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암산이 있어 내장산은 더욱 화려하다. "
1. 대 상 산 : 입암산(687m) - 전남 장성군
2. 산행시간 : 4시간
3. 출발시간 : 2007년 11월 4일 일요일 08시(07시 50분 집결)
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7시 40분(광양로타리 국민은행 앞)
5. 산행코스 : 전남대수련원 - 갈림길 - 산성골 - 남문 - 북문 - 갓바위 -
능선길 - 은선골 - 갈림길 - 전남대수련원 - 주차장
6. 준비물 : 회비 18,000원
중식,간식,식수, 등
7. 개념도
내장산국립공원은 모양과 이름이 서로 다른 3개의 산이 합하여 이루어진 국립공원이다. 1971년 내장산(內藏山.763m)과 백암산(白岩山.741m), 입암산(笠岩山.687m)을 합쳐서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내장산 단풍은 가을이면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의 3홍으로 남한 제일의 단풍 명산이다. 완벽히 붉은 단풍의 길을 이루는 단풍터널 뿐만이아니다. 산 곳곳에 다른 산과는 한눈에 다름을 느낄수 있는 단풍나무 군락지가 있으며, 노란색, 혹은 주황색으로 물드는 각양각색의 활엽수림이 밀집해 있다. 이렇듯 단풍나무가 밀집한 지역의 크기, 여러 단풍나무과의 수목이 어울려 빚어내는 가을색의 현란함 등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산은 역시 내장산인 것이다.
입암산은 산릉 아닌 계곡 단풍이 일품이다. 내장산이나 백암산 모두 치명적인 약점이라면 계곡 경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입암산 남창계곡은 상품(上品)중에서도 손꼽아줄 만한 경관지인 데다가 계곡을 따라 단풍나무가 즐비하다. 산홍, 수홍, 인홍이라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내장산국립공원의 수홍(水紅)부분을 완벽히 가려주는 산이 입암산인 것이다.
이렇듯 내장산국립공원은 제각각 독특한 단풍 경관으로 무장한 세 개의 명산으로 이루어진 “단풍국립공원”이다. 내장산국립공원에는 외래종 2종까지 합하면 한반도에 자생하는 총 15종의 단풍나무과 수종중 11종이 분포한다. 고로쇠나무, 산고로쇠, 왕고로쇠, 단풍나무, 내장단풍, 아기단풍, 당단풍, 좁은단풍, 털참단풍, 신나무, 복자기, 중국단풍, 네군도단풍 등 총 13종의 단풍나무과 수목이 자라고 있다.
입암산은 능선보다는 남창계곡(南倉溪谷)의 아름다움으로 이름나 있다. 입암산과 갓바위 능선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성(山城)골과 은선(隱仙)골, 입암산과 백암산을 가르며 흘러내리는 새재(鳥峙)골, 시루봉 남쪽의 자하동(紫霞洞), 사자봉 서쪽의 하곡동(霞谷洞), 사자봉 남서쪽의 내인동 등 남창계곡을 이루는 여러 지계곡들은 모두 골이 깊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선인들의 은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곡동은 임진란때 정하곡(鄭霞谷)이 피난했다 하여, 자하동은 역시 임진란때 공신 변이중의 아들 변자하(邊紫霞)가 은거했다 하여 골짜기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은선동에는 예전 골짜기 안에 은선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한다. 입암산은 산 이름보다는 오히려 입암산성(사적지 제384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정상에서 남남동향으로 뻗은 주능선은 옛적부터 외침을 막는 산성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삼한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입암산성은 후백제 시조인 견훤이 중요한 요새로 이용했고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때는 엄청난 격전지였던 곳으로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정유재란때 윤진(尹搢.1531~1598)이 왜적을 맞아 싸우다 아내 아들과 함께 순절하기도 했던 입암산성은 동학농민운동때 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을 피해 순창으로 가던중 산성 별장과 친분이 있어 하룻밤 머물었는데 그로 인해 별장이 처벌을 받고, 이후 별장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8. 산행정보
입암산 산행코스도 다양하다. 몽계폭포를 거쳐 백암산 상왕봉 - 소죽엄재 - 내장산 까치봉 - 내장사로 이어지는 총8시간 쯤 소요되는 코스와 남창골에서 장성새재를 거쳐 입암산 정상을 거쳐 정읍시 하부리코스, 남창에서 산성골이나 은선골을 거쳐 갓바위, 시루봉, 장성갈재코스 등 많은 코스가 있으나 산성골을 거쳐 남문 - 북문 - 갓바위 - 은선골 코스가 가장 인기있는 코스다.
전남대학교 수련원 입구에서 조금 지나면 오른쪽으로 몽계폭포를 지나 백암산 내장산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약 500m쯤 지나면 삼거리(오른쪽은 장성새재 코스)가 나온다. 약 5분쯤 오르면 삼나무 군락지가 있는 첫 번째 다리가 나오고, 조금 오르다 보면 두 번째 다리가 나오는데 계곡 단풍이 절경이다. 세 번째 다리를 지나 왼쪽으로는 은선골 방향이고 오른쪽이 산성골 코스다. 약 20분쯤 오르면 수로 역할을 하는 입암산성 남문에 도착한다.
