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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윤 교수 저 <별> | 육사 국문학과 이기윤(육사 33기) 교수는 지난 2006년 육사 개교 60주년을 맞아 육사 및 육사 출신 장교들의 발자취를 담은 <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60년>(북@북스 펴냄)을 출간했다. 지금의 육사는 미군정 시절인 1946년 5월1일 태릉에서 창설된 ‘조선 경비사관학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조선 경비사관학교는 1948년 9월5일 현재의 ‘육군사관학교’로 개명됐고, 한국전쟁으로 잠시 휴교했다가 1951년 10월31일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정규사관학교로 다시 문을 연 후 1954년 6월23일 현재의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를 잡았다. 육사는 일명 ‘화랑대’로도 불린다.
초창기 육사에는 광복군 출신보다는 박정희, 정일권 같은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 장교들이 대거 입교해 장교로 임관되었는데 이는 그후 우리 국군의 정체성 혼란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아닌 미군정 시절의 군사영어학교나 조선경비사관학교 출신자들로부터 잡으면서 정통성 훼손 및 역사왜곡에 적잖은 폐해를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책의 저자인 이기윤 교수는 육사의 역사를 ‘60년’으로 보지 않고 ‘110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교수는 육사의 뿌리를 조선경비사관학교가 아닌, 1896년 1월 창설된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찾았다. 그는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는데, 이런 연유로 이 책 출간을 앞두고 육사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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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문 |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이 교수는 그간 육사 내부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논쟁적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우선 1960년 ‘4.19혁명’ 당시 육사 안에서는 생도들이 국민의 가슴에 총을 쏘는 일을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 때 생도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놓고도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5.16쿠데타 당시 육사 장교단과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인 것에 대해 “그들의 자발적 의사로 보기는 힘들며 5.16에 참여한 박창암 대령과 육사 11기생인 전두환 대위 등의 회유와 설득에 의한 것”이라며 “그렇지 않다면 학교 지휘부 핵심요인인 교장 강영훈 중장과 생도대장 김익권 준장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책 출간 후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육사는 국가의 정예장교 양성의 산실 역할을 해왔고 이렇게 양성된 장교들은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쳐왔지만 군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된 5.16, 12.12, 5공화국 등은 오욕(汚辱)이었다”며 “생도들이 이 같은 과거를 잘 알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특히 “장교는 공인 중의 공인이고 국민의 공복 중의 공복”이라며 “이 때문에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부족하면 국민의 공복으로서 그 도리를 다할 수 없다”며 이 책을 발간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우리가 그간 알아왔던 육사 교수로서는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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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61.5.19) |
앞서 이 교수가 언급한대로 육사 생도들은 박정희 일파의 5.16 군사쿠데타에 대해 격론 끝에 결국 지지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쿠데타 발발 3일만인 5월 18일 오전 서울시내에서 생도대와 교수단이 합동으로 지지 행진을 벌였다. 이 일에 전두환이 나서서 생도들을 회유했다고 한다.육사 생도들의 5.16 지지행진 당일의 풍경을 이튿날짜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군사혁명 사흘만인 18일 상오 서울 교외 태릉에 자리잡고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와 장병들은 종로 세종로 태평로 등 수도의 심장부를 꿰뚫고 보무당당히 시가행진을 하면서 5.16군사혁명을 지지 성원하였다. 이날 상오 9시경 동대문에 집결한 이들은 혁명군의 선봉부대인 공수특전단 용사들의 선도에 따라 시가를 행진, 연도에 모여든 수만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행진 도중 육사생 대표는 마이크를 통해 “군사혁명이 어떤 권력을 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기성 정치인을 불신하고 도탄에 빠져 해매는 민생을 건져내기 위한” 우국 장병들의 의거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지지 성원하도록 호소하였다. 이같은 결의문과 국민에게 보내는 격문은 모두 우리말과 영어로 되풀이 되었으며 행진대열은 남대문에서 코스를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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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생도 대표가 '5.16 지지' 성명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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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생도들이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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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행진을 마친 육사생도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집결한 모습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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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행진을 마친 육사생도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집결한 모습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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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쿠데타 주동자인 박정희(왼쪽) 소장이 생도들의 인사에 대해 답례를 하고 있다 | 대구공고 졸업 1951년 12월 ‘4년제’ 첫 기수인 육사 11기생으로 입학한 전두환은 1955년 소위로 임관해 25사단 소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듬해 미국 코트베닝의 특수전 교육기관에서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와 낙하산 강하훈련을 받고 그해 7월 귀국했다. 5.16이 나던 그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ROTC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후배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지지행진을 회유, 촉구했다.
5·16 쿠데타 세력들은 육사를 장악하기 위해 오치성 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차지철 대위 등 3인을 육사에 파견해 쿠데타 지지를 위해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이 거절하였다. 당시 육사 교장으로 있던 강영훈 장군이 이를 막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같은 사실을 전두환은 상부에 밀고해 강영훈은 구금되었고 또 그길로 옷을 벗어야만 했다. 반대로 전두환은 쿠데타 세력의 지원 하에 육사를 장악하였다.
이는 일반시민들에게 5.16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일은 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어 육군 대위 신분으로 당시 최고의 실세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 육군참모총장 부관으로 권력 실세들과 근접거리에서 근무하였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 제1공수 특전단장을 거쳐 1973년 준장으로 승진해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를 지냈으며, 1977년 소장으로 승진해 제1사단장을 거친 후 1979년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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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 특히 그는 현역 시절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로 활동하면서 자기세력을 비밀리에 키워왔고, 1979년 박정희가 10.26사건으로 몰락을 고하자 그 세력들을 배경으로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그는 5.16 때는 쿠데타에 가담했고, 12.12 때는 쿠데타를 주도했다. 그는 군인으로 살면서 두 차례에 걸쳐 군부의 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치군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사반란과 내란죄를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은 전두환이 단지 육사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군의 간성(干城)을 키워내는 육사 생도들의 사열을 받아 논란이 일고 있다. 육사가 제대로 된 역사관, 국가관을 가졌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쿠데타 주범을 육사 행사의 주빈으로 초대해 마치 육사 생도들에게 쿠데타를 가르치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기획했는지 밝혀내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육사 생도들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 같은 선배는 육사생도들의 자랑이 아니라 수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군대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고 하지만 옳지 않은 명령은 거부할 줄도 알아야 한다. 독재자 이승만의 군대동원을 거부했던 이종찬 장군 같은 ‘참장군’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5.16쿠데타 당시 처음엔 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했던 그같은 기백을 우리 육사생도들은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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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28 서울수복 및 국군의 날 행사 때 세종로에서 시가행진 중인 육사생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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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젓같이 생겼네
그것으로 박정희 권력에 줄을 댄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