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전
1947년 12월 1일 부산 주둔 제5연대, 대구주둔 제6연대 및 제주 주둔 제9연대를 기간으로 하여 경남 부산에서 창설된 제3여단(대령 이응준 : 5, 6, 9 연대)이 증강되어 1949년 5월 12일에 제3사단으로 승격. 사단사령부를 부산에서 대구로 이동하고, 예하연대는 경상남/북도 지역의 공비토벌작전 임무 수행(초대 사단장 소장 이응준 : 22, 23 연대 예속)
※ 초기에 제23연대에는 전원 부사관만으로 편성된 특별중대가 있었다. 연대장은 이 중대를 특수임무를 수행하는데 주로 투입하였다.영덕전투간 수색/매복작전 성공사례
사단 모체인 제3여단은 1947년 12월 1일 부산 주둔 제5연대, 대구주둔 제6연대 및 제주 주둔 제9연대를 기간으로 하여 경남 부산에서 창설되었으며, 1949년 5월 12일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사단은 북한침략을 예지하지 못한 가운데 6월 25일부터 태백산이남지구의 공비격멸에 착수할 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즉, 6월 중순 현재, 태백산-보현산-지리산에 걸친 영.호남의 일부지역에는 잔존공비와 북한의 남침유격대(장, 李承燁) 30개 조가 합류하여, 540명으로 추산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육군본부는 이 공비를 제거하기 위하여, 6월 24일에 출동부대의 작전회의를 진주에서 개최하였다.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의 주관으로 소집된 이 회의에는 제3사단장 유승렬 대령, 동 작전참모 장송주 소령, 제5사단 참모장 박병권 대령, 독립제1대대장 金淙舜 중령, 영등포학원 부대장 홍성준 소령, 경찰부대대표등이 참석하였는데, 제3사단은 태백산-보현산지구를 담당하여, 지리산지구를 담당한 타부대와 함께, 25일 05:00부터 일제히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이 작전을 중지하고 정규전에 대응케 된 사단은 이날 11:00에 하달 된 육군본부의 '1개 연대를 26일 05:00까지 서울에 차출하여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속케 하라'는 긴급명령(육본작명 제93호)으로 제22연대의 2개 대대를 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의 지휘하에 선발시켰으며, 26일에는 잔여 1개 대대를 동연대장인 강태민 중령의 지휘하에 후속시키는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제23연대 1개 연대만을 사단기간으로 보유하게 된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독립제1대대 및 영등포학원의 배속을 육군본부에 요청하는 동시에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으로 하여금, 마산등 각지에 분산 배치된 병력을 부산으로 집결시켜, 출동명령에 대비토록 하였다.
대구에 소재한 제3사단장은 북한남침 초일의 전선상황에 대한 정보입수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육군본부의 작명이 어떻게 하달될 것인지를 예측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당면한 조치로서는 잔여의 기간병력을 집결 대기토록하는 한편, 사단의 위수지구에 대한 자체경계태세를 확립함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장은 6월 25일 12:00를 기하여, 경상남.북도 일원에 대한 계엄령을 선포함과 아울러, 대구 및 부산을 비롯한 각 시읍의 가두검문을 강화케 하고, 민간 트럭 300대를 징발 확보케 하였다. 왜냐하면 전자는 양민을 가당한 공비 및 적색분자의 암약(暗躍)을 사전에 막아내기 위함이며, 후자는 긴급출동시의 기동성을 확보키 위함이다.
사단장은 또한, 동해안연변에 대한 북한병력의 해상침투를 조기에 적발키 위하여 죽변이남의 해안선에 연한 각 읍면의 청년방위대로 하여금, 해안감시망을 급편케 하였다.
이 급편조치는 전선의 상황이 모호한 가운데에서도 그 일부의 정보나마 입수하는데에 주효하였다.
즉, 6월 25일 당일, 북한 유격대로 간파되는 일부병력이 온양리(죽변남쪽 5km)의 해안에 침투하였으며, 그들의 수송용으로 보이는 함선 1척이 방어진 전면의 해상을 남주(南走)하였다는 보고가 사단사령부에 전달되었다.
