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서천 56코스 역방향 제2부
장승거리-옥남마을-솔리천-송림산림욕장-장암해변-장항도선장
20230712
1.송림산림욕장과 장항제련소 굴뚝
서해랑길 56코스 역방향 탐방의 중간 지점을 통과한다. 마서면 남전리 백사마을에서 장항읍 옥남리 옥남마을로 이어지는 옥남길을 따라간다. 옥남길 170번길 갈림목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며 옻나무가 많아 칠전(漆田)이라는 이름을 얻은 칠전마을을 가늠한다. 저곳에 남전리의 중심지인 칠전마을이 자리하고, 그 아래쪽에 마을 산의 형국이 조개 모양을 닮아서 지명이 유래한 합전(蛤田)마을이 있을 것다. 이거저거 신경을 쓰면 속도는 느려진다. 그럼에도 마구 달리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위치를 가늠한다. 일행은 한참 앞서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추적한다.
서남쪽으로 바다가 열린다. 유부도와 유자도, 개야도와 대죽도, 소죽도를 가늠한다. 그리고 고군산군도의 새만금방조제를 어림한다.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며 길을 걸을 때, 그래서 주변의 위치와 풍경이 명확한 그림을 그릴 때 그 길은 내 길이 된다. 옥남길 들길로 들어서면 비가 내린 탓에 진흙길이다. 흙탕물을 피하며 내려가니 붉은 칸나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밭이다. 초록 잎을 너풀거리며 붉게 피어난 칸나꽃이 예쁘다. 꽃말은 '행복한 결말'이라고 한다. 행복한 사랑이 끝난 뒤의 참혹한 마음을 칸나꽃으로 표현한 도종환(1955~)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모든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이별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일가?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에/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 도종환의 '칸나꽃밭' 전문
칸나꽃밭 아래 넓은 묵밭은 도깨비가지들이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도깨비가지들이 무성히 꽃을 피우고 있다. 가지꽃을 닮은 도깨비가지 꽃이 연보랏빛과 흰 빛으로 반짝인다. 가시를 숨기고 자라는 도깨비가지, 이름은 흉악스럽지만 꽃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이 치명적인 것은 막강한 번식력이다. 막강한 번식을 자랑하는 도깨비가지는 대표적인 생태교란 식물이라고 한다.
옥남마을로 들어서면 남쪽에 옛 장항제련소 굴뚝이 솟아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아련한 시절의 추억을 불러온다. 덜컹 또 놀란다.장항읍 옥남마을에서 이 지역의 특색을 지닌 굴뚝을 또 만났다. 마서념 남전리 백사마을에서 이 지역의 시멘트 굴뚝이 높이 솟아 있는 것에 놀랐다. 옥남마을의 굴뚝은 더 육중하여 감히 맞짱 뜰 다른 집 굴뚝은 없을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육중한 굴뚝은 옛 장항제련소 굴뚝의 영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남마을을 빠져나가 솔리천 제방으로 나간다. 옥남리와 송림리를 잇는 옥남제방 입구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서천군 해안길이 탁 트여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흐려 투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위치가 확인된다. 아침에 지나온 마서면 송석리 송석항, 갈목 해변, 아름다운 매바위공원, 죽산 해안과 월포 해변, 남전리 백사마을에서 옥남리를 거쳐 내려온 모습에 가슴이 환해진다. 그 풍경은 길손의 마음을 덥힌다. 걸어갈 맞은편 송림리 지역의 곶(串)과 송림산림욕장이 남쪽에서 손짓한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 - 메리 올리버(1935~2919, 미국)의 <휘파람부는 사람> 수필집 서문. 삶은 사랑과 질문, 그 속에서 삶은 풍요로워진다. 길손은 탐방하는 길 풍경을 사랑하고 그 위치를 질문하며 끝없이 헉걱거린다. 행복하다.
옥남리는 옥포 남쪽에 있어서 옥남리이며 달리 솔리라고도 이른다. 옥포는 어디일까? 아마도 마서면 남전리 백사마을 아래쪽 약간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곳이 옥포일 것이라 제 멋대로 추정한다. 솔리천 배수갑문이 낡아서 새 배수갑문을 신축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옥남리에서 솔리천 제방길은 송림리 지역이다. 길손은 옥남리에서 솔리천까지의 제방은 옥남제방, 솔리천에서 송림마을로 이어지는 제방은 송림제방이라는 용어를 붙이고 싶다. 솔리천 위에는 장항산단로 솔리천교가 놓여 있다. 새로이 신축 중인 배수갑문 앞에서 서해 바다와 서천군 해안선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조명하며 환호하였다. 탐방의 이 기쁨을 무어라 표현할까? 오직 혼자만이 느끼는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송림제방길을 건너 송림마을길로 들어섰다. 마을집 울타리를 타고 피어나는 계요등 꽃을 오랜만에 만났다. '닭 오줌 냄새가 나는 덩굴'이라는 뜻의 계요등(鷄尿藤)은 잎을 따서 비비면 구린 냄새가 나므로 구린내나무라고도 불린다. 그렇지만 꽃이 예쁘다. 생명체의 이름을 인간이 붙이고 그들을 호명한다. 닭오줌 냄새나 구린내는 인간의 감각에서 느끼는 것이요, 그 꽃은 자신의 종족 보존을 위하여 벌과 나비가 좋아하는 빛깔과 향기로 그들을 유혹하여 자신은 짝짓기를 실현한다. 그들의 뜨거운 생존 열정에 감동한다. 계요등 흰빛과 자주색이 어느 꽃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송림 해안 방풍림 송림길로 들어섰다. 1.5km에 걸쳐 70년생 해송 약 1만 2천 그루와 그 아래 드넓게 펼쳐진 푸른 맥문동 꽃밭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이곳을 장항 송림산림욕장이라고 부르며 2019년도에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다. 맥문동 꽃밭의 맥문동은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울 때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녹색과 보랏빛이 엮어내는 풍경은 환상적일 것이다. 이 지역은 솔밭이 있는 갯벌을 1914년에 개척하여 '솔밭 만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느새 높이 15m, 길이 250m의 스카이워크(기벌포 전망대)에 이르렀다. 기벌포해전 전망대에 올라야만 서해바다와 갯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텐데 제한 시간 때문에 포기한다. 기벌포 전망대 앞에 설치된 기벌포해전 이야기 설명안내판이 눈물겨운 듯 환희인 듯 길손의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이 기벌포에서 기벌포 평화 선언을 희망하는 내용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이곳이 기벌포가 맞을까? 일설에는 장암리 해안을 기벌포라 이르며 구체적인 기벌포 지역은 추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솔내음과 초록빛에 흠뻑 젖어서 송림산림욕장 앞으로 나왔다. 전망산에 솟은 현 엘에스메탈(주) 상징 굴뚝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환희를 함께 전해 준다. 일제 수탈의 상징이요, 조국 산업화의 추억, 환경 오염의 주역 장항제련소 굴뚝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군산 출신의 고은(1933~) 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기록한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연기를 운명의 서장(序章)이라고 적고 있다. "금강 건너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멀리 바라볼 때마다 대책 없는 영원(永遠)이라는 느낌이 생겨났지. 