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장 소설도 이런 소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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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신문을 깔고 만찬 음식을 차리고 앉았다.
산동댁과 서울댁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건넌방에서 무슨
놀이를 하며 노는지 막내의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정원의 집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겼던 일은 실로 오랜만이다. 근심 걱정거리란
손톱만큼도 없는 행복한 집안 분위기였다.
“어이 덕형이, 울 집에서 이러케 해 본 것은 참말로 오랜만이네! 몇십 년 만에 오늘 첨인 거 같구먼.”
“정원이 자네는 아그덜 어렸을 때 기억도 까마득하겠네. 다 순해 가꼬 이런 일이 없었겠네.
우리 막내가 종채랑 놀면서 시끄럽게 헝게 정신이 없는 것 같고만은…….”
이때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막내를 덕형이 안고 오더니 무릎에 앉히고 설레발을 치고
다니는 막내 때문에 정신이 없겠다고 말했다.
“아니야 천만에 그냥 놔두라니까, 오늘 막내 땀세 우리 집에 집들이는 단단히 하고 있구먼그려.”
덕형의 무릎을 빠져나온 막내가 종채에게 숨바꼭질 놀이를 요청했으나 받아 주지 않자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려 얼굴을 가리고 벗겨내기를 거듭하며
저 딴에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덕형이 자네가 아까 막 했던 얘그는 영규가 유치장에서 풀려났던 날 자네 집에서
술을 많이 묵고 취해 뿌럿다고 하지 않았는가?”
“작년 여름에는 참말로 더웠다니까. 그날 손님이 왔담 말이시. 텃밭 머리에따가
평상을 만들어 놓았단 말이시, 거기서 술을 묵고 있는디 영규가 왔드랑게.”
“손님이라 했는가? 무슨 손님이기에 영규가 그 자리에 있었는가?”
“반민특위 활동했던 이순남 변호사인데 우리와 동갑인 사람이 명채랑 이형기랑 한 팀에
팀장으로 일했던 사람이라니까.”
유치장에서 김영규가 풀려나던 날 무슨 일로 덕형네에서 술을 마시다 취해
업혀 가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었다.
선변리 철다리에서 미나미가 탄 기차를 강으로 떨어뜨리면서 같이 죽었던 이경식의
아들을 명채가 데리고 와 만나게 되었던 얘기, 그리고 명채와 형기가 반민특위 조사관
활동하면서 이경안과 장영팔을 조사하기 위해 체포 작전을 펼칠 때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던 얘기, 이순남 변호사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집에 찾아왔던 얘기를 덕형이
간단하게 추려 정원에게 들려주었다.
“영규 아재가 우리보다는 술이 약하지 않응가?”
“하먼! 우리하고는 술이 약한 데에다가 1년 가까이 유치장에 있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날은 제 딴에는 화가 났던 거였다니까.”
자신을 고문해 장애인을 만들고 아내를 가로채려 했던 장영팔을 체포 조사하면서
몸 하나 상하지 않게 했던 것에 화가 난 영규가 이순남 변호사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얘기를 덕형이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영규가, 아니지, 영규 아재가 화가 날 만도 허네. 명채 니가 이야그를 해 보거라.”
김영규가 술에 취하게 되었던 이유를 덕형에게 대강 들었던 정원이 영규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고 말했다. 장영팔을 체포하고 심문했던 과정을 덕형에게 대강들은
얘기로는 이해가 안 되는지 당사자인 아들 명채에게 설명해 보라고 말했다.
김영규는 정원보다 10살 어리지만, 항렬로 따지면 삼촌뻘이 된다. 문중회의
때나 집안 모임이 있을 때는 깍듯이 존대하지만, 일반적인 장소에선 편하게 말하곤 했다.
“이경안이를 체포했던 얘기부터 하렵니다.”
“아니, 명채야! 니가 이경안이 그놈을 체포했담 말이냐?”
“그럼요.”
장영팔을 체포했던 과정과 심문했던 과정들을 덕형이 들려준 얘기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당사자인 아들에게 듣고 싶어 요구했다가 이경안을 체포했다는
얘기에 정원이 귀가 번쩍했다.
