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인간시장(4권) 43. 찰거머리떼

[물 안 개]

찰거머리떼 아파트 계단 옆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황마담이 문을 열어 줄지 의문이었다. 보통 손님은 맞아들이지 않는 비밀정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십 평이 넘는 아파트 두채를 이용한 황마담의 비밀 요정은 사전에 계약하거나 황마담이 인정하는 신분이 아니면 범접할 수조차 없는 성역이었다. 비밀루트를 통하지 않으면 사전에 계약할 수 없다고도 했다. 나는 열어 주지 않으면 부수고라도 들어갈 작정을 하고 나선 길이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특수한 확인하는 곳이란 얘기를 들었다. "장부장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안에서 화면으로 내 태도와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되었다. "누굴 찾으시는데요?" "황여사님요." "잘못 오신 거 아니세요? 여긴 그런 분 안 계신데요." "잠깐만요." 나는 수첩에서 장부장의 명함을 꺼내들었다. "확실히 여긴데요." 나는 특수 카메라가 어느 곳에 설치되어 있는지 몰라 가능한 대로 명함을 들어보이며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장부장님 새로 모시게 된 미스터 김입니다." "그럼 프로듀서가 바뀌었나요?" "예, 어제 발령 받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늘어지게 웃었다. 내 작전이 대충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연예가의 물귀신이라는 장부장을 잘 팔기만 하면 황마담의 비밀요정을 들어설 수 있다는 애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나는 내 얼굴이 나 모르게 화면에 비추어진다는 사실이 싫었다. 계단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기다렸다.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첫눈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나는 들어서며 재빨리 내부를 훑어보았다. 호화 아파트보다 더 세련되게 꾸며진 구조였다. "이리 앉으시죠. 언니 나오실 거예요." 여자가 자리를 권했다. 등나무로 만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불편한 자리였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이걸 태우시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종아리가 퍽 늘씬하다고 느꼈다. 속살이 거의 보이는 옷, 젖꼭지의 검붉은 자국과 돌출 부위까지도 느껴지는 얄사한 옷 속으로 그녀의 몸매를 읽을 수 있었다. 이제 갓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이 여자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많이 본 얼굴인데요?"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조용하게 웃었다. "11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 탤런트 모집에 끼여든 여자였다. 이 비밀요정에 오면 새파란 애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11기라면 일년이 조금 넘은 초년병들이었다. "요즘 뭐 하죠?" "연속극에 나가요." "단역?" "예, 저는 성주연예요. 잘 부탁합니다." "반갑습니다. 열심히 하면 될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장부장님께서 한번 얘기하신 것 같은데요?" "그러셨을 거예요. 절 귀여워 해 주세요. 열심히 할 테니 저를 잊지 마세요." 마주 앉은 모습이 너무 선정적이었다. 앉음새가 흐트러져 있었지만 추악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어 있었다. 깊게 파인 가슴도 젖무덤 부위가 드러났지만 밤거리의 여인처럼 후줄근해 보이는 몸매가 아니었다. 팽팽한 탄력, 깨끗한 피부, 저절로 흔들릴 것 같은 율동미를 느낄 수 있었다. 황마담이나 장부장의 불가사의한 힘이 어떤 것인지 윤곽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장부장이나 탤런트에게 입김이 센 프로듀서와 가요계 여인들을 쥐고 있는 사내들이 황마담에게 얹혀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을 흠어보았다. 모조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치가 있어 보이는 골동품들이 벽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고서화와 현대화들이 정연하게 조화를 이루었고 장식이나 청동제품, 돌조각들의 진열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이렇게 잘 꾸며진 방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김갑산 영감의 방도 이렇게 화려하지 않았고 큰돈 만지는 과부들 방도 이렇게 중후하지 않았다. "절 귀여워 해 주시면 손해는 안 볼 거예요. 그만한 보답을 해 들릴게요."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까만 동공이 빛나고 있었다. 나같이 연속극 안 보는 사람에게 낯이 익은 걸 보면 꽤 출연이 잦은 여자인 것 같았다. "학생이죠?" "예, 연극영화과예요." "여기는 왜 왔죠?" 그녀는 고개와 어깨를 까딱 흔들었다. 묘한 대답이었다. 알 필요없다는 말대꾸 같기도 했고 알면서 왜 묻느냐는 투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오시래요." 안에서 성주연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때 없이 입고 나온 양복과 넥타이가 퍽 불편했다. 괴춤을 한번 만져보았다. 이런 규모의 비밀요정이라면 텃세를 할 만한 어깨들이 황마담 주변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점쟁이들을 만나러 다니며 느낀 것은 가능하면 살이 붙었다는 주먹과 표창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들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힘의 부당함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가운데 둥근 소파에 앉은 여인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왕년의 스타였다. 