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 전, 뉴욕 과거편의 1부입니다. 좀 많이 깁니다.
―2002년, 도쿄. 에도가와 코난 7세. 8월의 여름.
흉악한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 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모리 아저씨를 이용해 수사를 하고 있었다. 단서가 무척이나 적어서 수사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고 있었다. 지문이나 상피 세포 조직― 용의자들을 색출해냈을 때 범인이라고 확신 지을만 한 단서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원한이나 인간 관계에서 벌어진 살인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자신의 욕망과 살의를 가득 담은 잔인하고도 엽기적인 살인이었다.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여성들이었다. 성폭행을 당하고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교살 당했다. 피해자가 죽어가는 걸 즐기는 악질적이고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어렵지 않게 범인이 어떤 녀석인지 프로파일링을 할 수 있었다. 범행에 대한 어떠한 망설임도 없으며 살해하는 걸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인물. 게다가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했던 인텔리하고 우수한 여성들이었다. 그런 여성들을 꼬여내 성폭행을 저지르고 살인을 했다는 녀석 또한 사회에서는 그런 부류의 인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인의 내면은 악랄한 사이코패스.
외면으로는 평범하고 멀쩡한 인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범인에 대한 단서가 부족해서 용의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본청의 수사관들은 골머리를 썩히며 그 사건에 매달릴 때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다행히 그 희생자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병원에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사정청취를 할 때 옆에서 엿들으며 지켜보니 여자는 두려움에 가득차서 제대로 말 조차 하지 못 했다.
―그, 그만해주세요!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피해자가 너무 두려워하자 일단 물러나고 다음에 오기로 한 형사들과 함께 병실을 나서는데 문자 착신음이 들렸다.
피해자의 핸드폰이었다. 생존한 피해 여성은 훌쩍거리면서 휴대폰을 보더니 눈빛이 변했다. 의아하게 여겼던 난 메일 주소를 입력하는 그 키의 음에 경악했다.
일곱 살의 아이.
그녀는 검은 조직의 일원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 3
Fiction. 하나우리
정신을 차렸을 때,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온몸이 심한 격통으로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쉬는 것도 고통이었다. 화염의 열기가 목구멍으로 들어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뭔가가 타는 매캐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눈 앞이 침침해서 뭔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목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를 치웠다. 물컹한 그것은 차가운 사람의 몸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움직여 내 몸을 짓눌렀던 누군가를 보았다.
아니, 보지 말았어야 했다. 봐서는 안 됐었다. 차라리 구출될 때 까지 정신을 놓고 있어야 했다. 내 눈앞에 있는 그것은, 그 사람은― 피투성이에다 화염에 타들어가고 있는, 란이었다.
나는 눈도 감지 못한 채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숨을 거둔 그녀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눈물 때문에 눈 앞이 흐릿했고, 그 눈물 때문에 안구가 따갑고 쓰라려서 더욱 쏟아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팔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잘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뻗어 란의 얼굴에 가까스로 손가락이 닿았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란을 깨우고 싶었지만, 정신 차리라고, 나를 보라고, 죽지 말라고 소리질러댔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나 때문에 죽었다.
내가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 했기 때문에, 일곱 살의 아이를 들어버렸기 때문에, 스파이를 쫓았기 때문에―.
아니, 내가 란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이유도 모른 채 죽어버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날, 내가 언제나 항상 옆에 있었다는 것 조차 모른 채. 내게서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한 채. 비참하게… 개죽음 당했다. 시간을 되돌려, 대신 죽어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텐데….
―란….
시간을 돌려, 내가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
―란……!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수 있을 텐데….
"―라아아아아안!"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공포에 질린 채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비명처럼 엄마가 나를 부른다.
"신이치!"
낯선 이름에 흠칫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를 안기 위해 엄마는 손을 뻗었지만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닿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내 몸을 만지는 게 두려웠다. 소름이 끼쳤다. 숨을 헐떡이며, 다시 나를 안아주려는 엄마를 밀쳤다.
"저리 꺼져!"
"신이치…!"
안타까워하며 그녀는 애처롭게 나를 부른다. 하지만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왜 나를 신이치라고 부르는 거야? 그게 대체 누군데!
"날 신이치라고 부르지마!"
목이 갈라질 정도로 소리지르면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오는 몸을, 어깨를 스스로 감싸 안았다. 나에게 다가오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구겨져 순식간에 눈물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런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온 몸을, 내 정신을 장악한 알 수 없는 공포에 의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비명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듯 했다. 귀를 틀어막았다. 몸이 뜨거웠다.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일어나면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항상 그랬다. 몹시 슬프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꿈이었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왜 난 이렇게 매일 밤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나야 하는 거지?
―도대체 왜!
"흑, 윽… 아흑…!"
꾸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뭔지 몰라도, 태어나서 살아왔던 몇년 간의 일을 송두리 째 날려버릴 정도의 일이라면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두려움이… 고통이 제발 내게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다.
그러나 매일 밤 잠들기 전,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바라는 내 소망은 매번 무참히 짓밟힌다.
매일 밤, 알 수 없는 공포로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2008년 뉴욕, 에도가와 코난 13세.
