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인터뷰
월남전의 성격이 再정립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 하느님도 양민인지 아닌지 구분 못할 곳이었다 ▣
―요즘 양민학살 주장이 빈번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월남엔 전략촌이 많습니다.
마을과 마을의 지하는 땅굴로 이어졌고 그 속은 베트콩들의 주둔지입니다.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 서면 주민들이 나와 땅 속에 아무것도 없다며 안심시킵니다.
무더위의 정글 속을 수색 정찰하고 안전한 마을에 도착했다고 판단한 한국군들은 휴식을 취하지요.
그러는 사이에 지휘관을 포함한 여러 병사들이 땅굴 속에서 나온 저격병에 의해 쓰러집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에게도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터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들입니다.
월남전은 6· 25처럼 밀고 밀리는 全面戰(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이요, 게릴라전이었습니다.
전선이 따로 없었고 피아 구분이 안되어 군인들은 눈뜬 장님 같은 처지일 때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령관인 나도 두 번이나 테러를 당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나에게 폭발물을 숨기고 접근한 여자는 열 두세살 정도 되는 아이였습니다.
사령관도 그 지경인데 장병들에게는 어떤 상황일지 짐작해 보시오.
월남 사람들은 1년에 농사를 3모작 합니다.
그중 3분의 1은 정부 세금, 3분의 1은 월맹군과 베트콩 식량으로, 나머지는 자기들 먹을 식량으로 나눕니다.
어린아이 호주머니 속에서 안전핀이 덜렁거리는 수류탄이 나오질 않나, 부녀자 치마 속에 권총과 소총이 숨겨져 있질 않나… 심지어 그들은 낮에는 월남 정부공무원이고, 밤이면 베트콩이나 첩자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한 가족이 월남 정부 공무원, 베트콩 첩자, 월맹군 첩자, 민병대 등으로 뒤섞여 살고 있는 집도 있었지요.
하느님도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운 전쟁이었어요.
옆의 戰友(전우)가 여학생으로 위장한 저격병에게 쓰러지면 그쪽으로 총을 쏘지 않겠습니까?
귀엽게 생긴 일곱살짜리 꼬마가 장난기 어린 동작을 취하면서 달려와 수류탄을 떨구고 도망갑니다.
피하지 못한 전우戰友가 쓰러지면 그 쪽으로 총을 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반사적인 보복행위가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은 어느 전쟁에서나 다 있고 월남전은 가장 심한 곳이었어요.
그렇다고 우리 軍이 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민간인, 특히 아녀자가 전투행위를 했을 경우 이들을 향해 발포하면「양민 학살」 로 볼 수 있습니까?-
『제네바 협약 제1추가 의정서 37조1항은 「배신행위의 금지」란 내용입니다.
배신행 위란 「戰時에 군인이 민간인이나 非전투원의 지위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트콩이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고 한국군에 공격을 가하면 엄연한 전쟁법 위반행위입니다.
이땐 당연히 보복의 권리가 따릅니다.
비록 아녀자라 할지라도 수류탄을 숨기고 접근해 공격행위를 하면 아녀자 이전에 敵軍(적군)이 되는 셈입니다.
그들이 양민이란건 말도 안 되죠』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는 「한겨레21 」 3월2일자에서 「월남전에서 전사 5000여 명에 적군 사살 4만7000여 명이란 무려 10배 가까운 전과를 올리는 이해되지 않는 전쟁기록을 남겼다.
무릇 게릴라 전쟁에서는 게릴라군보다 정규군의 피해가 높은 것이 보편적인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10배가 넘는 한국군의 전과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라며 예외적인 전과와 베트남 양민학살이 직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識者라면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척」 하고 나오니 세상이 어지러운 겁니다.
한국군은 8년 동안 연병력 32만여 명이 월남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중 5000여 명의 전사는 결코 적은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또, 강정구 교수가 게릴라戰 이 항상 이기는 전쟁인 줄 착각하는 것은 영화나 만화만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정규전보다 非정규전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으면 어느 나라나 전부 非정규전 부대만 보유했을 겁니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할 교육자가 저런 식으로 글을 쓰고 가르쳐도 존경받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참담할 뿐입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맹물 평화주의자들」이 요즘은 가장 양심적인 인물이 되는 모양이지요』
―양민을 죽이고 허위로 전과보고를 할 수 있습니까?
『항공 폭격에 의한 추정 사살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地上戰에서의 전과 보고는 반드시 일정 비율의 무기 노획이 수반되어야 인정받습니다.
