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알게 모르게 주어진 환경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최선의 길을 찾는 모양이다. 생물학적 용어로 적응이다. 진화는 우월 경쟁의 승리가 아니라 적응의 결과일 뿐이라는 다윈적 시각이 조직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 놀랍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정사업본부를 보면 볼수록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든다.
우정사업본부는 지식경제부 신하의 엄연한 정부 조직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업본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정부 기관이라면 국민에게 봉사하는 조직이지만 사업본부는 고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지경부는 산업정책 전반을 통합 조정하고 자원·에너지정책을 관장하는 정부 부처다. 정부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산업의 한 분야인 우정부문을 직접 운영한다는 뜻이 우정사업본부라는 이름에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산업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당장 민영화하는 게 효율적이다. 실제로 많은 나라가 우정 민영화를 추진해 왔다. 하지만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의 수렁에 빠져들거나 극심한 진통을 겪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우정 민영화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공론화조차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우정분야가 갖고 있는 공공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는 민영화를 둘러싼 최근의 세계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섣부른 민영화는 불구의 조직만 남겨놓고 실패하는 예가 많아 전 세계적으로 민영화의 추가 시도가 중단된 상태라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기도 하다.
오히려 갈수록 심화되는 시장 실패의 상처를 메울 수 있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우정의 공공성이 더 주목받는 추세다. 글로벌 위기와 양극화 등으로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시장에서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활동을 직접 수행하는 유일한 국가 조직인 우정 서비스 기관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현존하는 국가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시장경제, 공공경제, 사회경제의 세 영역에 모두 걸쳐 있기 때문이다.(지난 호 우정이야기 ‘금융소외자 대책은 우체국에서’참조)
문제는 지금의 사업본부 체제로는 우정의 공공적 기능을 심화·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우정사업본부의 위상과 조직을 보면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고 기형적이다. 국세청·병무청·문화재청 등 차관급 기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정원과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우정기관장인 본부장은 1급, 그것도 계약직이다. 중앙 조직의 장은 본부장인데 지방 조직(예를 들면 경기지방우정청)의 장은 청장인 것도 희안하다. 인사·재정 등은 지경부, 우편요금은 기회재정부, 우체국 금융은 금융감독원, 택배 등 물류는 국토해양부 식으로 여러 부서의 정책에 따라 좌우되는 구조도 어지럽다. 우정사업 연구 기능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갖고 있는데 이르러서는미궁을 헤매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런 이상하기 짝이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 우정 부문이 다른 많은 나라에 비해 건실하게 성장해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공성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새로울 정책 개발에 골몰하고 있다. 안목이 있다면 우정 조직에 눈길을 줄 만하다. 국토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우편망과 우체국 금융 등은 공공 서비스 혁신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걸음이 사업본부라는 기형적 조직 형태부터 정상화하는 것일 터이다. 다시 말하면 우정청으로 개편해 독립적인 정책 기반을 갖추는 일이다.
<요약>
산업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민영화하는 게 효율적이다. 하지만 실패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우정의 공공성이 더 주목받는 추세다. 문제는 지금의 사업본부 체제로는 우정의 공공적 기능을 심화·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우정청으로 개편해 독립적인 정책 기반을 갖추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