내 이름은, 에도가와 코난이다. 쿠도 신이치가 아니라….
나는 나에 대한 의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현재 열 두 살이라는 내 나이에 맞지 않게 난 너무 많은 거 알고 있었다.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와서, 마치 미국에서 태어나 생활한 사람처럼 영어가 유창했고, 그 나이에 알 수 없는 지식들을 알고 있었다. 가령 성(性)에 대한 것이라던가 범죄에 대한 것이라던가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알 리가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난 부모님과 성이 달랐다. 부모님은 쿠도라는 성을 가졌는데, 나는 에도가와였다. 부모님에게 들은 그 이유도 이상한 것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 친척 집에 양자로 보냈는데 그때 그들의 성이라고. 그럼 나를 호적에 올릴 때 왜 성을 바꾸지 않았냐고 묻자, 그들은 말 끝을 흐렸다. 게다가 부모님은 사정이 여의치 않을만 한 인물도 아니었다.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인 아버지와 유명한 일본인 여배우인 어머니.
그들이 설명한 이유에 납득할 수 없어서 혹시 나는 양아들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의심스러운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난 정말, 일곱 살이 맞는 건지 종종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볼 때면 이유없이 놀라곤 했다. 게다가 늘 어머니가 늘 부르는 내 호칭. 다른 사람의 이름. 쿠도 신이치.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6년 전 유명했던 일본의 소년 탐정의 이름이었다. 실종 되었다고 나오지만.
나에겐 말도 안 되는 지식이 있다. 학습 능력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이 말도 안 되는 지식이 내가 누군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했다. 중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공부는 무척이나 지루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복습하느라 짜증이 나는 것이다. 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적은 늘 톱이었다. 애들은 날 부러워하고, 시기하지만 그 부러움과 시기가 성가셨다.
"코난, 오늘 우리 집에 갈래?"
클래스메이트이자 5학년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 에드워드 애클스가 물었다.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난 그러자고 했다. 나는 에드워드를 좋아했다. 그는 성격도 밝고, 남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리지만 예술가였다. 공부는 못하지만 미술에 대한 재능은 탁월했다. 학교의 미술 선생도 에드워드의 그림만 보면 극찬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데 그게 에드워드의 학교 생활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헤이, 피카소! 우리 코난을 집으로 불려 들여서 무슨 음킁한 짓 하려고?"
미술 선생이 예쁜 여자인데다가 사람 성격도 괜찮아서 그녀를 흠모하는 남자 아이들이 많았다. 단지 처음엔 에드워드를 질투하는 것이었다. 나는 좋은 사교성―물론 연기―으로 부러움과 시기를 받더라도 애들과 그럭저럭 친하게 잘 지냈지만 에드워드는 아니었다. 성격은 밝아도 내성적인 그는 괴롭힘 당하기 좋은 타깃이었다. 5학년 때까지만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애들의 괴롭힘이 날로 심해지면서 에드워드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마. 에드워드가 뭔 짓을 한다고?"
그들이 에드워드를 게이 취급하고, 피카소, 고갱 등등 고인이 된 유명 화가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유치하게 괴롭힐 때면 난 그들을 말린다.
"쳇, 코난~ 피카소랑 놀지말고 오늘 우리 집 가자. 얼마 전에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새로 샀는 데 같이 해."
그리곤 그들은 나와 에드워드가 어울리지 못 하도록 방해를 했다.
"오늘은 안 돼. 에드워드 집에 갈 거야. 게임은 내일 하자."
"흥. 치사한 놈. 에드워드 편만 들고. 그래도 피카소 저 자식이 음흉한 짓거리 하면 날 불러. 저 얼간이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그렇게 하지도 못할 살인 협박을 하면서 에드워드를 위협한다. 그들이 가고 나면 나와 에드워드는 항상 한숨 짓는다. 그래도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면 곧 잘 웃었다. 둘도 없이 친한 친구였으니까.
나의 고귀한 예술가 친구, 에드워드 애클스는 비단 미술에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적으로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일곱 살 때부터 어머니가 시켜서 배운 바이올린을 열 두살의 나이에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주니어 콩쿨에 나가서 입상할 정도였다. 그러니 애들은 더욱 더 에드워드를 싫어했다. 나는 바이올리는 켜는 그가 좋았다.
그의 집에 가면, 나와 에드워드는 항상 바이올린을 꼭 켜곤한다. 분명 나는 바이올린을 배운 기억이 없는데, 능숙하게 켜곤 했다. 그래도 에드워드의 연주 실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오늘은 리베르 탱고 해줘."
"바이올린으로?"
"응."
"리베르 탱고는 첼로가 더 듣기 좋잖아."
"하지만 코난이 연주하는 리베르 탱코가 듣고 싶은 걸."
"난 첼로 못하는데."
"그러니까 바이올린으로 켜달라는 거지!"