그 굴뚝이 달고 있는 긴 연기가 움직이는 게 얼마나 나를 사로잡았는지 몰라. 이런 풍경만이 나를 억압하지 않고 있어서 그 풍경의 시간을 될 수 있으면 길게 연장하면서 열애하고 있었지. 사물의 어떤 측면이나 풍경의 자유만이 내 어린 날의 자재(自在)였는지 모른다네.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그 긴 연기야 말로 내 운명의 서장(序章)이었어." 또한 이 고장 출신의 나태주(1945~) 시인은 장항제련소 굴뚝 연기를 하늘에 나래 편 커다란 새로 비유하여 꿈과 희망을 추억한다. "천연색 사진에서/ 흑백사진으로/ 바뀌어지는/ 서해바다/ 예나 다름없는/ 그 일몰/ 산 위에 올라가면/ 장항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하늘에 나래 편/ 커단 새같이만 보였었지/ 지게 끝에 걸리는 마을의 연기/ 매캐한 고랫재 내음/ 벼타작 마당에서/ 부르고 대답하는 사내들/ 힘찬 목소리."(나태주의 '막동리를 향해서' 중에서)
장산로로 나가는 길 전망산 북쪽에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예전에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는 해수가 들고나는 지역이었는데 이곳을 매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서해바다와 전망산, 송림산림욕장과 습지,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 속에 인공의 상징 탑이 하늘로 솟아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꿈과 희망이요,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 운명 같은 풍경이 금강 하구 해안에 펼쳐져 있다. 그 길에서 자귀나무 꽃을 만난다. 여름꽃의 대명사 배롱꽃, 자귀꽃, 무궁화꽃은 아름답다. 그 각자가 특색이 있지만, 자귀나무 꽃은 부챗살을 펼치듯 공작새가 꼬리깃털을 펼치듯 연분홍 가느다란 수술을 펼치고 있다. 그모습은 하늘에 무지개가 피어난 것 같다. 무지개 자귀꽃은 볼수록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장산로를 건너 후망산(後望山) 남서쪽에 드리운 서천장암진성(舒川長巖鎭城) 옆을 통과한다. 조선 중종 때 축성된 장암진성은 서천포영성, 서천포진성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현재는 성내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벽은 일제강점기에 석축을 헐어 장항제련소 공장부지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어 형태가 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철조망을 통해 복원된 장암진성 석축을 살피며 장암리 해안으로 나갔다. 해안에는 친수시설과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길손은 이곳을 장암리 친수공원이라고 제 멋대로 불러준다. 이곳에서 활짝 열린 풍경은 서해랑길 56코스 역방향 탐방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해 준다. 바다 건너 군산 지역, 서해랑길 54코스와 55코스 탐방길이 분명히 확인된다. 금강기맥, 월명호수, 월명공원길, 수시탑, 시간여행마을, 군산 내항, 진포해양테마공원, 째보선창, 서래포구마을, 경암철길마을, 진포시비공원, 진포대첩기념탑, 금강하굿둑, 아, 눈에 그 풍경이 선하다. 금강갑문교를 통해 금강을 건너 서천군으로 넘어왔다. 장산로를 따라 금강을 흘러내려왔다. 마서면 송내천을 건너 장항읍으로들어와 동백대교를 거쳐 장항도선장에 이른 게 2주 전이다. 징항 지역에서 군산 지역과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에 아득한 그리움으로 추억된다. 채만식(1902~1950) 작가가 소설 <탁류>에서 금강을 묘사한 부분은 탁월한 명문이다. 장항 지역에서는 조정래(1943~) 작가가 <아리랑>에서 금강과 장항 지역을 묘사한 부분을 음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폭넓은 금강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만조를 이루고 있는 포구는 더욱 넓어 보였다. 만조를 따라 서쪽으로 열려 있는 바다도 한결 넓게 펼쳐져 멀고 가까운 섬들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심해 섬들은 썰물 때는 커져 보이고 밀물 때는 작아져 바다에 안긴 듯이 보였다. 포구 건너편으로는 산줄기 하나가 열서너 개의 그만그만한 봉우리들을 이루어내며 해변 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 산줄기가 끝나는 어름에 꽤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충남 장항이었다. 충남 장항과 전북 군산은 서로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먼 사이였다. 포구가 가로놓여 있어 뱃길이 아니고서는 오갈 수가 없는 탓이었다. 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을 때 군산 쪽에서 바라다보면 건너편의 낮춤한 산줄기는 바닷물에 그대로 비쳐드는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섬들을 품고 서쪽으로 펼쳐진 바다, 아슴하게 멀고 긴 수평선, 그리고 그 산줄기는 서로 어우러져 그지없이 아담하고 고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바다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 벌판 가운데로 기다란 몸짓을 굽굽이 흘러내린 금강이 제 몸을 바다에 풀어 맡기는 지점에서 오른쪽 포구에 장항이 자리잡았고, 왼쪽 포구로 군산이 앉아 있었다."(조정래의 <아리랑> 중에서)
장암리 수변공원을 나와 장암리에서 신창리로 넘어와 장산로를 따라간다. 신창리(新昌里) 지역은 갈대만 무성한 나루터를 1938년에 매립해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화학비료 제조업체인 (주)풍농 공장단지 앞을 지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비행장을 만들어 대륙 침략기지로 활용하려 했으나 조성만 해놓고 완성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행장터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장산로 건물 벽에는 서천9경 한 곳 한 곳을 홍보하는 타일화를 조성하여 놓아서 탐방객은 그 타일화를 보면서 장산로 걸어가는 지루함을 덜어낸다. 장항항을 지나니 옛 장항역과 장항항을 연결하는 옛 철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장항선의 종착역 장항역은 폐쇄되고 새 역사(驛舍)로 이전한 장항역은 군산과 익산으로 이어져 장항선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주만에 장항도선장 입구에 다시 왔다. 장항도선장 입구에 서해랑길 서천 55·56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길고 긴 서해랑길 57코스와 56코스 두 코스를 역방향으로 종주한 탐방을 이렇게 마쳤다. 힘겨웠지만 행복하다. 탐방을 끝내고 장산로 육교 위로 올라가서 다시 한 번 금강 하구와 서해 바다를 조망하였다. 운항을 멈춘 장항도선장, 바다 건너편 군산시 해망동 금란도의 홍등대, 그 뒤 월명공원의 수시탑, 소룡동 지역의 아파트 단지, 오른쪽 점방산에서 왼쪽으로 내리벋는 금강기맥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백대교 위쪽 금강하굿둑을 올려본다. 금강의 명작은 누가 뭐래도 신동엽의 장시 <금강>이다. 그 시는 지난 번 탐방에서 음미했다. 이번 탐방에서는 안도현(1961~) 시인의 '금강 하구에서' 소박한 시 작품을 음미하며 새로운 활력의 금강을 찬미한다.
