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안동 도산서원
@@@@@ 그시절 내고향 안동의 절구질 @@@@@
최근 안동(安東) 지방에서 3천년 전 ‘절굿공이’가 출토(出土)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방아의 원초적(原初的) 형태라 할 수 있는 이 ‘절굿공이’는 안동 저전리(苧田里) 유적에서 발굴되었는데,
이 ‘절굿공이’는 안동지역이 고대 농경문화(農耕文化)의 중심지임을 알게 하기도 한다.
일제시대 안동 도산서원
관개수로(灌漑水路)가 있는 저수지의 출수구(出水口) 부분에서 ‘절굿공이’가 발견된 것은
나무로 된 ‘절굿공이’가 저수지 물에 빠져 출수구 부분에서 큰 통나무에 걸려 있다가
3천년이 지난 오늘날 발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안동 저전리 저수지에서 출토된 3천년 된 청동기시대 절굿공이
처음 발굴(發掘)될 때의 ‘절굿공이’ 모습.
진흙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원형이
마치 요즈음 ‘절굿공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3천년 전 것으로 파악하는 근거는
이 저수지(貯水池)에서 발굴된 공렬토기(孔列土器 ; 아가리 주변을 따라 구멍이 뚫린 토기)
와 이단병식 석검(石劍 ; 자루를 두 계단으로 만든 돌칼)이 출토된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절굿공이’는 길이 151cm에 양쪽 지름이 9cm 정도다.
오늘날의 ‘절굿공이’처럼 중앙부(中央部)에는 돌기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사람의 키에 따라 손잡이 높낮이를 맞추라고 옵션을 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두 손을 사용할 경우 각각의 위치를 잡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고향 안동에서는 표준어인 ‘절구통’과 ‘절굿대’, ‘절구방아’, ‘절구질’ 등을
‘도기통’, ‘도굿대’, ‘도구바아(방아)’, ‘도구질’ 또는 ‘도굿대질’이라고 한다.
안동지방 사투리 ‘도기통’은 곡식(穀食) 따위를 넣고 절굿공이로 찧거나 빻을 때 쓰는 통인 ‘절구통’을 말하고,
‘도굿대’는 ‘절굿공이’를 말하며, ‘도구바아(방아)’는 ‘절구’ 그 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도구질’ 또는 ‘도굿대질’은 ‘절구질’을 말한다.
내고향에서 일컫는 ‘도구’라는 말이 일본어(日本語)인 ‘도구(搗臼)’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약간은 서글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절구질
그러면 ‘절구’의 유래와 종류를 먼저 알아본다. 지금의 탈곡·분쇄기(粉碎機)는 석기 시대의 ‘갈돌(마석 ; 磨石)’에서 유래하였다. ‘갈돌’은 지금도 아프리카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으로 큰 돌 위에 곡물(穀物)을 올려놓고, 작은 돌로 앞뒤로 문질러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갈던 도구였다.
절구(나무절구)
이 ‘갈돌’은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는데, 하나는 ‘맷돌’ 같이 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절구’나 ‘방아’같이 찧는 방법이었다. ‘절구’는 ‘맷돌’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代表的) 소형 탈곡(脫穀)·분쇄기의 하나였다.
지금은 때와 양에 관계없이 탈곡(脫穀)과 분쇄가 가능해졌지만, 예전에는 ‘절구’가 적은 양의 곡물을 찧거나 빻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정의 필수적인 도정도구(搗精道具)였다. ‘절구질’은 이 '절구'에 곡식을 넣고 ‘절굿공이(혹은 절굿대)’로 빻는 일이다.
절구질
'절구‘는 지역(地域)에 따라 도구통, 도구, 절기방아, 만방애(제주) 등으로 불렸는데,
크기는 어른 허리 높이(약 70~80㎝) 정도였다. 재료에 따라 나무절구, 돌절구, 무쇠절구가 있고,
‘절굿공이’도 ‘절구’ 재료(材料)에 맞추어 나무공이, 돌공이, 무쇠공이로 나누어진다.
한 개의 ‘절구’에는 두 사람이 ‘맞공이질’을 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절굿공이’가 딸려 있었다.
