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②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섬처럼 드문드문 서 있는 숲이나 올망졸망한 농가의 지붕이 눈에 들어왔지만 몸을 숨길만한 장소도 아니었고, 그럴 틈도 없었다. 행여 말이 있다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순식간에 길이고 들판이고 가릴 것 없이 까맣게 몰려오는 적을 무슨 수로 뚫 는단 말인가. 이제까지처럼 일행 중 누군가가 아니, 모두가 희생해서라도 길이 열린다면 그 렇게 하겠으나 그 역시 일말의 가망성도 없었다. 그렇다고, 산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미 무수한 인원이 산사태처럼 숲을 헤치며 달려오는 소란스런 기척이 들려 오는 것이다. 고립무원(孤立無援). 야트막한 구릉 위에 망연자실 서 있는 여섯 명의 머리위로 무심한 햇살만 따 가웠다. "저를 넘기세요." 설운경의 말이 가상하긴 해도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다고 놈들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소? 어림없는 소립니다. 우리가 죽인 놈들이 백 명은 될 거요!" 서수림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대로 놈들이 설운경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일행을 살려둘 리 만무했다 .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해 상대를 회유 복속시키는 것을 우선하지만 일단 적으로 규정되면 그야말로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것이 흑마방의 방식이었다 흑마방에서는 그들과 같은 하늘아래 살수 없다고 진작에 결론 내렸을 것이 분 명했다. 점점 다가오는 적들과 설운경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번갈아 바라보던 사군명이 시큰하도록 이빨을 깨물었다. "놈들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도 군주님이 다치는 것을 계속 피해왔으 니 최소한 군주님이 변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발로 놈들에게 걸어가든, 아니면 그들과 함께 싸우다 잡히든 설운경의 신 변에는 이상이 없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사군명은 단단히 칼자루를 움켜쥐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표행의 성패여부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것 같습니다. 하나 우리가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표물을 지키다가 죽는 것." 사군명의 뜻은 분명했다. 옥쇄(玉碎)! "제가 부족해서 많은 선배들을 잃고 이제 여러분도 사경에 빠뜨리고 말았으니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 백기표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몰살당했을 거요. 표행을 성공시 키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사군명을 위로한 팽상문이 한겨울 칼바람처럼 살갗을 파고드는 살기 띤 안광 을 빛냈다. "표물은 함부로 노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도 그리 의미 없는 일은 아니오." 팽상문의 독백이 허공에 흩어질 때, 사군명의 눈길이 설운경과 마주쳤다. 차마 애끓는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사군명이 한껏 정중하게 예를 차리고 마지 막 인사를 고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능력한 이 사람을 용서해 주시길……." "……." 가늘게 경련 하는 입술을 깨물며 북받치는 격정을 삼키는 설운경의 눈에서 소 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모두가 저 때문에 비롯된 일, 짊어진 업보가 무거워 함께 죽지 못하는 심정 을 헤아려 주세요. 그리고……."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은 설운경이 마침내 가슴깊이 새겨진 진심을 털어놓았 다. "저를 생각하는 사 표사님의 고마운 마음 평생 간직하겠어요. 저 또한 사 표 사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아요……." "……!" 뜬금없는 소리에 일순 멍해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군명과 설운경 두 사람에 게는 너무도 명백한 놀라운 고백.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달콤한 말 한마디 속삭이지 못한 안타까운 두 연인 이 생사가 갈리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털어놓는 사랑의 확인. 불현듯 찾아와 운명이 되어 버렸으나 아무런 사연도 만들지 못한 서글픔을 일 거에 뒤집어 버리는 벅찬 감동. 이 순간. 