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과학"이라는 것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 보완되어지며 다듬어지는 "이론"일 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설이 확립되면, 낡은 이론은 폐기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만일 진화론에 문제가 있으면, 과학자들은 언제든지 진화론을 폐기하거나 수정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의 눈에서 창조론은 이미 폐기된 이론일 뿐입니다. 그런데, 절대불변의 "사실"은 존재합니다. "진화"라는 것은 절대불변의 사실입니다. 이 "진화"라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진화론은 끊임없이 수정 보완되고 발전되고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부분 수정, 보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어떤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절대 불변의 사실을 부정하고 도로 "창조"를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사적유물론을 검증함에 있어, 우리는 "역사"라는 절대불변의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이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사적유물론"은 이제 과학적 "이론"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낡은 이론이라하여 통째로 마르크스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마르크스의 인식적 한계를 바라볼 뿐이며, 사적유물론은 이제 끊임없이 수정, 보완되고 다듬어져야 할 과학적 이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항이형이 발췌한 사적유물론 비판 부분은 그래서 다듬어야 할 부분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윗글도 사적유물론을 통째로 부정하는 비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사람이 기독교인이던 아니던..
아래의 글들은 제가 이전에 썼던 글들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그림자.
마르크스주의의 사적유물론에 따르면, 초기 농경생활을 한 인류는 지형, 기후조건에 따라 크게 3가지의 생산양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아시아적생산양식(4대 문명의 출발지 모두), 고전고대사회(그리스, 로마와 같은 노예제 사회), 봉건제사회(유럽, 게르만의 원시유럽 공동체)로 나뉜다고 한다. 또한 역사의 "보편적" 흐름은 원시공동체 --> 아시아적 생산양식 --> 노예제사회 --> 봉건제 -->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서구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틀린 것 같지 않다. 약간의 딜레마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변화처럼 이것이 한 사회의 내재적 발전에 의한 혁명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는가, 아니면, 노예제 --> 봉건제 처럼 외적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그런 점이 명확하지 않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사실 마르크스는 침략이나 전쟁과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서 사회변화가 이루어진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 듯 하다.
사실 인류의 초기 문명은 강을 끼고 발달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출발한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중요한 것은 강의 범람이라는 입지적 조건에 따라 관개의 필요에 의하여,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초기 부터 아주 강력한 절대 왕정 즉 1인의 독재자와 전체 국민의 총체적 노예 상태의 국가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시아적 공동체 사회가 절대왕정의 국가를 형성하였을 때, 이 사회는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고전고대적 노예제 사회의 침략을 받아, 외적 요인에 의하여 무너지고 노예제 사회의 틀 속에 편입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로마는 지중해의 강자로 떠올랐으며, 알렉산더 대왕은 멀리 인도까지 원정을 하였다. 하지만, 고전고대사회의 틀은 이탈리아와 그리스반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비록 전쟁에 져서, 노예의 보급루트로 한 때 전락은 하였지만 꾸준히 아시아의 4대 문명권에서는 나름대로 총체적 노예제 국가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손도 못댄 중국 문화권까지 그냥 그 상태로 "정체"되어 있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시각이다.
기억하기에 엥겔스의 편지에는 인도가 영국의 자본주의 침략을 받아 비로소 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로 강제 편입되고 이것은 "혁명"적 과정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자본주의 혁명을 겪은 셈이고 우리는 전제군주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으로 봐도 되는가?