‘절굿공이’는 아래·위를 둥글게 하고, 가운데는 손에 잡기 쉽게 가늘게 깎아 8자형으로 만들었다.
‘쇠절구’나 ‘돌절구’ 중에는 크기가 작은 것이 있는 데, 이는 ‘양념절구’로 양념을 다지는데 쓰였다.
한약제(韓藥製)를 분쇄하는 ‘약절구’로도 쓰인다. ‘양념절구’는 깨소금·후춧가루·마늘·생강 따위의 양념감을 찧는다.
농사를 지어보신 회원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가을철이 되면 농가는 수확물(收穫物)로 가득해진다. 고
추, 수수, 옥수수, 깨 등 좁은 땅을 최대한 이용해 지은 농산물(農産物)들이 농가 마당을 채우거나,
처마 끝에 달리고, 지붕에 널려 있어 보는 이를 풍요롭게 한다.
여기에서 잠시 가을에 거둬들이는 ‘조’를 ‘절구’에 넣고 찧어본다.
‘조’를 찧기 위해서는 먼저 ‘조’ 이삭을 줄기에서 따낸다. 견실(堅實)한 ‘조이삭’은 바짝 말라 있다.
조(조이삭)
‘조’ 이삭을 따낼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맑게 들린다.
따낸 ‘조이삭’을 ‘나무절구’에 넣고 아낙 둘이서 ‘쿵덕 쿵덕’소리를 내며, ‘맞공이질’을 한다.
두 사람이 하는 ‘절구질’은 리듬이 필요하다. 박자(拍子)를 맞추지 못하면 상대방(相對方)의 ‘절구공이’에 맞을 수도 있고 힘도 더 든다.
찧는 곡물(穀物)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도 해야 한다.
수북했던 ‘절구통’ 안은 ‘절구공이’의 자국이 분명(分明)해지며, 껍질이 벗겨진 노란 ‘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옆에 서 있는 다른 아낙이 ‘조이삭’이 골고루 찧어지도록 ‘절구질’ 사이사이 잽싸게 손을 넣어 뒤집어 주는 ‘깨낌질’을 한다.
맞공이질
(왼쪽 꼬마도 어였한 새댁이다. 이때부터 평생동안 절구질을 해야한다)
‘절구질’이 끝난 ‘조’는 ‘키’에 옮겨 담아 ‘키질’을 한다. ‘조’를 ‘키질’할 때에는 유난히 먼지가 많이 난다.
수건(手巾)으로 머리를 동여매지만, 아낙은 먼지를 피하기 위해 바람에 맞춰 방향을 튼다.
닥은 이내 ‘조껍질’과 불순물(不純物)로 수북해진다.
농가 마당은 쿵덕 쿵덕 ‘절구질’ 소리, 촤악 촤악 ‘키질’하는 소리,
아낙들의 수다가 함께 어우러져 더욱 풍요로워 진다.
깨낌질
(왼쪽의 여인이 '깨낌질'을 하고 있다)
‘절구’는 곡식을 찧는 데 쓰는 농구(農具)로 사람의 힘으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農器具)를 말하는데,
통나무나 돌, 쇠 따위를 속이 우묵하게 파서 만든다.
‘돌절구’는 돌을 파서 만든 절구로 ‘석구(石臼)’라고도 한다. “돌절구도 밑 빠질 때가 있다”라는 말은
“아무리 튼튼한 것이라도 오래 쓰면 결딴나는 날이 있다”라는 말로 쓰인다.
그리고 ‘절굿공이’는 ‘절구’에 곡식 따위를 찧거나 빻거나 할 때 쓰는 ‘공이’를 말하고, ‘메공이’는 ‘메처럼 된 절굿공이’를 말한다.
또한 ‘절구통’은 곡식(穀食) 따위를 넣고 ‘절굿공이’로 찧거나 빻을 때 쓰는 통을 말하기도 하고,
‘뚱뚱한 여자’를 비유(比喩)하는 말로도 쓰인다.
