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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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54)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덟째 왕은 이전 일곱 왕보다 더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왕입니다. 그는 앞에서 반복해서 짚었듯이 네로의 환생이라 부를만한 왕입니다. 로마의 모든 황제가 무지막지하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로마 제국은 나름 합리적인 체제였습니다.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과격하지만 않다면 웬만한 종교 문제나 민족 전통에 속한 문제는 눈감았습니다. 일종의 관용정신이 바탕에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로마 체제에서도 종교 자유를 상당한 정도로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함락시킨 이유는 종교적인 게 아니라 정치적인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위협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로마역사에 관한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를 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황제가 정치적으로 그리스도교 집단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일종의 마녀사냥을 통해서 정치적 소득을 올리려고 합니다. 황제에 대한 민중의 불평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겁니다. 최고 지도자의 그런 정치적 야욕으로 인해서, 또는 판단 실수로 인해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사도신경>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을 예수 죽음의 장본인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 집단이 지금 당장 로마에 정치적인 위협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로마 고위 정치인들이 하지 않았을까요? 아직도 저는 그게 궁금합니다. 앞에서 짚은 적이 있습니다. 4세기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받고 국교로까지 받아들여졌는데도 불구하고 ‘본디오 빌라도’ 운운하는 구절을 매 주일 예배 때마다 고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쨌든지 요한이 글을 쓰던 시절의 그리스도교는 생존이 위태로울 정도로 극심한 박해를 받습니다.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여기서 다시 열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환생한 네로의 동조자들을 가리킵니다. 조폭 집단처럼 악한 일을 행하는 독재자 근처에는 부화뇌동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독재자의 힘에 빌붙어서 나름 이득을 얻어보려는 속셈이겠지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들이 아무리 강력한 권세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한동안’일 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한동안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μίαν ὥραν’을 문자적으로 영역하면 one hour입니다. 그들은 한 시간만 권세를 누릴 뿐입니다. 한 시간만 떵떵거릴 뿐입니다. 그들은 그 한 시간짜리 권세마저 황송해하겠지요. 기억해둬야겠습니다. 모든 권세와 명예와 부와 자랑거리도 모두 ‘한 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7: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환생한 네로의(도미티아누스로 추정됨) 동조자들은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보탭니다. 악한 세력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요. 조폭들이 서로 어울려서만 악행을 저지르는 거와 같습니다. 수행자들은 홀로 자신의 길을 넉넉히 가지만, 아니 홀로 있는 걸 더 좋아하지만,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작당을 통해서만 뭔가를 시도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니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영화 <서울의 봄>이 기록적인 흥행을 보인다고 합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 서거 이후 벌어진 ‘12.12’ 사태를 조명한 영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가 벌인 쿠데타였습니다.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었습니다. 그때 벌어진 일은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저의 기억에도 생생합니다.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반 시절이었습니다. 졸업 논문도 마쳐야 하고, 다음 해 초에 있게 될 목사 고시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명일동에 있는 명덕성결교회 전도사 활동도 이어갔고요. 정신없이 바쁠 때였습니다. 대한민국에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다는 사실만 뉴스를 통해서, 그것도 부분적으로 전달받을 뿐이었습니다. 신군부에 장악된 방송이 제대로 된 뉴스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제 군사독재가 끝나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 세상이 온다는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야말로 ‘서울의 봄’을 꿈꾸었습니다. 달콤했던 꿈이 ‘광주의 겨울’이라는 악몽으로 끝났습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1980년 봄에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했습니다. 제가 군목 후보생으로 광주에서 군사 훈련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로 전두환은 7년을 대통령으로 살았습니다. 12·12 사태가 진압되었다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또 달라졌겠지요.
