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보다는 실제 측정하여 비교하는 것이 빠르겠지요.
구글어스를 통해서 거리와 방위를 측정해봤습니다.
과연 세종실록 지리지가 지도처럼 아주 정확한 방위와 거리를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개괄적인 지리적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우리 국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봉경(封境)【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영(閭迎)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리,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말한 여듧곳의 지명을 구글어스에서 표시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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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하실 것은 핀의 단추부분이 아니라 바늘이 꽂힌 부분이 표시점입니다.
이 위치를 경북궁과의 거리를 따져봤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21/29_cafe_2007_06_18_04_38_46758db64ba42)
세종실록 지리지의 거리는 도보로 측정한 거리이기에 당연히 오차가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넘어가야하는 양양, 여영, 경원 등은 오차가 40%를 넘었고
의주 역시 산악지형을 지나가야 하는 만큼 34%의 오차가 나왔습니다.
반면 곡물수송등으로 교통로가 잘 발달되어있던 동래와 해진까지는 비교적 오차가 작았습니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태안의 경우는 통계적인 이유로 오차가 많이 나왔습니다.
풍천의 경우 26%의 오차가 나왔는데 거리등을 따져봤을때 적당한 오차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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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를 봤을때 풍천의 오차가 30도로 가장 높았으나
동쪽의 양양 역시 21도의 오차가 있으며
북극성을 따라가면 되기에 가장 측정이 쉬운 북쪽도 15도의 오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풍천이 다른 곳에 비해 오차가 많기는 하지만 다음의 이유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종 당시에 대동여지도가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물론 구글어스도 없습니다.
다음은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정확한 지도입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근·김사형·이무·이회, 1402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11/32_cafe_2007_06_18_04_58_4675925c7022d)
이 지도를 보고 중국대륙도 조선땅이라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이 지도는 아랍인들의 지구본과 중국, 일본의 지도를 참조하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오른쪽 조선 부분만을 확대해서 보겠습니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정밀함은 없습니다. 대동여지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의
정밀한 지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김정호선생을 대단하다고 하는 이유가 그 이전까지 없었던 정밀한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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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세종실록 지리지 같은 풍물지를 만든다면
실제 한양의 서쪽에 있는 부평을 지칭하며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양에서 서쪽으로 60리 부평까지이며...' 라고 하겠습니까?
저라면 조금 방향을 틀어서 가장 서쪽으로 튀어나온 동네를 지칭하면서 조금 뻥쳐서
서쪽으로 600리라고 하겠습니다.
참... 강화도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남쪽으로도 제주도를 포함시키지 않았고
동쪽으로 울릉도를 말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또한 지리지에서 8방을 설명할때 도호부의 단위로 지명을 설명했고
당시 경기지역에서는 5개의 도호부가 있었는데 그중 서쪽은 부평도호부였습니다.
결론
그림 하나 없는 세종실록 지리지를 지도처럼 정확한 방위를 표시하였다고 주장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주장이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륙백제론도 말도 안되는 어거지 주장이며
8개의 방위각 모두가 조금씩의 오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쪽방향 하나만 찍어서 이상하다며
이것은 일제가 대륙조선론을 주장하기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 역시 지금의 과학적 분석방법을 도외시한 엉터리 주장입니다.
일제가 조선왕조실록을 조작하였다면 어떤방법으로 위조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순서입니다.
전체가 위작인지, 아니면 가필을 했는지, 종이한장만 끼워넣었는지를 먼저 찾아내면 됩니다.
지금의 과학은 종이의 제작 연대와 제작방법, 원목의 종류 등을 거의 정확하게 찾아냅니다.
또한 글씨를 쓴 먹물의 제작방법과 원료, 제작시기도 거의 찾아냅니다.
일제침략기에는 세계어디에도 그런 기술이 없었지만
지금은 조작은 거의 밝혀냅니다. 더군다나 조선왕조실록의 조작이라면 아무리 도서관의 연구원들이 식충이라 하더라도 벌써 밝혀냈을 것입니다.
첫댓글 역시 꽃파는 총각님은 반론으로서도 증거도 세련되고 좋습니다. 그 때의 지도감각은 눈을 기초하는 것이라 오늘과는 조금틀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것은 구글로 보아도 틀리지 않는 객관적 자료로 발전한점과는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총각님의 해석은 정확하지 못합니다. 그 당시의 한성지리지의 봉경은 발측과 목측으로 매우 정확합니다. 이수는 시대따라 신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어사용법도 임금이 서쪽으로 갔다하면서 평양쪽으로 간 일반적인 단어 사용과 지도개념으로 말하는 서쪽은 엄연히 구별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사는 서울인 한성부를 중심축으로 합니다. 구글지도를 보아도 동쪽인 양양은 거의 동쪽이고, 남쪽인 해남은 정남에 가깝고, 북쪽의 여영은 정복에 가깝고, 동북쪽인 경원은 역시 정동북에 가깝고, 서남쪽인 태안은 역시 거의 서남쪽에 가깝습니다. 동남쪽인 동래는 역시 거의 동남쪽입니다. 그러므로 서쪽도 역시 정서쪽을 가리켜야 맞습니다. 황해도의 풍천은 거의 서북쪽에 가깝습니다. 서북쪽은 이미 의주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쪽으로 풍천에 이르기 6백리 구절은 이상한 구절로서 일본이 조작한 구절이라 추정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러한 구절로 대륙조선설 신봉자들은 서쪽에 600리라는 기록을 붙잡고 서해바다까지 가는 넓이라 하면서 이 봉경의 개념을 한성부의 넓이로 억지로 해석하면서 넓은 중국에 있다 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서쪽은 한성부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거의 서북쪽인 황해도 풍천을 말할리 없습니다. 당연히 한성부 서쪽인 인천부근의 어떤점을 말한 것입니다. 서쪽을 황해도 풍천을 말하면 그 당시의 한성부는 역시 지금과 같이 경기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기도 어떤 곳을 붙잡고 서쪽이라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무슨 이런 엉터리 기록이 있냐고 야단하여 수정되었을 겁니다. 즉 누구든지 서울 즉 한양 서쪽은 인천근처인 것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세종실록 지리지 한성부의 구성이 임금이 사는 곳으로서 서울의 여러 가지를 소개한 뒤에 봉경이라는 전국적인 이수를 팔방으로 측정하여 전국적인 이수를 표시하여 전 국토의 면적을 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부터 나오는 각도의 여러 이수의 총론으로서 말한 그때의 지도개념으로 정확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서울 즉 한양 서쪽은 인천근처인 것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21도가 어긋나는 것은 거의 정확한것이고 30도가 어긋나는 것은 엉터리가 되나요?
