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에게 있어야 할 정체성
본문 : 요한일서 3장 1-6절
『예전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던 장로님 한 분의 간증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선 해마다 신입생을 대상으로 기독교인을 조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리엔테이션 현장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하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믿는 학생들이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손을 든다고 합니다. 마치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신감이 없더랍니다. 나중에 보면, 손을 안 드는 학생도 상당히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사람 손들어 보라”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주저 없이 번쩍 손을 든답니다. 아주 당당하게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님이 하는 말이 “왜 예수 믿는 것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할까?” 한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들이 자신 있게 손을 들지 못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지? 예수를 믿는 자신의 존재는 어떠한지?’ 신앙의 정체성을 몰랐기에 자존감마저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있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혹시라도 가진 것이 없다고, 또는 배운 것이 없다고 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신있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다 같이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라구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 눈치나 보며, 기 죽어 살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옆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시길 바랍니다. “집사님! 내가 누구인지 아세요? 나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나 하나님의 자녀라구요.” 옆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데 놀라지도 않네요. 반응을 보여야지요. 좀 놀라는 표정으로 “아.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집사님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왜냐? 하나님의 걸작품이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말씀은 당시 믿음의 박해와 이단의 유혹, 또한 삶 속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신앙의 정체성으로 흔들리고 있는 각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사도요한의 편지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너희가 누구인지? 어떠한 존재인지? 바로 알아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왜냐? 당시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교회를 다니는지?’ 알았더라면, 결코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교회를 다니긴 다니지만, 신앙의 정체성이 없어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인지? 왜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목표가 뚜렷한 것’을 말합니다. 하여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1.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대기업 회장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친구와 식사하기 위해 나왔는데, 깜빡 잊고 지갑을 두고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무개야. 내가 깜빡 잊고 지갑을 두고 나왔는데, 오늘은 네가 밥값을 내라.” 자신있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돈이 없다고 해서 창피함을 느끼거나 주눅 들지도 않습니다. 왜입니까? 대기업 회장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더구나 지갑에 돈이 없다면 말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안합니다. “지금 지갑에 돈이 없는데, 식사값을 내야 한다면 어떡하지?”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단 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존재에 대한 자존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냐에 따라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있는 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당당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나 떳떳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 보십시오. 오늘 본문 1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여기서 ‘어떠한 사랑’은 원어로 ‘포타펜’이라고 하는데,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말합니다. 따라서 1절 말씀을 해석을 하면 이런 말입니다. “너희가 왜 세상 사람들에 대해 자신감이 없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야.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내어주시고, 너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어. 따라서 너희는 대단한 존재야. 알어?” 이런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대단한 존재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사람들과 크게 차이가 없고, 좀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대기업 회장님의 아들 이야기를 예를 들었는데, 오늘 여러분은 대기업 회장님보다도 더 높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대기업 회장님의 아들은 지갑이 없어도 당당합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주눅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에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야?”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신학적으로 좀 어려운 말씀인데, 쉽게 말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비록 좀 별 볼일이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진짜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어도, 또 크게 출세하지 못했어도, 늙고 몸이 좀 아프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과 이단의 유혹으로, 또한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런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모습이 부끄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선 여전히 저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 좀 못나도, 좀 못 살고 가난해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하여 오늘 여러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자녀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와 ‘범죄하는 자’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와 ‘범죄하는 자’로 나눠질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 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거하다’란 말은 ‘함께 하다. 동행하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고, 반대로 아무리 교회를 다닐지라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주특기가 무전병이었습니다. 사단 연합훈련을 나갔는데, 저는 박스카 무전병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밀폐가 된 차 안에서 혼자서 있었는데, 그런데 고참이 자기와 바꾸자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사단장 1호차 무전병입니다. ‘훈련 내내 사단장과 함께 있어야 하기에 담배도 피지 못하고, 편히 있지도 못하고 죽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스카에 있으면 누가 볼 사람도 없어 편할 것이라 생각을 하고, 저와 바꾸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때요? 담배도 안 펴요. 사단장과 있어도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꿨지요. 그런데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사단장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니 먹을 것도 많았어요. 또 중간마다 ‘힘들 텐데 쉬라’고 해서 쉈어요. 놀라운 것은 훈련이 끝나고, 사단장이 특별히 저에게 휴가증을 주어 휴가를 갔다왔다는 사실입니다.』 자 여러분! 제 고참도 얼마든지 많은 것을 먹을 수 있었고, 또 쉬기도 하고, 휴가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요? 선택을 잘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나오는 두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와 ‘거하지 않는 자’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과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의 결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 제 고참이 왜 사단장의 차를 타지 않고, 제가 타는 박스카를 타려고 했을까요? 사단장의 차를 타면 자기 멋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스카를 타면 어때요? 누가 보는 사람도 없으니, 잠도 잘 수 있고, 담배도 피고, 적당히 요령을 피며 자기 멋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가 왜 사단장의 차 이야기를 하였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제 고참과 같이 여러분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으십니까? 