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연재3: 루터와 기도>
“루터는 ‘내가 아침에 2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가 계속 승리한다. 나는 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매일 3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4년 '규장'에서 출판된 E.M 바운즈의 <기도의 강력>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 책엔 이 말의 정확한 출처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장을 검증없이 여러군데서 사용하는 것 같다. 심지어 교회와 출판사 홍보에도 사용하고 있다.
또 어디서는 루터가 ‘평소엔 세시간, 바쁘면 예닐곱 시간 기도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면서 어떤 신앙의 행위보다 기도가 우선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조금만 관심 가지면 루터의 기도 생활에 대한 여러 변형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명언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주는 반면, 가끔은 듣는 이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이 정도 기도생활 안 할 거면 교회에서 말도 꺼내지 말라!'며 쫄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루터가 이런 말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루터는 결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그럼 앞서 언급한 말의 출처와 맥락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수도사 출신 루터>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루터가 수도사 출신이라는 점이다. 1505년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간 이래로 1523년까지 수도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루터의 기도생활을 이해하는 좋은 실마리가 된다. 루터의 수도원 하루 일과표는 일반적인 역사자료를 통해 어렵지 않게 재구성할 수 있다.
보통 새벽 1시나 2시에 기상하고, 취침시간을 제외한 매3시간마다 7회(취침기도포함) 기도회에 참여해야 했다(Vgl. WA30/1,125,17-21: “대교리문답 서문”; WA 42,511,28f.). 기도회와 기도회 사이에 노동, 탁발, 강좌, 식사 시간이 배정되었고, 매주일 금요일과 특정 교회 축일엔 전일 금식과 더불어 특별 기도가 있는 등 매우 빡빡한 일정이었다.
특히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은 기도와 미사 시간이었기 때문에 시간과 횟수가 정확하게 지켜질 수 있도록 온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것은 루터가 몸담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선 일반적인 상황이었고, 거기서 훈련 받은 기도 생활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루터가 수도원생활을 하면서 이런 기도생활에 상당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수도원에 야심차게 들어갔고, 그곳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구원받는 수단으로 배우게 된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 할 수록 루터의 불안감은 더욱 심해졌다. 과연 ‘내 기도의 양과 횟수가 구원받을 만큼 충분한 것인지?’ 당시 수도원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채우지 못하거나 정해진 기도시간을 그냥 넘겨버리는 것도 ‘죄’로 간주되었다. 지금 말로 하자면, ‘새벽예배 빠지면 지옥간다’는 것과 유사하다. 루터는 순진했고,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수도원에서 지정된 기도시간을 모두 채우는 것은 루터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단순한 수도사 신분이 아니라 1507년 5월 2일부턴 미사 집례와 강의 직무를 부여 받은 ‘사제’였기 때문에 강의 준비로 정해진 기도시간을 채우기 버거웠다. 이런 이유로 밤을 새워 기도하는 일도 있었고, 주말이 되면 밀린 기도 시간을 채우기 위해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 시기에 대한 루터의 회고다. “나는 내 방에 쳐 박혀 나에게 주어진 기도 시간을 모두 채우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어떤 때는 5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WA.TR 1, Nr. 495.)
수도사 루터에게 기도란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더라도 반드시 시간을 채우고 수행해야 할 그런 덕목이었다. 3개월치 기도 시간이 밀린 적도 있었다. 이 때 이런 고백을 한다. “기도 시간을 채우는 것은 이젠 솔직히 감당할 수 없는 짐입니다. 그렇게 난 기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WA.TR 5, Nr. 5428.) 기도 시간을 빼먹는 일은 루터에게 양심의 짐이 되었다. 한 예로, 1515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 진급 문제로 기도 시간을 지킬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날 밤 폭풍으로 천둥 소리가 하늘에서 진동하자 기도시간을 빼먹어서 하나님이 진노한 줄 알고 두려움에 떨었다(WA.TR 4, Nr. 4919). 수도사 기질의 루터에게 기도시간을 채우는 것은 영혼을 질식시키는 율법이었고 압박이었다. 그러던 그가 1520년이 되어서야 이런 식의 기도는 복음의 자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어, 그 후로 이런 식의 기도시간 떼우기와 영영 이별하게 된다(WA.TR 5, Nr. 6077).
<규칙적인 기도생활과 기도 방법>
그렇다고 루터가 기도를 게을리 했다는 것은 아니다. 수도사 시절 몸에 벤 기도 습관은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수놓게 된다. 특히 교리문답을 가르칠 때, 자기처럼 아침 저녁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는 대목은 수도사의 기도습관이 변화된 적절한 예로 볼 수 있다(WA30/1,125,17-21).