"시도 사랑도 안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리라/ 시도 사랑도 안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 안도현의 '금강 하구에서'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5.41km 중 7.58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17분 중 1시간 52분
마서면 남전리에서 장항읍 옥남리로 이어지는 옥남길을 따라간다. 왼쪽 옥남길 170번길 뒤쪽에 남전리의 중심지인 옻나무가 많은 칠전(漆田)마을과 마을 산의 형국이 조개 모양 같은 합전(蛤田)마을이 있을 것이다.
옥남길에서 서남쪽으로 바다의 죽도와 개야도, 군산항과 새만금방조제를 가늠한다.
마서면 남전리에서 장항읍 옥남리로 넘어왔다. 태양광 시설을 갖춘 건물은 어떤 표지도 찾을 수 없어 수산업체인지 농장 건물인지 분명하지 않다. 앞쪽에 큰 농지가 있는 것을 보면 농장 시설이나 농촌체험 교육시설 같다. 오른쪽은 바다로 나가는 길이다. 해바라기 꽃이 벌써 피었고 붉은 칸나꽃이 푸름 속에 빛난다.
본래 서천군(舒川郡)의 남쪽이 되므로 남부면(南部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서부면(西部面)의 19개 동리를 합할 때 서부면과 남부면의 이름을 따서 서남면(西南面)이라 하고 1929년에 간척지를 메우고, 1931년에는 장항선(長項線)이 개통되고, 1937년에는 장항항(長項港)이 완성되어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 1938년 10월 1일에 장항읍이 되었다. 긴 목에 읍이 생겼다 해서 장항(長項)이라 부른다. 집성마을으로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60여 호, 추계 추씨(秋溪秋氏) 30여 호, 온양 방씨(溫陽方氏) 30여 호, 용궁 전씨(龍宮全氏) 20여 호, 밀양 박씨(密陽朴氏) 20여 호가 있다.(장항읍행정복지센터)
칸나 재배지가 넓다. 원예용일까, 건강식품용일까?
묵밭에서 가지꽃을 닮은 도깨비가지 꽃이 연보랏빛과 흰 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반짝인다.
왼쪽 뒤의 농촌체험 교육시설 같은, 태양광 시설을 갖춘 건물을 지나 칸나 꽃밭을 거쳐 묵밭으로 왔다. 왼쪽 묵밭에 대표적인 생태교란 식물인 도깨비가지들이 무성히 자란다.
옥남1리 옥남마을, 살리 또는 솔리마을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옥남리(玉南里)는 백제 때 설림군에 속했던 곳이며,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서림군에 속했었다. 조선 초 1413년(태종 13)에 서천군에 속했으며, 조선 말 서천군 남부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솔리(率里)와 비두리(飛頭里), 합전리(蛤田里)의 각 일부를 합하여 옥포(玉浦) 남쪽에 위치해 있다 해서 옥남리(玉南里)라 하여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1938년 10월1일 장항읍에 편입되어 옥남정(玉南町)이라 했는데,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옥남동이라 부르다 다시 옥남리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옥남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진다.(서천군지)
옥남마을의 활짝 열려 있는 곳에서 서남쪽을 조망하니 옛 장항제련소 굴뚝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저 앞을 거쳐 지난다.
장천로 283번길 갈림목에서 오른쪽 옥남길을 따라 옥남1리 마을을 통과한다.
옥남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진다. 1리는옥포 남쪽이라서 옥남동이라 부르며 살리 또는 솔리라고도 하는데, 사람을 거느리고, 곡식을 거느리고, 부자가 떠나지 않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살리라 부른다고 하며, 또한 소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솔리라고 한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솔리 동쪽에 위치한 산을 누에머리라고 하는데, 이는 산의 모양이 누에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누에머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산 이름을 따서 누에머리, 또는 잠두(蠶頭)라고 부른다.
마서면 남전리 백사마을에서도 시멘트 굴뚝을 보았는데 옥남마을에서도 우람한 굴뚝을 본다. 장항제련소 영향 같다.
마을회관 입구에서 뒤쪽에 보이는 옥남2리 지역을 가늠한다. 옥남2리는 옥남1를 동남쪽으로 감싸며 옥남천까지 이어진다. 옥남1리 마을회관 앞쪽을 살피고 되돌아온다.
옥남2리는 옥남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며, 날머리라고 하는 중심 마을에 서아시와 동아시가 있고, 마을 앞 들 가운데에 있는 만들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으며, 옥북리 경계에 있는 당산재 너머와 장가매 등이 있다. 장가매 위에는 애멀재라는 지역이 있으며, 동아시와 서아시 중간쯤에 새뜸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날머리는 비두리라고도 하는데,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의 명당자리가 있다 해서 비두리, 날머리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마을에 추태기, 추만기 형제의 효자 정려문이 있으며, 이 마을에는 용궁 전씨가 많이 살고 있다.(서천군지)
농촌공동급식실은 노인들 공동급식실인 것 같다.
옥남길에서 옥남사거리를 살폈다. 중앙에 옥남사거리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장항산단로와 장천로가 교차하는데 앞쪽 도로는 장항산단로이다. 오른쪽 뒤 옥남2리 '만들'에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옥남길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앞쪽 뒤의 큰 도로는 장항산단로이다.
옥남길을 따라 오른쪽 수산업체 붉은 지붕 건물을 지나 해안으로 나간다. 왼쪽 위 장항산단로와 평행으로 이어간다.
중앙 위쪽 마서면 남전리에서 장항읍 옥남리로 넘어와 옥남길을 따라 오른쪽 옥남1리 마을까지 이어왔다.
옥남1리 마을을 빠져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 옥남길을 따라오고 있다.
서해랑길은 옥남로를 따라 솔리천 제방을 건넌다. 잠시 수산물직판장 옆으로 가서 풍경을 조망하고 진행한다.
송림리 곶(串) 해안으로 돌아나가면 좋을텐데 서해랑길은 맨 왼쪽 마을길로 이어간다. 바다에 아소래섬이 떠있다.
서해랑길은 옥남제방과 솔리천 배수갑문교를 건너 중앙 뒤 송림산림욕장 출입구로 이어간다.
이곳에서 마서면 옥남리와 이별하고 장항읍 송림리로 넘어간다. 옥남제방길을 따라 솔리천 배수갑문교로 이어간다.
솔리천 배수갑문을 신설하는 것 같다. 직진하여 솔리천 다리를 건넌다.
솔리천을 장항산단로 솔리천교가 가로지른다. 솔리천교 왼쪽 위에서 솔리천에 합수하는 하천은 옥남천이다. 옥남천은 길이 4.5㎞로 마서면의 송내리에서 발원하여 장항읍 옥남리로 서류하며 장항평야를 가장 많이 관개하는 하천이라고 한다.
솔리천에 배수갑문을 신설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건너편에 옛 배수갑문 2곳이 있는 곳으로 진행한다.
맨 위쪽에 송석리 송석항, 그 아래 죽산리 매바위공원&하소 해변과 월포 해변, 중앙 정면에 남전리 백사해변, 오른쪽에 장항읍 옥남리 해변이 분명히 확인된다. 옥포는오른쪽 비닐하우스 위쪽 지역일 것이라 가늠한다.
