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자유인 39달
○ "밥이 선생이다" 를 지은 황현산은 1945년 목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기욤 아폴리
네르를 중심으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번역비평학회를 창립,초대 회장을 맡았고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같은 학교 명예교수이다. 이 산문집은 한겨레신문과 국민일보에 실었던 칼럼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지난 30년
여년에 걸쳐 쓴 글로 맨 마지막 장엔 "삼가 노 전대통령의 유서를 읽는다"로 이런 내용이 있다. "고인은 순간마다 한 뜻을 위해 자신
의 온 몸을 내던졌던 사람답게 죽음 앞에서도 전적으로 죽음에 관해서만 말했다. 처절한 결단을 향해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던 고인
의 유서에는 짧은 문장과 비교적 긴 문장이 어울려 만드는 단호한 리듬과 처연한 속도감이 있다. 이 다감하고 열정적이었던 사람
의 절명사는 고결한 정신과 높은 집중력에 비롯하는 순결한 힘아래, 우리 시대의 어느시에서도 보기 드문 시적 전기장치를 감추고
있다. 고인의 믿었던 미래의 힘과 깊이가 그와 같다.
○ 3월1일 곡성에서 4~8대조를 모시는 시제가 있다. 전주에서 형님차로 9시 40분에 출발하여 곡성에서 시제를 모신후 나주 사촌형
병문안을 하고 광주로 이동하여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는데 30분 연착하여 4시간이 걸려 오후 7시에 도착한다. 전주에서 출발한 집
사람은 1시간을 기다리다 만나고 사돈 내외가 미리 도착한 일산 큰애집에 8시에 만난다. 강남에서 마두역까지 1시간에 주파하니 지
하철이 빠르긴 하다. 경주 사돈이 준비한 회에 저녁과 술을 먹고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
○ 3월2일 윤식의 연수원 입소가 10시에 있어 서두르는데 대강당에 보니 가족들이 1,2층 입추에 여지가 없이 빽빽하다. 점심은 구내
식당에서 먹어보는데 생각보다 잘나온다. 큰애와 며느리는 1시에 연수원에 입소하고 사돈내외와 청담동에 한복을 가봉하고 저녁
에는 사촌모임이 있는 사당동에 도착하여 6명이 나와 보쌈과 오리고기로 술잔을 나누는데 오랜만에 본 사촌들도 반갑다 진즉 술한
잔 대접했어야 하나 서울,인천에 살다보니 이제라도 다행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전주에 밤 12시에 도착하니 숨가쁜 1박2일이다.
○ 3월7일 장인장모님 제사가 구례에서 있는데 처남이 순창이모님 댁에 점심 먹자하여 가보니 밭에 퇴비뿌리는 작업을 하고 계셔 같
이 거든다. 밭이 상당히 커 심는 작물을 여쭤보니 감자, 고추 등 심으신단다. 점심은 삼겹살로 맛있게 먹고 출발하는데 광양 매화
마을을 들러보니 아직 이르며 몇나무 핀 매화꽃을 사진찍어 카톡에 올린다. 저녁에는 4집식구가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고 오랜만에
고스톱을 같이 친다. 이튿날은 칠불사와 쌍계사를 보고 아침 먹고 헤어지니 지리산 공기는 언제나 상쾌하다.
○ 3월11일 조합장 선거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실시되는데 남원 운봉과 전주농협이 관심이 간다. 운봉은 친구 매제가 출마하는데 무
투표 당선이니 축하전화를 미리 했고 전주는 친구가 상임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현 조합장이 당선되면 계속 근무 가능하나 조합장
이 바뀌면 그만 두는게 농협 생리다. 결과를 보니 6표차 당선이다. 조합원수가 4~5천명인데 6표차라니 그야말로 신승이다. 재검표
까지 갔다 뒤집혔다니 그럴만하다. 차점으로 떨어진 사람은 속이 오죽 할까? 하긴 어느 조합은 동점이 나와 연장자가 된 곳도 있다
니 할말은 없다.
○ 3월14일 영수친구 딸 혼사가 서울에서 있고 저녁에는 초등친구 모임이 뚝섬 인근에서 있다. 1시 예식과 5시 모임이라 시간이 비어
손자보려고 구리들를까 하니 집사람이 극구 말린다. 나만 좋지 며느리 간다하면 청소하랴 정신 없다고 하고 다음주 집사람 생일때
작은애가 차를 끌고 내려온다 하여 우리가 올라간다 하였으니 그때 보면 된다. 초등친구 모임에서는 식당하는 친구가 3명인데 장사
가 안되 불황이고 우스개 소리로 폭동 일어나지 않나 모른단다. 하긴 내가 봐도 되는곳만 되고 그렇지 않은 곳은 파리 날리나 보다.
○ 3월15일 스크린골프를 하고 저녁에는 회식이 있다. 매월1회 하는 회식장소도 이곳저곳을 전전하였으나 남원친구 여동생이 하는
식당으로 고정하여 만난다. 회원도 6명에서 1명을 보강하여 7명으로 하고 만나는 날짜도 매주 일요일 2시로 확정하여 못나올시 벌
금 5천원을 부담시킨다. 골프연습장도 나가지 않는데 그나마 매주 만나니 감은 잃지 않고 친다. 만약 스크린골프가 없었다면 퇴직
후 주머니가 가벼워 골프를 접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001년 시작한 골프도 어느덧 15년차에 접어든다.
○ 3월23일 집사람 생일이다. 80년 결혼 하였으니 36년! 어느새 그리 시간도 흘렀다. 결혼 하자마자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들 둘 낳고
두분 돌아가실때까지 모셨으니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다. 동생 셋까지 출가 시키고 농협생활 잘 마쳤으니 무얼 더 바라는가? 더군다
나 두 아들 반듯하게 키워 사회에 내보내니 100점짜리 아닌가? 무뚝뚝하고 표현을 잘 못하는 남편 만나 재미도 없었겠지만 이제라
도 반성하고 잘해보려니 마음은 먹지만 잘 안된다. 다행히 그동안 큰소리 안나고 대판 싸운적 없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을까?
○ 회갑을 맞고보니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난다. 아버님과 나의 나이차는 43세! 아버님 회갑때 나는 고등학생, 아무것도 할수 없을
당시 전주사는 막내 숙부님이 여수 놀러가자 하여 당시 완행열차를 타고 여수로 향한다. 여수 오동도를 구경하고 약주를 거나하게
자신 아버님은 돌아오는 열차에서 취해 주무신다. 내 위로 서넛 날려 장남 아닌 장남이 된 나는 두 아들 내외와 손녀 손자 9명이서
비행기로 제주도를 다녀온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속을 안다 하였는가? 자식 손가락만 다쳐도 가슴이 덜컹하는데 생떼같은 자식
을 먼저 보냈으니 그 속이 오죽하셨을까? 오늘 이렇게 안락한 삶을 사는것도 모두가 부모님의 은혜 아닐런지... 새삼 돌아가신 부
모님을 추모하며 그 한없는 고마움에 눈물이 난다.
첫댓글 아들내외의 사법연수원 입교를 축하하고 결혼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미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