양민을 죽이고 허위보고한 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죠.
부대 지휘 통솔 경험이 없는 이런 교수를 위해 한마디 더 한다면, 정신병자가 아닌 한... 전쟁터에서 군인들은 대개 신앙심을 갖고 싸웁니다.
특정 종교를 믿건 안 믿건 善하고자 노력합니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작은 단위부대가 단체로 정신 착란에 빠져 양민을 학살했다면 이들은 머지않아 비슷한 일을 또 저질러 결국은 세상에 알려졌을 겁니다』
▣ 한국군은 「양민 보호」, 월맹군은 「양민 학살」▣
「한겨레 21」은 지난해 9월초부터 최근까지 월남인들의 주장을 보도하면서 한국군이 학살한 양민들의 수가 9000여 명이 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목격자라고 소개된 월남인들의 주장은 당시 한국군의 양민학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책을 몇번 보았다는 蔡命新 예비역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월맹이 통일한 지금, 현지인들이 월맹군에게 당했다고 할 것 같습니까?
한국이 만만하게 보이니까 우리더러 학살했다고 하는거죠.
게다가 당시에도 피아구분이 힘들었는데 지금와서 진상조사를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할 줄 알고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과 방송들은 월남전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학살은 일체 거론하지 않고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9000여명 이라고 했지요?
1968년 2월 「후에」 전투에서 월맹군은 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종교인, 외국인 등 그야말로 「진짜 양민」 5800여 명을 단 한 번에 처형했어요.
우린 그런 아수라장을 막으러 간 겁니다』
―당시 駐越 한국군의 작전개념은 어떤 것 이었습니까?
『제가 근무하는 동안 한국군은 미군과 달리 양민 보호 개념으로 「단절 및 섬멸 작전(cut & destroy operation)」을 펼쳤습니다.
6·25 당시 非정규전에 익숙했던 저는 월남전이야 말로 非정규전의 전쟁이라 판단하고 물과 고기를 분리하듯 인민들과 게릴라들을 분리하는 작전을 밀고 나갔던 겁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은 누구나 사령관이 강조한 「100명의 베트콩을 포기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겁니다.
이 때문에 미군과 마찰도 있었지만 월남 주민들로부터 가장 신뢰받았습니다.
지금 월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원성이 잦다고들 하는데 이건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원하는 일부 사람들의 거짓말입니다.
월남에서 한국 군에 대한 원성이 1%라면 한국군에 대한 칭찬이 99%일 겁니다.
1973년에 우리 군대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을 때 자유 월남인들은 「다른나라 군대는 다 떠나도 따이한만은 계속 남아달라」며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 까지 벌였어요. 그런 우리더러 「양민학살을 한 傭兵」이라는 건 명예훼손 정도가 아니라 매국적 언동입니다.』
황해도 곡산 출신의 蔡장군은 6·25 당시 중령으로 유격부대 「백골단」을 조직하고 적진에 침투, 1000여명의 적사살 전과를 올렸고 인민군 對南유격대 총사령관 길원 팔과 참모들을 포로로 잡는 등 非정규전에 탁월한 군인이었다.
1965년 8월 金聖恩(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朴正熙 대통령에게 蔡命新 장군을 초대 駐越 사령관으로 강력히 추천했다.
이 배경에 대해 金聖恩 전 장관은 『蔡장군의 非 정규전 능력과 경험이 아주 우수했기 때문 』이라고 회고했다.
육사 5기생으로 1947년 4월8일 소위로 임관하여 부임한 곳이 제주도 9연대였다.
이미 남로당 지하조직에 의해 4·3 사태가 터져 제주도 전역이 월남처럼 피아구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소대원들도 좌익들로 가득찬 곳이어서 蔡命新 소위는 주야불문하고 그들과 친숙해지려 노력하며 마음을 돌리도록 애썼다.
이것이 주효하여 남로당 으로부터 암살 대상에 올랐지만 蔡소위로부터 감화받은 부하들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蔡命新은 6·25를 맞아 수많은 非정규전을 수행하면서 양민의 편에 서는 것만이 양민의 그늘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소탕할 수 있는 방법임을 체득한다.
그의 체험적 전투기술은 駐越 한국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친절한 따이한」이란 명성을 세워 한 ·월간 우호적 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월맹에 의한 통일 이후에도 현지로부터 「따이한」에 대한 좋은 인상이 지속되는 배경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駐越 한국군 사령관 蔡命新은 월남인들이 유교문화권에 오랫동안 젖어 있음을 간파하고 對民지원을 나가는 한국군에게 몇 가지 세부지침을 하달하기도 했다.