예술에 대해 재능이 있는 나는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 교감할 때면 에드워드는 한없이 밝아진다. 이 모습만 본다면 누구라도 그를 사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친구로서 그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따돌림 당하는 것도 너무 안쓰러웠고, 그들에게서부터 에드워드를 지켜주고 싶었다. 분명 동갑이지만, 나에겐 그는 아름답고 소중한 남동생이었다. 그가 바라는대로 썩 좋은 솜씨는 아니지만 리베르 탱고를 켰다. 몇 번 틀렸어도 그는 비웃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면 늘 만족스럽고 행복한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곤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 왜 애들은 이런 에드워드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 걸까? 왜 질투에 눈이 멀어서 이 좋은 애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애들은 애들이다. 그래서 난 늘 그러려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늘 에드워드를 지켜줬다.
그것이 그 아이를 파멸로 이끄는 줄도 모른 채.
"아, 배가 고파졌어."
한참을 바이올린을 켜고, 게임을 하고, 에드워드의 그림을 구경하고 이런 저런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다가 저녁이 되었다.
"뭐 시켜먹을까?"
"음. 그럴까?"
"뭐 먹을래? 피자? 아니면 타이 음식 주문할까?"
"피자 먹자. 피자 먹고 싶네. 콜라랑."
"그럼 엄마한테 시켜달라고 할게. 잠깐만 있어 봐!"
에드워드는 즐거워했다. 그러는 한 편으로, 그들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눈동자가 흔들리며 동요했다.
그들이 두려운 걸까?
다음 날 정오 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에드워드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큰 캐리어 가방을 끌고 종이를 보며 주변을 쉴새없이 두리번거리는 동양인을 보게 됐다. 그는 무척 곤란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이라도 잃었나 싶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처럼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나와 닮은 것 같이 보였다. 10년 후에 내가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멍청히 그를 쳐다보는데, 그만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아!" 하고 남자가 탄성을 지르며 나에게 다가온다. 순간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일직선으로 그가 목표로 정하고 접근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He, hello?"
"Hi…."
"Excuse me!"
당황스러워하며 그를 쳐다보니 다짜고짜 작은 종이를 내 얼굴이 들이댔다.
"Where is this? I'm lost!"
그는 종이에 적힌 주소지를 보여주며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말 했다. 주소지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관광객인지 뭔지, 제법 영어가 유창하긴 했지만 발음이 조금 어색했다. 길을 못 찾아서 곤란해보여서 나는 고개짓을 했다.
"Follow me."
"You know?"
"I khow."
그러자 그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하아, 하마터면 하루종일 거리 헤매고 다닐 뻔했네. 아, Thank you, boy."
일본인이었나? 가만히 그를 흘끗 쳐다보곤 캐리어를 보았다. 공항에서 막 온 듯 했다. 택에는 나리타 공항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었다.
"일본에서 왔나 봐요?"
"어? 응! 일본어 하네? 꼬마도 일본인?"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굉장한 우연! 근데 너 영어 무지 잘한다. 교포?"
"아니, 그냥 일본인인데요."
"헤에, 그렇구나! LA에 놀러왔어?"
"여기서 살아요."
"이민 온 거야?"
"아뇨. 그러는 형은요?"
익숙한 얼굴의 그는 헤실거리며 웃었다.
"보고싶은 사람이 있어서 겸사겸사 여행하러."
"애인?"
"난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지만. 이미 만났고.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라서 더 기쁘네."
그는 무척 기뻐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애인도 아니라는 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LA까지 날아온 건가? 의아했다. 헤실헤실 웃어대는 남자의 표정은 사심없이 행복해보여서 보는 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꼬마는 이름이 뭐니?"
"저요?"
"응! 나는 쿠로바 카이토라고 해."
갈색의 삐죽빼죽한 곱슬머리의 남자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난…."
문득 머릿속에 엄마가 날 '신이치'라고 부르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그 이름을, 엄마의 단말마 같은 외침을 지우고 그를 보고 마주 웃었다.
"에도가와 코난이요."
묘하게 낯익은 얼굴의 이 청년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취미로 마술을 한다고 했다. 처음보는 꼬마인 내게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고 미국 생활도 해보고 싶어 겸사겸사 놀러온 관광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이유라면 보통 방학이나 그럴 때 오지 않나, 싶었는데 지금 일본은 방학 시즌이 아니라 한창 시험이다 뭐다 정신없을 시기라 의아했는데 한 학기 휴학했다고 하나. 그렇게 까지 보고 싶었나?
"그렇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보고 싶었어요?"
"응. 그 사람이 떠난 6년 동안 잊으려고 했는데 잊혀지지 않더라고."
"6년 동안이나? 헤에…"
곁에도 없는 짝사랑 상대를 향한 그 마음을 6년 동안이나 지키고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도 좋아요?"
"응! 좋아.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물론, 6년동안 잊으려고 애쓰면서, 죽도록 미워하고 원망도 했지만. 결국엔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
나로선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내가 어려서 일까, 어리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6년 간 마음을 지킨 지고지순한 이 남자의 순정이 마치 머나먼 별나라 이야기 같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아, 여기서 곧장 걸어가다보면 종이에 적힌 주소지의 집이 나와요."
"꼬마, 아니… 코난은 집이 어디야?"
"여기요."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말하자, 그는 집을 보고 헤에- 입을 벌리며 감탄한다.