내가 어려서 도둑극장을 다닐 때 어린 내 가슴에서도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던 영화배우였다. 서글서글한 눈매, 적당히 살이 오른 몸매, 아직도 윤기도는 피부가 왕년의 스타다웠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김입니다." "반가워요. 앉아요." 황마담은 자리를 권했다. 차탁 위엔 향긋한 차내음을 풍기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제가 어려서 화면으로만 뵙고 실물을 뵙는 건 첨입니다." "고마워요. 장부장 부서로 온 모양이죠?" "예." "내 얘길 하던가요?" "자주 하세요. 황여사님께 귀염받게 굴라고요." "그래요." "제가 아무래도 쇼 프로그램을 맡을 것 같습니다. 장부장님께 황여사님 찾아 뵙고 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얘기하며 내가 꽤 사기술에 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점쟁이가 남을 속이지 말라고 했었다. 한 번 속이면 열 번 속는 화를 입을 거라고도 했었다. "장부장도 오기로 했다죠?" "예." "이상해요. 꼭 미리 연락하고 오는 사람인데." "같이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회의가 열렸어요. 저더러 미리 가 있으라시더군요. 오늘은 아마 귀한 손님 모시고 올 모양입니다." "누구죠?" "저도 잘 모르겠어요. 큰 손님 가실 거라고 하던데요." "아, 그럴 거예요." 황마담은 방송국 내부의 문제를 꽤 깊숙하게 물었다.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눈치챌 것 같았다. 내가 애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연예인들을 등쳐먹거나 연예계 여자들을 미끼로 내세워 돈을 챙기는 찰거머리들은 소수라고 했다. "얽히고 설켜서 다 그런 것들 아니냐? 뻔할 뻔자 아냐?" 녀석한테 내가 은근히 채켰다. "나도 첨엔 그런 줄 알았지. 안에서 들여다보면 달라. 더럽게 고생하고 쥐꼬리만큼 받는 애들야." "그만큼 받으면 상류 아니냐?" "고생하는 거에 비해선 동냥하는 셈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서 어느 놈은 일한 만큼 배 터지게 받는 사람 있니? 악착같이 알겨먹으려고 눈깔에 불을 켠 판에 말이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속에도 꽤 아귀찬 찰거머리들이 있지. 배역 선정하고 파우치 조정하고 출연자 점 찍을 수 있는 몇 놈들이 다 해처먹으니까." "꺼내 놔." 녀석은 내가 꺼내놓으라고 하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연예계 애들과 몇 년 어우러져 돌아다닌 실력이었다. 녀석은 그쪽 사정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장부장이 왕초격이지. 그 자식은 철저해. 주면 준 만큼, 안 주면 안 준 만큼 반드시 지키는 놈이지. 노래 한 곡 보내며 봉투 넣어 주면 액면가만큼 틀어 주는 거야. 봉투가 없으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고...... 그게 싫은 사람들은 아예 그 근처엔 가지 않아. 그런 반면에 나머지 PD들은 철저한 일벌레들이지. 건성으로 프로그램 짜기나하고 모니터랍시고 프로그램이 어떠니 출연자가 어떠니 깝신대는 것들은 방송국에 들어가서 PD노릇 열흘만 하면 제발이 저려서 뛰어나올 놈들이지." 녀석은 거품을 물고 프로듀서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임마, 뭔가 잘못하니까 비판받는 거 아냐?" "정말 뭣두 모르는 것들이 뭣보구 탱자탱자 한다더니 그 꼴이지. 아가리로야 무슨 말을 못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이 거적대기 쓰고 설렁설렁 만드는 깡통놀음인 줄 알아? 밤 새며 피 토하며 만든 거라구. 여건이 안 맞고 부족하고 대갈통 나쁜 거야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다 이거야. 그 몇 놈들 때문에 인식이 나쁠 뿐이지." "너, 아예 때려치우고 프로듀서 옹호위원회나 대변인 노릇해라." "그러고 싶을 때도 있다구. 배부른 놈들이 비스듬히 누워서 프로그램 쓱 보구서 배부른 소리로 깝신대는 건 올바른 비판이 못 돼. 비판하려면 근본적으로 애정의 전제 없인 이빨 까는 소리밖에 안 돼. 뭐든 보구서 욕지거리 하기처럼 쉬운 게 어디 있어? 욕 못하는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그렇다고 칭찬해 달라는 건 아냐. 뭐 좀 알고 비판하든지...... 비판 잘하는 놈이 똑똑하다는 인식도 문제는 문제야." "지랄 떨지 말고 장부장 얘기나 해라. 내가 필요한 건 다수의 고생하는 프로듀서 얘기가 아니라 장부장 같은 찰거머리떼들 얘기다. 황마담하고 어떻게 된 관계냐?" "그러니까 이런 사실을 알고 개떡 같은 자식들 얘길 들으라 이거다. 네 말처럼 어느 집단이든 그런 찰거머리떼들은 있는 법이다." "임마, 나도 알 만큼은 알아. 지금 고생하는 일꾼들 얘길 하자는 게 아냐. 장부장 같은 찰거머리들 얘길 하자는 거야." "알았다." 녀석은 장부장의 내력을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장부장 같은 찰거머리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방송국 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찰거머리처럼 연예인들을 뜯어먹고 산다고 했다. 신곡이 나오면 봉투나 몸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고, 탤런트라면 배역을 맡기 위해 똑같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황마담과 장부장의 사업적인 결탁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부장과 황마담의 사업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돌았다. 황마담이 연미희 같은 탤런트를 박명수라는 사기꾼에게 소개시켜 준 것도 소개비를 듬뿍 받아내고 저지른 장삿속이었다. 황마담의 부탁이면 장부장은 무리를 해서라도 기용하는 끈끈한 인연이라고 했다. 황마담이 언제부터 신인들을 거느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연예인이 필요한 사람이면 황마담과 협조체제를 만들어 황마담의 손길만 얻으면 된다고도 했다. 