그중 쌀과 식량을 전달할 때엔 한꺼번에 전달하지 말고, 조금씩 갖다 주되 가능한 고급 장교나 고급 하사관이 직접 갖다주도록 지시 했다.
받는 입장에서 고마움이 지속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군의 전투력 중 對民지원에 7, 현지 전투에 3을 안배하는 전략을 고수했어요.
부패한 월남정부, 이방인인 미군, 전투만 하는 월맹군과 베트콩 등살에 고통받던 월남주민들에게 한국군은 천사였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더러 양민학살이라니…』
전쟁은 天災地變(천재지변)과 동격이다.
지진이나 홍수가 개개인의 기막힌 사연을 가리지 않듯, 전쟁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잔혹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지키려 애써 온 것이다.
蔡장군의 주장을 요약하면, 월남전은 대한 민국의 안보가 위기에 몰리지 않도록 미군을 대신해 참전한「조국 안보 수호 전쟁」이었고, 적군 앞에서 용감하게 싸운 勝戰( 승전)의 기록이 축적된 「승리의 전쟁」이 었으며, 참전 8년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아선상에서 탈출하여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게 만든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경제 후진국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글을 누비는 형제들의 노고를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에 감사할 줄 알았다.
2000년 경제 선진국을 넘보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형제들의 고통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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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관련한 사진에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시선들이 많아서 한번 올려봅니다.
개인적으로 조중동을 싫어하고 한겨레를 선호하는 입장이지만, 진위가 가려지지도 않은 내용들을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기사화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한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베트남양민들이 단한사람도 없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하여 매도하는 것은 또다른 피해자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어줍잖은 댓글로 참전용사들을 모욕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양심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과연, 스스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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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한국군의 베트남양민학살사건 그허구와 진실 2부 <퐁니사건편>
2000년 7월26일 MBC토론에서 주월한국군의 베트남양민학살사건에대해 참석한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중장은 공개적으로 베트남양민 학살사건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군의 양민학살 주장은 1997년 경부터 월남 거주 한국 유학생의 논문과 기사 로 우리 사회에 조금씩 소개되다가 작년 가을부터는 「한겨레21」을 통해 최근 까지 집중 연재되었다
한겨레 21」의 기사들은 「미군보다 잔인 했던 용병」, 「아! 몸서리치는 한국군!」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여성 돌 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등의 大小 제목하에 당시 사건의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월남인들의 말을 중심으로 보도한 것들이다.
지난 6월27일 오후 2시경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회장 양상규) 소속 회원 2400여 명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신문사 앞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전우들의 명예를 매도한 한겨레측은 즉각 사과하라』며 시위와 난동을 벌인 것도 「 한겨레 21」의 이런 보도가 주된 원인이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실위원회와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는2000년 11월 14일 서울 종로 참여연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당시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에서 작성한 100여종의 보고서와 사진 20여장을 공개했다.
위원회측은 이 보고서가 지난 68년 2월12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마을(희생자 69명),같은 해 10월22일 쿠앙남성 쑤지엔현 홍차우마을(희생자 4명),69년 4월15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푹미마을(희생자 22명) 등 3건의 학살 의혹 사건에 대한 미군의 진상조사 보고 내용이라고 밝혔다.
또 지난 68년 4월29일 웨스트모얼랜드 당시 주베트남 미군사령관이 채명신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에게 보낸 미군측 진상 조사 내용과 한국측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도 함께 공개했다.
<<<<<<<<< 편지 내용 >>>>>>>>>
1968년 4월 29일자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채명신 중장에게 보내는 편지
채명신 중장
주월 한국군 사령관
606 Tran Hung Dao
Saigon, Vietnam
친애하는 채명신 장군
당신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전쟁범죄에 관한 주장이나 불만이 제기되었을 때 적절한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해야 할 지시가 항상 내려져 있습니다.
이 지시는 제네바 협약의 서명국으로서의 미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려진 것입니다.
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제3 해병상륙군의 요원들은 제네바 협약에 대한 위반 의혹이 제기된 사건들, 즉 1968년 2월 12일 쿠앙남성(省) 디엔반구(區)의 퐁니 마을과 퐁눗 마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 사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제한된 조사의 결과 이 사건은 역시 제네바 협약의 서명국인 귀국이 응당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임이 인정되어 우리의 조사는 종료되었습니다.
