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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사)
지난 1월28일 오후 3시, 인천공항 국제선 카운터. 몽골행 항공권이 든 초록색 여권과 캐리어 가방 손잡이를 쥔 몽골계 한국인 마야씨(35·가명)의 얼굴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위탁수하물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방에서 꺼내든 것은 손때가 탄 몽골어 교재와 영어 교재. 울란바토르 국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참이다. 수하물로 부칠 수 없는 케이크 상자는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임신 6개월째인 조카가 부탁한 한국의 생크림 케이크다.
마야씨는 울란바토르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스무 살에 한국 남성과 결혼해 경기도에 정착했다. 주민등록부에 올린 이름은 ‘강바트마야’. 엄마가 외국인이면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3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꾸라”는 시댁의 권유는 뿌리쳤다. “다 바꿔버리면 더 이상 몽골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마야씨는 스스로를 ‘몽골인이자 한국인’이라고 정의한다.
마야씨가 결혼한 직후 어머니 산사르씨(58·가명)도 한국에 왔다. 딸의 가사와 육아를 돕기 위해 한국인 사위의 ‘초청’을 받아 입국한 산사르씨는 2015년 마야씨의 이혼으로 ‘한국인 배우자’의 체류 연장 승인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고향인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마야씨의 두 동생과 조카 두 명이 산다. 2008년 모녀가 집을 비운 뒤로 마야씨의 큰어머니(산사르씨의 언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한국의 돌봄과 가사노동을 이주여성이 떠맡는 동안 본국에 남은 여성 친족들의 가사노동 부담은 배가된다. 한쪽 빈칸을 채우면 다른 한쪽에 빈칸이 생기는 ‘슬라이딩 퍼즐’과 흡사하다. 이주여성의 몸에 둘린 ‘돌봄 사슬’은 한국의 ‘결혼이주가정’을 지탱하는 동시에 본국의 가족을 해체한다.
경향신문은 지난 1월부터 한 달간 이주여성 14명을 만나 한국에서의 삶을 들었다. 왜 이들은 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누군가를 돌봐야만 할까. 한국은 왜 이주여성들을 ‘돌봄’과 ‘결혼’으로만 정의하려는 것일까.
국경을 넘는 ‘돌봄 사슬’
마야씨는 시댁에서 해마다 여섯 번 제사상을 차렸다. 시어머니는 ‘그나마 열두 번 하던 걸 반으로 줄였다’며 감내하라고 했다. 정작 마야씨에게 친엄마나 다름없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돈이 없다며 몽골에 못 가게 했어요. 결혼할 땐 2년에 한 번씩 가게 해준다고 했는데, 그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때 한 번이라도 보내줬더라면….” 이 일은 마야씨가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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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씨는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 결혼 생활을 회상했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우울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연년생 아이를 양육하면서 하루 세 끼 어김없이 시부모님 밥을 차려 드렸어요. 여자가 저녁에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면서 친구도 못 만나게 했어요. 새장에 갇힌 기분이었죠.” 둘째를 임신했을 때 시동생이 사고를 당하자 시어머니는 1년 넘게 집을 비웠다. 만삭의 몸으로 혼자 시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입덧이 심했는데, 시아버지는 계속 집 안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시댁 사람들이 입에도 안 대니 몽골 음식은 해먹을 수 없었어요.”
혼자 감당하기 힘든 가사노동은 남편과 시댁 가족이 아닌 마야씨 어머니 산사르씨가 도와야 했다. 시댁은 ‘양육 지원’ 목적으로 산사르씨를 초청했지만 정작 머물 곳은 내주지 않았다. 산사르씨는 서울 친척집에 머물며 딸이 사는 경기도로 출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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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돌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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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여성들인 간병노동자는 ‘대안 가족’으로 여겨진다. ‘감정노동’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환자에게 예속돼 ‘모성’을 강제당한다. 환자에게 해가 갈까 태업을 하며 근로개선 요구를 할 수도 없다.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돌봄노동자를 ‘사랑의 포로’라고 일컫는 이유다. 환자를 돌보는 틈틈이 ‘급하게 쏟아넣듯이’ 식사를 하기 때문에 위장병에 걸리기도 쉽다. 김씨는 위장이 나빠져 2019년 중국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간병인이 바뀌니 환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환자 가족들의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해 40일 만에 되돌아왔다.