북쪽을 가리키는 여영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만 기록자가 여영을 두고 북쪽이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황해도 풍천이 서쪽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침반을 사용하여 방위를 측정할 경우 북극성을 기준으로 방위를 측정할때와 다른 오차가 발생하게 됩니다. 물론 북극성 자체가 1도의 오차를 가지기는 합니다만 현제 자북은 7도가랑 기울어져있습니다. 그런데 1년에 1/60도씩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답니다. 지자기가 변화하고 있기때문입니다. 600년전이라면 지금과 10도정도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꽃파는 총각님, 우리가 그 당시 한성부에 있었다 합시다. 서쪽이라 함은 누구나 다 인천부근을 가리킬 겁니다. 실제로도 그러하고요. 이들은 위성을 타고 땅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은 그 당시의 지리적인 개념과 그리고 통상적인 일반인의 개념을 포함하여 말한다 보면 좋을 것입니다. 서쪽은 일반인의 관념으로도 한성의 서쪽이요. 지도개념으로도 서쪽인 인천 부근입니다.
실록의 이 기록자가 팔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당연히 서쪽은 동쪽을 가리키는 양양과 반대방향인 인천 부근을 가리키는 구절입니다.
동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양에서 동쪽은 삼척입니다. 그 윗쪽에 강릉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하러 더 위에 있는 양양을 거론하여 방위를 엉터리로 했을까요? 남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진(해남)이 아니라 강진입니다. 동남쪽은 더 심각합니다. 동래가 아니라 포항이나 영덕입니다. 이런 엄청난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쪽의 어색함만을 강조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의 팔방으로는 총각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실록의 기록자는 저의 해석대로 기록한 의미일 것입니다. 총각님이 말한 것은 기계적인 의미이고, 이조실록의 그 기록자는 단순한 기계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전국적인 면적을 지금 같이 측량하고 표시할 수 없어서 동남쪽 끝으로는 동래. 북동쪽으로 끝인 가장 먼 지점에 있는 경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 같은 표현으로 전국의 면적을 그려주고 있습니다.구글에서 표시한 것 중에서 황해도 평천을 대신하여 인천을 보세요. 북쪽으론 중간과 좌우를 포함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역시 끝인 동래와 해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쪽의 반대인 서쪽은 인천부근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서로 납득함이 없다면 조금 멈추어 봅시다. 시간이 지나면 혹시 허떤 해결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한양에서의 방향이 아니라 국토의 팔방을 말한 것이라면 더더욱 서쪽을 풍천이라 표시함이 이해됩니다. 풍천고을에서 관할하는 동네야 말로 우리 국토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입니다. 90리밖의 인천을 표지하지않고 600리밖의 풍천을 서쪽으로 표시한 것이야 말로 우리 국토의 팔방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이번일로 저도 공부를 많이 하네요. 세종 당시에 한양에서 서쪽에 있던 지역은 부평도호부였네요. 당시 경기도에는 광주, 양주, 부평, 수원, 철원의 5개 도호부가 있었습니다. 부평도호부는 지금의 부평초등학교 자리입니다. 경북궁에서 23Km 60리가 안되는 곳입니다. 나라의 국토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 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60리 되는 곳에 부평이 있다고 기록하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방향을 털어서 600리밖의 풍천을 거론하겠습니까?
상당히 일리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도보가 중심인데 60리도 상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서쪽이라는 관념이 인천부근이었을텐데 황해도 풍천이라 ?하면 믿어주겠습니까? 글은 그 당대의 일반적인 인식과의 대화입니다.
풍천 건은 일단 총각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사물을 판단하는 법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거의 다 한국에 살고 있는 별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수많은 구절을 이조실록에서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 인용하는 조목들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에 걸쳐서 내려오는 말도 유의함이 좋습니다. 일제 강점기 수십년에 많은 위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지금도 계속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적 방법과 문헌적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하고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글은 사후적인 결과를 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조사전인 심증적인 직관의 글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사실과 증거들이 나온다면 수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략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정확한 관찰일 것입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를 개작하였듯이 한국의 사서에도 군데군데 위조의 기록을 넣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의 하나입니다. 풍천 건을 인정했다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대륙조선설에 관한 중요한 의견]은 합당한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