동봉한 증언, 사진자료, 그리고 다른 문서들은 제3 해병상륙군의 기초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것으로, 우리의 조사가 완전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나는 디엔반구 구장이 이 사건을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의 단장과 토론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아마 장군께서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갖는 심각한 본질 때문에 나는 이 사건이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당신의 벗
W. C. 웨스트모어랜드
주월 미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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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공개된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의 편지다.
이 편지는 주월한국군의 학살 행위를 미군측이 3곳에 의혹을 품고 월남 정부의 압박을 박아 미국측이 조사에 착수했다는 건 알 수 있다.
1. 푹미 사건
(사진/68년 2월12일 퐁니·퐁넛사건 때 해병제2여단장을 지낸 김연상 준장(사진은 해병대사령관 시절의 모습.왼쪽)과 69년 4월15일 푹미 사건 때 여단장을 지낸 이동호 준장)
<출처:한겨레21>
< 퐁니.퐁넷마을 사전 현장 사진 >
퐁니.퐁넷사건이란
1968년 2월12일 해병 청룡사단 제2대대6중대가 퐁니마을로 이동중 베트콩의 저격과 부비트랩에 희생당하여 부상자 7명이
(미해병대원2명포함) 발생하자 해병2대대 6중대는 베트콩의 마을로 오인하여 81미리박격포로 마을포격 하였다
이로 인해 민간인 6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증언록: 미해병 상병 상등병 J.Vaughn의 증언
2월 12일 월요일 13시 경 CAP D-2 해병대와 Sylvia대위 그리고 Seacrest하사관은 서쪽의 제1루트를 통해 퐁니마을에서 작전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한국군은 마을에 포격을 가한 다음 자동화기로 습격을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집이 불타고 마을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PF중의 하나가 부상당한 소년과 여자를 CAP으로 데리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국군이 마을의 민간인게도 총을 겨누고 있고 따라서 더 많은 부상자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5시경 우리는 퐁니와 퐁넛으로 들어가 도와주라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의 경비대는 5명의 미해군과 26명의 PF 그리고 S-3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pictiorial study를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퐁니.퐁넷 사건의 원인
퐁니.퐁넷 마을 사건배경에는 이런 문제적 요소가 있었다.
베트콩들이 얼룩무늬복장을 입어 우군과 헷갈리게만들어 자주 출물하여 이 마을에서만 전사자3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던점
두번쨰 문제는 마을 입구앞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성을 잃었던 점.
셋번쨰 문제는 마을에 숨어든 베트콩의 저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여 베트콩의 저항거점으로 판단되어 마을을 81미리 박격포로 제압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점
사건후 한.미.월 합동보고서 내용
권고사항
1. 한국 해병 여단은 푹미마을 민간인들에게 발생한 사망, 부상, 상해, 재산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이른 시일 내로 지급할 것.
2. 한국 해병 여단은 사망, 상해, 재산피해 책임자들에게 적절한 징계처분을 내릴 것.
3. 베트남 제1군단과 한국 해병 제2여단은 책임전술지역 내 민간인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특별히 활발한 민사심리작전에 착수할 것.
4. 미해병 제3상륙전부대는 가능한 모든 한도 내에서 민사심리작전을 지원할 것.
5. 해병 제3상륙부대는 지뢰와 부비트랩을 경고하는 표지판을 가능한 3개 국어로 제작하여, 남베트남 제1군단 전술지대에 있는 모든 아군병력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포할 것.
6. 남베트남 지방군은 1번국도를 따라 카우라우 다리에서부터 바렌 다리까지의 정찰작전을 보호할 것.
7. 정보교환과 상호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도로정찰작전을 보호하는 한국 해병 여단 소속 부대와 남베트남 지방군 부대는 어떠한 작전을 수행하든 아주 친밀하게 정기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것.
미 해병 대령 해럴드 체이스
남베트남 육군 중령 카오 칵 낫
한국 해병 소령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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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퐁니학살사건에대하여 간략하게 각종 자료를 조합하여 써 봤습니다.
참고로 노르망디 작전 떄 미영 연합군의 폭격기에 프랑스인 5천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D.DAY때 방공호에 있다 미영연합군의 폭격에 무너진 방공호에 질식사하는 순간까지도 수첩에 이렇게 썼답니다.
나는 죽어갑니다.
하지만 전 억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방의 기쁨을 맞고 있습니다.