장항읍 옥남리 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천장항 LH1단지아파트 건물이 우뚝하고 그 오른쪽 뒤에 서태산이 가늠된다.
건너편 장항읍 옥산리에서 송림리 송림제방을 건넜다. 오른쪽 뒤에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을 것이며, 맨 오른쪽 산은 당뫼산일 것이라고 가늠한다.
장항지구 배수 개선사업으로 솔리천에 배수갑문을 신설 중이다. 장항산단로 솔리천교 뒤쪽으로 장항읍 일대가 조망된다.
옛 배수갑문과 맨 뒤에 송림산림욕장이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뒤 송림산림욕장 북쪽 출입구로 이어간다.
송림리 곶(串)과 바다에 아소래섬이 떠있다. 공사 중이어서 송림리 곶(串) 해안을 돌지 못하고 맨 왼쪽 마을길로 진입한다.
옛 배수갑문은 낡아서 철거할 예정이며, 새 배수갑문을 신축하고 있다.
제방길을 따라서 오른쪽으로 이어가야 하는데, 잠시 왼쪽 길로 들어갔다가 되돌아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왼쪽 제방길을 따라서 오른쪽 길로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서 이곳으로 진행했다.
멘 위쪽에 송석리 송석항, 그 아래 죽산리 매바위공원과 월포해변, 중앙 정면에 남전리 백사마을과 백사해안, 맨 오른쪽은 장항읍 옥남리 해안이다. 오른쪽 낮은 구릉 지역이 옥포였을까? 왼쪽 건물은 수산물처리장이라고 한다.
곶(串) 해안을 돌아가면 좋을텐데 공사 중이라고 한다. 서해랑길은 왼쪽 농가가 있는 장항산단로 11번길을 따라간다.
마을길에서 계요등 꽃을 오랜만에 만났다. 잎을 따서 비비면 구린 냄새가 나므로 구린내나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장항읍 송림리 북쪽 곶(串) 안쪽 마을을 통과하여 송림산림욕장 북쪽 출입구로 이어간다.
송림리(松林里)는 조선말 서천군 남부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목처럼 생겼다 해서 목리, 또는 항리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장항리와 합하여 서남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38년 장항읍으로 편입되어 간척지에 새로 생긴 마을과 합쳐 신(新)송빈정이 됐으며, 1945년 송림동이었다가 현재 송림리가 되었다.(장항읍행정복지센터)
56코스 종점 9.7km, 시점 4.5km 지점, 장항읍 송림리 709-1 지역이다. 장항산단로 11번길을 따라 마을을 통과하였다.
장항산단로 11번길에서 장항산단로로 나가서 맞은편 장항송림산림욕장 북쪽 출입구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선셋펜션, 정면 끝에 시골토종백숙 음식점이 있다. 장항산단로 끝에 해안을 돌아가는 산책뎈길이 있는데 공사 중이어서 폐쇄되어 있다. 왼쪽 장항송림산림욕장 북쪽 출입구로 이어간다.
송림산림욕장은 1.5km 거리에 걸쳐 있다. 산림욕을 즐기며 송림길을 걷게 된다.
송림 해변이 이어진다. 왼쪽 끝에 LS메탈(주) 장항공장 상징 굴뚝이 솟아 있고, 바다 건너편 중앙에 군산시 일반산업단지, 오른쪽 바다에 유부도와 유자도가 흐릿하다.
오른쪽에 유부도와 유자도, 바다 건너 중앙에 군산 외항이 어림된다.
남쪽에 유부도라는 섬이 위치해 있다. 이 섬은 임진왜란 때 어떤 부자(父子)가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는 유부도에, 아들은유자도에 피난을 갔다 하며, 이 섬은 아버지가 피난왔던 섬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유부도에는 송림초등학교 유부도 분교장이 있으며, 몇 년 전까지 유부도에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수심원이 있었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인해 현재 폐지되었다. 또한 유자도는 큰대섬 서북쪽에 있는섬으로 임진왜란 때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무인도다. 유부도를 입우도, 유자도를 유좌도라고도 했다 한다.(서천군지)
장항읍 송림리 앞 바다의 유부도와 유자도, 큰대섬과 작은대섬 등을 가늠한다.
송림 해안 방풍림에 위치한 장항글램핑장 옆을 통과한다.
송림 해변 백사장이 송림 포구까지 이어진다.
송림백사장은 매년 음력 4월 20일을 모래날로 정하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래찜을 하기 위해 찾아온다. 따라서 서천군에서는 송림백사장을 개발하여 관광서천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6월이면 백사장에서 대합축제가 열리고 있어 마을 주민들의 소득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장항 소득사업의 일환으로 송림리 어메니티 마을 조성사업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서천군지)
송림 해안 방풍 해송림이 울창하고, 맥문동밭이 펼쳐져 있다. 방풍림 바깥에 '솔만들'과 송림1리 마을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해안 쪽으로 방풍림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지형이 목처럼 생겼다 해서 목리 또는 항리라 했다고 전하는 이 마을에는 솔밭 만들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은 알마재라 하는 곳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솔만들, 간사지라고도한다. 이는 솔밭이 있었고 1914년 갯벌을 개척하여 마을을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에는 앞이 바다였는데 유독 소나무가 무성했던 섬이었었다고 한다. 그때 한 도승이 이곳을 지나다 솔밭을 가리키며 앞으로 큰 들에 들어앉을 솔섬이라 하여 '솔만들'이라는 지명을 지어 주었다 하며, 그 후 그 예언이 맞았다고 한다.(서천군지)
송림 해안 방풍림 쉼터정자 앞에 장항 송림갯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서천갯벌 습지보호지역은 검은머리물떼새로 유명한 유부도 인근 갯벌(3㎢)과 갯벌체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선도리·장포리 등지의 갯벌(13.5㎢)로 구성되어 있다. 서천갯벌은 새만금 갯벌이 사라진 후 금강하구에 남아있는 유일한 하구갯벌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7년 5월 17일 374만평의 매립을 대신하여 국립생태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내륙의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 조성을 선택하는 '갯벌보전과 생태산업 중심'의 정부 대안을 수용함으로써 보전을 선택한 서해안의 마지막 갯벌로 남아 있다. 갯벌 생물들은 오염물질을 정화하고 사구식물들은 사구의 유실을 막아 자연재난을 막아주며 계절따라 이동하는 새와 사람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갯벌은 다양한 생명체가 함께 공생하기 때문에 그 건강성이 유지된다. 서천의 원주민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일상의 치유가 되는 장항 송림갯벌은 다음 세대에게도 물려줄 소중한 자연 유산이다.('송림갯벌' 설명안내판)
송림 해안 방풍림 숲에 맥문동 꽃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여름날 보랏빛 꽃을 피울 때가 아름다울 것이다.