아버지 김 진사가 이경안과 장영팔에 받은 모진 고문으로 유치장에서 5일 만에
숨지기 전 김정원이 만났을 때다. 하얀 바지저고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걸음도 걷지 못해 담당 경관에 부축받고 겨우 면회실에 나오는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
“그날 느그 할아부지를 보니 내가 기가 막혀 말이 잘 안 나오더라니까.
할아부지가 생전 모습은 그때뿐이었다. 숨거두고 나니 할아버지를 내보내 주더라.
이런 이경안이를 니가 체포했담 말이냐?”
“이경안이뿐만 아니고 장영팔도 체포했담 말이시.”라고 덕형이 덧붙이자 정원은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다는 만족한 표정을 지며 아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경안이를 체포했을 때는 팀장님은 다른 체포 건이 있어 같이 합세를 못 했습니다.
형기하고 둘이서 잡았고요, 순천경찰서가 아니고 광주서부경찰서 지하실에서 조사했습니다.”
“명채야! 그놈은 독립군 할아부지를 죽인 놈이다. 인정사정 보지 말고 할아부지가 당헌
만큼 빚을 갚아 주었더냐?”
잠자코 듣고만 있으면 명채가 모두 다 얘기해줄 것인데 정원이 다짜고짜 혹독하게
고문도 했어야 한다며 할아버지가 빚진 만큼 하지 않았었냐고 얘기를 가로막고 물었다.
“몽둥이찜질도 해봤고 천장에 매달아보기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고문 조사도
우리는 못 하겠던걸요, 형기와 나는 지쳐 있는데 그 사람은 쌩쌩하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주먹질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요, 의자에 앉아있는 놈을 발로 걷어차도
아파하는 기색이 없더란 말입니다. 유도로 단련이 되어 넘어질 때는 낙법을 쓰고
몽둥이를 후려칠 때도 몽둥이는 부러지는데 이경안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문도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 내가 명채 너 말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이 나라에 반민특위가 활동한 거만 해도
얼마나 자랑스럽냐? 이경안이 그놈은 시방 감옥 사는 거니? 아니면 사형을 시킨 거니?”
반민특위가 와해하여 버린 줄을 아직 정원은 모르고 있었다.
“정원이 이 사람이 완전히 적막강산이라니까.”
“덕형이 자네가 무슨 말을 허는가? 적막강산이라니?”
“재판도 안 받아보고 일주일 만에 이경안이랑 장영팔이 풀려 나와 뿌럿담 말이시.”
“일주일 만에 풀려나다니 무슨 뚱딴지 겉은 소리를 헝가? 그놈의 죄상은 천하가 다 아는데,”
“반민특위를 이승만이가 해산시켜버리고 무효화시켰습니다.”
“명채야! 반민특위 특별법을 대통령이 맘대로 무효화를 시켜도 되는 것이냐?”
죄 없는 소주에 분풀이하듯 단숨에 들이킨 정원이 씩씩거렸다. 덕형도 소주를
들이켜고 담배를 빼 물었다. 명채는 두 사람에게 술을 따라 올리고 울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쓰는 표정이 역력하다.
우여곡절 끝에 반민족 해당 행위자처벌 특별법이 탄생한 과정, 활동, 이승만 정부의
방해 공작으로 반민특위사무실 습격 사건, 반민특위 위원과 요인암살 음모,
국회 프락치 사건, 그리고 반민특위 음해공작, 백범 저격 사건,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대통령 담화를 자주 발표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와해 공작으로 결국은 특위 위원과 전국에 조사관들이
전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명채가 설명했다.
“명채 아버지는 술을 조금만 잡수세요.”
“이 사람아! 이 판국에 내가 어찌 술을 안 묵고 넘어가겠는가?”
“당신이 술을 많이 잡수면 다시 백범께서 살아나고 반민특위가 부활한답니까?”
“호호호, 서울떡은 맨날 말을 이쁘게 헌다니까요, 그런 디다가 전라도 말이 아니고
서울말이라 농게 옆에 사람들이 들으면 듣기도 좋다니까요.”
“멩구 어무이야! 그러믄 우리도 서울말을 쓰면 될 거 아닝가?”
“서울말을 하기는 어디 쉬운 일이어요? 명채 메키로 서울서 태어나고 서울서
크믄 몰라도 우리 겉은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서울말은 못 배운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