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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브라흐만과 아트만
우파니샤드의 기본 개념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들은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브라흐만)로부터 나왔으므로 개별적인 존재의 참본질(아트만)은 궁극적으로 우주의 본질(브라흐만)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명상과 수행을 통해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하게 하는 원동력의 실체를 업(業, Karman)이라고 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이 업(業)에 의해서 생겨나는 윤회로부터의 자유, 즉 해탈이라고 본다. 해탈이란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본질을 깨닫고,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를 직관하여 궁극적으로 브라흐만과 자아를 합일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정신적인 수행을 통해 우주와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자기가 곧 최고의 절대적 실재인 브라흐만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사람은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모든 욕망이나 본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자유며 집착과 욕망,
그리고 일체의 업(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는가? 우파니샤드는 그 문제를 바로 인간 내부로의 탐구에서 시작하여 인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한 최초의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우파니샤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과 사상이 있는데, 그중 가장 주요한 단어가 아트만(我)과 브라만(梵)이다.
브라흐만 Brahman
브라흐만은 다양하고 다원적인 현상계의 기저에 놓인 불변의 실재이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바탕이자 불가멸이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다.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브라흐만은 변화하는 세계의 모든 부분과 측면의 기저에 놓인 불멸의 불변하는 실재이다.
우주에 있는 무엇이든 모든 사물들의 내면에는 주재자가 계신다.
이것이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브라흐만의 진실이니,
마음의 운동에 있어서 나타난 힘은 모두 브라흐만의 힘이다.
불멸하는 것이 실재이다. 마치 타는 불로부터 무수한 불꽃이 위로 날아오르듯 이,
불멸자의 심연으로부터 모든 것이 일어나며, 그들은 다시 불멸자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저 존재는 스스로 빛나며, 무형체이다. 그는 모든 것의 안과 밖에 머문다.
그는 태어나지 않으며, 청정하고 가장 큰 것보다 크며, 호흡도 없고, 마음도 없다.
실재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개념이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와 다른 편으로는 불변의 브라흐만이라는 이원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끊임없이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일원론을 강조하는데, 즉 진흙으로 만들어진 대상들이 다만 그 이름과 형태에서만 서로 다르듯이, 변화의 세계는 다만 이름과 형태의 세계이며, 그 실체는 영원, 불멸의 브라흐만이다.
"다만 말 혹은 언어만으로 변화가 일어나며, 실재에 있어서 변화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이름이며, 진흙만이 실재이다."
브라흐만은 감관과 이지의 세계와 달리 이름과 형태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무엇으로도 브라흐만을 적극적으로 묘사할 수 없으며, 단지 브라흐만이 아닌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기술이란 관계인데, 브라흐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브라흐만은 기술될 수 없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에 편재한 힘이다. 이 점은 다음의 인용에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이며, 마음도 그에 도달할 수 없어 당혹하여 달아난다.
말로 표현될 수 없으나 그것에 의해 혀가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에 의해 마음이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눈으로 그것을 볼 수는 없으나 그에 의해 눈이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호흡이 그것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호흡이 이끌려지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브라흐만은 표현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다. 브라흐만은 남성 he도 아니고, 여성 she도 아닌 중성 It이다. 브라흐만은 인간이 숭배하는 어떠한 유일신이나 다신들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브라흐만은 감관이나 이지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고, 최고의 신비적 직관의 섬광에서 체험될 수 있는 뿐이다.
아트만 Atman
소란스럽고 격동하는 내적 세계의 가운데 불변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모든 변화에 대한 고요하고 불멸하는 증자인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아트만은 인간의 가장 내면의 자아로, 끊임없는 변화에 종속되는 경험적 자아 empirical ego와 혼동되어선 안 된다.