이 북한 수송선은 병력 600명을 수산부근에 침투시키려던 것이었으나, 해군의 제701함(장, 최용남중령)에 포착되어, 26일 01:30에 격침되었는데, 6월 27일에 강릉의 실함과 함께 제8사단이 대관령 이서의 내륙으로 전진하게 되자, 동해안전선은 이제 사단의 전투정면으로 부각되었다.
차후에 밝혀진 바로는 제8사단의 내륙전진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니, 이는 강릉 남쪽의 정동진리 및 임원진에 해상침투한 북한 제766부대 및 549부대에 의하여, 이미 해안국도의 퇴로가 차단당하고 있었으므로, 임기응변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철수로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강릉에서 울진에 이르기까지의 92km가 무방비지역으로 적에게 개방된 결과를 자초하였으므로 사단의 긴급출동은 분초를 다투는 사생의 기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독립제1대대 및 영등포학원을 사단에 배속시킴과 동시에 '제3사단장은 주력으로 울진에서 적을 포착섬멸하라'라는 작명을 하달하였다.
6월 28일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북한 제5사단의 주력이 강릉이남으로 도보로 진출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을 뿐, 정확한 정보자료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에게 긴급출동을 명령하면서도 적정판단을 명확히 내리지 못하였다. 즉, 제23연대는 울진을 목표로 북상하면서도 언제, 어디서, 어느 규모의 적과 조우하게 될 것인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긴급출동하였다.
【보충2】사단의 주요작전 및 전투경력
1950. 6. 25 : 사단은 제22연대(대구)와 제23연대(진주)의 2개 연대 편성으로써 영남 지방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중, 한국전쟁 발발
6. 27∼6. 29 : 제22연대, 대구에서 열차편으로 서울로 이동하여, 제1, 제2대대는 서울 서북쪽(신도면)에, 제3대대는 김포의 제73고지에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지연전을 전개한 후, 제1, 제2대대가 행주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김포의 제3대대와 합류, 안양으로 철수
6. 30∼7. 4 : 제22연대, 혼성 제3사단에 편입되어 수원(신갈 북방)을 방어
7. 4∼7. 23 : 제22연대, 수원―천안―조치원―청주―보은―추풍령―대구로 철수
6. 29∼7. 1 : 제23연대, 동해안의 울진(남대천)으로 출동하여 북괴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
7. 2∼7.19 : 제23연대, 기성리―평해―영해―영덕으로 철수
7. 19∼8. 4 : 제23연대, 영덕 공방전 실시
7. 26 : 제22연대, 영덕으로 이동 제23연대와 합류
8. 4∼8. 7 : 영덕―강구로 철수
8. 9∼9. 22 : 포항지구전투 실시
9. 22∼9. 30 : 포항―홍해―청하―영덕―울진―삼척―강릉(38도선)으로 진격
10. 1 : 38도선 돌파
10. 1∼10. 10 : 원산 탈환작전 실시
10. 16∼11. 5 : 원산―함흥지구 경비임무 수행
11. 5∼11. 16 : 군단 예비
11. 17∼11. 30 : 22연대가 해산진, 제23연대가 나남으로 진출
12. 1 : 국군 제1군단의 철수 명령에 따라 철수 개시
12. 1∼12. 9 : 백암 및 나남―길주―성진―홍남으로 철수
12. 10∼12. 12 : 제22연대가 구룡포로, 제23연대가 부산으로 해상 철수
12. 15 : 제18연대가 사단에 예속되고 제26연대는 수도사단으로 예속 변경, 사단은 제1군단으로부터 제2군단으로 배속 변경, 원주로 이동
12. 21∼12. 31 : 홍천 북방 소양강 일대에서 북괴 제10사단과 제2사단의 유격대 소탕전 전개
1951. 1. 5 : 제2군단으로부터 제3군단으로 배속 변경
1. 7∼1. 10 : 평창―영월―제천―영주―춘양으로 철수
1. 14∼1. 19 : 남대리(소백산맥)에서 북괴군의 진격 저지
2. 4∼2. 10 : 춘양―영월―평창―횡성으로 진격
2. 11∼2. 13 : 중공군(제66, 제44군) 및 북괴군(제5군단)의 2월공세로 횡성에서 철수
2. 14∼2. 15 : 제2군단으로부터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전환, 제천을 거쳐 주포리로 이동
2. 23∼3. 4 : 강림―안흥―봉화산으로 진격
3. 6 : 미 제10군단부터 제3군단으로 배속 변경
3. 10∼4. 21 : 평창―하진부리―유천리(아이다호 선)―광천리―서림리(카이로선)―한계령―인제로 진격
4. 24∼4. 26 : 한석산―경봉지구 방어(중공군 1차 춘계공세)
5. 16∼5. 22 : 현리전투 실시