돌봄의 주체이자 혐오의 타깃
이 고된 노동의 절반을 이주여성들이 감당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돌봄 서비스의 이주노동자 실태분석’에 따르면 2020년 3월 기준 외국인 간병인 수는 전체 46%에 달했다. 하지만 이주여성은 주로 ‘개인간병’에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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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 다쳐도 이들을 책임질 ‘사용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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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주민·간병노동자라는 삼중의 정체성으로 인해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부각되지 않는다. 반면 이들은 혐오에는 쉽게 노출된다. ‘돌봄 돌려막기’로 부담을 덜게 된 한국 사회가 정작 그 종사자들을 혐오하는 부조리다.
김선숙씨는 “일부 간병인들이 환자를 학대하거나 질타받을 행동을 하면, 곧바로 ‘조선족 짱깨들 중국 가버려라’라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조선족들이 떠나면 요양병원이 운영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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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인 46%가 외국인…‘필요’로 하면서도 쉽게 혐오 대상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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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혼다뉴 소텔로는 본국에 자녀들을 남겨둔 채 타국에서 이주국 가정의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을 ‘초국가적 모성(transnational motherhood)’으로 정의했다. 이들은 이주국 국민의 ‘대안적 어머니’가 되어 돌봄노동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본국의 자녀들을 양육한다. 본국과 이주국에서 중첩된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과 일터의 경계가 붕괴되고, 돌봄노동은 ‘여성이 응당 수행해야 할 어머니 역할’이라는 인식이 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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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어머니’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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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는 2010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지 않은 채 아들을 낳았다. 중국도, 한국도 아이를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한국은 혼인관계가 아닌 외국인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어머니의 국적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비혼모의 출산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씨의 아이가 국적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다.
출산 직후부터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다시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싸움이 이어졌다. 2년간 분투한 끝에 2012년 아들은 ‘한국 국민’이 됐지만 하씨는 여전히 ‘외국인 엄마’다. 9년 전 귀화적격시험에 합격했지만 자산 요건인 ‘3000만원 이상의 예금 잔액’은 하씨에게 불가능한 숙제다.
아이가 자신의 친아들임을 증명하는 인지소송, 친부를 상대로 양육권과 친권을 찾아오는 소송은 아이 아빠가 종적을 감춘 탓에 배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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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비 소송에서 이겼지만 하씨는 아이 아빠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 외국인 특례도 ‘한국 국민과의 혼인’이 기본 조건이어서 적용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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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관계에 기반한 ‘국민’이라는 체는 미혼모 이주여성을 걸러낸다. 아이를 돌볼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인 친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민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면 ‘국민의 어머니’로 존재해야 한다.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나, 이주여성’
여성들은 계속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한국은 ‘국민을 돌볼 가족’으로서의 여성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이주여성은 틀을 허물고 벗어난다. 그들은 누군가의 가족일 수도, 노동자일 수도, 홀로서기를 원하는 독립가구일 수도 혹은 그 전부이거나 일부일 수도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나고 자란 응우옌 티엔 한씨(26)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온 지 4년 만에 ‘렌즈 연마 기술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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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명이 일하는 연마 작업장의 여성 노동자는 한씨까지 3명. 모두 베트남 국적의 이주여성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를 더 많이 뽑으니까, 여자들은 시집으로 한국 가는 게 더 쉬워요. 한국에서 알게 된 베트남 언니들은 다 결혼해서 왔거나, 유학하러 온 여자들이에요.”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E-9 비자 소지자 23만6950명 중 여성은 2만47명(8.4%)에 불과하다. 결혼이민자의 81.7%가 여성인 것과 대조된다.
