 돌연 폐찰의 입구에서 까마귀 울부짖는 듯한 거북한
대소성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그대들은...?"
백리천이 흠칫 눈을 돌렸다. 폐찰의 입구에 어느새 나타났는지 이
인의 마의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강시같이 깡마른 이 인, 대략 오순 가량 되었을까?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전신에서는 강렬한 사기(邪氣)가 풍기
고 있었다.
마치 노파같기도 한 괴이한 용모, 분명 노인임이 분명하건만 수
염조차 없는 매끈한 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기괴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카카카...! 우리들...? 남들은 보통 남도북검(南刀北劍)이라고
하지."
이 인의 마의노인의 음성은 실로 듣기 거북한 것이었다.
"남도... 북검...?"
백리천의 눈이 새삼 그들의 전신을 쓸었다. 이 인 중 한 명은 한
자루 장검을 비스듬히 안고 있었고, 나머지 일 인은 한 자루 도
(刀)를 들고 있었다.
"남도북검!"
각금혜가 그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듯 놀란 눈을 들었다.
(오빠! 저들은 대내의 환관 중 최강고수들이에요.)
그녀는 황급히 백리천에게 전음을 보내며 긴장을 떠올렸다.
밖에 지키고 서 있는 유천낭대의 눈을 피해 폐찰 안으로 소리없이
잠입해 들어온 것만으로도 남도북검의 무공 수위를 짐작할 수 있
었다.
"환관...?"
"예! 남도북검이라면 제독태감(提督太監=수좌환관)까지 지낸 인물
이에요."
각금금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크흐흐흐, 불알이 없는 친구들이란 말이지!"
천해산이 조소를 흘렸다.
"크흐흐...! 별 잡놈들이 다 관부 고수들이라고 나서는군."
천해산의 조롱에 이 인의 안색이 싸악 변했다. 허나 그들의 전신
에서 풍기는 고요함은 일체 흔들리지 않았다.
- 남도북검.
남도 북군기(北君其)와 북검 헌원궁(軒垣宮).
이들은 전대 황조로부터 당금의 대명 태조 시대까지 환관으로 봉
직해온 환관들로서, 그들의 무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
다. 황궁정통무공의 권위자로서 대내제일 고수로 불리울 정도인
것이다.
"후후! 이번에는 검과 도라...?"
백리천이 태연히 천해산을 직시했다. 천해산은 백리천의 의도를
눈치채고 한 자루 장검과 도를 끌러 백리천에게 내밀었다.
백리천은 물론이고 천해산조차 대내제일고수라는 남도북검을 대하
고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음에 각씨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
안이 벙벙했다.
"후후...! 남도북검, 나는 도전해 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사람
이다."
백리천이 그들을 직시했다. 무서운 위세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폐찰 안을 억눌렀다.
"허나 일단 도전해 온 사람은... 곧 죽음뿐이다."
- 도전해 오는 자! 죽음 뿐이다!
어찌 광오하다고 하지 않으랴!
허나 이 순간 남도북검의 뇌리에 백리천의 태산같은 위엄이 마치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마력(魔力)같이 스며들고 있었
다.
'으음! 예상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이다!'
남도북검은 그들이 생애 최대의 적수를 만났음을 직감하고 긴장과
함께 서서히 검과 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남도는 자신의 도를 수직으로 세웠고, 북검은 반대로 수평으로 검
을 눕힌 채 검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합공의 명수들이었
던 것이다.
백리천의 무심하던 눈빛이 미미하게 빛을 발했다.
"도검합격술(刀劍合擊術)의 최고 경지인 십자살격(十字殺擊)이로
군...!"
차갑게 중얼거린 백리천은 이내 두 자루의 도와 검을 각기 나눠
쥐었다.
순간, 무서운 검광과 도광이 얽혀 열십 자를 형성한 채 폐찰 가득
히 번져가지 않는가!
그것은 이내 가공할 검강과 도강으로 변해 회오리치듯 전광석화처
럼 백리천의 전신으로 덮쳐들었다. 그 속도는 거의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로 빨랐고, 그 가공함은 강철이라도 종이 베듯 할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훗! 십자살격의 약점은 바로 그 교차하는 중심에 있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던가. 이 순간
백리천은 너무도 담담히 두 개 병장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우우웅!