돈 많은 사내들은 황마담에게 두둑한 현찰과 연예인을 교환하는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그런 쪽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면 대충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장부장과 그를 추종하는 거머리들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과 황마담 같은 고급 뚜쟁이가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절실한 이집단이나 개인이 존재한다는 결론이었다. 연예계 여자와 하룻밤을 즐겼다는 것으로 남자의 길을 걸었다고 믿는 철부지 사내와 그것을 이용해 먹는 뚜쟁이와 연예인들의 피를 빨아 치부하는 프로듀서의 상태는 한마디로 오락산업의 인간화라는 현대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장난감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복잡해지는 인간의 두뇌처럼 정교하거나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오락적 기구로 등장시키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 대표적인 것이 프로레슬링에서 프로권투로 넘어온 것 같고 여자가수가 오락산업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끼리 오락기구로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파괴를 뜻하는 무서운 전쟁놀음을 유도해 내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은 힘센 자만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황마담의 표정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퍽 다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오늘까지 고급 뚜쟁이로 커온 배짱인지도 모른다. 여자이면서 같은 처지의 젊은 여자들을 돈 많은 사내에게 팔아넘기는 짓을 아니었다. "이봐 총각." "네?" 계속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던 여자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를 불렀다. "총각, 배 고파?" "아뇨."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어?" 황마담이 눈치를 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황여사님 집 아닌가요?"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이냐?" 황마담은 단번에 이렇게 나왔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아셨죠?" "이 녀석아, 여기가 어디라는 것쯤은 알고 달라든지...... ." 황마담은 핸드백을 열었다. "너, 얼마 필요하냐?"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 "이왕 들통난 마당인데 그게 뭣니까? 황여사라면 손 큰 걸로 소문난 분인데 말입니다." "잔소리 말고 가지고 썩 나가라. 벼락치기 전에." "장부장한테 연락해 보신 겁니까?" "멍청한 녀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냐?" "이건 영화판 아닙니다. 대사 외운 걸로 얘기가 끝나진 않아요." "그럼 어쩔 테냐?" "좀 부숴줄까 합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 나는 소파 위에 있는 꽃병을 집어들었다. "이건 모조품이겠죠?" 나는 장식용의 여물통에다 꽃병을 내던졌다. "이만하면 무단 주택침입에 폭행죄는 되겠죠? 일어나보슈. 얼마나 콧대가 센지 좀 봅시다." 나는 황마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블라우스를 찢어버렸다. 황마담이 소리쳤다. 문이 벌컥 열렸다.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나보다 한 뼘씩 더 커보이는 사내들이었다. 건장한 어깨선과 가슴을 느낄 수 있는 덩치들이었다 찢어진 앞가슴을 여미며 황마담이 소리쳤다. 나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앉아서 말로 합시다. 덩치 큰 형씨들." "이 자식이 제법 귀엽게 노는군." 한 사내가 여유 있는 몸짓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형씨들이 더 귀엽게 노시는구만. 황마담 밑 닦아 주느라고 끼웃 끼웃대는 게 정말 귀엽다." "어허!" 사내들이 나를 에워쌌다. 황마담이 차갑게 웃었다. 사내들은 황마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황마담은 기죽지 않는 내 표정에 잠깐 당황하는 눈치였다. "너 어디서 왔냐?" 황마담이 거만하게 물었다. 너무 배짱 좋게 나가는 내가 미덥지 않아 보였던 모양이었다. "서울서 왔다. 어디서 온 게 그렇게 중요하슈?" 모처럼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선 게 그녀에게 마음을 쓰이게 한 것 같았다. "뭘 믿고 까부냐?" "하나님 믿고 까불면 안 되는 거유? 그렇지 않으면 염라대왕 믿구 까부는 거유." "없애!" 매몰찬 한마디였다. 이쯤이면 신분을 밝힐 일인데 자꾸 딴소리만 하는 것이 두려워할 곳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았다. 사내들이 들어왔다. 나는 껑충 베란다 쪽으로 붙어서 앞장 선 녀석부터 걷어찼다. "으윽!" 한 녀석이 고꾸라졌다. 뒤미처 사내들이 합세했다. 매듭 공예품을 벗겨 사내들을 후렸다. 사내들은 날선 칼을 꺼내 들었다. "이 새끼, 죽인다." "아직 생명보험도 안 들었다. 이 자식아." 나는 몸을 날려 치고 들어가며 차례로 가격했다. 사내들이 쭉 뻗어 누웠다. "황마담, 이리 오시지." 황마담은 차갑게 나를 쏘아 보았다. 독기 서린 눈매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여서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나같이 풋내나는 사내 정도는 상대조차 않던 여자였다. 큰 손님만 상대하던 텃세가 역력하게 보였다. "이리 오슈. 당신 졸개들 자빠진 거 보면 황마담이 느릿느릿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앉음새가 퍽 요염했다. 괴고 앉은 다리 사이로 속치마 끝단과 희디흰 허벅지가 보였다. 요염한 자태에 넘어가지 않을 사내가 없을 것 같았다. "뭘 원하지?" 