한국의 이주여성 정책은 ‘가정’의 틀에 맞춰져 있고, 행정을 통해 재생산된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11곳의 이주여성 담당 부서이름에 ‘출산’이 포함돼 있다. “서울시 저출산대책담당관 산하에 다문화가족팀이 있었던 전례를 따른 것.”(도봉구) “팀을 만들 당시에 국제결혼 붐이 일었고, 그래서 출산과 다문화를 하나로 묶은 것 같다.”(마포구)
이해응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여성을 지칭할 때 기혼·비혼을 특정하지 않는데, 이주여성에게만 ‘결혼이주여성’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라며 “이런 호명은 유학생, 노동자, 투자자, 자영업자 등 ‘가족 형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주여성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했다.
한국 여성이 그렇듯이 가정을 꾸리며 일을 하는 결혼이주여성도 적지 않다. 이민정책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결혼이민비자를 가진 이주여성 중 경제활동 인구는 41.7%(2019년 기준)였다. 귀화여성을 포함하면 비율은 더 높아진다. 2005년 한국인 남편을 만나 충북 음성에 정착한 필리핀 국적의 로웨나씨(49)는 출산 이듬해인 2007년부터 일을 쉰 적이 없다. “슈퍼마켓도 하고, 옷가게도 하다가 2014년부터 식품 공장에 다니고 있어요.” 하청업체 파견직원으로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로웨나씨의 급여는 8년 동안 그대로다. 로웨나씨는 “그래도 E-9 비자를 받아 오는 것보다는 결혼으로 와서 공장에 취직하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여성가족부는 가족센터(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일자리를 이주여성들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처우는 열악하다.
여가부가 2020년 권인숙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중언어코치의 평균 임금은 2632만원, 통·번역사는 2561만원으로, 센터 행정직원 평균 임금(3428만원)에 크게 못미쳤다. 이중언어코치와 통·번역사는 결혼이민자만 지원할 수 있는 직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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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은 계속 떠나고, 계속 온다. 한씨는 체류비자가 만료되는 내년 5월 하노이로 돌아가야 하지만, 한씨의 여동생 마이씨(23)가 뒤이어 한국에 오기 위해 E-9 서류를 준비 중이다. 한씨의 꿈은 베트남에서 한국 유학 전문 사업체를 꾸리는 것이다. 한국 패션에 관심이 많은 마이씨는 한국에서 옷가게를 열고 싶다. 한씨의 베트남과 마이씨의 한국은 이들에게 각각 어떤 내일이 될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결혼해 한국에 왔으니까, 오히려 한국어보다 몽골어가 달려요. 통역에 필요한 전문용어도 더 배우고 대학생활도 경험하고 싶어요.” 마야씨가 어머니를 한국에 남겨두고 몽골로 ‘어색한’ 유학을 떠나는 이유다. ‘결혼이주여성’으로 한정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출발선에 선 셈이다.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인 마야씨는 “1년이든, 3년이든 언니랑 엄마가 비자를 받아 함께 파란 바다도 보러가고, 자유롭게 몽골도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문은 출처로..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4081338001
첫댓글 중국 동포나 혼외자 등 불편할 수 있는 단어나 상황이 있지만 그보다는 제목과 내용에서 말하고 있는 돌봄 돌려막기에 좀더 초점을 맞춰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남들 진짜 환멸나긔
응원합니다. 국적을 넘어 여성들은 연대해야 하긔.
남자들 진짜..그리고 그 남자들 가족들도 …. 너무 싫긔 …
좋은 기사긔! 외국인 간병인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46%나 되는지는 몰랐긔 돌봄을 헐값에 외주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혐오하는 사람들 보면 한남과 다를 바 없어 보이고요; ‘나 빼고 다 돌본 삶’이라는 말이 너무 씁쓸하긔
응원하긔
나빼고 다 돌본 삶이라니... 얼른 꽃길만 걸으시길
자국여성 부려먹던 버릇 못고치고 이젠 타국여성까지 부려먹으면서 나라 굴리긔 지긋지긋 하네요 대한민국 가성비가부장제 기사보니 인터뷰에 응하신 분들 모두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보다 못한 국가 출신들이라는게 시사하는 바가 크긔
한국은 왜 이주여성을 돌봄과 결혼으로만 정의하려는 것인가....
ㅋㅋ 촌철살인이긔🤬 잘봤습니다.. 마야씨에게 친권도 없네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