사군명의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흑마방 무사들의 살기 띤 모습도, 그들의 손에 머지않아 죽게될 자신의 운명도 아득한 꿈속의 일인 듯 전혀 현실감이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을 떨게 하는 감격과 환희만 생생히 실감될 뿐. 사군명은 한발 앞으로 다가가 설운경을 힘차게 부둥켜안았다. "고맙소. 죽는 것을 두려워 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이대로 죽으면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은 있었소. 한데, 이제는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소." 만일 무사히 표행을 마쳤다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섰을 두 사람. 그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속 깊이 묻어둔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광경이 주위에 둘러선 일행의 가슴에도 잔잔한 감동으로 전해졌다. 하나 그들에겐 감동의 여운을 음미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고갯길을 치달아 십여 장 앞에까지 당도한 적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다. "왔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인 탓일까. 서수림의 외침도 그리 급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담담히 전할 뿐. 사군명이 설운경을 부둥킨 손을 풀고 말없이 돌아섰다. 침묵은 백 편의 시구보다 절절했다. "흐흑……."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흐느낌으로 터져 나오는 설운경의 서러움을 뒤로하고 돌 아선 사군명이 굳은 눈길로 일행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설운경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섰다. 사방에서 적이 쇄도하는데 어디를 치고 나간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서로간의 거리는 대략 일장 정도. 상대의 움직임에 방해를 주지 않고 효과적인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거리였다. 야트막한 구릉의 정상에 빙 둘러서서 승냥이 떼처럼 몰려드는 적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이 더 없이 당당하게 보였다. "오너라! 표물을 노리는 도둑놈들의 피는 무슨 색인지 확인해야겠다!" 서수림이 당차게 외치며 기세를 떨쳤다.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지닌 흑마방의 무리를 표물이나 노리는 한낱 도 적 떼로 규정한 것이다. 순간, 팽상문이 말을 받으며 껄걸 웃었다. "아무렴, 남의 여자를 노리는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안 그렇소이까? 프 하하핫!"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오른 쪽 옆에 선 사군명을 흘낏 바라보는 팽상 문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매달렸다. 사군명이 쑥스러운 눈짓으로 답하는 순간, 잔뜩 검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적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에이잇!" 일 검에 사군명을 요절낼 듯 요란하게 고함친 사내의 기합은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초혼성이 되었다. 스스슥! "끄으윽……."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단천검의 움직임에 따라 가슴을 깊게 베인 사내가 그 대로 고꾸라진 것이다. 안남산과 창평야가 만나는 작은 구릉에서 벌어진 처절한 싸움의 첫 번째 희생 자는 그 사내가 분명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순서가 없었다. 뒤이은 팽상문의 검에 또 하나의 적이 쓰러지는 것과 해연에게 달려든 자의 목이 장도에 떨어지는 장면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두머리들이야 뒤쪽에 있다 해도 제일 먼저 달려올 정도면 나름대로는 고수 라 할만한 자들이 변변히 손도 쓰지 못하고 앞다퉈 쓰러지자 흑마방 무사들의 공세가 조금은 신중해졌다. "머뭇거리지 말아라!" "계집만 상하지 않으면 다른 놈들은 모두 죽여도 좋다!" 뒤에서 독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놈들아! 그리 쉽게 죽을 어른들이 아니니 마음껏 재주를 펼쳐 보거라!" 호기롭게 외친 것이 화근이 됐는지 팽상문은 말을 맺기 무섭게 좌우에서 동시 에 날아드는 도검을 상대해야 했다. 가슴어림을 노리고 다가서는 검을 쳐내고 껑충 뛰어 하반신을 가르는 도의 주 인을 내리치는 동작이 비호처럼 날렵했다. "가거라!" 어깨에 일 검을 맞고 털썩 주저앉는 사내의 등을 밟고 연달아 쳐낸 검 끝이 적의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끄아아……!" 어느새 셋. 하나 팽상문 앞에 쓰러진 적의 숫자는 그리 많은 게 아니었다. 