여기에 대한 역사학계의 딜렘마는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존재하였다고 "내재적 발전론"을 들고 나온 계기가 되었으며, 그 성과 또한 많이 이루어졌다. 이 내재적 발전론은 마르크시즘에 기반한 좌파적 자본주의 맹아론이건, 아니면, 우파적인 근대화론자건 간에 다 마찬 가지였으며, 역사학자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발전 5단계의 틀이 존재하였고 그 틀에 두드려 맞추어왔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오늘은 딱 한가지만 비판하자.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말로는 변증법 변증법하면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연구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비판하고 싶다. 즉,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부터, 추상적인 사회의 개념틀을 이끌어 내고 이 추상적 틀로 부터 구체적인 역사를 서술, 해석하여 나아갔다. 그런데,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마르크스의 개념틀로 부터 구체적인 역사를 해석한 것은 맞는데, 전제 조건인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부터 추상적 사회의 개념틀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조선사회가 조선사회 나름대로 발전이 있었다면, 여기다 왜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느니 없었느니를 두드려 맞추려는 것일까? 차라리 마르크스를 잊어버리고 조선사회의 기본 발전 틀이 무엇이었나를 살펴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 4대 신분론의 허구
내 주변에 양반이 아닌 사람이 없다. 아니 어딜 가도, 조상이 양반이 아니었던 사람을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4대 신분이 있었다고 한다. 양반, 중인, 백성, 노비. 대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면, 옛날에 족보를 위조하는 사람이 많았단다. 그래서, 지금 모두가 양반이 된 것이라고 한다. 뭐 그런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보았다. 돈주고 족보를 산 사람이 나오는 영화..이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피터지게 싸워서 신분해방을 쟁취하였는데, 놀랍게도 한국인들은 "신분위조"를 통해서 신분해방을 쟁취하였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아직도 카스트제도에서 신음하는 인도에 그 비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을까?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백성, 양반 등등...주요 논지는 이랬다. 원래는 신분이 아니었는데, 세습화의 과정을 통해서 신분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원래"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럼 조선말은 지독한 신분사회이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고려시대나 조선초는 지극히 평등한 사회였다는 말인가? 세상에 이렇게 시계가 거꾸로 도는 역사를 가진 나라도 있었던가? 돈주고 양반을 산 것은 조선말이고, 대대적으로 노비해방을 시킨것도 조선말 정조 시대인데, 앞의 논지가 맞다면, 기록된 역사가 틀렸다는 말이되나?
약간 수정된 해석이 있었다. 지식검색의 한 답변이다. "양반은 3대동안 과거에 급제를 해야 하는 족속들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중인(옛 허준이 중인이었죠..수준)으로 낙제를 하죠.. 천민은 생산적인 입장에 쳐해있는 사람정도로 생각하셔야죠...aa(백정,농민,상인) 구분하라면,,, 태어날때, 누구의 피를 받았느냐가 중요하겠죠..? 양반은 양쪽 부모 모두 양반이어야 하는겁니다.. 한명이라도 양반이 아니면, 중인 이하로 떨어지죠.."
3대 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중인이 된다? 이말이 사실이라면, 조선 말에는 중인들이 엄청나게 드글드글해야 할 것이다. 3대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후손은 대과를 칠 자격 조차 상실하고, 허준같이 의술이나 배울 수 밖에 도리가 있을까? 하긴 신분이란 개념이 참으로 중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4대 신분론의 신분이란 "혈통"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또 천방지축은 천민이라던데, 국어 교과서에 이순신장군의 부인이 된 방씨 소녀 이야기가 나온 걸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구국의 영웅에다가 신분을 넘나드는 초월적 사랑을 한 분이 아닌가? 구한말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은 의사였으니, 천민에서 해방되어 중인이 되기까지 어떤 백그라운드 스토리가 있었을까? "만강이"같은 드라마 보다도 더 극적인 영화를 한편 만들어도 될만한 엄청난 소재가 아닌가?
엄밀히 이야기하자. 양반은 신분이 아니다. 적어도 "혈통"을 기반으로 한 개념의 신분이 결코 아니다. 양반(兩班)은 문무양반의 줄임말임을 당연히 알고 있지 않은가? 문무양반이 무엇인가, 문과 혹은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확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문과 혹은 무과에 급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신분"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아버지가 벼슬아치여야만 시험칠 수 있었을까? 정말? 아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 누구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나.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국사선생님들. 당신들이 보았는가? 왜 쓸데없이 토를 다는가? 백성은 어떤 사람들인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자. 농민들이다. 일반 농민들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쌍놈이라는 바로 그 사람들도 영의정이 될 수 있었다. 실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논지를 펴는 필자도 신분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신분"은 존재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백성과 양반은 신분을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절대다수의 백성-양인(良人)이라고 한다-과 소수의 천민. 그리고 더 소수의 중인(中人, "가운데" 中)이 있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양인은 천민과 중인을 억압하는 계급적 존재였을까? 그건 아니다. 천민과 중인은 단지 출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받았을 뿐이다.