5. 22 : 제3군단의 헤체로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
5. 23∼7. 8 : 북평―강릉―양양―간성―거진으로 이동
9. 13 : 양양으로 이동, 9월24일∼10월 18일 4주간의 교육훈련 실시
10. 19 : 양양에서 양구 임당리로 이동,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변경, 제5사단의 작전지역(가칠봉 지역) 인수
10. 27∼10. 31 : 가칠봉 전방 1052 및 1211고지 공격
11. 23 : 양구로 이동, 11월 27일∼1952년 1월 7일 6주간의 교육훈련 실시
1952. 1. 7∼1. 11: 양구에서 제9군단지역으로 이동, 제6사단의 금성천지역 인수
3. 18 : 제9군단으로부터 신편 백 야전사령부로 배속 변경(백 야전사는 4월 5일부로 제2군단으로 승격)
4. 9 : 석장리―932고지―949고지―739고지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배치
9. 28∼10. 3 : 748고지(피의 고지)와 572고지(독수리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전개
1953. 1. 1∼4. 12 : 필승, 텍사스, 오봉 능선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전개
4. 13∼4. 19 : 작전지역을 제5사단에 인계하고 화천 상리로 이동, 미 제8군 예비?서 7주간의 부대정비 개시
6. 3 : 강원 화천(상리)에서 경기 연천(동송)으로 이동
6. 10∼6. 15 : 제22연대, 기간중 제5사단 증원차 동 사단에 배속
6. 15 : 제22연대 원대복귀와 동시 제5사단 작전지역 일부와 제8사단 작전지역 일부(금성천, 등대리 부근) 인수
6. 25∼7. 3 : 529고지(관망산)전투 실시
7. 13∼7. 15 : 금성천(여문리)부근 전투 실시
7. 19 : 화천에서 김화 동막동으로 이동(미 제8군 예비), 부대정비
【보충3】증언을 통해 본 3사단 22연대 : 개전 초기-38선돌파까지(이후 북진-'50년 말 철수까지 증언내용)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먼저 조국을 위해 전사한 장병들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다. 또한 전상을 입고 오랜 세월 고생하는 용사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6·25전쟁 발발 당일부터 전선에 투입돼 서울에서 포항 형산강 방어전까지 각종 전투에서 있었던 기억들을 요약 정리함으로써 고혼이 된 당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한다.
필자는 6·25전쟁 당시 대구에 위치한 보병 3사단 22연대 소속의 인사장교(준위)로 재직했다. 연대는 야간열차 편으로 서울로 이동해 지금의 은평구 불광동·수색동을 연하는 선에 배치돼 적의 남진을 저지코자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태세에 임했다.
1950년 6월28일 11시가 되어도 아침식사가 운반되지 않았다. 부연대장으로부터 필자는 후방 지휘소(CP)에 가서 식사운반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고 4분의 3t 트럭을 타고 후방 CP(현 전쟁기념관 위치)에 도착했다.
그러나 후방 CP 요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연대로 되돌아가기 위해 육군본부 정문을 나서는 순간 인민군 탱크가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미8군 관사지대로 피신하던 중 미군 지프차를 발견, 탑승해 현 이태원 로터리 부근의 미8군 관사지대 도로변 고지에 은신했다. 얼마 후 그 고지 아래로 인민군 탱크가 이동했으나 수류탄 2발뿐인 우리로서는 그냥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이미 인민군에 점령됐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기 위해 이태원을 거쳐 보광동 부근에 이르렀다. 때마침 인민군 전투기의 기총 사격을 받은 수많은 피난민들이 죽어 쓰러졌다. 그 중에 어떤 여인이 죽어 있었는데 등에 업고 있는 1~2살배기 어린아이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이 어린아이를 거둬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갈등에 부닥치기도 했다(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죄책감이 든다). 강둑에 올라 피란민을 수송하는 뗏목에 100명 이상이 승선, 강을 건너 2시간여 만에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에서 우리는 도로옆 학교에 `22연대 집결지'라고 크게 써 붙이고 낙오병 수습조치를 했다.