위에서 말한 ‘메공이’의 ‘메’는 묵직한 나무토막이나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아 무엇을 박거나 칠 때 쓰는 물건(物件)을 말하는데,
“메로 돌을 깨뜨린다”, “메로 떡을 친다”는 용례(用例)가 있다.
곡식을 찧는 농기구(農器具)에는 ‘절구’ 외에도 연자방아, 통방아, 물레방아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농기구는 그 모습들은 저마다 다르고, 이용하는 방법도 다 다르다.
그러나 ‘절구’는 ‘쇠절구’, ‘돌절구’, ‘나무절구’로 구분을 하지만, 그 형태(形態)나 사용하는 방법은 모두 같은 방법이다.
사실 ‘절구’만큼 우리네 실생활과 밀접한 농기구(農器具)도 그리 흔하지 않다.
‘절구’는 곡식을 찧는 용도 외에도 콩을 삶아 찧어서 메주를 만들거나,
그 외에 여러 가지 식물(食物)을 찧을 때도 ‘절구’를 사용했었다.
쇠절구
때문에 옛적에는 ‘절구통’이 집집마다 한두 개씩은 다 있었다.
이 ‘절구’를 요즈음은 인테리어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절구’는 여인들과 가장 가깝게 실생활에 사용된 농기구(農器具) 중의 하나였다.
‘절구’ 중에는 ‘통절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위아래가 굴곡이 없이 밋밋하게 만들어진 ‘절구’를 말한다.
‘통절구’는 대개 ‘나무절구’인데, 둥글고 굵은 통나무의 중앙부를 둥글고 깊게 파서 만든다.
그리고 ‘돌절구’나 ‘쇠절구’는 아래받침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어, 유연(柔軟)한 선을 만들기도 한다.
‘절구질’을 할 때 혼자 하는 ‘절구질’은 ‘외절구’, 둘이 하는 ‘절구질’은 ‘쌍절구’ 혹은 ‘맞절구’라고 부른다.
그리고 ‘외절구’는 혼자서 하기 때문에 여자든 남자든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쌍절구’ 또는 ‘맞절구’의 경우는 반드시 동성(同性)끼리 ‘맞절구질’을 하도록 했었다.
‘절구’와 ‘절굿공이’의 모습이 남녀의 ‘거시기’와 비슷하기도 했고,
‘절구질 ’역시 남녀간의 성행위(性行爲)를 연상할 수 있는 동작이었기 때문이다.
‘쌍절구질’과 관련해서는 예로부터 속담(俗談)이 전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척척 맞을 때 “어이딸(어머니와 딸)이 쌍절구질 하듯 한다”고 하는 말이다.
‘쌍절구질’은 ‘절구통’ 하나에 두 사람이 마주 서서 ‘공이’ 두 개로 ‘절구질’을 하는 것인데,
어지간히 손발이 맞지 않으면 부딪히거나 다치는 수가 있다.
위의 속담은 한 가정(家庭)에서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마음이 ‘쌍절구질’ 하듯 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다.
쌍절구 혹은 맞절구
외절구
그리고 옛사람들은 ‘절구질’을 하면서 ‘방아타령’을 불렀다. 이 ‘방아타령’은 처음에는 방아를 찧으면서 불렀지만,
세월(歲月)이 흐르면서 ‘절구질’을 하면서도 부르게 되었다.
‘절구질’이 그만큼 힘들기도 했었지만, 방아의 ‘확’과 ‘공이’가 ‘절구’의 ‘확’과 ‘절굿공이’를 닮았고,
움직이는 동작(動作) 역시 둘 다 성행위(性行爲)의 그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같은 가사(歌詞)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절구질
그래서 당시의 ‘방아타령’은 거의가 남녀 간의 ‘성(性)’을 표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방아타령’ 중 대표되는 한 가지를 소개한다.
옛적 민초(民草)들의 작업요(作業謠)에는 거의 모두에 성적인 요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우리네 소리는 특별한 양식(樣式)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일을 하면서 힘든 노동(勞動)을 잊기 위해 부를 수 있는 소재(素材)면 되었다.