백성(百姓)과 백정(白丁)의 차이는 무엇인가? 백성은 농사짓는 사람이고 백정은 소잡는 사람이다? 직업과 신분을 혼동해도 한참 혼동하고 있다. 한자 그대로 이야기를 하자. 백성은 말그대로 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다. 다른 말로 백가지 족보가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누구나 과거를 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전적 의미로 백정은 소잡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보다 더 근본적으로 고려 시대 일반 농사꾼을 백정이라고 불렀다. 백성이 성이 있다면, 백정은 성이 없는 "천민"이었던 것이다. 왜 흰白을 쓰는지는 몰라도, 丁은 곧 일할수 있는 노동력을 가진 壯丁과 같은 의미일 뿐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백정들은 여말 선초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원래 신라시대 육두품처럼 물려 받은 성씨가 있던 없던, 왕건 이후 성씨를 하사 받던 않던, 각종 연유로 성씨가 형성되었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성씨가 발생한 개별적 사건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은 여말 선초의 농서에 나온다. 그것은 금비 즉 "똥"을 비료로 썼다는 점이다. 똥을 비료로 쓰면서,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대규모 "부족"단위의 노동력이 필요하였지만, 여말선초의 생산성은 "씨족"규모의 노동력으로도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락은 호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부족 단위에서 마을 단위의 공동노동이 가능한 씨족단위 즉 "동족촌"을 형성하게 되고 사람들은 높아진 생산력을 기반으로 "주경야독"이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농촌에 내려가면 무수한 "동족촌"을 만나게 되며, 사람들은 그 고장의 이름을 따 "본"과 "성"을 만들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음서라는 "신분적 세습"을 통하여 벼슬을 한 사람을 양반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을 일러 "권문세가"라고 불렀으며, 이는 나말여초 각지에 할거하며 왕건이나 견훤과 결혼을 통해서, 손잡았던 사병을 거느린 부족장의 후손들인 것이다. 4대 임금인 고려 광종 때 처음 도입된 과거제는 초기에는 유명무실했지만, 일반 백정은 스스로 "백성"이 되어 계속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그들을 일러 "신진사대부"라고 불렀다. 이들이 바로 "양반"인 것이다. 결국 이들 백성에 의하여 "조선왕조"는 혁명적으로 개국하게 된 것이고, 권문세가는 지방의 토호로서 지방을 잘 알고 있는 향리 정도로 출세에 제한을 받는 "중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인들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의사나 화가가 될 수 없다. 천민과 양인사이에 태어난 홍길동에 적절한 신분은 "중인"이었을 것이다.
그럼 조선시대 소잡는 백정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그들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의 대통합과정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부족의 후손들로서, 골품제의 가장 끝단에 존재하며, 직업적으로 농토를 부여받지 못하고, 소잡는 일 또는 공업에 종사했던 천민집단..향, 소, 부곡에 사는 거주민들이었으며,그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집단 차별을 받던 존재였을 뿐이다. 지식검색에서, "임꺽정"은 천민이면서, 왜 "임"이라는 성씨가 있나요? 하는 질문도 보았는데, "성"이란 결코 신분을 가름짓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하고 싶다. 그들이 비록 주경야독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동족촌을 형성하는 한 성씨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분노했다는 그러한 소설적 인식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들은 오히려, 탐관오리의 과중한 조세수탈에 분노했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민집단이 일반 농민까지도 영향을 끼친 "난"으로 자리잡을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아는 천민의 대부분은 사실 백정보다는 "노비"라는 사람들이다. 노비들은 성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은 원래 성을 가진 양민이었으나, 과중한 조세부담과 흉년으로 "유랑민"이 되었다가, 부유한 "양인"에게 몸을 의탁한 존재일 뿐이다. 당연히 성이 없고 이름도 아무렇게나 불리는 존재였기에, 과거를 볼 수 있는 권리도 없었으며, 세금과 군역이라는 의무를 지지도 않았다. 혹은 관에 몸을 의탁하거나, 역모죄로 "관비"가 된 사람들도 더러 있으나, 이들마저, 조선 시대 말에는 3정의 문란으로 인한 "세금부족"현상 때문에 신분해방을 시키지 않았던가? 