아직도 기죽지 않은 말투였다. "내가 뭘 원할 거 같소?" "글쎄...... ." 그녀는 더 요염하게 웃었다. "왜 왔다고 생각하슈?" 나도 장난스럽게 물었다. "용돈이 필요한 사내 같진 않은데?" "그렇소." "그럼 내가 필요해?" "잘 보셨소. 당신이 몽땅 필요합니다." "내가 탐나면 말로 해야지. 보채는 것도 풋내가 나는군." 쉽게 넘어갈 배짱이 아니다 싶었다. "풋내가 나는 것도 재미있잖소?" "어린 게 뼈 삭으려고." "당신한테 뼈 좀 삭아 봅시다. 풋내가 나는지 단내가 나는지 한번 봅시다." "그럼 옷 벗어라." 그녀는 일어섰다. 웃옷을 벗어 소파에 던졌다. 풍만한 육체였다.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부끄럽니?" "벗어보슈. 심사를 해 봐야 내가 욕심을 낼지 걷어찰지 정할 거 아뇨?" "이게, 어따 대고...... ." 어린애 다루듯 말했다. "이봐요, 황마담. 당신 지금 사람 잘못 보느라고 애쓰고 있다는 걸 좀 알 수 없소?" "어쩌란 말야?" "당신 같은 고깃덩어리는 쌔고 쌨소. 옷 주워 입고 얌전하게 앉으슈. 내가 몽땅 당신을 갖겠다는 건 당신 모가지를 갖겠다는 거지 그 따위 비계덩어리를 갖겠다는 게 아니니까." "뭐라구? 다시 한번 주둥아릴 놀려 봐? 이게 어따 대고...... ." 제법 날서는 목청이었다. 나는 걸찍하게 그녀를 잡아 소파 위로 팽개쳤다. 그녀가 흐트러졌다. "연미희라고 알지?" "안다." "재일교포 청년 실업간지 사기꾼한테 이백만 원에 넘겨 줬지?"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겠다는 거냐? 남 "당신, 내가 손대면 그 따위로 아가리 놀리진 못할 거야. 여자라고 참는게 아니라 당신 배짱 때문에 참아 주는 거야. 그 따위로 대답하면 용서 않겠어. 정신 차리로 대답해. 신인 탤런트나 가수들을 계속 팔아먹을래? 아니면 손 씻고 이런 장사나 할래?" 그녀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웬만한 여자 같으면 벌써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을 일이었다. 비밀요정을 운영하는 여자라면 약자인데도 그녀는 무엇을 믿는지 당당하게 대들었다. "당신이 팔아먹은 여자들 불쌍하지도 않아? 얼굴 팔고 이름 팔아서 출세 좀 해 보겠다는 어린애들을 그렇게 곯려먹어야 시원하단 말야?" "도대체 너 누구냐?" 쉽게 기죽을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단단히 믿는 데가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믿는데가 없이 소문난 여자로 찰거머리짓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보다시피 사람이다." "사내답게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그녀는 흐트러진 몸매를 가다듬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말하지. 장부장 불러라. 그리고 여기 있는 애들 죄 불러라." "왜?" "얘기 좀 해야겠다." "쓸데 없는 짓 않는 게 좋아." 여전히 배짱 좋게 나왔다. "분명히 말하겠다. 수틀리면 작살 내겠다.비밀요정이든 네 빽이든 다 까발리겠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 "빨리 불러라." 그녀는 전화를 걸고 돌아섰다. 건넌방에 있던 여자애들이 얌전하게 걸어왔다. 낯익은 얼굴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넌 탤런트지?" "......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넌 가수지?" "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황마담. 얘들하고 하루 저녁 노는데 얼마야?" 황마담은 배시시 웃었다. "오십만 원 낼 배짱 있어?" "걸레 데리고 자는데 무슨 오십만 원 내야 해?" 계집애들 표정이 굳어졌다. "큰소리 치지 마라. 네 손에 죽을 년 같으면 여태 살아 있질 않았다. 넌 내가 어떤 년인지 몰라서 그래. 한마디만 하면 넌 뼈도 못 찾게 돼. 그러니 이쯤 했으면 흥정하자구. 네 얘기 다 들어 줄 테니까. 알았어?" "나두 빽은 좀 있는 편이다. 어떤 고관대작 빽인지 모르지만 한번 붙어보자." "까불면 정말 죽인다." "으흐흐흐...... ." 나는 황마담을 끌어내어 소파 위에 내던졌다. 우유빛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잘 들어라. 네가 팔아먹은 여자들이 어떻게 출세했는지 모르지만 뭣 좀 있다는 자식들한테 네가 얻어 처먹은 만큼은 토해 내게 할 테다. 별 놈 다 있겠지. 씀 만한 애국자와 존경할 만한 지도자와 믿을 만한 나 하나쯤 쉽게 어쩔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야. 난 쉽게 안 죽어. 백살 넘게 살아 있어야 할 놈이다. 영화배우 시켜 준다고 몸 뺏고 돈 울궈먹는 놈들이야 제 딸년 팔아먹을 소질까지 있으니까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넌 질이 좀 달라. 출연을 미끼로 방송국의 수챗구멍에서 기어나온 찰거머리한테 여자를 팔아 넘기는 것도 부족해서 걔들을 늙은 사내들한테 또 팔아 넘기는 건 내 눈으로 못 봐 주겠어." "그래서 어쩔래?" "몰아서 쓰레기통 속에 처박아 줄 테다." "놀구 있네." "잘 놀다갈 테니 두고 봐라." 아무리 다그쳐도 황마담 배짱은 꺾이지 않았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황마담이 스위치를 가볍게 올렸다. 화면에 방송가의 찰거머리 장부장 모습이 보였다. "열어 줘라." 황마담이 말했다. "들어오세요." 계집애가 문을 열어 주었다. 장부장이 들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장부장, 들어오슈. 기다리고 있었소." 내가 문 앞으로 걸어가 장부장의 멱살을 잡아 소파 위로 내던졌다. 장부장이 뒹굴었다. 아까 제법 큰소리 치던 사내들이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뒹군 장부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요?" 나와 황마담을 번갈아 쳐다보며 장부장이 물었다. 방송국의 찰거머리냐? 생긴 게 찰거머리처럼 생겼다. 탤런트, 가수들 피 빨아먹어서 뽀얗게 살이 올랐구나." "무슨 말요?" 장부장이 정색을 했다. "옷 벗어라." "예?" "넥타이 풀고 팬티 바람으로 서 봐." "왜 이러십니까?" "신체검사 좀 하자. 도대체 찰거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뜯어 좀 보자. 빨리 벗어!" 장부장은 황마담과 둘러선 여자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벗어요." 