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父がしたことなのに、私がインタビューを受けるのは恥ずかしいですね。祖父が生きていたら、人として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警察官として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ことだけというはずです」。
29日、神奈川県横浜市の閑静な住宅街で「大川」と書かれた表札を見つけてベルを押した。記者に会ったユタカさん(71)はインタビューの間、照れくさそうにしていた。ユタカさんは、関東大震災当時に朝鮮人300人の命を救った鶴見警察署長の大川常吉(1877~1940)の孫だ。
ユタカさんは1日、在日本大韓民国民団東京地方本部主催によって東京国際フォーラムで開かれる「第100周年韓国人受難者追悼式」に大川署長の遺族資格で招待された。
「当時のことについて知っていることはない」と言っていたユタカさんだが、向かいの部屋から1200ページを超える本を一冊持ってきた。神奈川県警察が大震災3年後に発刊した本には当時の状況を警察が収集してまとめた記録が含まれているが、ユタカさんの祖父が登場している部分には印がついていた。
◇神奈川警察の記録から見たその日
1923年9月1日午前11時58分に発生したマグニチュード(M)7.9の大震災は横浜を焦土化した。地震2日目、状況が悪化した。「朝鮮人が井戸に毒を入れた」というデマが一瞬のうちに広がった。日帝強占期当時、神奈川県には朝鮮人が集まって暮らしていた。急速に広がったデマを盲信した自警団が朝鮮人を無差別に攻撃し始めた。
当時46歳だった大川署長は鶴見警察署に朝鮮人を一人二人と保護し始めた。だが、デマが広がって部下の警察官さえ動揺した。大川署長は「朝鮮人はみな善良な良民」としながら説得したが容易ではなかった。動揺が続き、大川署長は朝鮮人を近くにあった寺の本堂に移動させ、彼らを守るために警察官30人余りを配置した。朝鮮人の数が増え続けると大川署長は再び警察署に彼らを移した。
大震災3日目である9月3日、1000人を超える集団が鶴見警察署を取り囲んだ。「警察署は朝鮮人保護所か、朝鮮人を出せ」という威嚇が続いた。一触即発の状況で大川署長は「朝鮮人に手をあげるならやってみろ。1人も渡すことはできない」と対抗した。「1人でも脱出すればどうするのか」という自警団の抗議に大川署長は「もし1人でも逃げる人がいたら割腹する」と約束した。結局自警団は帰り、大川署長がこうして救った朝鮮人は約300人に達した。
警察の記録の他にも当時の彼の行跡を追った記録がある。在日同胞作家の朴慶南(パク・ギョンナム)さんが大川署長の息子と目撃者を取材して1992年出版した本『ポッカリ月が出ましたら』だ。「不逞鮮人」を出せという自警団の脅迫があった9月3日、大川署長は「朝鮮人が毒を入れたという井戸水を持ってこい。私がまず飲む。異常があれば朝鮮人を渡す。異常がないなら彼らを私に任せろ」と一喝した。大川署長はなぜ朝鮮人をかばうのかという自警団の叱責に「どこの国の人でも人の命であることには変わりない。人の命を守ることが私の仕事だ」と答えた。
本を見せてくれたユタカさんは「当時朝鮮人を守ってほしいと議員にも要請したことがあるが、やはり祖父はなぜそのようなことをいうのかと言われたそうだ」として当時の状況を伝えた。
ユタカさんは「祖父は神奈川県で警察署4カ所に勤務した」と明らかにした。「警察なので町内には顔をよく知り交流のあった朝鮮人が多かっただろうし、人々を守ることが警察の仕事だと考えて守っただけだった」と淡々と話した。
関東大震災当時、朝鮮人300人を救った神奈川県鶴見警察署長の大川常吉が当時受け取った感謝状。漢文とハングルを混ぜて書いてある感謝状には韓国人の名前が一緒に書かれてある。キム・ヒョンイェ東京特派員
◇大川一族の家宝、写真に残されたその日
続いて「大川家の家宝」と言いながらビニールと紙ボックスで厳重に包まれていた手紙を取り出して見せてくれたものがあった。やや分厚い韓紙に書かれたハングルが目に飛び込んできた。
手紙は大川署長の保護で命を救われた朝鮮人が大震災5カ月後に送った感謝状だ。日本語ではない漢字とハングルを混ぜて書かれた手紙の末尾には8人の朝鮮人の名前が書かれていた。ユタカさんは「ハングルはよく分からないが漢字だけを見ても当時どんな気持ちで書いたのか伝ってくる」としながら「本当にありがたく思う」と話した。
大川署長の昔のアルバムを取り出して見せてくれた孫の手が止まった。ユタカさんが用心深く取り出して見せてくれたのは写真4枚。通りの至る所に、官公庁の前とみられる建物の前に無惨に虐殺された人々の死体が山のように無造作に積み上げられている。
当時の状況がどれくらい凄惨だったかを示す写真を大川一族はなぜ今まで保管しているのだろうか。ユタカさんは「戦争で当時記録がたくさん流失したが、祖父はこの写真を残して状況がこうだったということを証拠として、記録として残そうとしたようだ」と伝えた。
◇「祖父、当然の『人としての道理』を果たしただけ」
63歳で亡くなった大川署長の墓は横浜東漸寺にある。朝鮮人は故人を賛える碑を建てた。
関東大震災で6000人を超える朝鮮人が命を失った。ユタカさんは記者に「国籍が何であろうと人の命は大切だ」とし「祖父は何か特別なことをしたのではなく、当然しなければならない『人としての道理』を果たしたと考える」と話した。
할아버지가 한 일인데 제가 인터뷰를 하니 부끄럽네요.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경찰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일 겁니다.