여름날/ 매미 울면/ 긴 꽃대 마디마다/ 귀를 달고 울음 귀동냥 한다.// 여름 끝과 함께/ 매미 소리 끝나면/ 소리마다 흑진주가 된/ 구슬 걸어/ 꽃으로 피워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드리우는 맥문동.// 땡볕/ 소나기/ 천둥/ 여름을 여름답게 산 삶으로 맞는/ 가을의 섭리를 배운다.// 맥문동에게 - 권혁준(경기 하남 출생)의 '맥문동(葵門冬)' 전문
기벌포해전 전망대 앞에서 잠시 송림 해변을 살피고 되돌아온다. 송림 해변에서 송림포구를 거쳐 LS메탈(주) 장항공장 상징 굴뚝이 솟은 전망산 방향으로 해안길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바다 건너편 왼쪽은 군산시 일반산업단지, 그 오른쪽에 군산 외항. 중앙 뒤쪽에 새만금 방조제를 어림한다. 바다 오른쪽에 유부도와 유자도, 맨 오른쪽에 큰대죽섬과 작은대죽섬 그리고 묵도를 가늠한다. 오늘 새벽부터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 갯벌체험장에서 시작하여 장항읍 송림 해변까지 왔다. 서천군의 해안선과 갯벌을 알아본다.
서천군의 해안선은 장항읍, 마서면, 종천면, 비인면, 서면의 5개 읍, 면에 걸쳐 72.5㎞에 달하며, 연안지역은 금강이 서해와 만나며 형성된 하구갯벌을 비롯하여 다양한 갯벌이 발달하여 있다. 서천의 갯벌은 모래갯벌, 펄 갯벌, 혼합갯벌, 자갈갯벌 등 다른 형태의 갯벌이 지형에 따라 형성되어 있다. 갯벌은 형태에 따라서 구분을 하는데 개방형 갯벌은 주로 모래갯벌이 우세하게 발달하며(춘장대), 만입형 갯벌은 펄로 이루어진 펄 갯벌이 발달한다.(송림 갯벌, 장구만 갯벌) 특히 생태적으로 생물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하구형 갯벌은 강이 유입되는 하구에서 조수와 강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갯벌로 강의 연안을 따라서 좁고 긴 펄 질 갯벌이 발달 하여 생기는데 그것이 금강하구이다. 서천의 연안은 금강하구 기수 역 범위 안에 들어 있어 생태적으로 우수한 갯벌이다. 서천갯벌은 지역주민들에게는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생태계로 보전가치가 뛰어나 서천갯벌의 훼손방지 및 지속가능한 이용을 도모하기 위하여 세계 습지의 날 (2008. 2. 1)에 서천 선언문에서 서천군 서면(월호리), 비인면(다사리, 장포리), 종천면(당정리) 및 유부도 일대의 연안습지 15.3㎢를 습지보호지역으로, 2009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서천갯벌은 202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어 생태보전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서천군청)
맨 왼쪽 위 송석리 송석항, 그 아래 매바위공원과 월포 해안, 앞쪽의 송림곶(串), 송림갯벌과 송림백사장을 조망하였다.
송림백사장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이곳의 모래에는 염분과 철분,우라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찜질을 하면 신경통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시대 포영이었던 이곳이 유배지로도 이용됐고 이 근처에 고려 문신 두영철의 유배막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의 풍요(風謠) 가운데 ‘모래 땅에 몸을 묻고 햇볕이 스며드는 열기에 몸을 푼다’는 구절이 있다고 전하는 걸 보면 그 시절에도 모래찜을 즐겼던 듯하다.(서천군지)
장항스카이워크(기벌포 전망대)에 오르면 멋진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데 제한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그냥 통과한다.
기벌포 해전은 나당 전쟁 중인 676년 신라와 당나라가 금강 하구인 기벌포(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벌인 전투로, 신라는 이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였다. 신라는 이미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설인귀의 수군이 덕적도 앞을 지나 금강 입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라군에게 전달되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로 향했다. 22번의 크고 작은 전투 끝에 신라가 승리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당나라는 상당수의 전함과 4,0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기벌포 전투로 신라는 작게는 서해에서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크게는 7년에 걸친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서천군청)
높이 15m, 길이 250m의 스카이워크(기벌포 전망대)는 서해바다와 갯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스카이워크 앞바다에서는 기벌포해전이 펼쳐진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가지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붉은 일몰은 장관을 이룬다.(서천군청)
기벌포 해전을 잘 설명한 안내판이다. 기벌포 해전 역사를 설명한 뒤 기벌포 평화 선언을 제안한다.
제1차 기벌포 해전 : 금강하구 즉 기벌포(伎伐浦)는 7세기 중반 백제·일본, 신라,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하였던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터이다. 그 이유는 기벌포가 백제 옹진·사비 도읍기에 군사적, 외교적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는 금강하구를 통하여 대당, 대일본과 문화 교류를 끊임없이 펼쳤다. 그러나 660년 7월 기벌포를 지키지 못한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을 쉽게 점령당하였다.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산둥반도를 출발하여 덕적도에 도착한 다음 기벌포로 들어왔는데, 해안이 진흙탕이어서 빠지므로 다닐 수 없어 버들자리를 펴 군사를 나오게 하였다. 기벌포 백제 수군들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맞이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패배했다.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은 백제 수도 사비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 후 소정방은 백제 의자왕과 신하 93, 군사 2만인을 이곳 기벌포를 경유하여 당나라로 갔다.
제2차 기벌포 해전(백촌강전투) : 663년 백제부흥군과 일본연합군은 백제 왕조 복원을 위해 백촌강(지금의 금강하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우지만 대패한다. 이를 백촌강 전투라고 한다. 이곳 금강하구는 백강구(白江口)로 백제, 일본, 신라, 당나라가 동북아시아 최초로 국제전쟁을 했던 곳이다. 663년에는 백제 부흥운동을 원조하기 위한 일본군 장수 여원군신(廬原君臣),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과 나당연합군이 결전을 벌인 곳이다. 663년 8월 13일 백제 부흥군 풍왕은 일본의 원군 2만 7천을 맞으러 백촌으로 간다. 8월 17일 당 수군은 웅진강에서 백촌강으로 나와 진을 친다. 일본군은 마서면 백사마을에 진을 치고 당나라 장군 유인궤, 유인원과 이 곳 백강구에서 싸웠다. 백촌강 전쟁은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백제부흥군과 일본군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때 일본군의 배 400척이 불탔으며, 「삼국사기」는 백촌강 전투를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었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제3차 기벌포 해전 : 신라의 대당 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금강하구 기벌포의 중요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마지막 해전에서도 확인이 된다. 676년 11월 기벌포(伎伐浦)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당나라 설인귀가 이끈 당 수군과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신라는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676년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사찬(沙餐),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설인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 걸쳐 결국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육지에서는 매소성에서, 바다에서는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의 군대를 격파함으로 신라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게 되었다. 기벌포 해전은 신라가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은 마지막 해전이다. 당나라가 한반도에서 물러감에 따라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고 한민족의 '민족' 개념이 생성되었다.