황마담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도 장부장은 주춤거렸다. "윽!" 장부장이 또 한번 나뒹굴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꼼짝 말고 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신곡 틀어 주는 데 얼마 받냐?" "그건...... ." "좋다. 당신들 다 들어가." 나는 사람들을 모두 방으로 몰아넣고 전화줄을 잡아 뺐다. 혹시 밖으로 연락해서 귀찮은 애들이 몰려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마담 정도라면 내가 귀찮아 할 만한 애들일지도 모른다. "대중 없습니다." 두려운 목소리였다. "다 알고 왔다. 수틀리게 굴면 널 그대로 끌고 나갈 테니까 알아서 겨. 내 말 알아?" "네." 몇 대 얻어맞은 장부장은 할 수 없었는지 죄 털어놓았다. 장부장은 계산에 철저한 찰거머리였다. 인기 순위는 물론이지만 신곡 한 곡을 틀어 주는 데도 쥐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내였다. 연속극에 출연시키는 것도 그의 계산은 철두철미했다. 레코드 제작회사에서 으레 장부장한테는 판과 봉투를 건네 줄 수밖에 없었다. 봉투가 없어도 되는 건 젊은 여자들이었다.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봉투와 육체의 잔치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싫은 탤런트나 가수들은 그런 흥정에 매달리는 사람보다 많았다. 그는 언제나 출세하고 싶은 기회주의자 위에 군림했다. "이 자식아, 너 같은 자식 때문에 고생하는 동료들이 싸잡아 먹히잖아! 너 같은 놈은 방송국 철탑 위에 매달아도 시원찮은 놈야."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물론 다시 그러지야 않겠지. 너 같은 찰거머리들 할 얘긴 그것 뿐이니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네 재산 명세 좀 밝혀라." "별로 가진 게 없습니다." "이 자식이 지금 농담 따먹기 하는 줄 알아?" 장부장은 견딜 수 없었는지 비명을 지르며 소파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는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 더러운 찰거머리야. 가엾은 여자들 몸 뺏고 돈 챙겨서 잘 처 먹고 잘 사는 게 그렇게 좋대? 돈 없으면 네 딸년이라도 팔 "아닙니다." "그래, 네 딸년은 귀중하고 남의 집 딸년은 네 눈깔 꼴리는 대로 해도 괜찮다 이거냐?" "그게 아닙니다." "네 버르장머리 고치려면 네 자식 새끼들과 네 마누라를 여기 데려다 놓고 네 주둥아리로 다시 얘길 시켜 주마. 방송을 몇 백만 명이 본다는 걸 잊지 마라. 넌 몇 백만 명을 우롱하고 낄낄거린 놈야." "선생님, 제발...... ." 장부장은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런 장부장의 턱을 올려 붙였다. 장부장이 내 발목을 잡고 애원했다. "선생님, 하란 대로 다 할게요." "벗은 채로 나가라. 내가 피킷을 만들어 줄 테니." 나는 정말 장부장의 죄목을 상세하게 적은 피킷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탤런트나 가수가 되어 이름자를 남기겠다는 열성파들을 출발지점서부터 간교한 술수로 더럽히는 이들을 그냥 두고 싶지는 않았다. 연예인은 대중의 공동소유이지 이런 소수 찰거머리들의 독점품은 아닌 것이었다. 그들을 출연시키고 인기 순위를 조작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걸 미끼로 황당한 관계를 꾸미고 그것이 먹혀 들어가는 풍토를 어디서부터 치고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런 작태는 세상 어디에나 있겠죠. 사람 사는 곳엔 어디든 간계를 부리는 사람이 있겠죠. 하나님 없으면 존재 가치도 없을 종교집단마저도 그런 간계가 난무한다는 걸 신문을 읽어서 알고 있습니다. 겁니까? 그런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은 심심한가요? 지옥에 사람을 보내줘야 할 중대한 사명이 하나님에게도 있으신 겁니까? 탤런트나 가수들을 주무를 수 있는 건 그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대중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조작하는 소수는 대중을 우롱한 겁니다. 결국 그들은 국민을 속이는 소수의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 간악한 무리를 채찍을 휘둘러 내쫓지 않는 이유가 뭣니까? 이젠 지쳤습니까? 아니면 너무 노쇠해서 그럴 힘이 없는 겁니까. 그도 아니면 될 대로 되라는 겁니까. 대중에겐 우상이 필요합니다. 탤런트나 가수나 운동선수나 과학자를 가리지 않고 우상이 필요합니다. 그런 우상은 조금씩 조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찰거머리들에게 대중의 우상이 뜯어먹히는 건 용납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화려한 무대 뒤에서 피눈물나는 연습과 훈련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하루 아침에 그런 훌륭한 연기나 가창 실력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노력하는 그들 앞에 찰거머리떼가 나타나 그들의 또 다른 피를 빼앗기게 한다는 건 하나님의 직권남용이거나 직무태만일지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되면 하나님 재판소를 인간들이 설치할 지 모릅니다. 몸조심하는 게 상책입니다. 장부장은 쉽게 자술서를 쓰지 않았다. 아무리 다그쳐도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두려고 했다. "레코드 회사에서 얼마씩 받아먹었는지 먼저 써라. 그리고 가수나 탤런트한테 빼앗아 챙긴 것도 차례로 써라. 사기쳐서 자술서 쓸 생각은 말아라. 자술서마저 사기쳤다간 넌 만수무강하지 못할 테니까." 장부장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매달렸다. "다시는 이런 짓 않겠습니다. 제가 사표를 내면 되잖습니까. 그 정도면 제 마음 아시겠조. 제발, 제발...... ." 나는 장부장을 잡아 소파 구석에 구겨넣듯 처박아 놓고 볼펜과 공책 한 권을 내밀었다. "먼저 네가 진술서를 솔직하게 쓰는지부터 확인한 뒤에 결정하겠다." 장부장은 기억을 더듬는지 눈을 감았다 뜨면서 끌쩍거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장부장은 공책을 내밀었다. "네 죄악상이 가관이다. 