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松汀驛市場
2022. 10.3 토
오늘은 10월의 한시 기행이다. 서석협회까지 9시30분까지 일찍 서둘러 함평에서 8시20분에 광주, 무안 고속도로 달려 서실에 도착하니 반가운 선생님들께서 와계셨다.
청담 민영순 선생님의 기행에 대한 말씀을 듣고 청담 선생님을 비롯해 창강, 죽파, 춘곡, 만포, 아겸, 지당 모시고 총무 동계와 필자는 송정리 쪽으로 출발했다.
광주 광역시 송정리 재래시장은 광주 송정역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송정리 매일 시장은 송정 5일 시장과 함께 일명 재래시장 송정시장과 삼대시장으로 불린다.
광주 송정시장은 나주와 남평인근 농장에서 많은 과일과 야채가 들어와 먹거리가 풍부한 시장인데 100년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시장명을 1913송정시장으로 변경했다. 비교적 현대화 시설 新舊調和로 청년층의 創業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광주 송정역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있는 호남선의 철도역이자 경전선의 종점이다
본래 역명은 ‘송정리역 ((松汀里驛 )’으로 1913 년 10 월 1 일 영업을 시작했으며 2009 년 4 월 1 일 ‘광주송정역’으로 역명을 변경했다 .
100년 된 국수 가게와 자리가 없어 먹지 못하고 국밥집 시간을 맞춰야 먹을 수 있어 빵집, 방앗간의 옷고시(강정)등 여러 가게들이 상점 앞 길거리에 년대를 새겨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오는이로 하여금 역사가 깊음을 실감하게 한다. 전국의 시장이 많지만 이곳을 특성화된 시장으로 광주시를 구역 재정비 하였다. 광주 송정리는 강과 산의 조화가 아름다워 관산 8경이 있다. 용진산, 어등산, 황룡산, 극락강, 석문사, 복룡산, 풍영전, 호가정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한시 작시 후 12시 40분경 점심식사를 영명식당에서 마치고 다시 협회로 돌아와 청담 선생님의 기행을 통한 작시에 대해 들으면서 새삼 우리들의 부족한 한시 세계를 떠올렸다. 집이 먼 관계로 서둘러 집에 와 7시 3분 이었다.
2022.10.3. 토요일 해인 김보경
, 기행문
오늘은 양과동정 한시기행 하는 날이다 . 총무인 동계 선생이 불참하셔서 내가 오늘 대신 임시 총무 역할을 하기로 했다 . 남광주에서 회원들을 만나기로 해서 우선 남광주시장에서 회원 간식용으로 떡과 식수를 구입했는데 먼저 춘곡 , 송재 선생님이 도착하셨다 . 청담 선생님과 창강 , 죽파 , 만포 , 해인 , 지당 , 벽강 , 선생님과 함께 양과동정을 찾아가는데 근처에서 약간 위치를 지나쳤으나 오른쪽 언덕바지 위 정자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 현지에서 학생회관 정규화 선생님도 함께 했다 .
양과동정은 (良瓜洞亭 )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에 있으며 1990 년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 12 호로 지정되었다 . 양과정으로 오르는 길은 도로에서 두 갈래가 있는데 언덕 정면으로 나 있는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고 언덕 뒤쪽으로 나 있는 차도를 따라 오를 수도 있다 .
정자는 정면 3 칸 ,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치돼 있다 . 기단은 바른 층 막돌 쌓기를 하고 덤벙 주초를 놓고서 원형 기둥을 세웠다 .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 천장은 연목 (椽木 )의 연골이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다 . 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이고 , 암막새는 거북선 모양이다 .
지금으로부터 400 여 년 전 , 광주 지역의 선비들이 둘러앉아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랏일을 걱정하고 , 향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향약 (鄕約 )을 시행했던 양과동정 (良 苽洞亭 ). 양과동 마을 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정자는 ‘양과동정’이란 명칭 이외에도 간원대 (諫院臺 ) 또는 고경명 (高敬命 )의 별서 (別墅 )로도 불리고 있다 .
‘간원대’란 이름은 이곳에 드나들었던 선비들이 간관 (諫官 )으로 많이 배출되어 여기에서 국사 (國事 )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 그러나 정자의 제액 (題額 )을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으로 보아 1600 년대 중반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정자 내에는 양과동적입의서 (良瓜洞籍立議序 )와 중수기 (重修記 ), 고경명의 제양과모정 (題良苽茅亭 ), 박광옥 (朴光玉 )의 차유곡모정운 (次柳谷茅亭韻 ), 제간원대 (題諫院臺 ), 향약 등과 관계된 현판이 걸려 있어 당시의 옛 영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
광주 서창동 매월동 회산마을 출신으로 전라도사 , 충청도사 , 영광군수를 지내고 64 세에 성균관사예 겸 지제교에 부임하였다가 사임하고 ,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고령으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 고경명 의병과 군량미를 모우며 참여했던 회재 (懷齋 ) 박광옥 (朴光玉 , 1526~1593)이 자주 별서에 오르고 시주를 나눴다 ,
1604 년에 작성된 중수조목 (重修條目 )에 따르면 , 주자증손여씨향약 (朱子增損呂氏鄕約 )을 원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동약들과 대개 비슷하나 벌칙과 세부 지행규칙인 별규 (別規 )에서는 독특한 개성을 살필 수 있다 . 양과동 동약은 모두 4 권의 좌목이 있다 . 이것은 동계원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 마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이 좌목은 옛날 것을 일괄 정리해 동계에 가입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어 각 시기의 동계원 구성자료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 그러나 초창기의 성씨 구성원이 현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는데 , 이것은 마을에 보관된 문과안 (文科案 )과 사마안 (司馬案 )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동계의 조목 중 이의 실시를 30 리로 한정한 내용이 있다 . 이는 동계의 범위를 한정한 것으로 여러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사실은 1786 년 동각 (洞閣 )을 중수하면서 작성한 물자수합록 (物資收合錄 )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
동답기 (洞畓記 )와 완의 (完議 )는 동약의 물적기반인 사회경제적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 동장 (洞長 )과 공사원 (工事員 ), 유사 (有司 ) 등의 동약 조직과 소속 전답을 적고 있다 . 동약이 별도의 부세와 관련된 경제력까지 관여하고 있어 상부상조의 기능을 넘어 보다 큰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양과동정과 양과동향약관 사이에는 2012, 8 월에 세운 ‘양과동정공적비’와 좌우에 ‘양과동향약좌목비’, ‘양과동정공덕비건립헌성비’가 서 있다 .
참석 회원들은 양과동향약관 (良瓜洞鄕約館 ) 앞에서 죽파 선생님과 친분이 있다는 전 대촌동장인 박성진 씨의 양과동정에 대한 자세한 오랜 설명을 듣고 청담선생님의 오늘의 시제 ‘과양과동정 (良瓜洞亭 )’ 어운목 (魚韻目 )에 대한 설명과 작시에 따른 강의가 끝난 뒤 준비해 간 간식을 먹었다 . 또 벽강 선생님이 본가에서 어머님이 해 주신 식혜를 가져와서 간식은 더욱 풍성했다 . 좀 늦었지만 만족한 간식에 점심은 건너뛰었다 .
보람 있는 한시기행을 여기서 마치고 회원들의 차에 편승하여 모두 해어졌다 .
2022, 11 5 토요일 아겸 안명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