소금 덩어리를 물에 던지면, 녹아버려서 다시 집어낼 수 없지만, 그 물을 맛보면 짜갑게 느끼듯이, 오, 마이뜨레이여, 개아가 해소될 때, 그것이 무한하고 초월적인 청정한 의식이며 영원한 것이다. 개체성이란 무지 때문에 참나를 요소들과 동일화함으로써 일어난다. 신성한 빛 속에서 나의 의식이 사라질 때 그것도 사라진다. 참나의 의식이 있는 곳엔 개체성도 더 이상 없다.
아트만은 태어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순수한 영혼이며, 영원하다.
아트만은 ‘neti neti’라고 기술된다. 그것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소멸되지 않고, 잡혀지지 않으며, 무한하다.
아트만은 인간 속에서만 아니라 바다, 별, 나무, 천둥, 새, 그리고 짐승 등 모든 존재 가운데 존재한다. 우주 속에 있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모든 사물들의 중심에 아트만이 있다.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주인이다. 마치 수레의 살들이 테와 축에 의해 결합되듯이, 모든 존재들, 모든 생명들, 모든 신들과 세계들이 아트만에 의해 통일된다.
미묘한 본질이며, 만물이 그 안에 존재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아트만이다. 그리고 오, 스베타게뚜여,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는 무형상이다. 무상의 한 가운데서 그는 영원히 머무른다. 무소부재하고 지극히 높은 것이 아트만이다. 자신의 본성을 아는 현자는 모든 슬픔을 초월한다.
아드바이타의 개념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의 실체, 즉 불변의 실재이며, 이에 대해 변화의 세계는 다만 이름과 형태 nama-rupa를 통한 현현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 아트만은 모든 존재 가운데 있는 영구적이고, 고요한 증자 witness이며, 모든 곳에 편재하는 순수정신이다.
더욱이 아트만이나 브라흐만 모두가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것이므로 말로 표현될 수 없고, 오직 직관으로 체험되어질 뿐이다. 양자 모두 불생, 불변, 영원하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내적 세계의 기저에 놓인 아트만과 외적 세계의 기반인 브라흐만은 서로 다른 두 실재인가? 만일 그렇다면 아트만과 브라흐만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답변은 현자들의 위대한 통찰을 나타낸다. 외적 세계의 기저에 놓인 불변의 실재인 브라흐만은 비록 무한하고 영원하지만 영성 spirituality을 결하고 있으며, 반대로 내적 세계의 기저에 놓인 아트만은 비록 영적이지만, 무한성을 결하고 있다. 말하자면, 무한한 브라흐만은 순전히 물질적 실재이고, 아트만은 유한한 영적 실재라고 생각해도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리쉬들은 브라흐만과 아뜨만을 동일화함으로써 일격에 아뜨만을 무한한 정신으로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동일화함으로써 일격에 아트만을 무한한 정신으로 브라흐만을 정신적 무한자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서로 다른 두 실재가 아니라, 외적이거나 내적이거나 변화하는 현상계의 기저에 놓인 변하지 않는 단일실재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우빠니샤드적 예지의 핵심인
Tat tvam asi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Aham Brahma asmi (나는 브라흐만이다)
Ayam Atma Brahma (이 아뜨만이 곧 브라흐만이다)
Prajnanam Brahma (순수의식이 곧 브라흐만이다)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은 또한 바깥에도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은 또한 내면에도 있다. 내면에 있는 것과 외부에 있는 것을 다르게 인식하는 자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한없이 계속된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인식하며, 그 영광이 우주에 현현된 아트만은 바로 브라흐만의 도시인 마음의 신전 속에 살고 있다.
즉, 그들은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두 측면이다. 브라흐만은 이름 nama과 형태 rupa를 넘어선 것이다. 브라흐만은 창조주, 혹은 신으로 생각되어선 안된다. 브라흐만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것 Tat이다.