이거 들고 지옥에 가면 마귀들도 너만은 함부로 못 다루겠다. 이 천하에 지렁이만도 못한 놈." 나는 참지 못하고 몇 대 갈겨 버렸다. 연예인들과 관련 업체에서 뜯어먹은 게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많았다. 녀석이 큰 몫은 빼고 썼겠지만 자잘하다고 생각하는 몫만 해도 내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황마담, 이리 나오슈." 내가 문을 열고 황마담을 불렀다. 황마담 표정은 여전히 고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나하고 갈 데가 있소. 옷 입고 따라 나오슈." "못 갈 거야 없지. 너희들은 집 잘 봐라. 걱정을 말고." 나는 웃고 말았다. 여자 배짱이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황마담은 방문을 열고 옷을 뒤적거렸다. 수백 벌은 됨직한 옷만 넣는 방이었다. 황마담이 흘낏 뒤돌아다 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들어오시지." 그녀는 이미 반나의 몸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다고 하기엔 조금 풍만한 육체, 그러나 탄력을 느끼게 하는 육체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져 버릴 것처럼 농익은 여체였다. "잠깐 들어와요."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서 옷이나 갈아입으슈. 총각 기죽어서 들어가겠소?" "이럴 때, 세상에 나 같은 여자도 있다는 걸 봐두는 게 좋으실 텐데." "비계덩어리야 정육점에 가도 쌨소." "순진하셔." 치던 여자였었다. "잠깐 들어와요. 할 얘기도 있으니까." "난 비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럼 문 닫읍시다." "그러슈." 그녀는 돌아서서 방문을 닫았다. 나는 그때 기막힌 그녀의 앞가슴을 보았다. 그 나이에 그렇게 팽팽한 가슴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해 보였다. 장부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사람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처량한 신세였다. 연예인과 레코드업계에서 큰소리만 치던 찰거머리가 자술서를 써놓고 곤두박질 치는 그의 화려한 과거를 되새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봐, 장부장."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가엾은 여자들한테 몸도 상납받았다는데 네 마누라한테 한번도 안 들켰냐?" "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나도 명색이 사내자식인데 찔러바칠 수야 없잖아. 네 버르장머릴 어떻게 고쳐 주랴? 네 입으로 어디 한번 말해 봐라."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신 그런 짓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네 말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 "하나님께 맹세하겠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임마, 하나님이 웃겠다." "믿어보세요. 한번만 믿어보세요. 사표도 쓰겠습니다." "너 같은 찰거머리는 사표 아니라 오표를 써도 안 돼." "선생님, 제발...... ." "너 같은 놈 갈친 적 없다. 막내동생 같은 놈한테 선생님이 뭐냐 임마. 넋 떨어진 자식!" "선생님...... ." 장부장은 계속 애원조의 말만 늘어놓았다. "너희들 이리 와." 마룻바닥에 엉거주춤 서 있는 계집애들이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너희들, 차라리 창녀가 돼라. 그 여자들은 뼈대라도 있다. 몸으로 출세하려는 년들 끝 좋은 거 봤냐? 몸 파는 게 예술이냐?" "...... ." 아무도 대꾸하는 여자가 없었다. 무슨 체면에 입을 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의 출세에 목을 맨 여자들이라면 뻔뻔스럽지 않은 게 이상한 것이었다. "대답해 봐! 몸 파는 게 예술야?" "...... ." 여자들 표정은 여전히 뻔뻔했다. 얼굴이 두껍기 시작하면 여자를 당할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얼굴이 제법 팔린 탤런트의 따귀를 한 대 때렸다. "어마!" "가죽이 두꺼워서 아프지 않겠지." 나는 황마담 그늘에서 몸을 무기로 출세하려는 여자들을 차례로 때려 주었다. 성질 같아서는 장부장처럼 치도곤을 내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여자들은 얼굴을 감싸쥐고 구석으로 비켜섰다. 황마담이 방문을 열었다. 화사했다.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바탕에 까만줄이 박힌 실크 투피스였다. "가 봅시다." 하얀 핸드백까지도 인상적이었다. 핸드백 모서리엔 녹음기처럼 생긴 물건이 보였다. 황마담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꼭지가 환하게 보이는 가슴을 내밀고 씨익 웃었다. "장부장, 너도 일어나." 장부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장부장의 표정과 황마담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장부장은 잘 걷지 못했다. 나는 장부장의 겨드랑이를 끼고 일어났다. 치익! 그 순간 황마담은 핸드백 속에 있는 물건을 치켜들었다. 분사되는 액체가 코 끝에서 짙은 화공냄새를 풍겼다. 숨이 가빠졌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목구멍을 톡 쏘았다. 갑자기 몽롱했다. 숨이 탁탁 막혔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쓰러진다는 걸 느꼈다. "아, 아!"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황마담이 다급하게 뭐라고 소리 지르는 것도 아련하게 들었고 둘러섰던 사람들의 술렁이는 소리도 아련하게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히 끝장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점쟁이 말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어머니 말처럼 일찌감치 염라대왕한테 간 아버지와 잔병치레로 골골하는 광신의 한을 외아들에게 풀어보려는 어머니, 내가 태어나서 내 사랑의 주식을 가장 많이 분배해 준 다혜, 그리고 내 엉망진창의 과거...... . 