사군명의 검이 일으키는 위맹한 검풍에 주춤 물러서던 자들이 빽빽이 늘어선 동료들에 떠밀려,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목숨을 내맡긴 것이다. 일장 간격으로 둘러선 다섯 명을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은 잘해야 열 명 정도. 하나 완만한 구릉을 메우고 몰려드는 숫자가 너무 많아 싸움의 전면에 나서는 인원이 스물이 넘었으니 본신의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당하 는 자가 한둘이 아닌 것이다. 몇 안 되는 상대를 만만히 보고 공을 탐하는 욕심의 결과요, 이곳저곳에서 차 출된 무사들이 뒤섞인 탓에 체계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것이 또 다른 원 인이었다. 하나 예상보다 많은 희생자가 났을 뿐 결과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모자라는 무공을 민첩하게 움직임으로 메우며 적을 베어 넘 기던 서수림이 마침내 치명적인 공세에 격중된 것이다. 흉측스럽게 생긴 대감도에 오른쪽 허벅지 살을 뭉텅 내준 서수림이 비명보다 는 분노에 찬 일갈을 내질렀다. "이, 이놈들!" 고통도 느끼지 못했고 마음이야 여전했지만 움직임은 생각만큼 원활하지 못했 다. 순식간에 피로 바닥을 적시는 상처를 확인하지도 않고 황급히 중심을 잡으며 정신없이 몰려드는 도검을 쳐내는 서수림의 옆구리에 시퍼런 철부(鐵斧)가 찍 힌 것이다. 퍼억! "크흑!" 휘청 꺾어지는 와중에도 서수림의 검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적의 하반신을 쓸 어 가는 순간, 텅 빈 그의 등에 귀두도가 작렬했다. "으아아악……!" "크허억!" 동시에 터져 나오는 두 줄기 비명. "서 선배!" 서수림의 좌측에 있던 구태열이 토해내는 안타까운 외침. 끝없이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숨이 넘어 가는 서수림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한 놈 잡았다!" "모두 없애 버려라!" 기세가 오른 흑마방의 무사들이 서수림이 쓰러진 자리로 밀려들었다. 하나 서수림의 좌우에 서 있는 구태열과 해연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딜 기어드느냐!" 앙칼지게 외친 해연이 좌측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정신없이 달려드는 두 명을 동시에 베어 버렸고, 동시에 우측으로 몸을 날린 구태열의 도가 저지선 을 넘는 적의 허리를 갈라놓았다. 오 분의 일과 사 분의 일. 커다란 차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나 안 그래도 숨쉴 틈 없이 몰아치는 공세에 사력을 다해 저항하던 그들에 게는 너무도 큰 차이였다. 자연스럽게 서수림의 공백을 메우며 안으로 모여들어 여전히 일장 남짓한 간 격을 유지한 채 사면을 분담한 네 명 모두 엄청나게 가중된 압력을 느끼는 것 이다. 둑방에 가둔 물은 가장 약한 곳을 뚫는 법. 서수림에 이어 팽상문에게 위기가 닥쳤다. 자신의 주변을 적의 시신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만든 팽상문의 분투는 그가 지 닌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나 가중된 압력은 곧 그의 분투를 마감하게 만들었다. 그의 전면에 늘어선 다섯 명의 사내 중 동시에 검을 날린 세 명을 상대하는 순간, 제일 좌측에 있던 자의 장창이 정강이를 후린 것이다. "피해욧!"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해연이 뾰족한 외침을 발했지만 그녀의 간절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계에 달한 팽상문의 지친 몸은 목숨을 노리는 세 자루의 검을 상대하 기도 벅찬 상태. 쉬이익, 따악! 다행히 섬뜩한 창날은 피했으나 쇠처럼 단단한 창 자루도 팽상문의 정강이를 부러뜨리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등골을 타고 전해지는 극심한 충격에 본능적으로 움찔한 극히 짧은 순간. 제대로 쳐내지 못한 검이 빗장뼈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나마 목줄기를 꿰뚫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으나,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죽어라!" 득수한 자가 악독하게 외치며 손목을 틀자 빗장뼈에 걸린 검이 악독하게 살 속을 헤집었다. "으흑!" 팽상문은 본능적으로 목을 젖히며 몸을 뺐고, 한껏 뻗은 팔을 더 전진시키지 못한 상대의 검은 시뻘건 선혈을 묻힌 채 빠져 나왔다. 흉측하게 벌어진 상처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가 이미 혈인이 된 팽상문의 몸 위로 냇물처럼 흘렀다.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맹렬히 검을 휘두르는 팽상문의 필사 적인 모습이 처절했다. 하나 간교한 승냥이들이 눈먼 검에 당할 리 없었다. 곳곳에 허점을 드러낸 팽상문의 전신을 세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도가 유린 하고 또 한 자루의 창이 무지막지하게 복부를 쑤시는 순간, 팽상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말았다. 만신창이가 된 육신과 혼백의 분리. "일어나라, 팽상문! 