얼마 전 교인 한 분이 딸래미 선물이라고 동화책 한 권을 선물해서 받은 일이 있다. 제목은 <루터와 이발사>(IVP 2016. 11월 출판)인데, 기도하는 걸 어려워하는 이발사에게 쉽고도 깊은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내용이다. 여기서 루터는 대/소교리문답과 마찬가지로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소제목은 영어로 “A simple way to pray”(쉽게 기도하는 법)이다. 아이들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유익한 동화책이다. 조만간 나도 교회에서 어른들을 상대로 이 책으로 동화구연을 하려고 계획 중이다.
그런데 실은 이것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여기 등장하는 이발사 페터(Meister Peter) 역시 실존 인물이고, 루터가 동네 이발사를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서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루터가 이발사 페터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마이스터 페터씨, 제가 기도하던 방법을 당신에게 기꺼이 전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 이른 아침 시간과 일을 모두 마친 늦은 저녁마다 기도하길 바랍니다…..” (WA 38, 358, 2f.). 루터는 아이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듯 이발사 페터에게 기도방법을 전하면서 '아침 저녁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WA 38, 359). 물론 점심 시간을 의도적으로 뺀 것은 아니다. 기도는 언제든 가능하다. 다만, 루터가 보기에 그 외의 시간들은 “기도하기엔 너무 바쁘고 집중하기 어렵다”고 페터에게 쓰고 있다(WA 38, 358f.).
루터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자발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설령 기도 시간을 빼먹더라도 수도원에 있을 때처럼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WA.TR 1, Nr., 122). 앞서도 언급했지만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루터는 기도 시간을 ‘아침 저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 시간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세 시간 기도?>
이제 ‘루터가 매일 세 시간 기도했다’는 말의 진위여부를 따져볼 차례다. 수도원 기도시간과 다르지만, 루터가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지켰다’는 말은 다른 두 사람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한 사람은 평생 동료였던 필립 멜란히톤(Phillip Melanchthon)인데, 루터의 장례식에서 ‘매일 시간을 떼어 기도하던 사람’이라는 회고로 알려져 있다(Melanchthon, Oratio funere D. Martini Lutheri, CR 11, 731).
또 한 사람은 1530년 루터가 코부르크(Coburg) 성 안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만난 파이트 디트리히(Veit Dietrich)이다. 디트리히는 그 때 만난 기억을 편지에 담아 멜란히톤에게 전하게 되는데, 바로 이 편지에 “세 시간”의 비밀이 담겨 있다(WA.Br 5, 420,15: “디트리히가 멜란히톤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엔 “루터는 매일 성서 연구시간에 최소 세 시간 이상 기도한다.”는 문장이 실제로 등장한다. 주목할 것은 ‘세 시간 기도’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코부르크 성 안에서 루터의 일상일과였다는 점이다. 물론 루터가 죽을 때까지 그렇게 매일 세 시간씩 기도생활을 했다는 건 아니다.
여기서 ‘세 시간’이란 말이 ‘성서 연구’와 함께 덧붙여진 것도 주목해야한다. ‘세 시간’이란 말이 세 시간 꼬박 큰 소리 내서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의 기도는 언제나 성서의 말씀과 병행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에게 기도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과 함께 하는 영혼의 호흡’이었다(Oratio).
‘성서연구가 곧 기도였고, 기도가 성서연구의 호흡이었다’는 루터의 기도 생활은 실제로 1540년 <탁상담화>에서 그의 고백으로 확인된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세 시간씩, 오후에 있을 강의 준비로 바빴습니다. 이것으로 내 아침은 준비가 끝났습니다.”(WA.TR 4, Nr. 4959)
이것으로 보아 루터에게 기도란, 정해진 시간이나 틀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움직이는 영적 호흡이라고 할 만하다.
종합해 보자.
루터는 아침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외의 시간도 역시 말씀 연구를 위해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이 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기도의 길이나 총량은 중요하지 않다. 짧을 수도 있고, 더 길수도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도는 성서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고 체험하기 위한 통로였다는 점이다.
-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담임목사(서울시 용산구 소재)
* 본 글은 최주훈 목사 페이스북에서 옮겨온 글임을 밝힙니다.
첫댓글 말씀묵상과 기도의 관계를 잘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도는, 말씀과 함께하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말씀없는 기도는 공허한 주문이고 인간의 영을 고양시키는 종교행위입니다.
좋은 글 나누어주어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 말씀안에서 기도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였습니다 ~^^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