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큰 협곡.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협곡.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그랜드 캐년은 다 알아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무명으로 남아 있는
이 베르동 협곡은 마치 2등의 비애를 그대로 말해주는듯 하다.
하지만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곳이다.
나와 베르동의 첫 만남.
썽트-크로아 호수를 끼고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설레임을 안겨준다.
드디어 호수와 협곡이 만나는 지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왜 그렇게 큰 썽트-크르와 호수가
“텅텅” 비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합류지점에서 부터 카누를 타고 베르동 협곡천(峽谷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곳처럼 호수만 덩그러니 있는곳라면 사람들이 물놀이를 호수에서 즐기고 있었겠지만 이곳은 호수를 능가하는 비경이 있었기에 그만 호수는 잊혀져 있었던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수를 뒤로 한 채 협곡천을 따라 베르동의 천애 낭떠러지 사이를 거슬러 노를 저어 가고 있는 모습은 과연 한폭의 그림이었다. 청자빛 물, 깍아지른 죄우의 험한 절벽바위, 그 사이에 점점히 저어가는 카누들…그야말로 丹崖碧川의 절경이었다.
(호수와 계곡이 만나는곳에서 카누를 즐기는 모습)
차는 나의 감탄과는 달리 힘겨운 호흡을 해야했다. 계속 구비 구비 돌고 도는 오르막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전거로 도전하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도저히 힘들어 올라 오지 못할것 같은데 좀 쉬고 있다보면 어느새 땀을 뿌리며 앞질러 가고 있었다.
구비를 돌때마다 새로운 경치가 전개되고 있었다. 호수는 멀어져 가는 대신 험한 산 기세가 다가온다. 벌써 몇개 봉우리들은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도는곳마다 거의 바위가 튀어 나와 있었고 그곳은 잠깐씩 차를 세우게 하는 훌륭한 전망대였다.
계곡 주위의 산은 1577m의 그랑 마르제(Le grand Marges)를 위시로 둘러 서 있고 협천에 이르러 직각으로 떨어지는 절벽중 가장 높은것은 450m라니 현기증까지 다스려야 하는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조금은 편하게 보이는 툭 터진 아름다운 비탈뜨락이 있었다. 노란꽃과 온갖 들꽃이 넓게 피어 있었고 반대쪽 계곡의 산들은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다. 나는 첫 휴식을 이곳에서 가졌다.
협곡의 비경속에서 들꽃은 자연의 평화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들꽃과의 대화를 나누며 간단한 빵과 커피를 마신다. 아침의 고즈녁한 한가함속에서…그리고 다시 출발.
베르동 협곡은 그 사이를 흐르는 협곡천을 좌우길로 대략 100여km를 달리게 되어 있다. 오르락 내리락 그 구비구비 길에서 눈을 휘어잡는 자연의 조화들! 그야말로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곡곡산회전 봉봉수포류)…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 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돌고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그리 칼로 내리친듯 300-400m수직으로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을 수 있는가! 베르동川은 그 아래 까마득히 실개천이 되어 햇빛속에서 반짝이고 있을뿐이다.
전망대에 설때마다 유럽각국 (때가 유럽 성령강림절 휴가철이라 프랑스 인보다 이웃 나라 관광객이 더 많았다) 의 감탄사들이 사진셔터 소리에 섞여가며 어지러히 터져 나온다.
한 전망대 근처 바위에서는 산양을 만나기도 했다. 녀석은 사람들을 피하는 기색이 전혀없이 사진모델이 되어 주고 있었다. 가끔씩 몸을 틀어 이동하는데 정말 발굽과 몸이 바위와 일치가 되는 환상적인 모션을 보여 주었다. 나는 주위의 풀을 한줌 뜯어 다가 서 보았다. 그러자…놀랍게도 이 산양은 기꺼이 손에서 받아 먹는것 아닌가? 그때서야 다른 관광객들도 용기를 내어 각자 손에 풀을 들고 다가온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는것은 산양만이 아니었다. 어느곳에선 땅에서 솟아난듯 난네없이 없이 나타난 사람을 보고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벗어부친 윗 몸통, 허리에 메 달린 자일과 고리로 즉각 알수 있었다. 세상에…보기도 아찔한 이 험한 절벽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산양과 인간의 경쟁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하루를 차로 돌아도 다 못도는 절경속에서도 베르동 협곡의 절정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point sublime이라는곳, 말 그대로 절정의 장소라는 뜻이다. 가다 서고 서서 보다 다시 가고 이 반복 끝에 드디어 나는 point sublime에 도착했다. 이곳에서의 경치…! 만약 글로써 표현해주기를 나에게 바란다면 님들은 너무 잔인한 분들이리라…어떤 표현으로 어찌 내가 감히 그 희망을 채워줄수 있을까? 차라리 짐짓 “무덤덤한 말로” 넘기고 싶다.