"좋은 집이네! 뒷마당에 수영장 있어?"
"있긴 있는데."
"좋겠다~ 아아, 내 일본 집도 넓은 마당에 수영장 깔린 집이었으면 좋겠네!"
현실적으로 일본에 그런 집이 없지만. 그의 희망사항을 들으며 하하, 웃는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며 길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곤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집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집안.엄마는 새 영화 촬영 인터뷰로 외출한다고 했고, 아버지는 새로 출간할 신작 추리 소설이 문제가 되서 오늘 아침 일찍 일본으로 출국하셨다. 집 안은 낮인데도 어두침침했지만 신경 안쓰고 안락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키고 채널을 돌리다가 NCIS라는 해군 범죄 수사 드라마를 보았다.
한창 이것, 저것 드라마를 보고 있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저녁 먹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커피 테이블에는 젤리의 빈 곽 4통이 있었고, 그걸 버리고 있는 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라면 문을 열고 들어올 텐데, 아무래도 누가 찾아온 듯 했다. 나가서 유리문에 쳐진 커튼을 열어보니 낮에 본 그 남자였다. 그는 웃는 낯짝으로 파이를 들고 있었다.
문을 열자, 그가 불쑥 파이를 내밀었다.
"아까 길 가르쳐준 거에 대한 보답. 친구 집에 홈 스테이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구워주신 거 좀 가져와봤어. 레몬 파이야. 맛있겠지?"
"아, 네… 고맙습니다."
"우와, 집 좋다~"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멋대로 집 안에 들어왔다. 당혹스러워서 파이가 있는 접시를 든 채 뒤를 쫓았다.
"어? 부모님은? 안 계셔?"
"엄마는 일 때문에 나가셨어요."
"아버지는?"
"일본에."
"일본에?"
"네, 일이 있어서."
"흐응… 그렇구나. 그럼 어머니는 언제 오셔?"
"곧 오실거에요."
어쩐지 집에 어린애 홀로 남겨진 집에 손님으로 가장해서 찾아온 강도가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 가족의 귀가를 확인하는 듯해서 왠지 불안했다. 눈치를 살피며 그의 거동을 살피는데, 그가 텔레비전을 봤다.
"드라마 보고 있었어?"
"네."
"범죄수사물이네. 이런 거 좋아해?"
"네."
"그럼 추리 소설도 좋아하겠다. 홈즈라던가."
"그거야 당연하죠. 추리 소설 하면 당연히 홈즈니까!"
홈즈가 그의 입에 거론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흥분해버렸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나도 홈즈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난 루팡이 더 좋지만."
그 좋아한다는 사람, 훌륭한 사람이군. 홈즈를 좋아한다니.
"루팡이요?"
"응. 세계적인 대괴도! 아아, 루팡이 나오는 소설에서는 늘 홈즈가 루팡을 놓치지! 루팡 소설에는 홈즈가 루팡의 연인을 죄다 죽여서 별로지만."
좋았던 기분이 불쾌해진다. 그래봤자 그건 홈즈를 이용한 2차 창작물이다. 난 홈즈가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그런 소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루팡은 범죄자고.
"얼굴이 왜 그래?"
"내가 뭘요?"
"똥 씹은 얼굴이잖아. 하핫, 코난 너 내가 홈즈 욕 했다고 기분 상했구나?"
알면 입 좀 다물지, 불청객.
"밥은 먹었어? 저녁 식사 시간인데."
"아직."
"그래? 그럼 그 파이라도 먹고 배 채워. 어머니 늦으시려나 보네."
그러곤 찬장이라던가 돌아다니더니 사진을 바라본다.
"에도가와 부인은 어떻게 생기셨으려나~"
웃으면서 액자들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왠지 어두워진다. 뭐랄까, 어쩐지 쓸쓸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사진에 문제라도 있나 싶어 옆에 가서 같이 봤다. 별 문제 없다. 유리도 깨진 곳 없었고, 나와 부모님이 작년에 말라부에 놀러갔을 때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신쨩~ 엄마 왔어! 맛있는 피자도 같이 왔지롱~"
피자는 어제 먹었는데. 그보다, 신쨩이라고 부르지 마!
"어머? 손님?"
엄마는 내 옆에 선 남자를 보며 놀란 듯 묻는다. 설명하려고 입을 뗐지만, 이어진 엄마의 표정에 아무 말도 못했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 그녀는 그를 보며 뜻 밖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신…이치?"
왜 그 이름이 이 남자를 보고 나오는 거지? 어리둥절해 하는데, 옆의 남자는 엄마를 보고 생글 웃는다.
"안녕하세요! 어라? 쿠도 유키코 씨 아니세요?"
그는 엄마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당황한 엄마는 뭐라 반응을 하지 못했다.
"이야, 설마 유키코 씨 아들이 코난이에요? 우와,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냐? 어? 그런데 코난하고 성이 다르네?"
엄마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나를 붙잡고 자신의 뒤로 숨긴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방어적인 태도에 당황했다. 왜 이러지?
"당신, 누구야?"