이들에게 땅은? 당연히 경작권을 주어, 양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썰을 풀어야 겠다. 관비들이야 원래의 호적을 회복하면 되지만,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노비의 경우에는 개화이후에 의탁 양인들의 성을 물려받아 그 집안 사람이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 절대 다수는 이미 "성"을 가진 양인이었으며, 이들은 백성이기도 하고, 또한 양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4대 신분론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로 보면 고려 이전에 해당하는 토호적 지배구조(막부와 농노)를 가진 일본인들이 한국사회구조가 이미 일본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시킨 날조된 역사의식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조선사회는 "농업사회"로서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매우 진보된 사회구조를 가진 국가였다. 그 자부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
인간의 학명은 Homo sapiens라고 한다.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에 둔 의미이다. 이것은 실제 동물분류학 상의 학명으로 표준화된 명칭이며, 3명법으로 하면 린네라는 사람이 최초의 명명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여기에 대하여 이의를 달거나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철학적 사유에 기반한 주장이 있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유명한 공리를 남겼듯이 생각하는 인간의 정의 뒤에는 근대적 사유의 기반이 되는 관념론의 충분한 논거가 있다. 고교 윤리시간에 많은 인간에 대한 정의를 배운 기억이 난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인간이라는 정의를 내렸고, 호이징가는 Homo ludens 라는 유희의 인간이란 정의를 내렸다. 기타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내린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간의 정의는 마르크스의 Homo labor 즉 노동하는 인간이 아닌가 한다.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으로서, 노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기초로 생산력개념을 이끌어 내었고, 여기에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인 생산관계라는 개념까지 이끌어 내면서, 단지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되던 역사에 "과학적" 분석을 "최초로" 적용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의 모든 인간관이 자신의 존재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자는 당연히 인간을 사유하는 것으로 적용할 것이며, 정치가는 정치적 인간으로, 귀족계급은 유희의 인간으로, 그리고 육체노동자 계급은 노동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마르크스라는 사람의 존재는 노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였고, 굳이 이야기한다면 정신노동자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신의 실제 존재와 달리 "노동자적"(엄밀히 이야기하면 무산노동계급인 프롤레타리아적) 사고를 하였고 그에 기반하여 정말로 훌륭한 "눈에 보이는" 학문적 업적을 이룩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을 완수시킨 레닌에게 이르러 이같은 "노동자적"사고는 "비노동자적" 사고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비화되면서, 소위 "당파성"논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멘세비키니 볼세비키니, 트로츠키주의니 스탈린주의니 하는 모든 것이 그러한 당파성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최근까지도 중국이나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사회에 있어서의 무수한 피의 숙청에 그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뿐이랴. 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도 무림, 학림논쟁, MT, MC논쟁, NL, PD논쟁 등 무수한 논쟁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이고, 급기야 현실 정치 세계에서도 그 망령은 죽지 않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범 NL계니 범 PD계니 하는 이야기가 버젓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정말 씁슬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노동자적 사고에 적합한 것인가?