희망.... : 지금 바라다보고 있는 기별포 저 서해하다는 말이 없지만 잠깐만 눈을 감으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백제군, 신라군, 일본군, 당 군대가 목숨을 내걸고 부르짖는 함성이 귓전에 다가온다. 오늘날 1400여 년 전 역사적 사건을 거울삼아 대한민국, 일본,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최초 동북아시아 국제전쟁터 기벌포에서 '기벌포 평화선언'을 할 때이다.
송림 해안 방풍림 '송림산림욕장' 주차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송림산림욕장 입구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56코스 시점 2.8km, 종점11.4km 지점이다.
서해랑길 이정목 옆에 송림마을 솔바람 숲 설명안내판, 장항관광안내지도, 서천9경안내도, 서천종합안내도 등이 설치되어 있다.
서천 송림마을 솔바람 숲은 바닷가 모래날림과 바람으로부터 장항농업고등학교와 주변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1954년 장항농고학생들(제5회, 6회)이 약 2년생 묘목을 식재하여 조성된 숲이다. 70년생 곰솔(해송) 약 12,000본과 그 아래 자라고 있는 맥문동 등 초화류가 서해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태공간을 이루고 있는 명소로 2019년도에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장항송림산림욕장 바닷바람을 막기 위한 방품림으로 1954년 장항농고(현 장항공고) 학생들이 2년생 곰솔을 식재하였으며, 곰솔(해송)이 1만2천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이곳은 면적 275,703㎡, 산책로 1.5Km에 달하며, 해안을 따라 산책코스가 조성되어 바다와 함께 산책코스를 즐길 수 있다. 또한, 맥문동, 해국, 송엽국 등의 하층 식생을 조성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더한다. 장항송림산림욕장은 2019년 산림청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으며, 2021년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되었다.(서천군청)
옛 장항제련소 굴뚝이라고 불리지만 1979년에 새로이 세워진 굴뚝이다. 장항제련소는 1936년 전쟁물자 수탈을 위해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창설되어 일본의 구리제련 주생산시설로 사용되었다. 1937년 전망산 위에 90미터 높이의 굴뚝이 완성되어 해발 210m로 한때 항해와 항공의 목표물로 쓰이기도 했고,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우리나라 산업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이후 군산비행장 활주로가 짧아 비행기 이착륙에 굴뚝 높이가 장애가 되어 이 굴뚝이 철거될 위기가 있었지만, 1979년 일제가 건립한 굴뚝을 철거하고, 높이 120m로 재건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LS메탈(주) 장항공장 상징 굴뚝이 되었다.
송림산림욕장에서 장산로101번길로 나왔다. 56코스 종점 11.9km, 시점 2.3km 지점, 장암동 434지역이다.
장항읍 송림리에서 장암리로 넘어왔다. 장산로101번길을 따라 장산로로 나간다.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는 예전 해수가 들고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매립된 곳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성의 서벽과 서쪽 전방에 위치한 전망산 사이에는 본래 해수가 들고나는 지역으로 천연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매립되어 현재 공장부지와 전답으로 이용되고 있다."(서천군청)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장항제련소 굴뚝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제기 됐다. 120m의 바위산에 90m 높이의 장항제련소 굴뚝은 1970년대까지도 지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했었다. 충남도의회 서형달 의원은 10일 열린 제297회 임시회 1차 본회의 5분 발언을 통해 장항제련소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부각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했다. 서 의원은 “1936년 설립돼 국내 비철금속산업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한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지금은 아무 쓸모 없는 축조물에 불과하다”며,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관광객 집객 효과와 평화의 상징 장소로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100m 높이의 굴뚝으로 대변되는 장항제련소로 인해 장항은 한때 군산에 버금가는 신흥도시로 성장했다”면서도 “지금은 군산과의 개발 격차가 5배 수준으로 벌어져 있어 자본과 인구가 군산으로 물밀 듯 빠져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개원 4년째인 서천의 국립생태원과 개원 2년째인 국립해양자원관으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서천을 찾고 있으나, 정작 소비는 타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며 “서천군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시티저널, 이명우 기자. 2017.7.10)
자귀나무 개화시기는 장마시기와 맞물려 있다고 한다. 부채살처럼 펼쳐진 자귀꽃이 예쁘다.
장산로101번길을 따라와 LS메탈(주) 장항공장 앞에서 장산로와 만났다. 장산로를 건너 왼쪽 장암진성 입구로 이어간다.
장산로 장암터널 입구에서 오른쪽 화송길로 진입한다. 화송길 입구에 복원한 장암진성 석축이 있다. 왼쪽 산은 후망산이다.
장암리(長岩里)는 길고 큰 바위가 있는 나루터라 해서 장암진(長岩津)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항리(項里)를 합쳐 장항리라 했다. 그후 1938년 장항읍이 신설됨에 따라 장항리를 나누어서 항리(項里)와 새로된 마을을 합하여 송빈정이라 하고, 장암을 그대로 장암리라 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장암동이라 했다가, 현재는 장암이라 부른다.(서천군지)
화송길에서 철조망을 통해 장암진성을 살폈다.
서천장암진성(舒川長巖鎭城)은 해발 90.1m의 후망산(後望山) 남서쪽에 길게 드리워진 말미에 조선 중종 때 축성한 진성으로, 산성이라기보다는 평지성에 가깝다. 성벽은 해발 4∼43m 사이의 산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의 둘레는 640m로 전제형태는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있다. 현재는 성내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벽은 일제강점기에 석축을 헐어 장항제련소 공장부지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어 형태가 잘 남아 있지 않다. 성의 서벽과 서쪽 전방에 위치한 전망산 사이에는 본래 해수가 들고나는 지역으로 천연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매립되어 현재 공장부지와 전답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망산(前望山)에 오르면 금강하구와 서해바다가 한눈에 조망되며, 성의 후면에 위치한 후망산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남산성(南山城)(서천읍 남산리)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암진성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성, 서천포진성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중종 9년(1514)에 축성되었다.(서천군청)
화송길을 따라 LS메탈(주) 장항공장 정문 앞을 거쳐 해안으로 나간다.
국내의 금과 은, 동 등 비철금속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세워졌으며 건립 당시에는 연간 제련량이 1500t 정도였다. 당시에는 국내 유일의 비철금속제련소였다. 해방 후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계속 확장돼 1974년 1만 5천t, 1976년에는 5만 t 규모로 증설되어 우리나라 비철금속 제련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으며 산업화의 한 축을 이뤘다. 1989년 6월 럭키그룹(현 LG)에 인수되어 럭키금속 장항공장이 되었으며, 1990년 5월 연제련공정을 완전히 폐쇄하여 가공산업공정으로 전환하였다. 1995년 엘지(LG)금속 장항공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1999년에 엘지(LG)산전 장항공장으로, 2005년에는 LS산전 장항공장으로 변경되었다가 2010년에 LS메탈 장항공장으로 최종 변경되었다. 제련생산공정은 1989년 폐쇄되었지만 50여 년간 분진 및 중금속이 쌓이면서 주변 지역의 환경오염이 심각하다고 한다. 2007년 장항지역에서 생산된 벼와 대파에서 허용치 이상의 카드뮴과 납이 검출되어 전량폐기조치된 이후 국립환경과학원 정밀 조사에서 제련소 반경 4km 이내의 토양에서 비소와 중금속에 오염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경작금지 및 주민이주 조치가 내려졌으며 약 2천9백억원의 비용을 들여 15년간 주변 지역 오염을 정화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 중이다. 그 사업 중 하나로 서천군에서 장항송림산림욕장을 조성하였다.(나무위키)
오른쪽은 장암리 방파제, 왼쪽 환경개선 및 편의 도모를 위해 친수시설이 설치된 장암리 친수공원으로 진입한다.