프랑스여 영원하라. 연합군이여 영원하라
나라를 위해 조국을 위해 싸운 신분들을 학살자로 보지맙시다.
전쟁으로 인해 억울한 민간인들은 발생하지만 퐁니사건처럼 아무 명분없는 전쟁에 나가셔서 살기위해 이런 조국의 부름에 한순간 청춘을 전쟁으로 보내신 분들입니다.
솔직히 제가 이렇게 베트남관련 학살 관련글을 올리는 거는 소련님의 잡담글을 보고 매우 충격을 먹었습니다.
알지도 못하시는 지식내용으로 잡담글 후 그 글에 대해서는 바로 또 반론 들어가드리며 참조 문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한국군이 승려를 강간 하고 학살했다;
베트콩의 38년전 심리전 전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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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과 신앙*
채명신은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20세의 나이로 평남 진남포 근교에 있던 덕해국민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덕해는 고향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덕해교회에 권사로 활동하던 지역이다.
채명신은 덕해교회 청년부 교사를 하면서도 항일운동으로 투옥된 아버지 채은국씨가 집에 비치해둔 철학, 사상, 동서양의 교양 서적 등 수많은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한편 광복과 더불어 석방된 아버지는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채명신이 교사가 된지 얼마후 진남포 근교에는 공산당의 당과 군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학원이 개설되었는데 원장은 김책이었다.
김책은 당시 소련 극동군 사령부 88 여단소속 소령으로 1945년 김일성 대위와 함께 평양에 들어왔다.
김책은 평양학원 개설을 앞두고 먼저 교사들을 초청했는데 이때 채명신 교사도 초청되었다.
이날 김책 소령은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빛나는 사회주의 국가건설로 총매진 할 것입니다.”라고 외치면서 교사들에게 질문 순서도 진행시켰다.
이때 채명신 교사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들먹이며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떤 사회주의 건설을 할 것인지를 조목조목 질문했다.
김책은 놀란 표정으로 “아니 동무가 어떻게 마르크스 시즘에 그렇게 해박하오”……
채명신은 아버지가 골방에서 남몰래 탐독했던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자신도 열심히 읽었던 내력을 설명하자 김책은 “부친은 영웅이시오 부친의 애국적 행동을 기억하겠소”하면서 채명신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특히 180cm 훤칠한 체격을 보고 크게 호감을 가졌다.
“채동무! 내년(1946년 2월) 평양학원 정식 개원식 때 채동지를 꼭 초청하겠소”하면서 채명신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로부터 1년후 1946년 2월 18일 평양학원 개원식날 채명신은 김책의 안내로 중앙 단상 세 번째 줄에 앉았다.
맨 앞줄에는 치즈샤코프 소련군 주둔 사령관과 김책, 김두봉, 김일성, 이용범, 강양욱 등 북한 권력의 핵심 인사들이 앉았다.
치즈샤코프 사령관은 이날 기념사에서 “내년 기념식 때는 탱크부대와 포병부대, 전투기가 분열에 참가할 것입니다.”……
채명신은 이날 이 평양학원은 앞으로 북한 정권의 핵심적 당간부와 군대 장교들을 양성한다는 소문이 틀림 없음을 확인했다.
한편 이날 채명신이 크게 의심한 것이 처음보는 김일성 모습이었다.
학생때 역사공부를 통해 만주벌판을 누비며 항일투쟁의 신비의 장군이었던 김일성 장군이 오늘 이곳에서는 30대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김일성의 평양행 제의를 거절한 채명신
기념식이 끝나자 축하연회가 열렸는데 김책 원장이 “김일성 동지 이 젊은 청년이 내가 그동안 누차 말했던 채명신 동지요.자 악수들 하시오.”……
김일성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채명신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갑소 채동무! 말씀 많이 들었소, 사회주의 공부를 많이 했다지요. 우리는 채 동무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오늘 나와 함께 평양으로 가지 않겠소!”……
악수한 손을 다시 한번 크게 흔들었다.
이때 김책은 “김일성 동지를 따라 평양으로 가서 신생조국 건설에 힘을 보태시오.”하면서 김일성의 제의를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어캐 날 안따라 가겠다는 건가?”……
채명신이 답변을 못하고 주춤거리자 김일성은 고개를 갸웃둥 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식장을 떠났다.
채명신이 이때 김일성의 제의에 망설인 결정적 이유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소련군 정치장교로부터 공산주의는 허구라는 사실을 자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때 채명신이 김일성을 따라 갔다면 채명신의 인생은 180도로 변했을 것이라고 그날 그 상황을 회상했다.
