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경 초명은 백옥삼(白玉杉 또는 白玉三)이며 고려시대의 개국공신으로 병졸에서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궁예를 섬겨 기병장으로 있다가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자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과 왕건의 추대 개국공신 1등이 되고 태조를 도와 사방을 정복했다. 994년(성중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공(武烈公)이다.
배상지
김성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어 류성룡 ·조목·남치리 등에게도 사사하였는데 천문·지리·율력·병전·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에 밝았다. 저서로는 금역당집이 있다.
배인길 봉화읍 석평리 유록동에는 고색이 창연한 쌍절각이 있으니 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예천의 용궁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배인길 의사와 그의 부인 월성 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旌門)이다. 조선 선조 4년(1571) 유록동에서 참봉 배삼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사물을 관찰하는 바가 깊어 주위의 기대가 컸다. 의협심과 용맹을 겸비하면서 지모가 뛰어났으므로 관찰사였던 백부 배삼익은 어린 선생을 좋은 선생밑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선생은 남자로 태어나서 나약하게 방안에만 앉아 글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무예를 연마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될 때 나라를 구하는 것도 남자가 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낮에는 무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글공부를 하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6월 왜군의 제1진을 지휘하는 고니시 유끼나가의 병력이 예천땅 용궁에서 우리 군사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평소에 닦아왔던 무예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안동의 예안현감을 찾아가서 출병할 것을 간청하여 군마와 병사 3백명을 지원받아서 용궁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때 용궁의 전장에서는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나 선생의 지원병 3백명이 도착하자 우리 군사의 사기가 충천한 반면 왜병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일단 퇴각하였다. 탁월한 무술을 발휘하여 많은 적군을 쓰러뜨린 선생은 왜군의 후속부대가 다시 공격하여 오자, 우리 군들은 패하고 말았고 선생은 홀로 싸우다 적의 집중공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니 이때가 선조 25년(1592) 6월 15일이며 선생의 나이 22세였다. 한편 선생의 고향에서는 밤낮으로 무운을 빌고 있던 부인 월성 이씨에게 선생의 애마가 주인을 잃은 채 혼자 돌아오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의 전사통보였다. 슬픔에 싸여 식음을 전폐하던 이씨부인은 비장한 결심을 한 후 몸을 단정히 한 후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잘라 치마폭에 혈서를 썼다.그리고는 선생의 명복을 빈 다음 스스로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생의 유해를 찾지 못한 고향에서는 봉화읍 석평리 호애산에 의관장으로 장례를 하였는데 후일 이것을 의사총이라고 불렀다. 선생 부부의 쌍절을 기리기 위해 사림에서 건의하여 순조 17년 조정에서 쌍절각을 세우고 선생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본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60년마다 돌아오는 임진년의 6월 15일에는 선생의 후손들과 사림에서는 추모제를 거행하여 왔다. 참고문헌 : 영남인물고, 봉화군지
배상열 어릴 때는 나이많은 어머니와 생활하였는데 아침, 저녁으로 물을 길러 로고 산에 가서 나무를 마련하였다. 그러면서도 남들과 같이 학문을 닦는데는 빠지지 않았다. 선생이 10세 되던 해부터 어머니는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30리 떨어진 봉성면 우곡리에서 살게 되었다. 어린 선생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어머니에게 문안드리기 위하여 그 그곳을 다니면서 간간이 과학을 연구해서 활용하면 인간 생활이 윤택하여지고 편리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학의 근원은 우주공간의 원리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선생이 만든 과학 기구는 혼천의, 천체 주위도, 천화도, 일월십이회도 등이었다. 한편 학문에도 일가견을 가져 통학육도, 화계초록 등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천기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선기옥형도 이 때에 만들었다. 이와 같이 과학에 집념을 보이면서도 학문의 뜻은 버리지 않고 꾸준히 수양하면서 남다른 의리와 덕행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1789년(정조13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가 죽으니 고향의 사우들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글을 지어 조상한 자가 70여명이 되었고, 상여줄을 잡은 이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은 가세가 빈곤하여 법전면 풍정리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화재를 당하여 모든 가산이 불탔으나 선생의 유퓸만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선생이 만든 혼천의와 선기옥형, 저서인 괴담집 3권 6책은 봉하읍 석평리 유록골에서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보존되어 온다. 참고문헌 : 영남인물고, 봉화군지
배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