다소 공격적인 목소리로 엄마가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마와 뒤에 숨겨진 나를 번갈아보더니 엄마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멋쩍게 웃었다.
"아, 저는 근처 친구 집에 왔다가…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렸나보네요. 쿠로바 카이토라고 합니다."
하하, 사람 좋게 웃으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놀란 듯 경악어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
"쿠로바… 카이토? 당신, 쿠로바 도이치의 아들인가요?"
"엣? 어, 그걸 어떻게…?"
뭐야, 뭐야,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쿠로바야 우리 엄마가 유명한 여배우니까 알아볼 수 있다고 치지만. 엄마는 왜 저 남자를 알고 있는 건데? 쿠로바 도이치는 누구고? 나는 이 상황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누군가 설명해주길 바라면서 두 사람은 번갈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나와 엄마 그리고 쿠로바 카이토라는 남자는 커피 테이블을 둘러싸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엄마는 카모마일 차를 그에게 주었고, 그는 홀짝 거리면서 뜨거운 차를 조심스레 마셨다. 뭘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은 대화가 없었다. 간신히 입을 먼저 뗀 사람은 쿠로바였다.
"이런데서 유키코 씨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벌써 14년이네. 도이치 씨의 오츠야(お通夜) 때 이후로 보지 못 했는데."
"그러게요. 그때 봤던 예쁜 누나가 유키코 씨였다니. 깜짝 놀랐어요."
"그때 나보고 아줌마라고 했었지."
"하하."
"카이토 군은 정말 잘 자라주었네. 훌륭하게."
"고맙습니다. 아, 오츠야 때 유키코 씨랑 유사쿠 아저씨 덕분에 어머니가 많이 기운 차리셨었어요. 14년이 지났지만, 그때 일 감사했습니다."
"뭘요, 친구로서 당연하지. 장례식 때 찾아가질 못해서 미안할 뿐이었어. 그런데 어머니는 요즘…?"
"잘 지내세요. 성격도 여전하시구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남자의 표정이 무겁다. 오츠야(お通夜)라면, 일본 전통 장례 문화로 장례식 전날 밤에 행하는 의식이다. 그 날은 장례식 때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도이치라는 사람은, 이 남자의 아버지 같은데 오래 전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도이치 씨가 누구야?"
분위기가 침침해서 끼어들 자리가 없었지만, 궁금했던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으응, 아빠 친구 분이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술사셨지.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사고가 아니라 그건 타살이었어요. 유사쿠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구요."
그 말에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지독한 증오와 살기가 느껴져서 흠칫 놀랬다. 그것도 잠시 뿐, 증오도 살기도 지운 그는 다시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아까, 코난이 유사쿠 아저씨가 일본에 가셨다는데. 아저씨도 여전하신가요?"
"그 양반이야 늘 똑같지."
호호, 웃는다.
"그런데 카이토 군은 오래 전에 봤는데도 우릴 기억 하고 있다니, 놀랐어."
"희미하긴 하지만, 9살 때 일이라.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신이치는요?"
"어?"
쿠도 신이치. 그 이름이 언급되자 엄마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신이치요. 유키코 씨의 첫째 아들."
"아, 응. 다른 곳에…"
"흐응, 그래요?"
"카, 카이토 군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LA에는 어쩐 일이야?"
엄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걸 의식하지 못했는지 카이토는 활짝 웃었다.
"저야 잘 지내죠. 만날 사람이 있어서 여행도 할 겸 겸사겸사 왔어요."
"지내는 곳은?"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서 홈 스테이 하고 있어요. 아, 아까 제가 코난 먹으라고 레몬 파이 가져왔는데. 친구 어머니가 구우신 건데 맛있더라구요. 드셔보세요."
"고마워. 카이토 군도 아버지처럼 마술을 하고 있니?"
"취미로요. 예전엔 마술사가 될까 했는데, 고민 중이에요."
"너라면 아버지를 닮아서 잘 할 것 같은데. 왜, 어릴 때 있잖니. 나한테 장미 마술 보여줬었잖아. 그때, 무척 귀여웠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유키코 씨는 아름다우시구요."
어두운 분위기가 그들의 농담으로 조금 밝아졌다. 엄마는 키득거리면서 웃었고 그도 웃었다. 그러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그가 아차차- 호들갑을 떨며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있었네요. 돌아가 볼게요."
"아아, 그래? 좀 더 있다 가도 되는데. 저녁 같이 먹자."
"아, 친구랑 같이 파티 하기로 해서요. 나중에 초대해주세요. 당분간 LA에 머물 건데. 맞다, 코난! 너 내일 형이랑 놀자."
"에?"
"친구가 경찰이라 바빠서 나랑 같이 못 놀아주거든. 그러니까 친구 대신 네가 놀아줘. 응? 괜찮지? 좋지?"
누구 맘대로 이 인간이!
"그래, 코난. 그게 좋겠다. 카이토한테 여기저기 안내해 줘."
엄마도 왜 마음대로 정하는 건데? 안내해주라고 해봤자 달리 이 근처에 재밌는 곳도 없는데.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 듯 헝클어트려 놓으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그럼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유키코 씨. 그리고 코난도!"