만일 그날 김일성을 따라 갔다면 채명신은 인민군 고급 장교를 거쳐 6.25 남침때는 아마 별을 달고 남한공격의 선봉에 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책은 후일 김일성의 무자비한 숙청 계획에 따라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죽었으며 뒤이어 평양의 기독교 세력도 제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문화가 서울보다 먼저 개화되어 조만식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946년 조만식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과 교회 폐쇄가 시작되었다.
교회 폐쇄의 목적은 당시 기독교는 북한 사회에서 가장 조직화된 세력이고 또한 교육열이 높은 계층이기에 특히 자유주의 신봉의 싹을 미리 짤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선교사가 최초 평양에 왔을 때 채명신의 외조부 박진준은 이때 기독교인이 되어 1890년대말 평남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 고향에 교회를 세워 장로가 되었다.
이때 채명신의 어머니는 다섯 살이었는데 채명신은 모태신앙으로 유년시절부터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한편 1947년 1월말 채명신의 어머니가 권사로 시무하던 덕해교회에 용강군당원들이 찾아와 교회를 접수한다면서 내일부터 교회문을 닫으라고 욱박질렀다.
이때 채명신은 교회 폐쇄를 절대 반대했다.
그러자 당원들은 “당신들의 하나님이 뭐요 하나님을 직접 보았소! 천당 천당 하는데 천당 갔다와 봤소!……
그러자 채명신은 “눈에 안보인다고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내 질문 하나 하겠는데 지금 공기가 당신들 눈에 보이오, 안보이오! 안보이지요, 안보인다고 공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당원들은 “동무는 말이 많소! 말이 많으면 반동이요, 반동은 인민의 적이요.
인민의 적은 이 땅에서 살 수 없소 반동이 어떤 대가를 받는지 똑똑히 보여 주겠소!”하고 떠났다.
그 상황을 지켜본 덕해교회 교인들은 채명신에게 지금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교회 청년부 교사로서 특히 청소년 선교를 중단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계속 교회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채명신의 어머니는 “애야 내 옆에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 뿐인데 난들 너를 내품에서 떠나 보내고 싶겠느냐 너를 살리는 길은 이곳을 떠나는 길밖에 없다.”……
-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채명신의 뒤에는?
채명신은 자신을 살려야겠다는 교인들과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해서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밤중에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
기차편으로 원산을 거쳐 철원까지 와서 철원에서는 야밤에 전곡으로 향했다.
날이 밝아지자 돈을 주면 남쪽안내를 해 주겠다는 청년을 따라 갔지만 그 곳은 바로 연천 보안서였다.
그 청년은 보안서 프락치였다.
인민재판 형식으로 보안서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즉결처분을 받을지 또는 시베리아 유형으로 보낼지 두갈래 길에 처했다.
결심공판 전날 채명신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날의 나의 기도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중 심장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없었다.한참후 갑자기 뜨거운 훈김이 채명신의 어깨를 덮어주면서 “그가 지금 너를 구하러간다”라는 암시가 눈앞을 스쳐갔다.
순간 채명신의 눈에는 생전 처음겪는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터져나왔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즉 연천군 소련 주둔사령관 소코핑대좌(대령)가 연천보안서에 순시차 들였다가 감방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채명신은 감방 창문을 통해 “다와라시! 야우치셀리” (동지! 나는 선생이다) 채명신은 러시아 말을 다 끌어모아 서울에 돈 많은 삼촌을 만나 돈을 얻어 모스크바 유학을 갈려고 한다고 했다.
“쟁기가 무노가예스시 젱기다와이”(돈이 대단히 많다 돈을 가져오려고 간다)
소코핑 사령관은 만리타국 이곳 연천에서 러시아 말이 나오자 반갑게 생각되어 채명신을 보며 미소를 짓드니 “하라쇼”(좋다) 결국 연천보안서는 채명신을 재판없이 석방 평양행 기차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여관집 주인의 극비안내로 한밤중 연천을 탈출 포천으로 와서 드디어 미군 헌병의 안내로 서울에 도착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에게 유일하게 찾아간 곳은 지난날 아버지와 함께 민족운동을 했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이정규 교수였다.