백리천은 두 개 병장기의 끝만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곧 무서운 공세가 발동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순간, 백리천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과 도가 부러질 듯이
진동하며 무서운 검기를 쏟아냈다.
카앙!
챙!
두 번의 격돌음이 터지며 백리천의 검과 도가 남도북검의 검과 도
를 쳐냈다.
주르륵...!
남도북검이 비틀거리며 세 걸음 이상 밀려났다.
꽈꽝!
그 순간, 허공에서 은은한 뇌성이 울리며 백리천의 신형이 귀영
(鬼影)같이 그들을 뒤쫓아 갔다.
"소검만환식(小劍萬環式) 일도파(一刀破)!"
백리천의 우수에 쥐어져 있는 검에서는 무서운 검환(劍環)이 마치
폭발하듯 수만 개로 불어나며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꽈아앙!
또한 좌수에 쥐어져 있는 도(刀)는 지축이 뒤흔들리는 폭음과 함
께 한 가닥 섬광으로 변해 천공을 달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가공할 굉음이 이어졌다.
카강캉!
우드득!
둔탁한 소리가 퍼지고 폐찰이 무너질 듯 휘청거리며 사방으로 흙
먼지가 자욱이 솟아났다.
정녕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들의 격돌은 주위 이십여 장을 완
전히 태풍에 휩쓸리는 초지처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으...!"
"끄... 으!"
흙먼지 속에서 기이한 신음이 이어졌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헌데, 북검은 전신에 무수한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는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서 있었고 남도의 미심혈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거대
한 상처가 생겨나 있지 않은가!
그들의 상처는 워낙 순간적으로 발생한 것인지라 아직 피조차 흘
러나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남도북검은 아직 자신들이 당했
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아연한 표정이었다.
시간, 그야말로 섬전일순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들의 이마와 전
신에 난 상처에서 피가 서서히 뻗어나오고, 그들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크아악!"
"와악!"
촤아아악!
남도북검은 자신의 몸에서 뻗어나오는 진홍빛 액체를 목격하고야
자신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그제야 전신을 찌르는 고통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간 것이었다.
그들이 지면을 구르고 있을 때에 백리천은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
다.
'아아...!'
각금혜와 각금금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백리천의 엄청난 무공, 그리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살상수법
등, 백리천의 행동행동이 그녀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백리천의 어디에 이러한 패도적인 기질과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휘이잉!
바람, 짙은 피비린내를 함유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사울림을
쓸고 간다.
죽음의 숲... 사울림이었다.
■ 대상천하 제1권 제10장 죽음(死)의 숲-5
⑤
칠흙같은 어둠.
일진의 바람이 불 때마다 어둠 속의 고목들이 머리를 산발한 채
흐느끼고 있는 듯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 사울림의 정상에
는 그 어둠의 색과 어울리지 않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눈깨비 속에 한 사나이가 거대한 깃발(幡)을 들고 우
뚝 서 있었다. 육척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 검은 피부에 정녕 사
나이다움을 풍기는 이십대 후반의 미청년이었다.
나무 한 그루도 없는 사울림의 정상에 서 있는 미청년의 기태는
실로 당당했다. 신광이 번뜩이는 호안(虎眼)에 금빛갑주(金色鉀
胄)를 걸치고 있어 그 위세는 정녕 천신이 하강한 듯했다.
누구란 말인가? 그가 과연 누구이기에 인적이 없는 사울림의 정상
에 거대한 번을 당당히 든 채 우뚝 서 있단 말인가!
휘이잉...!
푸드득!
금빛갑주의 청년의 굵은 눈썹이 눈발에 휘날리는 순간 그의 입에
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후후후, 늦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이곳까지 오지 못하는 것일
까?"
그의 눈이 문득 야공을 응시했다.
"실망이군...! 멋진 친구를 만나나 했더니... 별볼일 없는 친구였
던가?"
'나, 위검종(衛劍宗), 그 친구를 보기 위해 만리장성을 넘어 달려
왔건만... 내가 만나 볼 가치도 없는 친구였단 말인가?'
금빛갑주의 청년, 그의 독백으로 미루어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
는 듯 하지 않는가!
헌데, 그가 바로 일백이십만 명친건흥군의 중랑장(中郞將)인 막북
금랑(漠北金狼) 위검종이란 말인가!
- 막북금랑 위검종.
