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박래여
아침에 쇠고기 무국을 끓였다. 농부는 혼자 먼저 먹고 일터로 떠났다. 손님 있을 때는 피하기 선수인 농부는 일 핑계를 대고 나간다. 나는 딸과 처녀들이 깨기를 기다리며 윌버 스미스의『나일강의 여신』을 읽는다. 두 권 째 잡았지만 딸과 손님들 때문에 독서는 지지부진하다. 이집트를 형상화 한 소설에 매료된 지 오래다. 사막과 미라, 피라미드, 모래 속에 묻힌 거대도시, 왕들의 계곡은 가 본 적도 없지만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일단 잘 읽힌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처녀들 목소리가 적막을 깬다. 우리 집이 편하다는 처녀들, 밝은 목소리가 듣기 좋다. 아침은 건너뛴다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간단하게 아침상을 봤다. 밥 먹어라.
아침밥은 안 먹어도 된다던 처녀들이 밥상 앞에 앉았다. 맛있다. 연발하며 밥을 먹는다. 밥 먹고 차 마시고 배낭 챙기고 출발 준비를 한다. 출발하겠다고 현관을 나설 때는 점심때가 다 됐다.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가야지요. 올 때 됐는데. 점심땐데 국수라도 먹고 갈래? 아니요. 아점으로 먹은 밥이 아직 소화가 안 됐어요. 전화 해 볼게. 농부랑 통화로 작별 인사를 했다. 운전조심하고, 가다가 배고프면 뭐든 사 먹기. 오만 원 짜리 두 장을 줬다. 세 사람이 점심 한 끼와 기름 값은 될 거다. 사나흘 잘 쉬고 잘 먹고 여비까지 챙겨주는 민박집은 없겠지.
딸만 남고 세 사람은 떠났다. 조용하다. 손 전화를 열었다. 2024, 5. 22. 신경림 시인이 돌아가셨단다. 오늘이 발인이란다. 선생님을 뵌 지 까마득하다. 삼사십 대였지 싶다. 밀양에서 뵈었다. 문학행사에 참여하러 오셨었다. 청상 시인이시구나. 생각했었다. 다정다감하고 조용한 인품이셨다. 시인과 소설가는 성격차이가 난다. 시인은 풀잎에 맺힌 이슬만 먹을 것 같이 맑은 존재로 보인다면 소설가는 산전수전 다 겪은 호랑가시열매처럼 억세고 강한 느낌이 든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가슴에 품은 것을 풀어내기 때문일까.
문학의 별 하나 또 졌다. 이승에 태어나고 떠나가는 것은 정해진 순리지만 죽음은 늘 가볍지 않다. 나와 연관도 없는 죽음이라도 애석하고 안타까운데. 생전에 두어 번 뵌 적 있는 문단의 큰 어르신이시니 어찌 가벼울 수 있겠나. 문상은 못 가지만 선생님의 명복을 빌어드렸다. ‘선생님, 저승에서도 시의 꽃 피우세요. 농무와 묵계장터, 가난한 사랑의 노래 등을 외우던 젊은 날이 있습니다. 그곳은 영혼들이 사는 세상이라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 곳이 아닐는지요. 이승에서 선생님을 뵐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분위기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편안하게 가십시오.’ 손님이 떠난 자리에 가라앉은 숲을 보며 신경림 선생님을 추모했다.
우리 집에 왔던 처녀들은 언젠가 또 올 수도 있고, 와서 쉬어갈 수도 있지만 먼 길 떠나신 신경림 선생님은 이제 작품으로 밖에 뵐 수 없게 된 것이 다를 뿐이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든가. 문학의 큰 별 하나 졌지만 시인이란 그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승에 왔던 사람은 모두 떠난다. 무엇을 남기든 남기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내가 떠난 자리에 남겨 둘 것이나 있는가. 떠남은 허전하고 쓸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