그러기에 위에서 소개한 ‘방아타령’사설은 ‘방아타령’과 여타의 노동요(勞動謠) 사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절구질
힘든 ‘절구질’을 하면서, 그 힘든 작업(作業)에서 오는 고통을 잊기 위한 사설이면 되었다.
그런데 그 소리 안에는 거의가 남녀의 성(性)과 관련한 내용을 소재(素材)로 하고 있었다.
이웃집 남정네는 밤새 방아를 찧는다고 표현(表現)한 것이나,
우리 집 서방은 초저녁잠이 많다는 것은 모두 성(性)을 빗댄 표현이다.
사실 ‘절구’나 ‘방아’라는 게 좀 성적(性的)인 포인트도 있다.
처음 만들어 질 때야 그런 의도였을까 마는 공이가 위 아래로 철떡거리는 것이
성행위(性行爲)의 그것과 비슷한지라 성적 농담(弄談)에 자주 이용되곤 했었다.
나무절구
그리고 여자들도 성적인 욕구(欲求)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할 때는 ‘확’과 ‘공이’가 여성과 남성의 ‘거시기’로 보이고,
그 연속적(連續的)인 동작이 성행위(性行爲) 그 자체로 보여 수치심을 느끼곤 했었다.
이 때문에 예부터 ‘디딜방아’와 ‘절구질’은 며느리와 시아버지, 딸과 아버지,
형수(兄嫂)와 장성한 시동생, 제수(弟嫂)와 시숙(媤叔), 젊은 숙모(叔母)와 장성한 조카,
젊은 고모(이모)와 장성한 조카, 장성한 오누이가 같이 찧거나 빻지 않게 했었다.
‘절구’와 ‘절굿공이’, ‘방아확’과 ‘방앗공이’의 생김새와 그 작동형태(作動形態)를 계속 응시하다보면
서로가 너무 민망(憫惘)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부(夫婦) 간에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처녀 총각의 절구질
옛적에는 가족관계(家族關係)가 아닌 남녀가 단둘이서 ‘절구질’을 할 때 여성이
가장 쉽게 남성(男性)의 ‘가죽 절구질’을 받아들이는 경향(傾向)이 있기도 했었다.
‘절구질’이 ‘거시기’하는 모습과 흡사(恰似)하여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고조(高調)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준근은 그의 풍속화(風俗畵)에서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절구질’을 하다 말고,
처녀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거시기’하는 총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림에서와 같이 일단 성사(成事)가 된 후부터는 총각보다 처녀가 더 적극적(積極的)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기도 하다.
그만큼 그 시절의 이성간(異性間) ‘절구질’은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절구’와 ‘절구공이’가 가지는 성적 이미지(김준근의 풍속화)
요즘에는 곡식을 도정(搗精)하는 기계에 집어넣고 분도(分度) 수만 맞춰주면, 알아서 적당하게 껍질이 벗겨져 나온다.
하지만 조선시대(朝鮮時代)나 그 이전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절구’를 이용하는데, ‘절구’는 쓿는 것과 빻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어 그만큼 편리(便利)하게 이용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옛적의 ‘절구질’은 주로 여성(女性)의 몫이었다.
하루 먹을 곡식을 가져다가 ‘절구’에 넣고 ‘절굿공이’로 두들겨 껍질을 벗겨내면서
빗자루로 살살 털어내면 떨어진 껍질은 밖으로 날린다.
그러고 나서 찧어진 곡식(穀食)을 다시 ‘체이(키)’에 담아 살살 ‘키질’을 해주면,
자잘한 나머지 껍질과 돌멩이 같은 것들이 골라진다.
그러면 이걸 가지고 한 끼나 혹은 하루 먹을 양식(糧食)을 삼는다.
절구질과 체이질(키질)
그런데 이 ‘절구질’이란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절굿공이’를 보면 알겠지만, 그 무거운 ‘공이’를 아래위로 들어 올리고 내리는 건
헬스장에서 중량기구(重量器具)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무거운 ‘공이질’을 한나절 또는 하루 종일 한다는 것은 여간 중노동(重勞動)이 아니었고, 하기 싫은 일이 아니었다.