하나님, 끝장인가요? 살려 주세요. 제발...... . 나는 살아 있었다. 차츰 의식을 되찾았다. 몽롱한 것은 여전했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아 있다는 건 전율이었다. 하나님에게 기도했던 마지막 몸부림은 뚜렷하게 기억났다. 손목이 뒤로 묶여 있었다. 발목엔 철사줄이 옥죄고 있었다. 캄캄한 시멘트 벽과 차가운 지하실인 것만은 확실했다. 참으로 허무하게 당한 꼴이었다. 녹음기처럼 생긴 물건은 특수한 무기 같았다. 분사액을 맞자마자 나는 혼미해졌었다. 마취제이거나 특수한 화공약품인 것 같았다. 시멘트 바닥을 발길로 때려보고 소리를 질러봤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철문 쪽엔 가파른 계단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묶인 손발을 풀더라도 빠져나가긴 어려운 것 같았다. 묶인 것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내 힘으론 풀 수 없었다. 황마담이 나를 살려 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나를 감쪽같이 해치울 수만 있다면 장부장이 목숨을 걸 만큼 나를 증오하고 있을 것 같았다. 찰거머리들은 지금 나를 없애도 되는지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이렇게 살려둔 배경엔 반드시 그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 손쉽게 없앨 계획일 것이고 내 행동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나를 행동대원으로 파견한 뒷손이 있다면 흥정을 하려고 벼를지 모른다. 지금쯤 내 신상을 캐내어 흥정을 하거나 없앨 계획을 세울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꼼짝없이 그들 손아귀에 들어 있는 신세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묶인 빨래줄을 끊어보려고 몸부림을 치거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겨우 일어났다.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뛰어보았다. 살아날 방법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곧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나는 게 많았지만 지금의 내 신세는 그렇지 않았다. 어딜 살펴도 내가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허리띠 속에 감추었던 표창도 없어졌다. 허리띠와 구두끈까지도 없었다. 날선 표창 한 자루만 있어도 손목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멘트 바닥에 계속 비벼댔다. 한 겹만 풀어내면 손목의 빨랫줄은 풀 수 있었다. 손목을 엉덩이 밑으로 넣어 앞으로 빼내어 시멘트 벽에 계속 비벼댔다. 내가 깨어나면 그 정도는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한참만에 손목의 빨랫줄과 발목의 철사줄을 풀어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살아나갈 길이 막연했다. 지하실은 견고했고 철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며칠만 가두어 두면 제풀에 죽을 것 같았다. 목이 말랐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아니 바깥 공기를 맡고 싶었다. 그저 흙먼지가 풀석거려도 좋은 그런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공해로 찌든 공기라도 좋았다. 지렁이가 나오는 수돗물이라도 마구 퍼마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살려 주셔야 합니다. 나 같은 사내가 한 명쯤 이 땅에 살아 있는 건 하나님을 위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셨죠? 그리고 불의를 보고 참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 행위가 모두 옳은 것 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작가들을 법이라고 하는 큰 구멍으로 걸러낼 순 없잖습니까. 법이란 항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사람의 문제는 법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법망을 피해 흉악한 짓을 하는 무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랏돈을 구멍내고 뒷구멍으로 제 뱃속 채우는 공무원들의 뻔뻔스러움은 어째서 용납하며 귀여운 소녀 팔아 치부하는 사내들은 어째서 잘 살게 내버려 두는 겁니까. 하나님, 아무튼 나 같은 사내는 살려두는 게 좋습니다. 악착같이 살아남을 겁니다. 지하실 바닥을 죄 훑어보아도 손목에서 끊어낸 빨랫줄과 발목에서 풀어낸 철사줄뿐이었다. 그것만 가지고 육중한 철문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황마담은 치밀한 여자 같았다. 철문을 틈새로 바깥 공기를 맡아보았다. 철문 바깥으로 또 다른 철문이 있을 것 같았다. 보통 건물의 지하실이 아니라 규모가 조금 큰 건물의 지하실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가 몹시 고파왔다.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철문 바로 옆에 기대어 섰다. 들어서는 순간 내려칠 생각이었다. "비켜 서라." 카랑카랑한 황마담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주먹을 힘 주어 쥐었다. 갑자기 지하실이 환해졌다.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백열등이 강한 불빛을 쏟아놓았다. 눈이 부셨다. "폼 그만 잡고 내려서라. 죽기 싫으면 어서!" 나는 사방을 훑어보았다. 천장의 백열등 주위에 나를 감시할 수 있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용케도 묶은 걸 풀었구나. 아래로 내려서라. 어서!" 나는 꼼짝 못하고 지하실 구석으로 내려섰다. 철문이 열렸다. 건장한 사내들 손엔 사냥용 장총이 들려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내들은 쇠갈고리를 들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이제 정신 좀 차려라." 