채명신은 서울 거리에서 전개되는 좌익 남로당 청년들과 우익인 서북 청년 반공청년회가 매일 같이 맞붙어 테러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지금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똘똘 뭉쳐 있는데 서울에서 전개되는 모습을 본 채명신은 서울에 가면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지금은 목사보다 더 급한 것이 공산당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채명신은 마침 육사 5기생 모집에 응시 합격되었다.
1948년 4월 6일 육사 졸업과 동시 소위로 임관된 채명신의 기나긴 군대생활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채명신의 방패가 되었다
그의 첫 암실위기는 제주 4.3사건 때부터 시작하여 송악산 전투에서 적의 따발총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총알의 충격으로 쓰러지기는 했지만 아무런 통증이 없어 가슴을 만져보니 날아온 총알이 왼쪽 주머니에 달린 미제 야전복의 커다란 강철 단추의 한가운데를 맞아 단추는 크게 쭈그러졌고 총알은 땅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또한 경북 영덕지구 전투 때는 속 내의까지 피가 스며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즉 적이 쏜 총탄이 자신의 귓볼의 살점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 피가 옷을 적시고 있었는데 만일 총알이 불과 1cm만 안족으로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채명신은 6.25 전쟁중 주로 유격대원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중공군의 인해(人海) 전술로 후퇴중에 민가를 찾아 대민접촉중 방안에서 인민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채명신은 이때 만일 여기서 체포되면 분명히 평양으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부하 2명에게 “너희들은 일단 투항해서 지내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가라 나는 이 곳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주게”
이 말이 끝나자 그는 자신의 권총을 오른쪽 귀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딱 하는 격발소리만 나고 불발이 되었다.
다시 불발 탄환을 끄집어내고 다시 실탄을 장전 재차 권총을 귀에다대는 순간 옆의 부하가 억센 손으로 “죽지말라는데 왜 죽습니까”
그 순간 채명신의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내 부하의 입을 통해 죽지 말라고 하시는 구나”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인민군이 문을 박차고 방으로 들어오면서 “손들었”하는 찰나 채명신이 먼저 그들을 제압 2명을 사살하고 부하들과 함께 전광석화처럼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밖에서 대기중인 또 다른 2명을 사살하고 산으로 도망쳤다.
이때 인민군이 쏘아대는 따발총의 탄환이 채명신과 그 부하들을 향해 날아왔지만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이날밤 채명신은 기도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은 하나님이 확실히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날밤 고향의 어머니와 덕해교회 성도들 생각이 나서 잠을 설쳤다.
낙엽을 이불삼아 누워서 나무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을 보면서 우리 어머니는 이 아들을 남쪽으로 보내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얼마나 많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까?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시도 때도 없이 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그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
그렇다! 바로 우리 어머니의 그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구나!!……
한편 서울은 이미 공산군에 점령당했고 국군은 수원과 오산으로 밀리면서 전투는 더욱더 치열해졌다.
한편 채명신의 유격 대원들은 북한 지역에서 3개월을 작전하는 동안 대원들과도 연락이 두절되면서 각자 남쪽으로 탈출하고 있엇다.
채명신은 1951년 1월 중순 황해도 연백평야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
강화에서 어선을 타고 다시 충남 당진 석문이라는 해변에 상륙했다.
채명신은 최경록 장군의 소개로 정일권 육참 총장에게 지금 중공군의 전투 규모와 그들의 전술 작전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한편 육군에서는 이미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채명신이 살아서 돌아오자 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이제는 비교적 안정된 보직을 주어 심신의 휴식을 취하게 했다.
-북한 유격대 사령관 길원팔 중장 체포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51년 1월말 채명신은 유격 결사 11연대를 이끌고 다시 적후방 깊숙히 침투해 들어갔다.
그해 3월 중순의 어느날 특급 정보를 입수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군량밭이란 마을에 인민군 거물이 묵고 있다는 정보였다.
바로 그 거물이 조선공산당 제2비서겸 북한군 현역 중장이며 대남 유격부대 총 사령관인 길원팔이었다.
길원팔은 6.25 이전부터 남한땅 동해안과 태백산맥에서 게릴라 전을 통해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장본인이었다.
채명신은 우수한 대원 2백명을 선발해서 길원팔이 묵고 있는 마을을 포위했다.
마을 주위에는 지방자위대 30명이 무장을 하고 길원팔을 지키고 있었다.
인민군복을 입은 채명신은 이들 자위대장을 찾아
“길원팔 동지를 해치려는 불순 세력들이 이곳에 침투했다는 정보를 듣고 급히 내려온 특수부대다.