죽으면 안 된다!" 안타까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구태열의 절규는 태풍처럼 휘몰아쳐 무수한 적을 쓰러뜨린 강맹한 그의 도법보다 더욱 거세게 터져 나왔다. 하나 이미 작은 산을 이룬 시체더미에 자기 몸 두께만큼의 높이를 더하고 쓰 러진 팽상문이 일어날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흔들어 깨우고 싶었지만, 불과 일 장 남짓한 거리 는 이승과 저승의 거리만큼 아득했다. 아직 사지육신이 붙어있고 심장이 뛰고 있으니 검을 휘두를 뿐, 남아있는 세 사람도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전신을 적시고 흐르는 적의 피와 나의 피. 목숨을 노리고 잔혹한 살수를 펼치는 서로의 몸 속에 흐르던 피가 구분할 수 없이 한데 어울려 뒤섞인 것이다. 오직 살기로 집중되어 갈수록 활활 타오르는 선명한 의식과 달리 점차 무거워 지는 팔다리가 크고 작은 상처를 허락할 때, 요란한 뿔 나팔소리가 창평야 넓 은 들에 울려 퍼졌다. 뿌우, 뿌우우……! 순간, 흑마방의 무사들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공격을 멈추 었다. ……. 삽시간에 찾아온 거짓말 같은 정적. 시산혈하를 이룬 처참한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다면 이제까지의 격 전이 꿈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정적을 뚫고 들려온 것은 섬전처럼 구릉위로 치달려오는 사인교 위에서 터져 나온 웅혼한 일갈이었다. "손을 멈추고 모두 물러나라!" 불과 이 각이 안 되는 시간에 백여 명의 동료를 잃은 흑마방의 무사들은 아무 런 갈등도 없이 공손히 뒷걸음질 쳤다. 그들이 재빠르게 좌우로 붙어서는 순간, 한치의 틈도 없을 것 같던 구릉에 순 식간에 넓은 길이 뚫리는 광경이 마술과 다름없었다. 순간, 황급히 설운경을 감싸고 둘러선 세 사람의 표정이 긴장으로 얼어붙는 듯 했다.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하나 어차피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그들에게 엄청난 힘을 지닌 변수가 새삼 불 리하게 작용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사인교를 앞세운 행렬이 구릉위로 올라와 멈추자 온천지가 떠나갈 듯 우렁찬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방주님을 뵙습니다!" 검을 움켜쥔 사군명의 손가락에 손잡이를 으스러뜨릴 듯 힘이 들어갔다. "……!" 천하 마도의 주인 흑룡마제 갈천위. 그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귀하신 손님을 정중히 모시라 일렀거늘 문제가 있었는 모양이외다." 구릉의 높이를 몇 자는 높인 시신더미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설운경에게 말을 건네는 갈천위의 태도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손님을 모시지 않고!" 갈천위의 느닷없는 호통에 뒤에서 빈 가마를 메고있던 혈룡대원들이 성큼 앞 으로 나섰다. "모시기를 청하오!" 아예 사군명과 구태열, 해연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사군명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갈천위만큼이나 당당하게 말문을 열었다. "원하지 않으시니 물러들 가시오." 순간, 갈천위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거듭되는 생사의 혈전을 치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살아남은 주제에 전 혀 위축되지 않고 태연히 응대하는 사군명의 태도가 묘한 흥미를 불러일으키 는 것이다. 손아귀에 든 먹이를 재롱을 지켜보는 맹수의 여유. 갈천위는 짐짓 철없는 아랫사람을 나무라듯 혀를 찼다. "쯔쯧, 이 모든 일이 네놈들 때문이다. 흑마방의 방주로서 봉래도의 군주를 모셔 예를 다하려는 본 좌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쓸데없는 오해를 쌓게 만들었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느냐?" 이제껏 무수히 죽어간 흑마방의 무사들과 자기 목숨을 던져 혈로를 연 표사들 이 들었다면 저승에서도 어이가 없어질 소리였다. 사군명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흑마방의 방주께 그런 뜻이 계신 줄 몰랐소이다. 하나 군주님은 이미 목적지 를 정하고 중원에 건너오신 것. 방주님의 성의는 고마우나 따를 수 없음을 용 서해 주시오." "프흐흐……." 어이없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리는 갈천위의 얼굴이 일순간 얼음장처럼 싸늘해 졌다. "귀한 손님 앞이라 예를 차렸더니 네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는구나! 썩 물러서지 못할까?" "당장 태도를 바꾸고 불같이 노하니 군주님을 예로서 모시겠다는 당신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날 죽이기 전에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오." 콰지직! 사인교의 팔걸이가 갈천위의 손아래 으스러졌다. "갈!" 