친수공원 해안에서 장항읍 시가지를 살핀다. 왼쪽에 장항읍 신창리 (주)풍농장항공장단지, 오른쪽에 장항항이 자리한다. 당그매 서쪽의 모래톱을 모래터라 하며 모래찜질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는데, 이곳이 맞을까?
금강 하구에 장항항이 중앙에 있으며, 그 위 동백대교, 더 위쪽에 금강하굿둑이 있다. 오른쪽은 군산 시가지 해망동과 소룡동이며, 수시탑이 있는 월명공원이 오른쪽에서 2/5 지점에 있는것으로 가늠된다.
장항의 발전상을 살펴보면 1930년 10월 장항항이 개항되고, 1931년 8월에 경남철도 장항선이 개통되었으며, 1937년 시가지 계획공사가 착수되었다. 1938년 10월 1일에 마동면 일부와 서남면 일부를 흡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52년 7월 5일에 국항으로승격되었다. 1956년10월 10일 서천경찰서가 이전되고, 1964년 7월 11일에는 명실공히 국제항으로 승격되어 항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후 1989년 8월 10일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되었으나 사업의 지연으로 장기간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정부의 내륙 산단조성사업, 국립해양자원관 조성사업,국립생태원 조성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어서 해안 시대의 중핵 도시로의 부상이 기대되고 있다.(서천군지)
동남쪽을 살피면 금강기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벋어내리고 맨 왼쪽에 동백대교와 군산 내항이 가늠된다. 행정구역은 왼쪽 지역은 월명공원이 있는 군산시 해망동이며 그 오른쪽은 군산시 소룡동이 오른쪽 끝까지 차지하고 있다.
서남쪽을 살피면 중앙에 군산일반산업단지와 오른쪽 끝에 군산 외항이 조망된다. 바다 왼쪽에 야간 항행의 안전을 위한 해로 표시등인 붉은 등간(燈竿), 오른쪽에 청색 전망산 등대가 있다.
서쪽을 살피면 해안에 징임리 빙피제와 전망산에 LS메탈(주) 장항공장 상징 굴뚝이 솟아 있다.
장항제련소가 우리나라를 수탈한 증거로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통계가 있다. 만주사변 직전의 1930년에는 한국의 광산액이 2,465만 원이었는데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에는 11,043만 원으로 격증하였고 더욱이 1942년에는 44,542만 원으로 상승하였다. 12년 사이에 18배로 늘었다. 처음에는 광업의 중점은 금광이었다. 즉 금 생산이 목적이었으나 점차로 철, 석탄, 중석, 흑연, 마그네사이트, 수연 등으로 옮겨졌다.(이기백, 韓國史新論, 광산자원의 약탈, 413쪽에서 발췌 인용) 그것은 이러한 광산물이 군수공업에 직접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통계는 한국은 일본의 병참기지화가 되고 있었고 수탈을 위한 공업화와 식량공급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거기다 한국은 일본 상품의 시장이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장항제련소는 그런 수탈에 맨 앞에 있었다, 장항제련소는 비철금속제련소로서 한국에서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굴포천의 '그때 그곳에 있었다' 블로그에서 인용)
장암리 친수공원 언덕에 올라서서 친수공원, 전망산과 후망산 장암진성을 뒤돌아보았다. 오른쪽에 장산로 장암터널이 보인다.
장암리는 제련소 굴뚝이 명물이었으나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럭키금속으로, LG니꼬로 회사가 바뀌어갔다. 그러나 아직도 제련소 굴뚝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마을을 굽어보고 있으나 철거설이 나돌아 주민들의 찬반 의견이 분분했었다. 장암리는 마을 뒷산에 신당이 있다 해서 당그매라고 하는 곳이 있고, 고려 때 장암진이라 하던 성터가 있는데 왜구와 크게 싸우던 성터이다. 조선 중종 10년에 영성을 크게 쌓았으며, 큰바위에 웅거한 해문이 있는 요새였으나 지금은 모두 허물어져서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성을 중심으로 성밖이라 부르는 곳과 성안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성안 동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숫망매 또는 후망산이라 하며, 암망매 또는 망산, 망월산 또는 전망산이라 부르는 곳에 현재 LG니꼬가 자리잡고 있다. 성밖 동쪽 모퉁이를 뱃섬모랭이라고 부르며, 숫망매 꼭대기에 두꺼비집처럼 생겼다 해서 두꺼비바위 또는 성암, 마귀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는데, 옛날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서천군지)
언덕 위에서 장암리 해안을 내려보았다. 전망산 뒤쪽에 송림포구와 기벌포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을 기벌포라고 하는 것 같다.
성안 서남쪽에 있는 지역을 질구지라 한다. 이 지역은 곶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제곶, 제곶자리라고도 하는데, 지형이 말의 갈기처럼 생겼다 한다. 질구지 앞을 질구지개라고 한다. 여기가 지벌포(持伐浦)라는 포구로 백제 충신이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우리나라에 쳐들어 오거든 육군은 숯고개를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지벌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깥에서 쳐부숴야 한다고 말했으나, 왕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적이 쳐들어오도록 기다렸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했는데, 그 지벌포가 바로 이곳이라 한다. 지벌포, 지화포, 손량, 장암포, 서천포, 백강, 진포 등 많은 이름이 있다. 서천팔경 중의 한 곳인 장암모각(長巖暮角)은 월포리쪽에서 보면 장암리의 바위가 두 뿔의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곳에 노을이 비쳐든 모습이 장관이었다 하는데, 풍류를 아는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기에는 지금의 모습은 너무 많이 변해 있다.(서천군지)
장항읍 장암리에서 신창리로 넘어왔다. 장항항과 동백대교, 군산 내항과 그 오른쪽 군산시 해망동과 소룡동이 조망된다.
장항읍 신창리 장항도선장 입구까지 장산로를 따라간다.
본래 서천군(舒川郡)의 남쪽이 되므로 남부면(南部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서부면(西部面)의 19개 동리를 합할 때 서부면과 남부면의 이름을 따서 서남면(西南面)이라 하고 1929년에 간척지를 메우고, 1931년에는 장항선(長項線)이 개통되고, 1937년에는 장항항(長項港)이 완성되어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 1938년 10월 1일에 장항읍이 되었다. 긴 목에 읍이 생겼다 해서 장항(長項)이라 부른다. 집성마을으로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60여 호, 추계 추씨(秋溪秋氏) 30여 호, 온양 방씨(溫陽方氏) 30여 호, 용궁 전씨(龍宮全氏) 20여 호, 밀양 박씨(密陽朴氏) 20여 호가 있다.(장항읍행정복지센터)
장산로 끝에 장암터널과 후망산이 보인다. (주)풍농은 질소화합물, 질소, 인산 및 칼리질 화학비료 제조업체라고 한다.