‘절구질’이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다 보니 ‘절구’를 대신할 물건들이 고안(考案)되었는데,
그 것이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아니면 몇 집마다 하나씩 있던 ‘디딜방아’였다.
절굿공이
‘절구’가 순수(純粹)하게 인력을 이용한다면, ‘디딜방아’는 다수의 힘을 이용하기도 하고,
팔보다 다리를 쓰며 시소처럼 밟는 구조(構造)가 되어 있어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절굿공이’는 ‘절구’속에 곡식(穀食)을 넣고 빻을 때 사용하는 도구(道具)로 대개 은행나무, 가래나무 또는 호두나무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나무는 ‘절구질’을 해도 터지거나 갈라지지 않고, 모양이 변하지 않아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
‘절굿공이’는 손으로 잡는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었다. 가운데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면 손으로 잡기도 편하지만,
위 아래로 나누어진 ‘공이’의 무게 중심이 되어 힘을 덜 들이고 사용하는 장점(長點)이 있었다.
‘공이’는 꼭 나무로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돌 또는 쇠로도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곡식을 빻을 때 ‘맷돌’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절구’를 이용하면 알맞게 빻을 수 있어 선호(選好)하기도 했었다. 용
도(用度)에 맞게 찧거나 빻기를 조절(調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구질’은 앞서 소개한 대로 혼자서 하기도 하고(외절구), 둘이서 하기도 했으며(쌍절구 또는 맞절구),
여러 명이 ‘절구공이’를 같이 들고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기도 했다.
여러 명이 하는 절구질
집집마다 안뜰 한 모퉁이에 오두마니 앉아서 온갖 먹거리를 찧고 빻아내던 ‘절구’와 ‘절구소리’,
보릿고개를 맞은 가정(家庭)에서는 가난을 찧었고, 부잣집마다에는 풍요(豊饒)를 찧어주던 ‘절구’와 ‘절구소리’도
이제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개구장이 시절, 하루 종일 싸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함께
찧으시던 ‘절구소리’는 무언가 모르게 푸근함을 안겨주곤 했었다.
‘찹쌀사래기’로 만드는 말랑말랑한 ‘찰떡’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구수한 ‘쑥개떡’이 만들어져 상위에 올라오기도 했었다.
초가을 올벼를 베어 ‘절구’에 ‘찐쌀’을 찧을 때는 어머니께서 잘 찧어진 부분을
한 움큼 덜어내어 껍질을 후후 불어내시고, 입 안 가득 넣어주시곤 했었다.
찐 쌀
씹을수록 고소하던 그때 그 찐쌀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40∼50년 전만 해도 ‘절구’는
이와 같이 인간생활(人間生活)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생활필수품(生活必需品)이었다.
이삭을 부수어 알곡을 낼 때, 보리의 알곡을 찧어 껍질을 제거(除去)할 때,
현미(玄米)를 한 번 더 찧어 백미로 만들 때, 쌀이나 고추를 빻을 때, 쫄깃쫄깃한 떡을 칠 때
주로 쓰이던 ‘절구’는 가난한 가정이든, 부유(富裕)한 가정이든 그 수준에 맞는 먹거리의 산실(産室)이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보릿고개를 맞으면 송기(소나무 속껍질)나 쑥을 찧어 허기진 배를 채웠고,
제사 때나 결혼식 또는 명절(名節)에는 쌀가루를 부수고 떡을 쳐내 풍족(豊足)함을 가져다주기도 했었다.
절구에 찧어서 만든 쑥떡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귀퉁이에 조용히 앉았던 그 ‘절구’는 너무나 크고 높아
동네 개구쟁이들을 불러들여 빙빙 돌며 술래잡기 놀이를 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 속에 들어가 놀기도 했었다.
‘나무절구’나 ‘무쇠 절구’, ‘돌절구’ 모두 둥글둥글하게 아래와 위가 원통(圓筒) 모양으로 된 것이 가장 흔한 모습이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맵시 있는 모양의 ‘절구’는 아래쪽이 네모나게 각지고,
위쪽은 둥글어서 예로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우주관(宇宙觀)을 그 모습에 담고 있기도 했었다.