우선 동무들도 1차 조사할 것이 있으므로 잠시 협조해 주기 바란다”
채명신의 평안도 말씨에 그들은 의심없이 채명신의 명령에 따르는 순간 우리 유격대는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 무장해제를 시키고 그 길로 그들의 생명도 끝났다.
김한철 대위가 이끄는 정예 대원들은 세포위원장 집에 묵고 있던 길원팔과 그의 참모장 외팔이 강칠성 대좌까지 체포했다.
길원팔은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 훈령과 친필 사인이 있는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전방의 작전 상황도 입수했다.
채명신은 생포된 길원팔을 앞에 두고 직접 심문했다.
“몇살인가” “말 안하겠다” “고향은” “모른다” “학교는?” “일본의 쓰가모 고등상업학교를 나왔다” “결혼했는가” “듣기 싫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나는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다.
인민군복으로 위장하고 여기에 침투했다.”
“그 썩어빠진 남조선 괴뢰도당이 여기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너 반란군인가! 바른대로 대라”
채명신이 본 길원팔은 확실히 거물이었다.
채명신은 길원팔에게 마지막 한가지 제의를 했다.
“당신이 만약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당신은 분명히 영웅대접을 받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가자”
길원팔은 “그 썩어빠진 땅에 내가 왜 가느냐”하면서 길원팔도 채명신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오명보다 자결을 원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살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자기 손으로 차마 당신을 죽일 수 없다고 하자, 길원팔은 그럼 이왕이면 내총으로 죽고 싶다.
김일성 동지께서 주신 권총이라고 하면서 채명신이 압수한 권총을 요구했다.
채명신은 더 거절할 필요없이 압수했던 권총에 실탄을 한발만 장전해서 건네주고 방을 나왔다.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그의 손에 건네주는 순간 그순간 기분이 어떻했느냐고 필자가 엉뚱한 것 같은 질문을 하자 노병은 잠시 60여년전 그때 그 순간을 회상하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총탄이 빗발치는 그 수많은 전투에서도 항상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그날 그 권총을 그의 손에 넘길 때도 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채명신은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 간단한 묘비도 세워주었다.
길원팔 지묘(吉元八 之墓)라고……
무덤 앞에서 채명신은 부하들과 함께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비록 적장(敵將)이기는 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했다.
-적장의 아들을 대학교수로 만들었다.
한편 필자는 이번 채명신 장군과의 대담에서 당시 길원팔이 자살 직전 유언으로 남긴 그때 14세된 소년의 이야기를 이번 안드레명상에서 꼭 게재 하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대신 그때 그 소년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참고로 채명신 장군의 나이는 벌써 83세다(2009년)
중요한 비화는 역사에 남을 수 있겠끔 밝혀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에 채 장군도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수년전 대담 때는 이 소년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자 채 장군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는 김장로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고 인쇄화 되는 것은 피합시다”라고 거절했던 것이다.
참고로 채명신 장군은 안드레명상의 독자가 된지 이미 10여년이 넘었다.
그럼 지금부터 길원팔이 남긴 그날의 유언내용을 지면관계상 간단히 기술하고자 한다.
길원팔은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한 고아소년을 아들로 삼아 키우고 있었는데 이날 길원팔은 자살직전 채명신에게 유언을 남겼다.
“저밖에 있는 내 아들을 남조선에 데리고 가서 훌륭하게 잘 키워주시오”……
채명신은 길원팔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14세 소년을 데리고 와서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공부를 시켰다.
그때 그 소년이 지금은 이름을 데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원로급 교수가 되었으며, 지금쯤(2009년) 그 교수의 나이도 이미 70세 전후가 될 것 같다.
끝으로 채명신 장군의 전쟁과 신앙 그리고 전쟁터에서 일어났던 각종 비화는 한편의 영화나 소설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첫댓글 채장군님의 유언을 받들어 월남전 일반병사묘역에
안장을 했답니다~~훌륭하신 군인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고생 시절에 채장군의 신문에 연재된 월남참전이야기 감명깊게 읽고 막연히 존경했던 이름입니다. 인물도 잘 생기셨더마.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한 위대한 장군님 입니다.
연세야 많으시지만 돌아가셨다니 눈물이 찔끔났습니다.
[충성 ! ]
고 채명신 장군님께 저의 정성을 담아서....
꽁깍지님 혹시 여군출신이십니까?
저는 채명신장군님의 부음소식을 뉴스로 접하고도 바쁘다는 핑게로 추모글 하나 작성하지 못하고 있는데...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