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한바퀴 109 - 인천 초한지 벽화
황제 자리를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만화가. 대담한 필치의 그림과 현실을 풍자한 독특한 재해석과 연 출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대표작 고우영 삼국지처럼 동양의 고전 소설을 만화로 그 려내었습니다. 일본에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있다면, 한국에는 고우영이 있다고 해 도 될 정도로 동양고전 만화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초한지의 내용이 타일벽화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일간스포츠에 고우영씨의 초한지만화가 인기가 있어 일간스포츠신문 판매수가 엄청 뛰었다고 합니다.
1938년(호적상으로는 1939년) 만주국 봉천성 본계호(현 중화인민공화국 랴 오닝성 번시시 시후구)에서 일제강점기 때 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고종률(高鍾律)과 어머니 김신숙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유년기인 일제강점기 당시, 아버지가 경찰 간부였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습니다. 그 시절에 집에 자가용이 있고 큰 사냥개를 키웠을 정도라고 고우영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8.15 광복 후 구사일생으로 월남했습니다.
월남 당시,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아버지를 크게 반겼지만 양심 때문인지 경찰 간부직을 포기하고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고우영은 한중수교 이후 1990년대 중국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만주의 고향이었던 동네를 겨우 찾아 가 봤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어릴 때 다니던 학교나 옛 집이 모 두 사라지는 등 옛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초한지를 만화로 그린 고우영은 1955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만화계에 데뷔. 필명 은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인 동성고등학교에서 따왔습니다. 가끔 드물게 '추동성'이 본명이며 '고우영'이 필명이라는 식으로 서술이 된 자료가 있는데 틀린 서술입니다.
당시 만화방 만화(대본소)가 주류가 되었던 만화 시장에서 "쥐돌이", "공주 애찌루" 등을 그렸고, 후에 전업 만화가로 데뷔하면서 심장마비로 일찍 요절한 형 고일영이 그리던 "짱구박사"를 이어받아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합동출판 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고, "교과서 같은 만화"나 그린다는 이유로 고 선생님 의 아트를 몰라보고업계에서 쫓겨난 뒤에 약동이 시리즈의 그림작가를 맡다 가 스토리 작가인 방영진의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이 연중되어 연재처를 찾아 나서는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197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임꺽정이 연재되었는데 이 작품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로서의 행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 연재에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의 결정이 주효했었습니다
당시 신문에서는 단컷만화나 4컷 만화가 주로 연재되었고 그 때문에 신문만화 는 무조건 단컷 아니면 4컷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 데 장기영 사장이 일본이나 구미 신문에서 연재되던 극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 다는 소식을 듣고 일간스포츠에 이와 비슷한 형식의 만화를 연재하라고 지시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간스포츠 편집국은 이에 대해 매우 반발했고, 이에 장기 영 회장이 그 편집진을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고, 김수남 당시 소년 한국 주간이 편집진을 다독여 결국 만화를 연재함으로써 수습이 되었습니다. 그 인연 덕분이었 는지 나중에 고우영은 한국일보에서 <한국만평>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호지,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등의 고전 중국 관련 역사물과 가루지기 전, 일지매 등 한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재정립한 만화 등을 그리며 연 거푸 히트를 쳤고,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1980년대 들어 그는 당대 유행하던 프로덕션식 제작공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실용학습만화라 든가 삽화 등 만화 외적인 활동에 몰두하다 보니 장편에서 호흡이 잘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서유기>가 대표적인 예인데, 삼장법사의 탄생에 인간 드라마를 할애해 최선을 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줄거리 전개에 급급해 동력이 떨어졌습니다. 다만 이보다 짧은 <21세기 아리랑 놀부면>, <가루지기> 등 한 국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이 더 호평을 받았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을 여행하고 쓴 미국만유기, 84년도에 유럽을 여행하고 쓴 유럽만유기, 1995년도에 중국을 여행하고 쓴 중국만유기 3권 모두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 때 연재중이던 초한지는 작가가 미리 완결까지 그리고 떠나는 바람에 그림이 초기에 비해서는 퀄리티가 떨어집니다. 당시에는 이메일 이 없어서 팩스를 주로 쓰던 시절이니 어쩔수 없어도 본인도 무척 아쉬워하던 이야기. 이 작품은 고우영의 저작 중에 유일하게 만화가 아닌 일반 서적으로 출 판되었으며, 사후(2007년 추모 2주기)에 '고우영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라는 제목으로 복간되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 눈이 나뻐지더니만 한쪽 눈을 볼 수 없는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상태로도 안경을 쓰고 작품을 연재했고, 1994년에 십팔사략을 내며 대작 사극작가로 돌아왔습니다. 이 작품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청소년 추천 도서가 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1988년부터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4년간 지냈으며, 1996년부터 2년간 한국일보에 <한국만평>을 연재했습니다