‘절굿공이’의 재료는 목재(木材)였고, 여자용과 남자용 두 가지로 만들어졌으며,
여자용(女子用)은 길이 120cm가량으로 양쪽은 불록하게 만들고, 가운데는 손에 잡히도록 가늘게 만들었다.
(벽에 세워둔 ‘곰베’같이 생긴 것은 남자용 ‘절굿공이’다)
남자용(男子用)은 지름 약 20cm, 길이 80cm가량의 나무둥치에다 구멍을 뚫고 가는 나무를 박아 망치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를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울메’라고도 하고, ‘방꾸’라고도 한다.
이렇듯 우리들의 선인(先人)들은 ‘절구’와 ‘절구질’을 통해 ‘방아악’과 ‘방아타령’ 같은
음악을 탄생시키면서 가난 속에서도 마음의 풍요(豊饒)로움을 빚어내기도 했었다.
물질주의(物質主義)로 포만한 지금 세상에서 상대적인 빈곤으로 괴로워하는 군상(群像)들에게 옛 선인들이 방아질을 하며,
만들어낸 소박한 그 행복은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자문(自問)하게도 한다.
그리고 그런 연유(緣由)로 ‘절구’는 아직도 우리들 마음을 정겹게 두드리는 풍성한 소리의 추억(追憶)이 되고 있다.
옛적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절구질’을 하면서도 ‘디딜방아’ 찧을 때 부르는 ‘타령’을 불렀다.
‘방아타령’을 ‘절구질’ 할 때도 부르고, ‘디딜방아’ 찧을 때도 불렀다는 말이다.
‘방아타령’은 지방(地方)마다 한 가지씩 있을 정도로 많이 지어져 불렀는데,
여기에서는 그 중 한 가지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지금은 곡식의 탈곡(脫穀), 제분(製粉), 떡 만들기 등 모든 과정은 정미소(精米所)나
전문업소가 담당하는데다 아파트 숲의 물결 속에 그 시절 ‘절구’는 이제 존재할 권리는 물론
앉을 자리마저 빼앗겨 우리 주변(周邊)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은 초등학생(初等學生)들을 상대로 ‘절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는 학생이 드물다.
그러나 ‘절구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 절구통, 뚱뚱보 여자”하고 ‘절구통’을 허리 굵은 여자들의 대명사(代名詞)로 둔갑시켜 버린다.
어쨌든 마을마다 정미소(精米所)가 생기면서 ‘절구’는 자연스레 그 존재 가치를 상실(喪失)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 누구도 떡을 만들기 위해 힘들게 ‘절구 방아질’을 하지는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민속촌(民俗村)이나 토속 음식점 한 켠을 장식하고 서있는 ‘절구’를 바라보면
서 옛 시절 ‘쿵더쿵 쿵더쿵’ 힘차게 진동(振動)하던 방아 소리만을 기억해낼 뿐이다.
남정네들의 절구질
조상(祖上) 대대로 이어 오면서 그 ‘절굿공이’를 들었던 그 숱한 여인네들의 한숨이
아이들의 ‘미영베’ 저고리 소매 끝에 번들번들하게 눌어붙었던 땟국과 콧물자국처럼 겹겹이 달라붙어 있기도 하다.
재론(再論)하지만, 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로써 가장 오래전부터 쓰여 오던 생활용품(生活用品) 중의 하나가 바로 ‘절구’였다.
쌀과 보리쌀을 찧는 것은 물론 떡쌀을 빻는 일, 메주콩을 삶아서 찧는 일 등을 모두 ‘절구’로 찧고 빻았다.
가정에서 쓰는 도정기구로 ‘절구’의 일종인 ‘확돌’ 이라는 것도 있었는 데,
대개 어른의 한 아름이나 되는 나지막한 돌을 넓적하게 파서 손안에 들 수 있는 크기의
‘갈돌’을 ‘확돌’안에 넣어 고추나 ‘죽 쌀’을 갈았었다.