그런데, 꼭 이런 사상투쟁의 뿌리를 굳이 사회주의권이나 운동권의 논쟁으로 제한해서 고찰할 필요는 없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논쟁은 얼마든지 있었다. 멀리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논쟁,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사림파 내부의 이기론 논쟁, 사색당파의 논쟁, 위정척사와 개화파의 논쟁, 현대 보수정치권들 상호간의 논쟁 등 현대 학생운동권의 논쟁의 뿌리는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차라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 조선과 비슷한 사회제도를 가지고 있던 중국 송나라의 붕당정치 또한 매우 유명하다. 조선사회의 논쟁은 모두 학풍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써클식으로 운영되어 오던 학생운동 역시 마찬가지였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상투쟁"이란 육체노동자하고는 거리가 먼 정신노동자 상호간의 "권력투쟁"이었을 뿐이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사상투쟁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이 아니라 지배권력 내부에서의 "권력투쟁"에 다름이 없다고 단언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한사람이지만, 설마 또 다른 사상투쟁을 촉발시킬 용의는 추호도 없다. 다만 마르크스로 다시 돌아가, 그가 이룩하였던 "학문적 업적"에 보다 큰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의 존재가 무엇이었던 간에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제각기 인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밖에 없으며, 모두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어떤 인간에 대한 평가이던 결국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라는 속담이 생각이 날 뿐이다. 노동하는 사람으로 부터 시작해서, 사적유물론의 업적을 이룩하였음에도 실제의 사회역사 발전은 마르크스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해석은 게르만적 공동체에 기반한 서양의 역사는 훌륭히 설명하였지만, 동아시아 국가에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산재하던 다양한 사회구성체를 전혀 해석할 수가 없었다. 또한 아직도 그가 꿈꾸던 국가없는 사회주의는 등장한 적도 없다. 자본주의 주변국에 불과한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이 사회주의이념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면서 마치 자본주의의 쌍생아처럼 등장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의 사고는 단지 인간의 일면만을 보았다는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한단 말인가? 인간이 머리와 육체가 떨어져 존재하지 않듯이 결국 사고 체계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 만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가정해보자. 당파성이건 뭐건 간에 보다 다면적인 통일적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생물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다. 인간은 동물의 한 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에서 말하는 종개념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된다.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는 "생식적 격리"라는 종개념만이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한 종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생식사회(reproductive community)를 이룬다. 즉, 한 종의 동물의 개체들은 잠재적인 배우자로서 서로를 인식하고 생식을 위하여 서로를 찾는다. 종은 또한 생태적인 단위이기도 하다. 끝으로 종은 서로 통하는 커다란 유전자급원(gene pool)을 구성하는 유전적 단위이지만 개체들은 잠시 동안 유전자 급원의 내용물의 적은 부분을 가지고 있는 임시적인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김훈수 등, 동물분류학)
나는 3가지의 다면적 생물학적 종에 대한 인식은 3가지 형태의 진화론으로 나타났다고 보는데 격리설, 자연선택설(자연도태설), 돌연변이설이 상이한 3가지의 종개념에서 각기 유추될 수 있는 이론으로 본다. 종에 대한 이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 일리가 있다. 혹자 인위적 구분에 불과한 "종"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생물학적 종이 보이는 뚜렷한 현상적 특징이 실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현상적 특징은 생물학이 가지는 3가지 수준에 대한 인식 즉 세포 내의 분자적 혹은 유전자적 수준에서, 세포 상호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생리학적 혹은 발생학적 수준에서, 개체와 개체 또는 종과 종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생태학적 수준에서 그리고 시간과 공간적으로 실재함을 보이는 특징들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보아야 한다. 인간이라고 하는 종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하여 노동이라는 특이한 행동으로 자연과 교류하는 생태학적 존재로만 한정지을 수 없다. 개체와 개체 상호간의 생식적 단위로서 자손을 재생산하며 일군의 무리를 이루는 발생학적 존재이기도 하고, 이로부터, 가족, 씨족, 부족, 민족이라는 다층의 사회를 구성하는 유전학적 존재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과 개인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성립된 사회적 존재로서 자연과 교류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타 사회와도 교류하는 그런 중층 아니 3층적 존재로서 인간을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개체노동의 산물로서의 "물질"인 생산수단을 둘러싼 2차적인 소유개념으로 생산관계 및 사회관계를 해석하였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적인 상태로서 자연과의 관계를 형성하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즉 2차적 소유관계가 아니라, 생산관계가 말 그대로의 의미로 "1차적으로" 존재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인간이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하던 단지 생물학적 종으로서 생태계의 일부분이었던 원시공동체사회를 이루던 때가 자연을 적극 이용하는 농경과 목축이라는 노동행위를 통하여 역사 시대를 발전시켜온 때보다 분명히 선행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었고, 그 기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역사시대보다 훨씬 더 장구하기 때문이다. 전체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변증법은 무의미하다.