고우영이 정립한 중국사 인물들의 이미지가 꽤나 강렬하게 한국 만화에 남았습니다. 비극적인 한신의 삶, 쪼다같은 유방과 유비, 새로운 해석의 제갈량 등. 제갈 량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고평가 받다보니 고우영의 해석같은 경우 는 없다시피 하지만 인물들의 재해석에 큰 여지를 남겼고, 지금 널리 알려진 미 청년 한신도 사실상 고우영 초한지에 의해 남겨진 이미지입니다. 쪼다지만 속이 큰 유방과 유비 역시 최훈의 삼국전투기의 유비와 매우 비슷한 포지션. 여러모 로 한국 만화에 큰 영향과 족적을 남겼습니다
초한지는 진나라 말기부터 전한 초기까지 중원의 정세를 풀어낸 연의 소설. 명나라 때 견위가 쓴 <서한연의> 가 그 원본이라고 합니다
<삼국지연의> 나 <수호전> 등 중국사대기서와 달리 독립된 작품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중에 <초한지> 라는 제목이 붙은 책들은 제목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작가들이 쓴 별개의 작품으로, 사마천의 <사기> 를 뼈대로 해서 진한교 체기의 여러 이야기들을 모아 제각기 살을 붙인 것입니다. <초한지> 라는 명칭 자체도 사실상 고우영 화백이 최초로 소개했습니다.기 물론 서로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줄거리는 모두 비슷합니다
가장 일반화된 줄거리는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 억압받던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초나라 귀족이던 항량과 조카 항우가 난세를 틈타 대두하고, 한켠에 선 유방이 몸을 일으키며 세력을 불려 천하를 놓고 대립하다가 유방의 승리로 끝나는 내용입니다. 일부 번안가들은 창해공의 진시황 암살음모부터 시작하거나 여불위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마지막 부분도 토사구팽에서 벗어나서 오초7국 의 난과 한무제의 즉위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호전> 이나 <삼국지연의> 와 같이 전형적인 중국식 영웅상인 유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신은 무능하지만 인덕으로 주위에 유능한 사람이 몰린다 는 중국식 영웅의 원조가 바로 한고조 유방입니다. 그 외에도 한삼걸의 포스, 항 우의 먼치킨스러운 무력과 행적 그리고 비극적인 몰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다다익선(多多益善), 국사무쌍(國士無雙), 토사구팽(兎死狗烹), 배수진(背水陣), 사면초가(四面楚歌), 금의환향(金衣還鄕), 금의야행(金衣夜行)등 친숙한 숙어들이 초한지에서 나옵니다.
1982년 9월 장가계는 중국 제1호 국가 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자연 유산으로 등록된 곳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장가계 라는 지명은 장 씨들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장가계'라 는 명칭을 얻게 된 데는 한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한지에 등장하는 항우와 유방, 그리고 유방을 도와 천하를 호령하던 유방의 책사인 '장자방'으로 불려온 장량과 깊은 관계있습니다
유방과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킵니다. 유 일컫던 항우마저 제거하고 한나라 황제 에 등극합니다. 이렇게 황제자리에 오른 유방이지만 개국 공신들의 세력이 커지 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들을 견제한 유방은 여러 공신들에게 음모를 씌워 차례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책사가 바로 한신과 장량이다 장량은 한나라를 건국한 뛰어난 책략가 이며 지혜의 주머니로 널이 알려진 인물 입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에서 쓰던 사 냥개를 잡아 국을 끓인다."는 토사구팽 란 말 한신에게 남기고 장량은 종적을 감춥니다. 개국공신의 화려 한 권력과 영화를 스스로 버리고 은둔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은 자신 의 공적을 과신한 나머지 유방의 옆에 남아 있다가 유방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한신은 장량이 일러 주었던 토사구 팽 란 말을 되뇌면서 최후 를 맞이합니다.
유방에게 병을 핑계대고 물러나온 장량 은 세상의 눈을 피해토가족(土家族)이 살고 있는 험준한 천문산 깊은 골로 들어옵니다. 이곳에 은거한 장량은 미개한 부족이었던 토가족에게 글도 가르치고, 농법과 세상을 살아가는 문물도 알려줍니다. 공자의 대학과 중용의 앞과 뒤의 글자를 따서'대용'이라고 토가족이 사는 마을의 이름을 정해 주었으나 토가족들 은 모두 장량을 숭배하여 장씨 성으로 개명하여 장 씨 집성촌인 장가계가 탄생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량은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장량을 찾아 내고자 한나라의 군사들이 이곳 장가계 에 들이닥칩니다. 그러나 장량은 토가족과 일치단결하여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한나라의 군사를 물리칩니다. 이러한 미래 를 예측한 장량은 수많은 가묘를 설치함 으로서 죽어서도 화를 피해갔다고 합니다. 그 때 화를 피한 무덤이 이곳 장가계 금 편계곡에 남아있습니다.
공자(孔子)상 앞에서
첫댓글 덕분에 항상 좋은 구경한다. 땡큐~~
탱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