십 년 전에 약관 십팔 세로 이미 대명친건흥군의 중랑장이라는 직
책에 제위된 인물, 명의 건국 이후 최고의 무장이라고 손꼽히는
젊은 영웅이었다.
일명, 막북의 금빛늑대.
그는 일단 전장에 뛰어들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용장으로 유명
한 청년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명대 이후 최고의 무장이라 손꼽히고 있는 막북금랑 위검종이 단
신으로 사울림의 정상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음...! 소문만 거창한 인물이었던가?"
막북금랑 위검종의 눈에 언뜻 실망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철벅!
그의 발이 물기 젖은 대지에 한 걸음 내려섰다. 기다림을 끝내고
돌아가려는 태도같았다.
"후후후, 결코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오."
헌데 이때, 조용한 음성이 돌아서려는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가! 담담하면서도 신비하도록 낭랑한 음성, 바로 백리천의 음
성이었다
위검종의 눈에 번개같이 놀란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보지 못할 짧은 순간에 이미 사라지고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
기만 했다.
위검종은 서서히 투구의 끈을 다시 조이며 몸을 돌렸다.
"그대가... 백리천?"
백리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두 개의 눈이 얽혔다. 한 명은 이미 천하를 격동시키고 있는 천하
제일의 젊은 무장이고 그리고 또 한 명은 항차 천하를 덮고자 이
제 마악 강호에 출도한 일대영웅이었다. 실로 영웅 대 영웅의 만
남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이곳까지 무사히 와 준 그대에게 찬사와 고마움을 보
내고 싶군."
위검종의 눈에는 어떠한 살기(殺氣)도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일체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어찌보면 백년지기가 서로 만난 듯
했다.
"후후후...! 그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는 그대를 실망시
킬 수는 없지...!"
백리천의 전신에도 긴장된 빛은 없었다. 그저 지기를 대한 듯오히
려 부드러움만이 떠돌고 있었다. 백리천도 영웅, 위검종도 일대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헌데... 그대가 이렇게 어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위검종이 짐짓 놀란 눈으로 새삼 백리천을 살폈다.
순간 천해산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크흐흐흐...! 감히 도련님께 어리다고 그랬나? 너는 도련님을 능
멸한 그 한 마디로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천해산이 이제라도 덮쳐들 듯 으르릉거렸다. 그러나 위검종은 태
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죽는다...! 왜? 내가?"
그는 오히려 다정한 눈으로 천해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음울한 날씨이기도 하고... 더우기 이곳은 사울림, 죽음의
숲이라는 곳이니 죽기에는 안성맞춤이겠군."
"후후, 오늘같은 날은 죽기에 더욱 좋은 날이지."
백리천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극히 절제된 감정으로 천해
산을 바라보았다.
"산, 천해황룡번(天海黃龍幡)을 다오."
"예!"
백리천은 위검종이 한 자루 번(幡)을 무기로 사용함을 알고 그 역
시 번으로 상대하겠다는 듯 천해산에게 번을 받아들고 있었다.
각금혜와 각금금는 이미 백리천을 신인(神人) 이상으로 믿고 있었
다. 해서 이같이 무서운 적수를 눈 앞에 두고도 별로 긴장된 빛도
없이 예의 활달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금아야! 저 살찐 고슴도치는 몸 속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장기
를 지니고 다니는 것일까?"
"글쎄? 우리가 본 병장기만 해도 십여 가지에 달하니, 진정 움직
이는 병기창고라고 해야 맞겠지?"
"호호, 움직이는 병기창고? 그럴 듯 하다."
두 자매의 대화에 천해산의 얼굴이 붉어졌다.
'크흐, 도대체 저 말괄량이들 하고는 언제나 헤어질 수 있을까?
정말 걱정되는구나!'
이때, 백리천이 칠척 길이의 천해황룡번을 쥐고 대치해 서자 위검
종의 눈에 은은히 놀란 빛이 떠올랐다.
"호, 그대도 번을 사용하시오?"
"크흐흐흐, 어리석은 자! 도련님은 자그마치 일천 종류의 병장기
를 장난감같이 취급하시는 줄 모르고...."
천해산이 대신 대답했다.
위검종은 천해산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느끼고 놀란 빛을 드
러냈다.
"흠! 대단하구료."
백리천의 눈이 차가워졌다.