"으응, 안녕히 가세요."
"잘 가요, 카이토 군."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집을 나갔다. 하루 만에 기가막힌 우연을 경험하니 어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우연히 길을 잃은 남자에게 길 안내를 해주고, 근처 이웃 집에 머무는 데다가 내 부모님과도 아는 사이라니… 지구는 넓은데, 세상은 좁다. 이런 식으로 우연히 그런 사람을 보게 되다니. 엄마를 돌아보는데, 소파에 앉은 엄마의 표정이 어두웠다.
"엄마?"
왜 그런가 싶어 다가가 어깨를 흔드는데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어, 엄마. 숨 막혀."
"흑…."
흐느끼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당황했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저 남자를 만난 게 그렇게 슬픈 일이었나? 옛날 친구를 잃은 게 떠올라서 슬퍼진 건가? 어떻게 엄마를 달래야하나 고민이 됐다.
"너도, 저 아이처럼…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자랐어야 했는데… 엄마가 미안해, 신이치…."
신이치.
엄마는 또 그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름. 간혹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이치라는 사람, 혹시 부모님이 말씀은 안하셨지만 잃어버리거나, 죽은 내 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윽박질렀겠지만 너무 서럽고 슬프게 우는 엄마를 보니 화낼 수가 없었다. 그저 가녀린 엄마의 몸을 끌어안고 토닥일 뿐이다.
"울지마. 난 괜찮아, 엄마…."
쿠로바를 만난지 어느새 한달이 되어간다. 우리 집에 하도 들락날락 거리는 녀석은 자연스레 엄마가 없는 시간이 많은 나의 내니(Nanny)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올 때까지 쿠로바는 거의 나와 함께 있었다. 종종 할 일이 있다거나 약속이 있다고 없을 때도 있옸지만, 주로 같이 있었다.
함께 있을 때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각자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시시껄렁한 뉴스 가십거리를 보고 열라게 씹는 정도가 다였다. 그 중에 제일 즐거우면서도 열받는 건 홈즈와 루팡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일 때였다. 나는 완벽하게 홈즈의 편이었고, 그는 홈즈도 나쁘지 않지만 루팡이 최고라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홈즈는 깎아내릴 땐 나는 역성들며 목청이 커졌다. 그런 나를 보고 그는 깔깔거리며 뭘 그렇게 열내냐고 웃어댔다. 내가 웃겨서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매번 나만 열 받는다. 마술을 좋아하는 그가 내게 마술을 보여줄 때면 그에 대해 보복하듯 한껏 그의 마술을 비웃고, 트릭을 다 파헤쳤다.
트릭이 간파 당하면 그는 절망한다. 그리곤 마술은 마술인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거라며 넌 어쩜 그렇게 마술사에게 잔인하게 굴 수 있냐고 기집애처럼 훌쩍거는데 그럴 때마다 어퍼컷을 날려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날도 집에 엄마는 안 계셨다.
늦게 심야 라디오 출연을 해야한다고 했다. 아무렴 상관 없었다. 오랜만에 내 절친한 친구 에드워드가 집으로 오기로 되어있었으니까. 가여운 에드워드. 어디서 생겨난 유언비어인지 몰라도 가뜩이나 게이 아니냐고 애들이 수근거리는데 그 게이설이 사실인 것마냥 학교 전체에 퍼져서 그에 대한 괴롭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어이없게도, 어린 에드워드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8학년 남학생에게 블로우 잡(Blow job)을 해줬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들은 에드워드를 보거나 그 아이의 곁을 지나갈 때면 '얼간이, 멍청이, 바보, 호모 새끼. 허슬러(Hustler)'라고 욕했다.
에드워드는 억울함을 주장하며 절대 그런 일 없었다고 했지만 이미 퍼진 소문은 애들 사이에서 사실인 것마냥 받아들여졌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보호했지만, 보호하면 할 수록 나까지 게이 아니냐며 비웃음 당했다. 에드워드랑 어울리지 말라고 에드워드가 있는 눈 앞에서 나를 그에게서 가로 채 가려 했다.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에드워드는 더욱 힘들어졌다. 따돌림의 강도가 강해지고, 그의 라커를 불태우기 까지 했다. 왜 13살 밖에 되지 않는 애들이 무서운 테러를 벌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였다. 어느 날은 에드워드와 함께 집으로 가려고 하다가, 에드워드가 오질 않아 학교를 샅샅이 뒤진 적 있다. 에드워드를 발견한 곳은 학교 내의 수영장이었다. 그를 수영장에 빠뜨려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원래 목적은 괴롭히는 것이었겠지만.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빌어먹을 애새끼들이 증오스러웠다. 그 후로 에드워드를 건들일라 치면 과민하게 반응했다. 워낙 애들 사이에서 인기도 있었고, 친절했던 나이기에 애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노골적으로 괴롭히지 못했다. 그것도 내 앞에서만이었다. 24시간 그의 곁에 매일 붙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없을 때 그들은 그 아이를 공격했다.
애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하고, 저급한 욕들이 오르고 내렸다.
