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73. 【이서공원·이공제비】(덕수이씨)
이공제비에 새겨져 있는 놀라운 비밀 몇 가지(2)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
프롤로그
바로 앞의 글에서 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했다. ‘이서’ 공(公)의 송덕비 전면의 큰 글자, 즉 ‘이공제(李公隄)’ 석 자를 쓴 이가 당시 12살의 꼬마 ‘이학철(李鶴喆)’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대구사람들이라면 ‘이서’와 ‘이공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이지만, 타지역인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천(新川)’과 정조 때 대구 판관을 지낸 ‘이서’ 공과의 인연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 뒤이어 이공제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비밀 몇 가지에 대해서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오늘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이서공원 비각 앞에 놓여 있는 안내표석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아래는 표석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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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제비(李公隄碑)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
여기 있는 3기의 비석들은 조선시대 신천(新川)의 치수에 공이 컸던 목민관 두 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당시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운 송덕비(頌德碑)이다. 예로부터 대구분지는 용두산에서 건들바위를 돌아 반월당과 달성공원 앞을 지나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신천의 범람으로 인해 큰 비가 올 때 마다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따라 1778년(정조2) 당시 대구판관이던 이서(李溆)공이 사재를 털어 지금의 신천을 따라 물길을 돌리는 대규모 치수사업을 시행하여 홍수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막았다. 이러한 이서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은 이공제비를 세우고 중국 송나라 소식(蘇軾)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 축조한 제방을 소공제라 명명한 것을 본 따 신천제방을 이공제라 칭하였다.
비각의 왼쪽에 있는 비는 1797년(정조21) 세운 것이며, 가운데 비는 왼쪽의 비가 초라하다고 하여 1808년(순조8)에 다시 세운 것으로 모두 수성교 서편에서 옮겨 왔다. 오른 편의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대구군수 이범선(李範善)공이 1898년(광무2)에 큰 홍수로 인해 이공제 하류 부분이 훼손되어 대구읍성이 위험하게 된 것을 단시일 내에 보수하여 대구를 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듬해 백성들이 세운 송덕비로 이공제비와 함께 문화재로 보호해 오고 있다.
대구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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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장’ 명의의 이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내용이 담고 있다.
첫째, 여기 있는 3기의 비석은 모두 대구부민들이 세운 것이다. 신천의 치수에 공을 세운 ‘이서’, ‘이범선’ 두 수령의 송덕비이다.
둘째, 전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의 2기는 대구 판관 이서의 송덕비이다. 그는 사재를 털어 신천의 물줄기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제방을 쌓아 수재를 막아냈다. 이에 대구부민들은 이 제방을 ‘이공제(李公隄)·이후제(李侯隄)·이후언(李侯堰)’이라 칭하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이공제(李公隄)’ 비를 세웠다. 맨 좌측의 것이 정사년(1797·정조21)에 세운 것이고, 그 우측이 10여 년 뒤인 무진년(1808·순조8)에 세운 것이다.
셋째, 나머지 1기는 대구군수 이범선의 영세불망비이다. 그는 1898년(광무2)에 큰 홍수로 신천 하류의 제방이 무너지자, 신속하게 이를 보수함으로써 대구부민들에게 큰 은택을 베풀었다. 이에 대구부민들이 그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 송덕비를 세웠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위 3가지의 내용들 중에서 두 번째의 내용을 두고 ‘이설(異說)’이 제기되고 있다. 그 이설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천은 예나 지금이나 물줄기의 위치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판관 이서는 치수를 위해 신천의 물줄기를 돌린 것이 아니라, 범람이 잦은 지금의 수성교 인근에 제방을 쌓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일제 강점기하에서 작성된 몇몇 보고서에서부터 왜곡되기 시작해 현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근래에 제기된 이 이설에 한 표를 던지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고지도·고문헌’ 등을 통한 사실 검증에서 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대구광역시에서 제공하는 각종 자료들을 보면 ‘이서가 신천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예전의 텍스트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3기의 비에는 판관 이서가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았다는 내용이 없다
자! 그건 그렇다손 치고 필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기존의 이설에 대한 보충설명과 함께 또 다른 이설(異說) 하나를 더 제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러한 내용들은 이서공원 비각 내에 있는 3기의 비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내용들이다.
먼저 언급할 내용은 기존의 이설에 대한 보충설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천의 물줄기는 옮겨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3기의 비문 어디에도 신천의 물줄기를 옮겼다는 내용은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비문 전문을 따로 소개하겠지만, 비문에는 ‘제방을 쌓았다[防築·築]’거나 ‘무너진 곳을 따라 고쳤다[隨毁完築]’라는 표현만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필자가 새롭게 제기하는 이설 한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자. 참고로 다소 의외의 내용들이어서 이야기를 꺼내기가 상당히 당황스럽고 조심스럽다. 널리 해량해주기 바란다. 무슨 말인고 하니 3기의 비문 어디에도 판관 이서가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았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비슷한 내용을 한 번 찾아본다면 ‘무진년 이공제’ 비문에 나타나는 한 대목을 들 수 있겠다. 내용인즉슨 판관 이서가 대구부민들의 세금과 부역을 크게 덜어주었다는 것인데, 제방축조와는 별개의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유로 해서 세상에는 이서 공(公)이 사재를 털어 신천제방을 쌓은 것으로 알려진 것일까?
이것은 추측컨대 이서 공의 묘지명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들에 그러한 내용들이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 선생이 찬한 묘비명에는 관련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莅大邱捐俸築堤 起偃虹亭 邑人賴之 號曰李侯堰···’
(대구에 부임하여 녹봉을 출연하여 제방을 쌓고 홍정을 오르내리니, 고을사람들이 이를 일러 이후언이라 했다.)
여하튼 현재 이서공원에 남아 있는 ‘정사년 이공제비’와 ‘무진년 이공제비’ 그리고 ‘군수이후범선불망비’에서는 판관 이서 공이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았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시간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가도록 하자.
2016.03.05
砧山下 풍경산방에서
송은석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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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이공제비각
좌측에서 부터 정사년(1797) 이공제비, 무진년(1808) 이공제비, 기해년(1899)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비의 뒷모습
정사년(1797) 이공제비
무진년(1808) 이공제비
기해년(1899)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경시방축(經始防築) -- 정사년 이공제비
경시방축(經始防築) -- 무진년 이공제비
이후휘서시축동천기비(李侯諱溆始築東川其費) --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