풍농비료공장이 있는 자리를 비행장터라 하는데, 이는 일제시대 일인들이 3만평의 부지에 비행장을 만들어 대륙 침략기지로 활용하려 했으나 조성만 해놓고 완성을 보지 못했다 하며, 지금은 일부가 논으로 되어 있다. 이 지역을 신시장이라고도 하는데 전에 창선리 쪽에 서던 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시장은 5일장으로 인근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이용했으나 장소가 비좁고 복잡하여 지금은 창선리로 이전했다.(서천군지)
장산로 장항항 입구 벽에 서천9경 중 한 곳인 춘장대해수욕장 타일화가 조성되어 있다.
신창리(新昌里)는 조선초 1413년(태종13)에 서천군에 속했고, 조선말 서천군 남부면의 지역으로 갈대만 무성하던 곳에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1938년에 이곳을 매립해서 새로 마을을 만들고 삼기정이라 하여 장항읍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신창동이라 했다가 현재 신창리로 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서천경찰서를 비롯하여 우체국, 군산해운항만청장항출장소, 대한통운등관공서가 자리잡고있으며, 30%가 상가로 형성되어 있다.(서천군지)
장항항 앞을 통과한다.
장항항은 1938년부터 항구기능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장항지구의 신도시 개발 및 공업단지 건설로 수출입 화물과 연안화물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권역항만으로 운영되며, 충청권 및 중부권의 교역 창구로서의 기능을 할 것이다. 항구 주변지역에 해운항만에 영향을 미칠만한 공업단지가 발달하지 못하여 항구의 기능이 미약하였으나 엘지(LG)제련소 등의 원료 및 제품을 수송하면서부터 기능이 증대되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항과 접하고 있어 군장항으로 통합개발되고 있다. 2009년 현재 주요 항만시설은 안벽 330m, 잔교 2기 등이 있다. 선박접안능력은 모두 3척으로 1만톤급 2척, 1천톤급 1척 등이다. 2001년에는 1만톤급 선박 2척이 접안가능한 안벽이 준공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장항항은 소형화물, 벌크시멘트, 관공선 등이 이용하고 신항부두는 벌크시멘트, 금속류, 잡화, 비료원료 등의 화물을 취급한다. 1989년부터 이웃한 군산항과 연계하는 군장항 건설사업이 진행되어 연간하역능력 3,097만톤으로 확대하고 선박접안능력은 35척으로 강화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천소방서와 장항공업고등학교로 가는 신창서로 출입구가 건너편에 있다.
한라시멘트 주식회사 장항유통기지를 보며 장산로를 따라간다.
서천 : 백제 설림군(舌林郡) → 신라 경덕왕 15년 서림군(西林郡) → 조선 태종 13년 서천군(舒川郡)
한산 : 백제 마산현(馬山縣) → 고려 초 한산현(韓山縣) → 조선 태종 13년 한산군(韓山郡)
비인 : 백제 비중현(比衆縣) → 신라 경덕왕 15년 비인현(庇仁縣) → 조선 고종 32년 비인군(庇仁郡)
서천9경 중 금강하굿둑을 홍보하는 타일화를 거쳐 장항해양수산사무소 입구로 향한다.
서천군의 행정구역은 삼국시대 설림(서림)·마산·비중(비인)으로 나뉘어 있다가 고려시대 서림(서주)·한산·비인으로 일컬어졌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년) 처음으로 서천이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이 서천군으로 통합됐다.1914년 4월 1일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을 서천군으로 통폐합하였다.(서천군지)
장항해양수산사무소가 앞에 보인다. 안쪽에 한라시멘트 주식회사 장항유통기지가 있다.
건너편 신창동로 출입구에 CJ대한통운택배가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서천경찰서와 장항우체국이 나온다.
옛 장항역과 장항항을 연결하는 옛 철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장항선의 종착역 장항역은 폐쇄되고 새 역사(驛舍)로 이전한 장항역은 군산과 익산으로 이어져 장항선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오른쪽이 장항도선장, 장산로 장항도선장 입구에 서해랑길 서천 55·56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장산로 육교는 장항도선장과 창선1리를 이어준다.
장항도선장 입구에 서해랑길 서천 55·56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2주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
거리 14.2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도 쉬움. 실제 탐방 결과는 15.41km, 4시간 17분이 소요되었다. 매바위공원을 한 바퀴 돌아서 거리가 늘어난 것 같다.
서해랑길 서천 55·56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56코스 역방향 탐방 종주를 기념한다.
장항도선장 공원 앞 터에 운동장이 조성되고 육교로 올라가는 길이 빙그레 돌아가는 곡선 주로로 조성되어 있다.
탐방을 끝내고 장항도선장 육교 위로 올라와 조망한다. 운항을 멈춘 장항도선장, 바다 건너편 군산시 해망동 금란도의 홍등대, 그 뒤 월명공원의 수시탑, 소룡동 지역의 아파트 단지, 오른쪽 점방산에서 왼쪽으로 내리벋는 금강기맥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항도선장 공원 앞에 서해랑길 서천 55·56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지난 2주 전 서해랑길 55코스에서 힘겹게 걸어왔던 장산로 동쪽, 창선1리 지역이다.
창선(昌善)1里는 장항읍사무소가 자리잡고 있는 행정 중심지로 철길과 중앙로를 기점으로 바다 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가 당초 갈대밭이었는데, 1929년에 개척하여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그후 1938년 장항읍이 신설됨에 따라 본정(本町) 일정목(一丁目)이라 하다가 1945년 8월15일 광복과 더불어 창선동(昌善洞) 1가(一街)라 했고, 1988년 5월 1일 법률4004호에 의해 동에서 리로 변경되면서 창선1리가 된 마을이다.(서천군지)
한라시멘트 건물 뒤로 전망산의 엘에스메탈(주) 상징 굴뚝, 오른쪽 (주)풍농 장항공장단지 굴뚝 뒤로 후망산이 보인다.
왼쪽에 (주)풍농 장항공장단지, 중앙에 서천경찰서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신창리 맨 뒤쪽 송림리 해안을 돌아왔다.
왼쪽은 신창리 지역, 철로 오른쪽 지역이 창선1리 지역이다. 옛 장항역은 중앙 뒤쪽 창선2리 지역에 있다. 그곳까지 다녀온다.
창선(昌善)2里는 장항에서 지가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장항읍 시가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처음 개펄이었을 당시 성주리산 기슭을 깎아 매립한 지역으로 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개간 사업에 참여했다 하는데, 공사시 인부들을 수용하던 집을 한밭집이라 했다 한다. 따라서 장항 시가지에서 최초로 인가가 형성된 곳이다. 새로 생긴 지역이라서 신부락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으며, 현재 19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항역과 버스터미널, 한전장항지점, 농협군지부장항지점, 수산물검사소 등의 기관이 자리잡고 있다.(서천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