에드워드의 마음은 수십번, 수백번 넘게 짓밟히고 찢겨져 나갔다. 선생님들에게 몇 번이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애들 싸움이지 않냐고, 괜찮다고. 별 일 없을 거라고 넘어간다. 난 그들에게 분노했다. 왜? 선생들이면서 왜 에드워드를 지켜주지 않는 건데?
에드워드의 그림 실력을 극찬하던 미술 선생도, 그의 바이올린 선율을 좋아하던 음악 선생도 그를 돕지 않았다. 무신경하게 그를 외면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이 사람, 누구야?"
집에 온 에드워드가 옆에 선 쿠로바를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네 형이야?"
"아니. 아는 형이야. 들어와."
약속대로 집에 찾아온 그를 집 안으로 안내하면서 말했다.
"헤에, 저 사람 너랑 똑같이 생겼네."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웃어보이지만, 그의 표정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얼마 전에도 에드워드의 집에 갔지만, 그는 한달 전처럼 나와 함께 있어도 환하게 웃지도 않았고, 행복하게 바이올린을 켜지도 않았다. 즐겁게 하던 추리 소설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한테 사달라고 부탁해서 받은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틀었다. 뭐든지 해야했다.우울해하는 그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봐, 소년! 에드워드라고 했나?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워? 게임이 재미없어?"
옆에서 커피에 식빵을 찍어 먹고 있던 쿠로바가 물었다. 망할 놈. 에드워드 심기를 건들지마.
"정 심심하면 이 형이 마술 보여줄까?"
그리고 일본어로 지껄여봤자 못 알아 듣거든요? 영어로 말해, 영어로!
"잘 봐―?"
"What? What?"
상대가 미국인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일본어다.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간단한 마술들을 보여줬다. 신문을 찢고 원상태로 되돌리거나 손장난을 이용한 카드 마술. 신기한 듯 그것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웃었다. 다행이다 싶어 안심한 것도 잠시, 마술이 끝나고 시간이 좀 지나자 어김없이 어두운 얼굴이 되고 만다.
"재미 없어? 다른 거 할까?"
그렇게 물어오는 쿠로바는 영어로 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서 내가 대신 통역해주었다. 그러자 어두운 표정의 에드워드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그래도 된다고 전해 줘. 그냥,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어디 아파?"
"그런 건 아니고."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정말 안색이 그다지 안 좋아 보였다. 시간을 흘려 보내면서 쿠로바는 질리지도 않고 새로운 마술들을 보여주다가 저녁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는 늦으셔서 저녁을 준비한 건 쿠로바였다. 남자가 만드는 음식이라 그런지 변변찮았지만, 배고팠던 우리는 그럭저럭 먹었다.
"피자 시켜줄 걸 그랬나?"
다 먹고나서 쿠로바는 후회하는 듯 말했다. 그럴거면 진작에 시켜주던가. 돈이 없어서 안 시킨 거 아니야?
늦은 시각, 내일 학교도 가야 했기 때문에 나와 에드워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직 엄마가 돌아오시지 않아 쿠로바는 오실 때까지 기다리다가 가겠다며 거실에 남아있었다. 거기서 혼자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에드워드에게 있었다.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는데, 쉽게 잠 들지 않는 듯 그는 자꾸 몸을 뒤척였다.
"잠이 안 와?"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눈 붙이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하고 있어 봐. 그러다 잠들 거야."
"코난."
"응."
"코난은 매일 악몽을 꾸잖아?"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집에서 자거나 에드워드가 여기서 잔 적이 종종 있기 때문에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와 함께 있으면 그나마 자주 꾸는 그 악몽도 덜했다. 안심이 되서 인걸까?
"나도 요즘 매일 악몽을 꿔."
옆으로 돌아 누워서 그를 보았다. 웅크리고 누운 그의 얼굴은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꿈인데? 많이 무서워?"
"응. 꿈에서 말이야. 애들이 날 괴롭혀. 학교에서 하 듯이."
역시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고 있는데 많은 상처가 되는 모양이었다. 안쓰러워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토닥여주었다. 그는 어두운 목소리로 침울하게 자신의 꿈 얘기를 계속 들려주었다.
"근데 이 꿈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뭔데?"
"꿈의 마지막에, 내가 그들을 전부 살해한다는 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하기만 한 그의 억울함이 분노를 꿈에서 해소시키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그걸 악몽이라고 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그들을 살해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듯 했다. 쓰다듬던 그의 머리가, 어깨가 덜덜 떨린다. 꿈에 대한 공포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울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꼭 끌어 안아주었다.
이렇게 연약한 애를, 왜 그들은 못 살게 구는 걸까….
"괜찮아, 에드. 별 일 없을 거야. 괜찮아."
토닥토닥, 그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별 일 없을 거야. 별 일이 생기게 내가 내버려두지 않아. 그러니까 울지마, 에드.