갈천위는 체면을 무시하고 당장 사인교 위에서 솟구칠 기세였다. 순간, 설운교가 해연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소녀가 비록 멀리 떨어진 섬에서 나고 자랐으나 중원에 두 영웅이 있음은 익 히 알고 있었거늘, 오늘 이렇게 한 분을 뵈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꾀죄죄한 몰골로 일행의 뒤에 숨어있을 때는 한없이 불쌍하고 처량한 느낌이 더니 막상 앞으로 나와 빛나는 눈으로 갈천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감히 범 접할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 사군명이 당당하게 나설 때와는 또 다른 표정이 갈천위의 얼굴에 스쳤다. 이제껏 진행된 일의 진상이야 어떻든 봉래도의 군주가 대세를 인정하고 자신 의 말에 동조한다는 것은 막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당돌한 표사 나부랭이의 객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봉래도 군주의 의연한 태도. 수시로 번뜩이는 갈천위의 눈을 보아 자신의 계획이 실마리를 잡았음을 짐작 한 설운경은 제발 사군명이 자신의 뜻을 헤아리기를 바라며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애초의 계획대로 집안의 어른이신 손녀의 할아버지께서 봉래도의 무인들을 이끌고 함께 오셨으면 좋았겠거늘, 사정이 급해 소녀 혼자 중원에 건너 오다 보니 이런 번잡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갈천위에게는 위협이었고 사군명에게는 암시였다. "호오, 일이 그렇게 되었구려……." 애당초 수하들의 희생이 적지 않으리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설운경을 고스란 히 손에 넣으려한 것도 봉래도의 무서운 힘을 경계한 때문이었다. 대세를 읽고 기꺼이 태도를 바꾸면서도 은근한 협박까지 할 만큼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설운경이라면 단순한 인질이 아닌 훌륭한 교섭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갈천위는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나 역시 봉래도에 봉래신장이라는 고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흠모해 마지 않았거늘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안타까울 뿐이오. 하하핫!" 설운경은 사군명이 눈치 없이 나서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비록 예정에 없던 일이라 해도 이렇듯 몸소 찾아와 청하시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 싶습니다." 설운경의 돌연한 태도에 침묵을 지키던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해연이었다. "군주님……!" 한발 앞으로 나와 설운경의 손을 움켜쥐는 해연의 얼굴에는 자진해서 마굴로 들어가려는 설운경의 처사에 대한 걱정과 불만이 가득했다. 하나 설운경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아이는 봉래도에서부터 저와 함께 지내던 처지이니 응당 방주님의 호의를 함께 받아야 마땅하지만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운경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주친 설운경의 눈에 담긴 애절한 호소를 사 군명은 읽었다. 조금 전, 봉래신장 얘기를 꺼낼 때부터 짐작한 설운경의 뜻이 너무도 간절하 고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지 마세요. 내 뒤를 쫓아오고 있을 할아버지와 힘을 합하면 기회는 다시 만들 수 있어요. 제발 내 뜻을 따라 주세요. 사군명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설운경은 행여 사군명의 마음이 변할 까 재빨리 고개를 바로 하고 말을 이었다. "소녀를 초대하려는 방주님의 의지가 워낙 확고한 탓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알 기로 막대한 대가를 받았음에도 저 사람들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영웅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고, 이번 표행에서 먼저 간 동료들이 죽음을 앞두고 부 탁한 것도 있으니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먼저간 표사들의 공통된 부탁은 끝까지 살아남아 표행을 성공시키라는 단 한 가지였다. 다시 한 번 사군명에게 간곡한 뜻을 전달한 설운경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 의 싸움을 세 치 혀끝으로 벌여 나갔다. 어쩌면 이제까지 표사들이 치른 싸움보다 더 치열하고 중요한 싸움일지도 몰 랐다. "그럴 리는 없으리라 믿습니다만, 설령 희생당한 수하들을 아끼시는 마음에 저들의 죄를 준엄하게 물으시려는 생각을 품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오 나, 방주님의 위엄과 흑마방의 무서움을 저들이 이미 뼈저리게 느꼈을 터이니 이제는 방주님의 도량을 보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게 소녀의 생각입 니다. 