시골에서 ‘인절미’ 같은 떡을 만들 때 잘 찐 찹쌀을 이 ‘확돌’에 넣고 ‘절구공이’로 쳐서 이겨낸다. 때문에 많은 가정에서는 부엌 앞이나 장독대 옆 또는 곳간 앞에 ‘확돌’을 두고 있었다.
부자간의 절구질
그리고 옛적에는 방아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게 ‘절구’였다. 가난하든 부유(富裕)하든
무엇이든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곡식을 찧고 빻아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절구방아’는 음식을 만들기 직전의 과정(過程)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식구가 많으면,
그만큼 ‘절구질’을 많이 하고, 서둘러 해야 하는 고달픔도 따랐다.
가족이 많고 먹고 살만한 가정일수록 그 집 며느리나 하녀(下女)들에게 부과되는 ‘절구질’의 고역이 가중(加重)되었다는 얘기다.
대신 가난한 가정 며느리들은 찧고 빻을 것이 별로 없으니 ‘절구질’도 그리 많지 않았다.
금이 간 나무절구에 임신한 며느리와 동서가 절구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절구질’소리와 방아 찧는 소리는 고픈 배도 부르게 했고,
고픈 배를 더 고프게 하는 마술(馬術)을 부리기도 했었다.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 민족, 그렇게 오랜 세월을 굶주리며 살아왔기에 먹을 것을 보면 ‘환장증(換腸症)’이 생겼고,
그래서 남의 집 ‘절구질’ 소리만 들어도 입에 침이 괴이곤 했었던 것이다.
반대로 ‘절구질’소리와 방아 찧는 소리가 자기 집에서 들리는 날은 고픈 배도 부른 듯이 여유(餘裕)가 생겼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조금 있으면 무엇이든 한 그릇 그득하게 담겨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절구질
여기에서는 ‘절구’와 관련한 세시풍속(歲時風俗)과 ‘절구’의 유물을 잠시 살펴본다.
경상남도(慶尙南道) 지방에서는 정월의 첫 소날(上丑日 ; 상축일)에 ‘절구질’을 하면
집안의 소가 골이 아파서 죽거나 병이 생긴다고 하여 이를 삼간다.
또 우리나라의 중부(中部) 이남에서는 보름날 새벽에 ‘절굿공이’를 가지고
집마당이나 밭에 가서 “디지기방아 찧자, 디지기방아 찧자”하면서 찧고 다니기도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절구질
(손자를 업은 시어머니가 '깨낌질'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굼벵이나 두더지·독벌레들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전라남도(全羅南道) 지방에서는 보름날 아침 ‘절굿공이’로 마당의 네 귀퉁이를 찧고 나서
땅이 얼마나 들어갔는가를 살펴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했다.
내고향 봄날은 새싹들 풀내음으로 가득하다.
이때의 동쪽은 봄, 남쪽은 여름, 서쪽은 가을, 북쪽은 겨울로 여기고,
땅이 많이 팬 쪽의 땅은 그 해에 물이 흔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가뭄이 든다고 믿었다.
전라남도(全羅南道) 지방에서는 또 ‘절구’에 여신(女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보름날 아침, ‘절구’ 주위에 열두 달을 상징(象徵)하는 열두 가지 음식에 콩·보리·조·팥·쌀 등
의 곡식을 섞어 놓고 그 해의 흉풍(凶豊 ; 흉년과 풍년)을 점치기도 하는데, 같은 날 오후에 이들을 살펴본다.
두 사람이 한 ‘절굿공이’를 사용했을 때도 손잡이 위 아래를 나누어 잡을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151cm의 중간쯤이 되는 부분이 ‘절굿공이’를 드는 손잡이 높이 정도로 본다면,
3천년 전 안동지방(安東地方)에 살았던 사람들의 키 높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안동 ‘절굿공이’는 그동안 일본(日本)의 나라현 가라코카기 유적(遺蹟)을 비롯한 야요이시대
전기(기원전 4-3세기) 유적에서 발굴된 목제(木製) ‘절굿공이’ 보다 300~4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도 힘겨운 어머니의 절구질 소리가 들린다.
새월은 흘러도 절구질 소리는 동네에 끊이지 않고 들린다.
여기가 울엄마 신혼방 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