이날 오후 8시쯤 집결된 병력을 파악하니 출동 당시 2400여 명이었는데, 3분의 1인 800여 명에 불과했다. 그중 절반은 완전무장 그대로였으며 나머지는 민간복장으로, 어떤 병사들은 팬티만 입었는가 하면 맨발로 40㎞를 걸어 왔다고 했다.(참고 : 혼성편성의 문제점) 연대 병력은 명령에 의해 용인지역으로 이동, 적의 남하 저지에 나섰다. 그러나 처음 박격포 세례를 받고 전투도 제대로 못해본 채 수 명의 사상자만 내고 다시 수원 방면으로 후퇴했다. 그후 중부전선인 음성·괴산 방면에서 전투 중 대구로 철수, 재편성해 영덕·강구 방면 전선에 투입됐다.
인민군 5사단이 울진·삼척 방면에 상륙해 보병 23연대가 저지했으나 역부족으로 향토 연대인 22연대가 추가로 투입되었다. 22연대는 강구 북방 해변 181고지에 포진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격전을 치렀다. 주간에 우리 군이 이 고지를 점령하면 야간에는 인민군이 역습해 고지를 빼앗기는 등 무려 11차례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계속됐다. 이 전투로 하루 사상자 수가 100여 명씩 발생했다. 이때 필자는 강구 뒷산 도로변 고지에 배치됐다.
연대는 적의 파상 공격에 밀려 강구에서 철수하고 지금의 포항시 북구 청하면 해변에서 급히 지원된 해군 LST로 포항 구룡포항으로 해상 철수, 오천에서 재편해 포항 북방 평해지구 전투에 투입됐다. .
포항 수도산 고지에 배치 중이던 필자는 적이 침공해 온다는 보고를 접하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뒤통수가 당기는가 하면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몇분 후 적이 공격해 왔다. 우리는 적을 향해 격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그 순간 한 병사가 다가와 총이 고장났다고 했다. 그 총(M1소총)을 받아 실탄을 장진, 격발해 보니 그 총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얼마 후 적군은 수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총이 고장났다는 병사를 불러 확인해 본 결과 실탄 장진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사병들 거의가 문맹자였으며 교육도 1~2일 정도 받고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나타난 웃지 못할 사례로 다소 이해가 될 것이다.
연대는 포항 전투에서 밀려 형산강 남쪽 제방으로 철수, 포진했다. 그해 9월 초순에는 늦은 장마가 계속돼 형산강 물이 넘칠 정도였으며 온 들판이 물 천지를 이루었다. 참호 속에 물이 고여 잠도 빗속에서, 밥도 빗속에서 먹었다. 소금을 섞어 만든 주먹밥이 비로 인해 갈라져 절반만 먹어도 다행이었다.
전투보다 더 힘든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피·아간 박격포 공격은 계속됐다. 약 2주간의 대치 중 9월16일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드디어 10월1일 보병 23연대가 전국 최초로 38선을 돌파하고 진격에 박차를 가했다.(이후 북진-'50년 말 철수까지 증언내용)
지금까지 개전 초기의 극히 일부 사례를 소개했다 그후 중공군이 개입해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격전이 전개되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 사상 가장 처참한 참상을 여과없이 보여 주었다.
지금도 북한군은 군사대국을 꿈꾸며 대량살상 무기를 생산, 비축하고 있다. 우리 군은 적의 움직임을 철저히 경계, 전·후방 어느 곳에서나 적을 섬멸·격퇴할 수 있는 전투태세 준비에 완벽을 기함으로써 제2의 6·25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우리는 백골이 되어도 싸워서 이기는 무적의 정예란다 ~~우리3사단~
북괴군이 가장 두려워 하는 부대 백골부대..화이팅 잘보앗다.영진~~아..
고생많이했습니다.....잘들어갔지? 아이들은 몸살안났는지?
많은자료 수집에 고생하셨습니다 백골인의긍지와 자부심을갇게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