동조자들이 크고 작은 권력을 짐승에게 보태는 이유는 그래야만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비열하게 작동하는 거지요. 악한 세력의 동조화는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류 역사에서, 특별히 문명이 발달한 인류 역사 이후로 반복되었습니다. 지난 역사만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까지 미래 역사에도 이런 일이 크고 작은 영역에서 반복되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그중에서 소수의 남겨진 자로 살아야 하고요. 그렇게 살려면 역사를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게 바로 깨어 있는 영성이기도 하고요.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요한은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들의 연합체라 할 짐승이 ‘어린 양’과 싸울 것이라는 말을 천사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짐승과 어린 양의 싸움은 아예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짐승은 프로 격투사 골리앗이라고 한다면 어린 양은 목동 다윗입니다. 짐승은 상대를 파멸시키는 일에 특화된 존재이고, 어린 양은 잡아먹히는 데 특화된 존재입니다. 본문은 어린 양이 짐승들을 이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이고 ‘만왕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만주(萬主)는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Κύριος κυρίων를 영어 성경은 Lord of lords라고 번역했습니다. 만왕(萬王)이라는 한자도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스어 Βασιλεὺς βασιλέων를 영어 성경은 King of kings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린 양은 주들 중의 유일한 주이고, 왕들 중의 유일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짐승으로 묘사된 로마 제국의 막강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가 손을 못 대는 영역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어린 양만 이기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짐승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와 ‘함께’ 있고, 부르심을 받고, 선택을 받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의 본질과 정체성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하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제자로 선택받아,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신앙이 있다는(faithful) 뜻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움에서 이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실제의 삶에서 실감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요.
부록(1) - 2015년 12월10일에 쓴 매일묵상 ‘Agnus Dei’(하나님의 어린 양)를 여기 옮깁니다.
대림절은 예수 재림만이 아니라 초림을 포함하는 절기다. 예수 초림에 따라다니는 인물은 세례 요한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는 원래 요한의 제자였다가 자기 형 시몬(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네 복음서가 다 언급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의 세례 건은 잘 알려진 사건으로 보인다.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건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종의 ‘불편한 진실’이었는데도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세례 요한 추종자들이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흔적이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를 두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이라고 말했다(요 1:29, 36). 어린양은 구약시대에 대표적인 속죄제물이다. 어린양이 제단에 오름으로써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종교의식이 그 바탕에 있다. 예수의 죽음이 곧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그누스 데이는 슬픔이면서 기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 없이 죽은 사건이기에 슬프지만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 사건이기에 기쁘다. 슬픔과 기쁨이 여기에 결합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과 우리의 속죄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걸 주술적인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여기에는 예수라는 인격체의 고유성이 자리한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실제 삶으로, 그리고 운명 전체로 생생하게 살아낸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기를 계시했다는 말이 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에 완전히 일치된 자가 그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았다는 모순을 해명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의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생각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5Ea4j-Si3M(바흐의 비 단조 미사곡 중 ‘아그누스 데이’)
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요한은 천사의 말을 이어서 듣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사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와 비슷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 제우스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역할은 올림포스 12신 중의 한 신인 헤르메스가 맡았습니다. 헤르메스라는 이름에서 해석학을 가리키는 hermeneutics가 유래했습니다. 제우스의 뜻을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하는 건 일종의 mission impossible입니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바람이 분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실제로 바람이 분다는 뜻인지, 아니면 바람이 부니까 밖에 나가지 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바람이 부니까 옷을 단단히 입으라는 것인지 저 문장만으로는 모르는 거지요.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는 말을 거꾸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고요. 전체 문맥을 보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성경도 늘 해석이 필요합니다. 해석이 필요 없는 대목도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단 우리말 성경은 번역문입니다. 번역은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도 한계가 있고, 오역도 종종 나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성경이, 일단 신약만 놓고 볼 때, 1세기 세계관으로 살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문서라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 당시 사람과 21세기를 사는 현대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수렁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해가 동에서 뜨고 서로 진다고 생각했고, 지구는 평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부장 주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지중해 인근을 세계 전체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바이러스는 물론이고 박테리아도 몰랐고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지성적이지도 않고 영적이지도 않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지성적이고 더 영적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역사 발전이 충분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았기에 그런 한계가 성경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갑자기 여인이 앉아있는 물에 관해서 말합니다. 17:1절이 가리키는 그 물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위 15절은 물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모든 체제와 문화와 사회 제도 전체를 가리킵니다. 로마는 아주 강력한 체제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체제를 배경으로 로마 제국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대표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