덧붙여 우리가 인간을 볼 때, 정리되지 않았지만, 고려해야할 필요한 개념들을 추가해 보자.
인간은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하다. 따라서, 노동이란 특징을 지나치게 내세울 필요는 없다. 사실 개미도 건축(개미집)에다가 농경(버섯 재배)과 목축(진드기 사육)을 하지 않는가? 동물의 한 종으로서 인간은 생태적 환경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그 일부분이다. 인간이 자행한 생태계의 파괴는 일방적이 아니었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는 법으로 농업사회에서 인간의 가장 큰 자연의 적은 세균성 질병이었다. 인간이 생태계를 넘어서 무생물과의 관계를 적극 형성한 산업사회에 있어서 인간은 전통적인 생물학적 질병에 더하여, 공해와 같은 무생물학적 질병이라는 반작용과 싸워야 하였다. 최근 의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질병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바꾸어 왔는지를 많은 부분 해석함을 보았다. 페스트로 인한 서시베리아지역의 공동화, 홍역으로 인한 잉카제국의 멸망, 앙코르와트의 멸망, 온대성 기후지역의 문명 발달과 대조되는 열대 우림 지역에서의 원시성 등이 그 예이다. 최근의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류 종의 멸망이라는 우려는 이런 점에서 결코 기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회와 사회, 문명과 문명간 관계에 있어서도 문화적 교류 및 충돌(전쟁)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해석의 고려 요인이 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양이 물질적으로 발달한 것은 사실이나 동양의 문화적 발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가장 진화했다는 개념을 아주 오래전에 버렸다. 아주 원시적인 바이러스도 차 떼고 포 떼고 DNA, RNA 같은 분자형의 몸체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고도로 진화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인도는 아직도 신라와 같은 신분제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굴지의 IT대국이며 핵보유국이기도 하며 그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크리슈나 무르티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뛰어난 성자가 많은 것이 더 흥미롭다. 고려시대의 호족연합국가 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일본 사회도 조선같은 관료주의 사회를 거친 우리보다 오늘날 사회적 생산력이 더 뛰어나다. 획일적인 서구식 근대화론이나 역사발전 5단계라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모든 인류의 역사를 재단할 수는 없다. 즉 인류사회는 분명히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여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각 사회마다 나름대로의 가치체계하에 발전하여 왔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회가 각기의 고유한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지향성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보편성이 맑시즘은 결코 아니라 생각한다. 생물학에서도 신대륙의 광비원류인 거미원숭이의 지능은 구대륙의 유인원류인 침팬지의 지능에 맞먹는다고 하며, 바다에 사는 돌고래가 고고학자들이 사람과 동물과의 경계라고 부르는 잃어버린 고리(두개골 용량 800-1200 cc)를 뛰어넘은 유일한 동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지역적 생태계에서 신생대 이후 학습과 지능을 발전시켜온 종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간사회의 문명도 그러한 보편성이 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서구적 개념)의 발전은 오늘날 전세계의 문화적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모든 사회의 지향마저 보편성의 이름으로 획일화 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인류문화의 거대한 통합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다양한 사회의 가치에 깊숙히 결합된 모습으로 마치 동전의 한면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자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서양과 동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남과 북. 이같이 다양한 수준의 상극적인 개념을 극복하는 통일 지향적 모습 속에 보편성은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 그 보편성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며, 그것을 우리 사회가 극복할 수 있을지 몹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짝짝짝!!! 이 정도 글이면 사적유물론 걷어차버리지 뭐할라꼬 신주단지 모시듯이 붙들고 있지비? 더 좋은 브랜드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주변에 많겠구만.
과학자들은 진화론 좀 수정했다고, 진화론이라는 브랜드를 걷어차지는 않습니다. 뭐..정히 냄새가 구리다면..사적천지론이라고 하기로 했잖아요.
나도 평소에 역사의 합법칙성이 있냐, 거기에 따른 시대 구분은 가능한가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형의 보편성에 대한 고민 계속 관심 가지고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