이곳, point sublime이라는곳! 이곳은 400m의 높은 바위가 금방 쩍 갈라진것 처럼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곳이었다. 역발산 기개세 항우장사가 이곳에 와 그 절벽을 쫙 밀어 부치면 한치의 틈도 없이 그대로 맛 물릴 정도로 견아상착(犬牙相錯: 개 이빨처럼 맛물린 지세)의 形이었다. 그리고 그뒤로 이어지는 숨고 나서고 하는 물길과 절벽들의 숨박꼭질…
이 협곡이 생긴것이 지리사학적으로는 일억년 전, 바닷속에 있던 알프스의 융기가 시작되고 그렇게 솟아오른 산 사이를 비집고 수천 수만년을 두고 흐른 물살이 결국은 이렇게 높고 좁은 협곡을 만들어 낸것이다. 그러니까 이 절벽들은 한때의 제 살을 지천에 두고도 이렇게 찟어진 채 벌써 또 몇 천만년을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것이다. 가장 좁은곳은 살이 서로 맞닫기라도 할듯한 불과 몇 미터이니 안타까움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 협곡의 또 다른 매력은 아래로 내려가 바로 그 물가를 걸을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로 돌며 감탄하는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고 아래로 내려가 발로 걸으며 진땀을 흘리는데 있는것이다.
오늘은 주위를 차로 한바퀴 돌아본 “바퀴여행”이었다면 내일은 발 여행이다.
직접 협곡밑으로 내려가 굽이치는 물살과 함께 걸어 보는것이다. 다시 하루를 소비해야 하며 많은 에네지를 필요로하는 베르동 트렉킹을 위해 모처럼 해지기 전에 하루를 마무리 해 보았다. 그 만큼 베르동 트렉킹은 심신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베르동 계곡물이 거세게 흐르는 강가에서 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갈라진 협곡틈에서 튀어나온듯 별들이 하늘에 맑게 흩뿌려져 있는 밤이었다.
다음날…
계곡탐사를 떠나기전 떠오르는 point sublime의 아침햇살이 보고 싶어 그곳이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주위의 높은 동네로 향했다.
수억년을 숨쉬고 자연의 침식에 몸을 맡끼고 있는 너 자연이여!
보이지 않는 끝없는 너희들의 몸부림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었일까?
우리의 삶의 몸부림이 또한 이 자연속에서는 어떠한 의미일까?
이제 나는 이번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계곡 트레킹을 위해 먼저 휴게소가 있는 출발지점으로 갔다. 옛날에는 대피소였는데 지금은 출발하는 사람은 신발끈을 졸라메고 돌아 온 사람들은 아이스 티를 마시며 숨을 고르는 곳이다.
베르동 협곡은 여러 개의 코스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Sentier Martel, Sentier d’l’imbut, Senrtier du Bastidion등…
모든 코스가 하루를 소요하기에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나는 랑뷔(l’imbut)코스를 골랐다.
설명서에 적혀 있는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는 한 마디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출발점에서 계곡물까지 350m고도의 차이,
내려가는데만도 한 시간 이상의 길이다.
다행히 일찍 왔기 때문에 선선한 아침에 무척이나 상쾌한 출발이다.
이제 물가를 따라 펼쳐지는 4km의 길을 걷는 즐거움만이 남은것이다
휴게소에서 아래로 내려 갈려는데 젊은 환경보호원들이 출발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설명해 준다. 잠시 긴장되던 마음은 출발하는 첫 걸음을 환하게 맞이 해주는 프로방스 산 꽃인 노란 산국 무더기에 의해 누그러진다.
중간쯤에서 만난 아주 큰 도토리 나무에 안겨보기도 하면서, 그늘에 잠시 잠시 몸을 맡겨 가면서 발은 한가히 걷는데 귀는 온통 강물소리를 향해있다. 최소한 물소리 들릴만한 곳쯤은 왔을까?….
드디어 힐끗 협천(峽川)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느껴지는 서늘함은 마치 나를 맞이 하러 나온 전령인듯 반갑다.
내려가 서니 가로 지르는 다리가 있다. 어울지 않게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진 철 다리다. 알고보니 그럴만도 한것이 8년전 큰 홍수가 났을때 나무다리가 떠 내려 가버렸던것이다. 이제 이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트랙킹이 시작하는것이다.
경치는 같은 경치이지만 물가에 서서 보니 어제 위에서 보던 바와 사뭇 다르다. 아니…이미 나는 감히 내려다 “볼수 있는” 자리에 있지않다. 모든것이 코앞에 서있고 시야는 제한되어 있다. 이제는 정말 내가 이 거대한 자연의 한 일부분이 되어 있는것이다. 물은 천길 절벽을 어루만지듯 감돌아 흐르고 산자락은 물에 발을 담근 채 우뚝 서 있는 이곳에서 나는 그저 나뭇잎뒤에 숨은 미물같다
발길을 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여느 강가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 만큼 길이 편했다. 좁은길이 나오다가 이내 숲 사이길로 바뀌기도 하고 협천에 바짝 다가서다 또 갑자기 숲으로 들어가고, 옆에 끼고 걷다가 보면 어느덧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고.. 정말 다채로움이 있는 길이었다. 거기에다 이제 바로 코 앞에 솟아있는 그 절벽들…내 쪽의 절벽은 아예 볼수도 없다. 겨우 물건너 반대쪽 절벽을 보려도 너무 가까이 있기에 고개를 젓혀 들어야 한다.