"으흠! 개탄할 일이다. 만리장성 이북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있
어야 할 관의 무장이 일개인을 상대하기 위해 이곳 사울림까지 오
다니...!"
백리천의 질책어린 말에 위검종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하하하,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천군께서는 대명최고의 영웅이시
고, 당금 황상하고도 막역한 사이가 아니오. 내가 그분의 명을 따
르는 것이 곧 황상의 근심을 덜어 드리는 길이니 어찌 마다하겠
소!"
천군, 그가 당금의 황제와도 막역한 사이였단 말인가! 백리천은
점차 밝혀지는 천군의 거대한 힘에 한 가닥 전율조차 느끼며 서서
히 번을 세워 들었다.
휘리리릭!
두 개의 장군번(將軍幡)이 진기를 가득 머금고 죽음의 냄새를 뿌
리기 시작했다.
문득 백리천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호, 이곳에 그대말고 또 다른 인물이 있었군."
"...?"
위검종이 백리천의 돌연한 질문에 의혹해 했다. 그러다 돌연 그의
눈에 무서운 신광이 번뜩였다.
"누구냐?"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노기가 들끓었다.
"흐흐흐, 위장군, 오랫만이오."
그 순간, 허공이 웅웅거리며 기이한 음성을 토해냈다.
스스스...!
동시에 마치 어둠 한 곳이 더욱 어두워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한
인영이 장내에 내려서고 있었다. 실로 일체의 흔적을 느낄 수 없
는 소리없는 신법이었다.
나타난 인물은 검은 야행의를 걸친 육순의 애꾸노인이었다.
"아니! 그대는 금마도주(禁魔島主) 초류비(楚流飛)!"
위검종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흐흐, 나 역시 천군단의 초청으로 잠시 중원에 나왔소이다."
애꾸눈의 육순노인, 금마도주 초류비의 전신에서는 사이한 기운이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리고 있었다.
각금혜와 각금금의 안색이 질려갔다. 그녀들이 육순노인 금마도주
초류비의 출현에 공포의 기색을 떠올리자 백리천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천오빠...! 저 금마도주라는 사람은 고문술에 천하제일인자
라고 하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에요. 죽음의 섬, 금마도
의 도주(島主)로서, 대역죄를 범한 죄인들을 심문하는 직책을 지
닌 사람이에요.)
백리천이 담담히 쳐다보자 각금금이 황급히 전음을 보냈다.
'금마도주...?'
- 금마도주 초류비.
관부의 치죄(治罪) 기관인 사감부(査監府)의 금마태독(禁魔太督).
알려진 바로는 금마도주의 무공은 이미 무적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전 세인들에게 공포스럽게 부각되고 있는 것
은 그의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고문방법 때문이었다.
일단 그의 손에 걸리면 천하의 어떤 사람이라도 입을 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써 심지어, 없는 죄까지 자백하지 않을 수 없
다고 했다.
"헌데 어찌 이곳에 오셨소?"
위검종의 눈이 차가워졌다.
"...?"
금마도주 초류비의 눈에 의혹과 노기가 어렸다.
"이곳은 내가 맡은 곳이오. 내 미리 아무도 필요없다고 했거
늘...!"
"흥! 위장군의 호기는 대단하지만, 저자는 이미 남도북검까지 처
치한 인물이오. 혼자는 어렵소."
초류비가 싸늘히 웃으며 말을 끊었다.
"무엇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이오...!"
위검종이 노호를 터뜨렸다.
무서운 기개가 산악같이 일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 밟힌 것
같아 무섭게 분노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실로 남아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무모한 만
용같이도 보였으나 백리천은 어쩐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 사내다운 인물이로군. 나와 정정당당히 싸우고 싶다는 뜻이
군!'
이때였다.
두두두두두-- !
돌연, 아랫쪽으로부터 일진의 말발굽소리가 진동하지 않는가!
"어멋! 누가 이런 산길까지 마차를...?"
각씨자매가 돌연 들려온 말발굽소리에 어이가 없는 듯 눈을 동그
랗게 떴다.
그렇다! 사울림은 단신으로 넘기에도 여간 어려운 곳이 아닌데 마
차를 끌고 올라오다니 그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두두두두두!
덜컹... 덜컹!
요란한 음향은 점차 사울림의 정상, 백리천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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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