분명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긴 살아야 하는데, 혹여 부담이 될 것 같이 멀리 하시지는 않으신지요? 혹여 교회도 적당한 거리에 두고, 신앙생활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신지요?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기억에 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시는 것입니다. 당황한 집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왜 따라오세요? 예수님께서 저를 따라 오시면, 제가 심히 부담스럽다는 말에요. 전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자유롭고 싶어요! 담배도 피워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하고, 오늘 저녁에는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따라오면 어떻게 해요. 예수님은 그냥 교회에 계세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집사님이 예수님이 따라오는 것을 싫어한 이유가 뭐에요? 자기 마음 대로 살고 싶은데, 예수님이 계시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제 고참과 같이 편하고, 자기 멋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에요? 범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나쁜 생각이 들던가요? 최소한 예배 시간만큼은 나쁘고 잘못된 것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밖으로 가면 어때요? 유혹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늘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약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로 죄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을지라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죄에 넘어지고 범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날마다 ‘그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조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안다고 해도 자랑을 하는데-, 우리는 누구와 동행을 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에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놀랍지 않습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를 따라 하겠습니다. “그래 맞아.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므로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있는 집 사람들은, 배운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자기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망신 당하는 짓을 하질 않습니다. 저들만의 자존심이요, 품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하여 이제 당당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비록 없어도, 배운 것이 없어도, 크게 성공하지 못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인식이 있을 때, 6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범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가 죄를 짓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데,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만을 위해 살며, 내 생각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하여 오늘 여러분 모두 내가 누구인가?하는 분명한 신앙의 정체성을 알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할 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 말을 이해하려면, 세 문장으로 띄워서 해석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긴 하지만, 아직 육신의 몸과 이 땅에서 살기에 죄를 짓고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마지막 때가 되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리를 하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 이 세상은 죄악된 세상이기에 우리들이 하나님 자녀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장차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이르게 되면, 그때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써 주님의 영광스러움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이미’(already)와 ‘아직’(yet)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의인’이지만, ‘아직- 완전한 의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좀 어렵지요? 그러나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좀 부족할지라도 장차 주님이 오실 때는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주님과 함께 거하며, 영화스러움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 세 번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날마다 깨끗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아하기 위해서’입니다.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화로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함 인 줄’ 믿습니다. 이런 목적, 이런 소망이 있었기에 저들이 그 모진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 2절에 “그가 나타나시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차 주님이 재림하셨을 때,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주님이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도 깨끗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에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요한계시록 3장 21절 말씀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당당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장차 주님이 앉는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자 여러분! 춘향전을 아시지요? 기생 월매와 성참판 사이에서 춘향이가 태어났습니다. 춘향이가 자랄수록 점점 예뻐졌고, 시와 그림에 능하여 온 동네사람들이 칭찬하였습니다. 마침 사또의 자제 이몽룡이 광한루에 놀러 갔다가 그네를 타는 춘향을 만나 연애가 시작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아버지가 한양으로 발령나는 바람에 ‘과거에 급제하여 오겠다’ 약속을 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변학도 사또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고 하였습니다. 춘향은 “이미 지아비가 있으니, 수청을 들 수 없다”고 거절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변 사또가 수도 없이 비단과 돈과 맛있는 음식으로 유혹을 하고, 옥에 가두기도 하고, 매를 때리기도 하지만, 이몽룡을 향한 마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변 사또가 춘향이를 처형하기로 한 날에 암행어사가 출두를 합니다. 변 사또는 옥에 갇히고, 춘향이는 풀려납니다. 이몽룡이 과거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여러분! 만약에 춘향이가 변 사또의 유혹과 겁박에 넘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는 이몽룡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이몽룡이 왔을 때 그 얼굴을 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이 성춘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 누굴 기다려야 하나요? 다시 오실 신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유혹을 한다고 넘어지고, 누가 핍박을 한다고 겁을 내고 믿음을 저버린다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 사람이 좋다고 주님을 배신한다면, 나중에 주님을 어떤 얼굴로 대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때론 힘들고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짓기도 하고, 넘어져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된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이 여러분의 신랑이 되십니다. 곧 여러분을 데리러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장차 하늘나라에서 호화스러운 혼인잔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렙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여, 주님이 오셨을 때 주님과 함께 영화스러운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똑같은 환란과 고난을 당해도 요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묵묵히 그 고난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소아시아에 일곱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성도들이었지만 환난을 당했을 때,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을 받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똑같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할 준비를 한 자와 못 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이길 원하십니까? 세상 살기도 힘들고, 믿음생활하시기도 힘드시죠?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능히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주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장차 주님의 신부가 되어 영광스런 혼인잔치에 참여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큰 소리로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신앙생활 잘하여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어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