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에 서울 한산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성왕(聖王) 16년(538)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웅진시대의 방어거점이었던 산성이다.
공산성은 웅진성, 쌍수산성, 공산산성, 공주산성 등 여러 이름이 있어 시대적인 변천을 알 수 있다. 웅진성이란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공주가 웅진으로 불릴 때의 이름이며, 그후 고려 초기 전국적으로 난을 피하여 인조(仁祖)가 공주에 파천한 이후로 왕에게 쌍수의 이름을 받아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불렀다.
원래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인 세종 14년(1432) 이전에는 이미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듯하고, 선조 29년(1596), 선조 36년에 고친 기록이 있으니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대대적으로 수리 보수한 듯하다. 현재도 일부는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되어 있다.
공산성은 금강에 접하여 길이 약 800m의 장축을 북서-남동으로 두고 금강의 남안에 자리하고 있는 표고 85m와 110m 두개의 산봉우리와 금강(錦江)의 단애(斷崖)를 이용하여 만든 포곡식 산성이다. 이중 석축부분은 1,930m, 토축부분은 730m에 달하는데 동남부에서는 이중이다.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6m이며 너비가 3m정도인데 밖은 급경사를 이루고 안쪽은 내탁공법(內托工法)을 썼으므로 안쪽으로 넓고 깊은 호(濠)가 있다.
성곽의 부대시설로 사방에 문지가 확인되는데 현재는 남쪽 진남루와 북쪽 공북루의 문루가 남아있고, 동?서쪽으로는 자리만 확인된다. 그밖에 치(雉)나 적대(敵臺) 등의 시설은 보수가 많이 이루어진 탓인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 안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사찰로 유명한 영은사(靈隱寺), 인조가 파천때 머물렀던 기념으로 세웠던 쌍수정, 성내의 중군영의 문루였던 광복루가 있다. 또 정유재란때 주민을 안무(按舞)하였던 명의 세장군의 업적을 기린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내려온 사실을 적은 쌍수산성 주필사적비가 있다. 이중 명국삼장비는 일제말기 공주읍사무소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이 되자 이곳에 옮겨 놓았다.
공산성의 성격에 대하여는 군사적 목적을 가진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한편으로는 무녕왕(武寧王)의 지석에 나오는 방위나 기타 자료를 들어 웅진시대의 왕궁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우금치 전적지
이곳 우금치는 1894년 동학혁명군 최후의 격전지/전적지 이다. 1894년1월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을 선두로 봉기한 동학군은 그해 4월 전주를 점령하고 호남일대를 장악하였으며 10월에 다시 봉기하여 북상하였는데 그 첫 목표가 호서지방의 요충이며 충청도 감영소재지인 공주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공주의 남쪽관문인 이곳 우금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동학군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한다는 기치를 높여 들었기 때문에 일본은 현대식 무기를 가진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여 여기에서 동학군을 저지하였다. 이 전투는 1주일을 밤낮으로 계속하였는데 약10만 명을 자랑하던 동학군은 겨우 1천여 명만이 살아 남는 참패를 당하고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곳 우금치는 봉건체제의 개혁과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민족사적운동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므로 그 의의를 기리고자 1973년 11월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이곳을 정화하고 동학혁명군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다.
3. 신원사
신원사는 동학사 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로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이절은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화상이란 고승이 창건하고, 그 뒤에 여러번의 중창을 거쳐 1876년 보련화상이 고쳐 짓고 1946년 만허화상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의 건물지는 신원사와 중악단 남쪽에 전개된 넓은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금당지를 중심으로 신원사의 원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믿어지나 조사의 결여로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금당지로 믿어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오층의 석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본래의 사역이었음을 쉽게 알게 한다. 이와 같은 원금당지를 중심으로 석탑이 있는 이외의 현재의 신원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웅전의 우측에 독성각이 좌측에는 영원전이 있는데 이들은 최근에 신축 혹은 개수가 이루어져 있다. 한편 대웅전에는 전내에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하여 우측에 대세지보살을 좌측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중악단은 태조 3년(1394)에 왕실에서 묘향산의 상악과 지리산의 하악과 더불어 계룡산의 삼악으로 숭배하면서 세운 것으로 매년 춘추로 계룡산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는데 지금의 중악단은 고종 16년에 중수된 것이다.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신라말 고려 초기의 석탑양식인 5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이다. 이 밖에 대웅전에서 약 50여m 거리에 한국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계룡산중악단\'이 있는데 보물 제1293호다. 주변의 암자로는 고왕암, 등운암, 선광원, 소림원, 불이암, 금용암 등이 있다.
4. 마곡사
이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설법 전도할 때 모인 신도가 삼밭의 삼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라 지은 것이라 한다. 절에서 내려오는 얘기로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2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여 고려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 하나 그 처음 연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고 전하는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선덕여왕 12년은 백제 멸망이전 백제 의자왕 2년에 해당한다. 만일 642년 창건이 사실이라면 의자왕 2년으로 전해져야 하는데 적대관계의 신라 연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금물이나 은물로 베껴 쓴 필사 불경들이 지금도 여러점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후기 불교문화의 대표적 유산이기도 하다. 이 절과 관련해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일대가 조선조 십승지지, 즉 전란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마곡사는 임진왜란의 전란을 피하였으며, 한국전쟁 때도 병화를 입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또한 마곡사에서 5층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 동종, 포저유서 및 송곡문집판각, 해탈문, 천왕문, 명부전, 응진전, 신검당, 국사당, 매화당, 홍성루, 수선사, 대향각, 영각, 고방 등과 보물 제1260호 석가모니 괘불탱은 숙종13년(1687년)에 제작된 석가모니 불화로 삼베에 채색을 넣어 그린 탱화와 전적 판본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대전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