지식과 자유
우파니샤드는 낮은 지식 aparavidya과 높은 지식 paravidya로 구분한다. 전자는 감각과 사고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하고 무상한, 유한적 대상계에 제한된 것이다. 낮은 지식으로는 베다(Rig, Sama, Yajur, Atharva)와 음성학, 제의, 문법, 어원학, 운율학, 천문학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한편 높은 지식이란 불변의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의해 감각을 넘어서고 원인이 없으며 규정지어질 수 없고, 눈도, 귀도, 손도, 발도 없으며, 무소부재하며, 가장 미묘한 것보다도 더 미묘하며, 영원하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 현자에게 완전히 드러난다. 높은 지식은 비지각적, 비개념적이며, 직관적이다. 그것은 직접적이며, 감관과 사고를 가라앉힌 사람에게만 달성된다.
더욱이 높은 지식은 객관적인 것도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주체, 대상, 인식행위라는 경험적 인식의 세 범주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나 제사의 수행, 찬송가나 주문의 음송으로는 높은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경전의 학습이나 사고력의 훈련이나 학식을 통해서도 아트만은 인식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연모하는 자에게 그는 알려진다. 실로 그에게 아트만은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에겐 아트만에 대해 들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그것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 대해 말하는 자는 훌륭하다. 그에 대해 배운 자는 슬기롭다. 좋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축복받은 자이다.
아트만의 진리는 무지한 자에 의해 가르쳐질 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견해는 지혜에 근거하지 않는 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미묘한 것보다 더욱 미묘한 것이 이 아트만이며, 모든 논리를 넘어선 것이다.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하나임을 아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헛된 이론을 버리고 진리에 이른다.
말은 그를 드러낼 수 없다. 사고는 그에게 이를 수 없다. 눈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를 진실로 아는 현인의 가르침 외에 어찌 그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비길 바 없는 활과 봉헌의 날카로운 화살을 우파니샤드에 고정시키라. 집중된 마음과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으로 화살을 당겨 불멸의 브라흐만이라는 과녁을 맞추어라. 옴이 활이고 화살이 개별적 존재이며, 브라흐만이 과녁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표적을 잡으라. 마치 화살이 과녁과 결합하듯이 그대 자신을 그 안에서 잃으라. 그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마음과 모든 감관이 함께 얽혀 있다. 오직 아트만만을 인식하라. 잡담을 버리라. 그는 불사의 다리이다. 수레의 살처럼 신경이 만나는 그 곳, 마음의 연꽃속에 그는 머물고 있다. 그를 '옴'으로 관조하라. 그대는 어둠의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있으리라.
아트만은 나아가 세계의 근원이며 진리의 참모습인 브라만의 개별적인 표현이다. 웃달라카는 그의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한줌의 흙덩이를 알면 그 흙으로 만든 모든 것을 안다.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중 흙만이 참 존재이다.”
마야 Maya
마야는 브라흐만의 힘으로서, 그에 의해 브라흐만이 스스로를 현상적 세계로 현현시킨다. 그것은 브라흐만 자체와 공존하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나 이 말을 브라흐만과 마야라는 두 가지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왜냐하면, 마야는 브라흐만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현상계를 마야라고 지칭하며, 또 마야를 환영 illusion이나 비실재로 번역함으로써 아드와이따 베단따가 현상계를 환상이나 비실재로 주장한다고 말한다. 아드와이따의 마야 개념에 대한 그러한 해석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드와이따 베단따는 현상계와 그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하는 것은 다만 그 궁극성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드와이따 베단따에 있어서 실재란, 그 자체 외의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브라흐만만이 실재이며, 현상계는 브라흐만에 의존하므로 궁극적이 아니다.
그러한 비궁극적인 존재를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는 '실재도 비실재도, 그리고 양자 모두도 아닌 것'으로 기술한다. 즉,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도, 전적으로 비실재적, 환상적인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의 그 유명한 새끼줄-뱀의 비유와, 그리고 순수한 착각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착각은 실재에 바탕하고 있다는 통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베다와 베단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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