황마담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섰다. 황마담 옆엔 후리후리하게 생긴 사내가 느린 동작으로 내려왔다. 몹시 빨라 보였다. 무공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긴장감을 가졌다. 눈매는 부드러웠지만 표정이나 움직임이 예삿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무릎 꿇어라." 황마담이 내 앞에 버티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황마담, 차라리 나를 죽이지 그래." "그러지 않아도 죽여 주마. 너 같은 녀석은 살려둘 가치가 없어. 나한테 감히 덤비다니." "함부로 나를 없애진 못할 거다." "어린 녀석이 겁도 없군." "내가 당신한테 찾아갈 땐 그만한 각오 없이 가진 않았을 것쯤은 알겠지." "아무리 그래도 살아나진 못한다. 내 손에 걸린 게 죄다." "쉽게 죽진 않을 거다." 나는 황마담 옆에 늘어선 사내들은 두렵지 않았지만 말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내만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을 없애 버려." 황마담이 둘러선 사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쇠갈고리 든 사내들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가볍게 몸을 피해 가운데로 나왔다. 쉬익 쉬익! 쇠갈고리가 바람소리를 냈다. 나는 앞선 녀석부터 재빨리 걷어찼다. 황마담과 사냥총 든 사내들이 뒤로 물러났다. 쇠갈고리 든 사내들을 눕히고 돌아섰다. 총구가 나를 겨낭하고 있었다. "쏴 버려. 어서!" 황마담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사내들이 나를 정통으로 겨낭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소름 끼치는 순간을 맞았다. 다른 건 다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총알을 피할 재간은 없었다. 사람들이 옛날처럼 무술정신을 갖지 않는 것은 총알이 발명된 이후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았다. 총 한 방이면 수십 년을 갈고 닦은 무술도 일순간에 끝나는 것이었다. 총알은 비정한 것이었다. 사람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는 살상무기일 뿐이엇다. 무술은 인간미가 있지만 총알은 그런 게없었다. "어서 쏴!" 황마담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나는 총구를 피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서!" 나는 그 순간에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쏘래두!" 황마담이 재촉했다. "어때? 흥정합시다." 팔짱 낀 사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침착했다. "어서 쏴! 빨리." 황마담이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팔짱 낀 사내가 내게 바짝 다가섰다. "비켜! 쏘라니까." 황마담이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총을 든 사내들은 대꾸없이 겨냥만 했다. "흥정하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 내려라." 팔짱 낀 사내가 이렇게 한마디 하자 모두 총을 내렸다. "이게 무슨 짓야? 약속하고 틀리잖아? 미스터 유, 왜 이래?" 황마담이 발악하는 소리를 질렀지만 팔짱 낀 사내는 내 어깨를 잡았다. "한 판 겨룹시다. 이기는 사람 맘대로요." "좋소." 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황마담이 떠들든 말든 팔짱을 푼 사내는 웃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앗다. 동작선이 느렸다. 사내는 별로 움직이지 않았고 몸을 재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격은 번번이 빗나가기만 했다. 나는 사력을 다했다. 이 사내를 거꾸러뜨리지 못하면 내 목숨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 사내는 좀처럼 공격하지 않았다. 내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날려 공격하며 헛점을 짚어 나갔다. 한참 동안 나는 헛손질만 한 셈이었다. 그는 가볍게 몸을 날려 내 손목의 혈을 찍었다. 나는 대자로 뻗어 누웠다. 이렇게 강한 상대는 무초권법을 배운 이후에 처음이었다. 단 한번도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무서운 사내였다. "내 이름은 유기하요. 이걸로 우리 흥정은 끝났소. 나도 장형을 잊고 장형도 이번 일을 다 잊어 버립시다. 자, 돌아가시오." 나는 간신히 일어났다. 손목이 퍼렇게 힘줄 솟은 자국으로 드러났다. 유기하는 다가와 혈을 지그시 눌러 풀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척비척 계단을 딛고 올라섰다. 황마담이 무섭게, 그러나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황마담을 걷어찼다. 황마담이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유기하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반드시 당신을 찾아가겠소." 나는 참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문을 열고 나섰다. 유기하의 웃음소리가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묘안당]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아니 천하에 장총찬이가...ㅎㅎ 못이긴 사람이 있다니~참으로 제목이 어울린 소설입니다 다각도에서..펼쳐지는 무법지대에서 다해치웠는데 황마담한테 넘어 가다니~~가스를 쏘았어도 그주위에 번졌을텐데...다음편이 기다려지네요.....총찬이도 모르는 유기하라는 멋진 무술가가 있다니.....ㅎㅎ감사합니다

[미혜]

잘되길 바랬는데 종찬이에 참패로군요!!

[새처럼]

좋은글 김사헤요 ^^^

[그리운남촌]

잘 읽고갑니다~~

[기니피그]

감사합니다

[다리위에서]

ㅈㄷㄳ...

[김성갑]

감사

[그랜빠]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