둥그스럼하게 길게 나온 옹벽을 지나 성문이 서 있을 자리에는 물푸레나무 한그루가 수문장처럼 입구를 가리며 중앙에 서 있다. 50년은 된듯한 나무로서 저절로 발아해서 자란 나무다. 남문을 지나 약 5분쯤 오르면 앞이 확 트이면서 넉찍한 분지가 나타난다. 산줄기가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계곡따라 물이 흐르는 곳, 널따란 땅에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물을 캐며 살기에 그만인 곳이다. 1970년대까지 상투를 틀고 전통 풍속을 고집하던 “유불선합일갱정유도교” 신도들이 집단을 이뤄 살다가 지리산 청학동과 경기도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이젠 집터만 희미하게 남아있고 경작하던 논밭엔 잡목과 풀이 무성하다. 남문에서 약 800m를 오르면 북문이 있는 북쪽능선에 도착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호남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깅개맹개”평야라고도 하는 정읍 저 멀리 한없이 펼쳐지는 평야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펼쳐지는 호남평야가 넉넉한 곡창지역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온다. 정읍들을 조망하면서 능선을 걷다보면 어느덧 갓바위에 이른다. 성벽의 서쪽면을 차지한 갓바위는 선비들이 쓰 다니는 갓처럼 생긴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갓바위에 오르면 방장산, 고부의 두승산, 내장산, 백암산, 멀리 선운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하산은 시루봉 방향으로 내려오다 능선 갈림길에서 왼쪽 은선골로 내려선다. 오른쪽으로 전망이 조금씩 터지다가 이내 숲속으로끝없이 길이 이어진다. 1960년대에 조림 했다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곧 실개천 같은 물줄기를 만난다. 돌이 많이 깔려있고 늪지대도 나온다. 계곡을 건너는 남창 6, 5, 4, 교가 있고 산성골과 만나는 3교부터는 게곡단풍을 만끽할 수 있다.
주변의 명소
가. 입암산성 - 사적 제384호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기록이 없으나 삼한시대의 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 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 것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기토부분에 종출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된 점 등에서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를 엿볼수 있다. 서쪽의 갓바위에서는 남쪽으로 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고, 사방이 높고 중간은 넓어 외부에서 성안을 들여다 볼수 없는 요새지다.
고려말 몽고에 대항할 때에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국난극복의 요충지로서 효종 때에는 성을 개축하여 둘레 길이가 2795보에 달했다. 또한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성내에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진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을 더 파서 물걱정이 없게 되었다.
성안에는 5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장 1명을 두었으며, 각종 무기를 두는 군기고와 군량 7천석 이상을 비축할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은곳이 많은데다 남북의 두문이 남아 있어서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매우 유서깊은 호국유적이다.
나. 백양사(白羊寺)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632년)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가을 단풍을 비롯하여 일년내내 변화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대웅전, 극락보전, 사천왕문은 지방문화재로 소요대사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숲길을 지나 백양사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쌍계루가 눈에 띈다. 앞에는 계곡을 막아 만든 연못, 뒤로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어 연못물에 어른거리는 쌍계루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쌍계루 를 지나면 대웅전과 극락보전, 부도탑이 나온다. 백양사는 창건 당시 백암사였다가 고려 때 정토사로 바뀌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조사가 불경을 읽을 때마다 흰 양이 설법을 들었다해서 백양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던 고승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일제 때 2대 교정(종정)을 지낸 환응, 조계종 초대 종정 만암, 태고종 초대 종정 묵담 등 근래에 와서 서옹당 종정 등 고승만도 5명이나 된다. 등산로 쪽으로 올라가면 암자가 많다. 약사암과 운문암, 천진암 등은 경관도 뛰어 나다.
절 입구에서 20분 거리인 약사암은 전망대 격으로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백 양사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절 경내와 맞은 편에는 난대성의 늘푸른나무인 비자나무 5,000그루가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0.5km 구간에 우 거진 수백년된 아름드리 갈참나무 거목들, 3,000여 그루의 고로쇠나무와 비자림은 산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다.
다.필암서원(筆巖書院):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은 호남지방의 유종으로 추앙받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 梁子徵,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김인후 선생이 죽은뒤 30년이 지난 선조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때 소실되자 인조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현종13년(167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그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도 다치지 않은채 오늘에 이른다.
<하서 김인후>
조선 중종5년(1510)에 나서 명종15년(1560)에 죽었다. 장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열 살때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1531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35년(1540)에 과거에 급제하여 그후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는등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 대고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냈다.
학문에 있어서는 특히 성(誠)과 경(敬)을 중히 여겼고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집 앞은 인근 여러 고을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는 송강 정철도 있었다. 그는 정조20년(179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등 10여권을 남겼다.
참고로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현을 보면 설총, 최치원, 안유(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이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선비산악회 (011-633-8193)
첫댓글 지난번에 다녀온 곳이나 참고하시라고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