해남의 작은 섬 봉래도 사람들의 외곬수적인 기질에 익숙한 소녀에게 드넓은 대륙을 호령하는 영웅의 도량을 보여 주시면 이 또한 소녀가 고향사람 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갈천위는 염상호와는 또 다른 지혜를 보았다. 완곡한 말속에 자신의 뜻을 밝히되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기 보다 이성을 자극 하며, 상대의 뜻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당당한 의지를 숨기지 않는 설운경. 그녀의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불가피하게 수하들 과 싸움을 벌인 표사들까지 호의로 대할 만큼 넓은 도량을 지녀 그녀의 자랑 거리가 될만한 영웅'에서 '수하들의 복수에 연연하는 속 좁은 위인'으로 전락 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뿐인가, '외곬수적인 기질을 지닌 봉래도 사람들'의 적이 될 것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갈천위는 기꺼이 설운경의 장단에 놀아나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설운경의 말마따나 외곬수적인 봉래도의 인물들이 기질대로 행동해서 무적세 가에 먼저 책임을 묻지 않고 행여 흑마방을 향해 칼끝을 돌릴 경우 설운경의 말과 태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터였다. 이 모든 일이 봉래도를 적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무적세가를 견제하기 위함이 며 납치는 했어도 극진한 예로 대접한 것은 물론, 죽어 마땅한 표사 놈들까지 설운경의 뜻에 따라 풀어줬다고 하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갈천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군주께서 이 사람을 그리 좋게 생각하시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최악의 경우 설운경의 생명을 담보로 봉래도와 무적세가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하나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설운경은 그의 손에 목숨이 달린 나약한 여인이 아니라 봉래도를 대표해 교섭 과 흥정을 벌이는 입장이었다. 갈천위로서는 자신이 베푸는 호의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 었다. "사실 본 방의 핵심들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하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내 아무 리 도량이 넓다 해도 저자들에게 목숨 값을 받아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요. 하나 모두가 본 좌의 호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데 원인이 있고 군주께서 그렇듯 간곡하게 말씀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구려. 내 저자들을 풀어 주겠소." 모든 일은 순조로울 때, 쐐기를 박아야 했다. 설운경은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결코 호의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군명의 목숨이 구해졌 다는 감격에 갈천위가 고마운 마음도 들었기에 그녀의 절은 갈천위가 보기에 도 흡족할 만큼 정중하고 공손했다. 목숨을 구한 두 사람이 마치 자신의 혈육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주님의 고마우신 마음에 감읍할 뿐입니다." "이거, 별일도 아닌 것을 이렇듯 깊이 새기시니 군주님이야말로 무림의 명숙 들이 부끄러울 만큼 은원이 정확한 사람인가 보외다. 프하하핫!" 속보이는 인사치레를 민망히 여겨 웃음으로 얼버무릴 위인이 아니건만 갈천위 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어쩌면 직접 설운경을 거두겠다고 나선 자신의 결정이 스스로도 흡족한 탓일 지도 몰랐다. 이렇듯 만만치 않은 계집을 섣불리 대했다가 불필요한 적대감만 쌓았다면 정 녕 큰일 아니겠는가. 웃음을 멈춘 갈천위의 눈길이 무심코 사군명과 구태열을 훑었다. 순간, 갈천위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생사가 뒤바뀌는 감격적인 순간에도 무심한 듯 미동도 않는 태산같은 태도. 수많은 적과 싸우며 오늘을 이루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있는 갈천위이기에 사람을 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처참한 몰골로 서 있는 두 사내, 특히 처음에 자신과 말을 섞었던 표사 놈의 기도는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 갈천위는 절을 끝내고 일어선 설운경에게 눈길을 돌렸다. "군주님의 뜻에 따라 저자들을 돌려보내기는 하겠소 만, 무공을 폐하는 것만 은 양해해 주시오." "무슨 말씀이신 지……." 