29일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오카와라고 적힌 문패를 발견하고 벨을 눌렀다.기자를 만난 유타카 씨(71)는 인터뷰 내내 쑥스러워했다.유타카 씨는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300명의 목숨을 구한 쓰루미 경찰서장 오오카와 쓰네요시(18771940)의 손자다.
유타카 씨는 1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도쿄지방본부 주최로 도쿄국제포럼에서 열리는 제100주년 한국인 수난자 추모식에 오카와 서장 유족 자격으로 초청됐다.
당시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했던 유타카 씨는 맞은편 방에서 1200쪽이 넘는 책을 한 권 가져왔다.가나가와 현 경찰이 대지진 3년 뒤 발간한 책에는 당시 상황을 경찰이 수집해 정리한 기록이 담겨 있지만 유타카 양의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부분에는 표시가 돼 있었다.
◇가나가와 경찰 기록으로 본 그날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M) 7.9의 대지진은 요코하마를 초토화했다.지진 이틀째 상황이 악화됐다.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루머가 순식간에 퍼졌다.일제강점기 당시 가나가와 현에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았다.급속도로 퍼진 루머를 맹신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46세였던 오카와 서장은 쓰루미 경찰서에 조선인을 하나둘 보호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루머가 퍼지면서 부하 경찰관들마저 동요했다.대천 서장은 "조선인은 모두 선량한 양민"이라며 설득했지만 쉽지 않았다.동요가 계속되자 대천서장은 조선인들을 인근에 있던 절 본당으로 이동시키고 이들을 지키기 위해 경찰관 30여 명을 배치하였다.조선인의 수가 계속 늘어나자 대천서장은 다시 경찰서로 이들을 옮겼다.
대지진 사흘째인 9월 3일 1000명이 넘는 집단이 쓰루미경찰서를 에워쌌다."경찰서는 조선인 보호소냐, 조선인을 내보내라"는 위협이 이어졌다.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에게 손을 줄 테면 해봐라.한 명도 줄 수 없다고 맞섰다."한 명이라도 탈출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자경단의 항의에 오카와 서장은 "만약 한 명이라도 도망갈 사람이 있다면 할복하겠다"고 약속했다.결국 자경단은 돌아갔고, 오카와 서장이 이렇게 구한 조선인은 300여 명에 달했다.
경찰 기록 외에도 당시 그의 행적을 쫓은 기록이 있다.재일동포 작가 박경남 씨가 오카와 서장의 아들과 목격자를 취재해 1992년 펴낸 책 포카리 달이 뜨면이다.불령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협박이 있었던 9월 3일 대천서장은 조선인이 독을 넣었다는 우물물을 가져와라.내가 먼저 마실게.이상이 있으면 조선인을 넘긴다.이상이 없다면 그들을 나에게 맡기라고 일갈했다.오카와 서장은 왜 조선인을 두둔하느냐는 자경단의 질책에 어느 나라 사람이든 사람의 목숨임에는 변함이 없다.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내 일이라고 답했다.
책을 보여준 유타카씨는 "당시 조선인을 지켜달라고 의원들에게도 요청한 적이 있는데 역시 할아버지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하셨다고 한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유타카 씨는 "할아버지는 가나가와 현에서 경찰서 4곳에 근무했다"고 밝혔다."경찰이기 때문에 동네에는 얼굴을 잘 알고 교류가 있었던 조선인이 많았을 것이고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켰을 뿐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300명을 구한 가나가와현 쓰루미경찰서장 오오카와 쓰네요시가 당시 받은 감사장.한문과 한글을 섞어 쓴 감사장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다.
◇오가와 가문의 가보, 사진에 남은 그날
이어 "대천가의 가보"라면서 비닐과 종이박스로 엄중히 싸여 있던 편지를 꺼내 보여준 것이 있었다.다소 두꺼운 한지에 적힌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는 오카와 서장의 보호로 목숨을 건진 조선인이 대지진 5개월 만에 보낸 감사장이다.일본어가 아닌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쓴 편지 말미에는 8명의 조선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유타카씨는 "한글은 잘 모르지만 한자만 봐도 당시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전해진다"며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카와 서장의 옛 앨범을 꺼내 보여주던 손자의 손이 멈추었다.유타카 씨가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준 것은 사진 4장.거리 곳곳에 관공서 앞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무참히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보여주는 사진을 오카와 일족은 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을까.유타카 씨는 전쟁으로 당시 기록이 많이 유실됐는데 할아버지는 이 사진을 남기고 상황이 이랬다는 것을 증거로 기록으로 남기려 한 것 같다고 전했다.
◇"할아버지, 당연한 '사람의 도리' 다 했을 뿐"
63세의 나이로 사망한 오오카와 서장의 묘소는 요코하마 히가시점지에 있다.조선인들은 고인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간토 대지진으로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유타카 씨는 기자에게 국적이 무엇이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며 할아버지는 뭔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첫댓글 좋은자료 잘읽었습니다
주변의 조선인들이 얼마나 착하고선한..그런일을 할분들이 아니라는것을
같이 지내오며 보고 느꼈으니 더 열심히 그런좋은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공감댓글 감사합니다 ^^
참으로 인간적으로 휼륭하신 분이네요 ~
생명존중을 몸소 실천하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