턱- 숨이 막혀, 번쩍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마주보고 누운 채 곤히 잠들어있는 에드의 얼굴이었다. 천장을 보며 바로 누워 길게 숨을 뱉고 심호흡 하듯 숨을 쉬었다. 몸이 땀으로 젖었다. 에드가 있어서 잠결에 그를 의식했던 건지 다행히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는데, 눈 앞이 흐릿해지면서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입술을 잘근 깨물고, 소리없이 흐느끼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1시를 넘기고 있었다. 잠깐 잠든 것 같았는데, 3시간이나 시간이 지나 있었다. 엄마가 집에 와있을까?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내려갔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내지 않고 거실로 가니, 소파에 앉아 있는 쿠로바의 옆 얼굴이 보였다. 프렌즈의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제법 웃긴 드라마인데도, 그는 웃지도 않은 채 무표정하게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는 말이 더 옳을 것 같았다.
표정이 없는 그의 얼굴은 항상 웃고,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던 그와는 무척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싸늘하고 창백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그를 불렀다.
"쿠로바…?"
이름이 불리자 눈을 깜빡이는 그의 표정이 다시 변한다.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생글 지어보인다.
"깼어? 악몽이라도 꾼 거야?"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처음 엄마가 없을 때 그와 함께 있던 밤, 기억하지 못하는 악몽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을 때, 그는 상당히 놀랐다. 나보다 겁에 질려버릴 정도로 놀라고, 악몽을 꾸고나면 유독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나를 꼭 끌어 안고 달래주었다. 물론, 싫다는 데 엉겨붙는 사람이 있는대로 소리질러대고 두들겨 팼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다. 종종 밤 늦게 까지 있을 때면, 그는 날 달래고 나한테 얻어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는데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으면 그는 항상 늘 똑같이 대답했다.
―유키코 씨가 아직 안 오셨으니까.
그걸 핑계 삼아 그가 내가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곁을 지켜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만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고, 열 살이라는 큰 나이 차이에 관심사도 맞지않은 우리 둘이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다.
"코난."
생각에 잠겨있는데 불시에 불린 이름에 흠칫 놀란다.
"어?"
"코난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을 향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빛이 그의 흰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그 검은 눈동자가 어쩐지 쓸쓸해보였다.
"고향…?"
그런 질문을 받았어도, 고향이라는 일본에 대한 향수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는 모른다. 분명 그 곳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사고 후 병실에 있을 때 문병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코바야시라는 여선생부터 시작해서, 하이바라, 겐타, 미츠히코, 아유미… 슬픔에 가득했던 스즈키 소노코라는 누나도 있었다.
―코난,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야.
울면서 말했었지. 그 누나. 내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많지만, 지금 난 그들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모르겠어."
내 대답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씁쓸하게 한 쪽 입 꼬리를 웃은 채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드라마를 바라볼 뿐이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진다.
"미안."
왜 사과 했는지 모른다. 그저 사과 해야 할 것 같았다. 쿠로바는 날 보며 피식 웃고 차갑고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로받아야 할 건 쿠로바처럼 보이는데, 그의 손길은 날 위로해주었다.
"안 잘 거야?"
"잘 거야."
그렇게 말하곤 난 그의 허벅지를 베고 소파에 누웠다. 나에게 형이 있더라면, 그가 내 형이라면 이런 식으로 어리광부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도 어린애의 어리광이라고 받아들인 듯 거부하지 않고 그의 다리에 뉘인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다독여주었다. 그 손길이 다정해서 올 것 같지 않던 잠이 다시 찾아온다.
# 후기
사실 세 편으로 나누어져 있던 과거편의 1부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카이토와 코난의 뉴욕에서의 만남이죠. 그리고 6년 동안 악몽에 시달려도 망가지지 않았던 코난을 무너트린 사건이 벌어진 뉴욕 과거편의 서막이었습니다. 3편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전에 써놨던 걸 이어붙이고 조금 손을 본 정도입니다. 거의 손대지 않았지만요. 서술이 긴 건, 저 내용을 전부 쓰면 분량도 엄청나게 길어져서 대부분의 얘기는 서술로 끝냈습니다. 아아, 5편이면 이 지루함이 끝나고 드디어 카이토와 코난의 스쿨라이프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iㅅi
혹시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한 은어 등의 주석입니다.
NCIS - 해군 범죄 수사국. 해군 관련 범죄 수사를 다룬 미국 드라마로 인기가 많다.
오츠야(お通夜) - 일본의 장례문화로 장례식 전날 밤, 장례식 때 찾아올 수 없는 지인들이 이 날 방문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행사다.
내니 Nanny - 유모, 보모, 베이비 시터를 가리키는 말.
블로우 잡 Blow job - 구강성교를 뜻하는 은어.
허슬러 Hustler - 사기꾼, 창녀, 매춘부.
프렌즈 Friends - 2004년 시즌이 끝난 유명한 미국 코미디 드라마.
첫댓글 ㅎㅎ ncis라... 저도 그거 봤다죠..꽤 재밌어요....
다음편보러 고고~
전 미드 많이봐요. 정말 재밌어서 ㅎ 크리미널마인드, 멘탈리스트, 수퍼내추럴, NCIS 등등... 많이 봅니다. 주로 범죄수사물 위주지만.
아힝흥헹 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어가는거지..카이토!덮쳐버려!!
제발 빨리 확 덮쳤으면 좋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카이토쨔응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