그래도 길은 편했다.
이렇게 그냥 가면 되나보다…
하지만 이 생각이 전혀 오해였음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베르동은 그렇게 만만한곳임을 거부하고 있었다.
편한 숲길을 나와 오르막턱을 하나 넘고 보니 또 하나 좁고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저으기 걱정을 하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험하다. 순간 눈에 띄는 절벽쪽으로 걸려있는 쇠줄이 걱정을 누룰수 있게 해준덕에 짐짓 태연히 다가선다. 첫 길은 그런대로 스릴까지 즐기며 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이 구간에서 부터 다음 목적지 까지 적어도 여섯번의 “쇠줄길” 이 나오는데 갈수록 간담을 서늘케 하는 길이었다. 한곳은 아예 절벽 중간을 파고 길을 낸곳으로 쇠줄이 달려 있었지만 짦지 않은 길을 후둘거리는 다리로 넘겨야 했다. 겨우 한 절벽 중간에 파인 겨우 한 사람이 지나 갈 정도 넒이의 길, 아래로 보이는 급물살의 谷川…그야말로 "무릎으로 기고 뱀같이 업드려서"(膝行蛇伏) 가야 한다는 무이산(武夷山) 무이구곡을 가는 심정이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한 사람을 목숨을 걸고 바깥쪽으로 양보해야 하는 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코스옆 바위엔 여기에서 죽은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걷기를 한시간
멈추어지는 발길에 따라 계곡가에서 휴식과 점심을 먹으며 잠깐 낮잠도 즐기려는 순간…갑자기 총소리 같이 피이용 그리고 타타탕 탕!하는 소리가 계곡의 적막을 깬다. 깜짝 놀라 바위 밑으로 피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위에서 작은 돌하나가 굴러 왔는데 내려오는 속도에서 가속이 붙어 온 계곡에 메아리를 치며 마치 총알이 날라오듯 한것이다. 긴장으로 죄어오는 몸을 추스리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 코스는 목적지 까지 5개의 장관이 있다. 어느곳은 별것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하고 어느곳은 역시 비경임을 인정하게 하는 험난한 코스를 극복하며 도달한 마지막 지점은 물이 바위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특이한곳이었다. 이름도 깔데기(Enntonoir)라고 불리우는 지점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많던 계곡물이 소리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물은 사라지기전 이곳까지 온 사람들을 보상이라도 하려는듯 널직한 자갈톱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진땀을 흘린 사람들 마다 이곳에 이르러 쉬고 있었다.
사실 길은 그 너머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큰 바위 덩어리들을 넘어가야 하는 코스였고 그 사이 사이마다 벌어진 틈들은 더 이상의 접근을 원치 않는다는 강한 경고를 보내는듯 했다. 나는 여기 자갈톱에 그냥 몸을 뉘였다. 물에 발을 담그어 본것은 한참이나 지나서 였다.
이렇게 해서 한바퀴 둘러본 베르동 협곡은 과연 대단한 곳이었다. 하지만 굳이 객관적이기 위해 말한다면 특이한 것은 그 웅장함이야 가히 압도적이었지만 계곡 자체의 아기자기한 멋은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큰 바위들도 바로 어제 굴러 떨어진듯 투박했고, 많은 나무, 풀들이 나름대로 무성하게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불그레 벌거벗은 절벽위에 한그루 낙랑장송만이 외로히 서 있는 모습, 신선들이 바둑이라도 둘만한 넒찍하고 편한 바위 덩어리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베르동은 아직은 험한 기세로 흐르고, 구르고 움직이는 젊은 계곡이었다. 계곡이 젊어서 일까.. 젊음은 젊음을 부르고 있었다. 여기에는 또한 카누 타는 젊은이, 밧줄 하나에 의지해 암벽을 타고 오르는 젊은이들의 도전이 있었다. 베르동은 젊었고 베르동은 젊음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선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설악산 계곡으로, 자연에 젊음을 던져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베르동 계곡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곡을 빠져 나왔다.
뉘엇뉘엇 지는 해를 따라 협곡의 베르동을 떠나며 다시 경유하게 된 발렌솔(Valensole)의 넓은 평야속에서 나의 10박11일 프로방스와 베르동 협곡여행의 긴 호흡을 정리해 본다.
여행이란 하나의 실험이다. 내가 나를 만나고 내가 나를 만드는 나와의 실험인 것이다. 내가 자연에 도전하며 흘린 땀이, 내가 자연에 도전해 받은 열기가 내가 살아 가는 삶에서 힘이 될것이며 이 힘으로 인하여 또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되는것이 아닐까?
다시 파리로 올라가는 길…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 또 다른 미래를 향해 가는 길이리라.
멋진 상념에 빠진 이 여인은 누구일까?
첫댓글 멋져요. 저도 베르동계곡을 책에서 보고 다음에는 꼭 가고 싶은곳으로 점찍어 두었는데 사진으로 보고, 글을 읽으니 더 가고 싶어지네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감사해요. 같이 가고 팠는데 일행들 일정 때문에...스치듯 비슷한 시기 가겟다 싶어요. 정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