갈천위는 설운경의 말을 잘랐다. "본 방의 수하들이 동료를 아끼는 마음은 혈육을 대하듯 하나 심성이 거칠어 쉽게 다스릴 수 있는 사내들이 아니오." 갈천위 본인도 잘 알고 있듯이 둘 다 사실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동료의 불치병보다 자기 발에 생긴 티눈을 중히 여기는 자들이며, 심성이 거친 자는 부지기수지만 감히 방주의 명령을 거역할 만큼 배포 있는 자는 아예 하나도 없다는 게 사실과 가까웠다. 하나 갈천위의 말은 나름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있었다. "행여 저들을 무사히 보낸다면 나로서도 저자들이 무사히 항주까지 도착하리 라 장담할 수 없소. 최소한 무공을 폐하기라도 해야 수하들의 울분을 달랠 수 있으니 그 점만은 군주께서 양보해 주시오." "무인에게 무공을 폐한다면……." 설운경은 미처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무고한 인명을 수없이 해쳤으니 다시 칼을 잡기 보다 조용히 참회하며 여생 을 보내는 것이 아마도 사람된 도리일 거외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정작 무고한 인명을 수도 없이 해친 갈 천위가 뻔뻔스럽게 말장난을 했다. 하나 만일 거부한다면 그나마 어렵게 구한 목숨이 위태로울 가능성이 높았다. 설운경이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사군명의 담담한 음성이 등뒤에서 울렸 다. "구선배, 일단 살고 봅시다." 일단 설운경의 간절한 뜻에 따르기로 한 사군명이 구태열을 설득하려 애썼다. "무공을 잃어도 뜻은 꺽이지……." 사군명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구태열이 너무도 의연하게 동의한 것이다. "당연한 말씀. 인생은 간단하지 않아서 살 재미가 있지요. 살다보면 무슨 일 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니겠소?" 무인에게 있어 무공을 잃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난제를 선선히 받아들인 두 사람은 성큼 앞으로 나서 갈천위 앞에 섰다. "무공을 폐하시오!" 오히려 갈천위가 수세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흐음, 제법 뼈대가 굵은 놈들이로구나." 생각 같아서는 팔다리의 근육을 끊고 요혈을 봉쇄해 폐인으로 만들면 좋겠지 만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설운경을 의식해야 했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뜻대로 한다면 몰라도 이미 거래와 협상은 시작된 것이다. 피차 납득할 수 있는 만큼 주고받지 않으면 이제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었다. 갈천위는 사인교에서 일어나 옆에 선 수하의 창을 받아 거꾸로 잡았다. 가장 깨끗하고 확실한 방법을 취하려는 것이다. 사군명과 구태열은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멈추었다. 일순간 두 사람을 바라본 갈천위가 섬전처럼 창을 떨쳤다. 파팍! "우훅!" "흐읍!" 웅혼한 내력이 실린 창끝이 단전(丹田)을 강하게 가격했고, 숨이 멎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키는 두 사람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내공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크고 작은 상처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더욱 극심해 지고 전신의 맥이 풀리며 두 사람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털썩, 쿠쿵! "목숨이 붙어있는 것을 천행으로 알고 지은 죄를 반성하며 살아라!" 마치 엄격한 사부가 제자를 훈도 하듯 근엄하게 말한 갈천위가 더없이 친절한 얼굴로 설운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갑시다. 중원에 발을 디뎠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여러 가지 준비를 한 다고 했으나 본 방에서 지내시는데 불편함이 없으면 좋겠소이다." 구릉의 정상에 무수하게 널려있는 시체들. 미약한 꿈틀거림으로 시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군명과 구태열의 힘없 는 시선이 멀리 사라져 가는 거대한 행렬을 쫓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육신. 흐릿한 눈동자. 허무하고 한심한 꼬락서니이긴 해도 살아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구태열의 말대로 간단하지 않아서 살만하고, 살다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 르는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비틀거리는 몸을 서로 부축해가며 일어서다 바닥에 흥건한 피에 미끄러져 시 체더미에 쳐 박히는 순간, 사군명을 향해 빙긋 웃는 구태열의 뜻 모를 미소! |
|
첫댓글 즐감입니다.
감사 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하고. 있읍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