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증인은 나이들어 허리는 굽었어도
대양을 저어가는 노와 같이
아직도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체구를 지녔다.
황금빛의 틀어진 머리는 옥수수 비단결 수염처럼
어깨 위까지 덮고 있다.
이마는 넓고 코 위에는 뿔테안경을 쓰고 있어
세상에 드문 현인같아 보였다.
스무 자녀의 아버지요,
백 명이 넘는 손자들이 무릎에 올라타고
그의 큼직한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즐겨 듣는다.
그는 전쟁 때 4년이라는 긴 시간을 영국 편이라 하여
포로가 되어 프랑스군의 진지(陣地)속에서 괴로움을 겪었다.
이제 그의 조심성은 더해 갔지만,
간교하거나 의구심은 전혀 없었고,
지혜는 원숙해지고, 인내심은 강하고, 아들처럼 순진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했다.
그럴 것이 그는 아이들에게 숲속의 요술장이 이야기,
한밤중에 나타나 말에게 물을 주는 요정 이야기,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의 죽은 유령, 하얀 레티시가
보이지 않게 아이들 방으로 출몰한다는 이야기,
또는 크리스마스 전날밤에 암소들이 외양간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옛 이야기,
거미를 호두껍질 속에 넣어 가슴에 걸고 다니면
열병이 낫는다는 전설,
네잎 크로버와 말편자가 신기한 힘을 가졌다는 이야기 등등,
마을의 전설집에 들어있는 모든 전설들을 들려주었다.
대장장이 바씰은 난로 옆의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파이프의 담뱃재를 털고 오른팔을 내밀면서,
'르블랑 선생, 마을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저 배들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면 말해주시오.'
큰 소리로 묻자, 공증인은 겸손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나로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 나도 남들보다 더 알지 못하지만,
나쁜 의도로 왔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아요.
평화로운 우리를 건드릴 아무 이유가 없지않겠어요?
성질이 급한 대장장이가 소리를 쳤다.
'도대체, 우리는 모든 일에 꼭 이치니, 까닭이니,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날로 옳지 못한 일이 행해지고,
힘이 강한 자가 정의가 되는 세상에.'
공증인은 이 격한 소리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은 의롭지 않아도 신은 의로우십니다.
결국엔 정의가 이깁니다.
내가 포트 로얄의 프랑스 감옥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여러 번 위안을 받은 전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이 공증인이 언제나 즐겨 반복하여 말하는 이야기였다.
'이름은 잊었지만,
옛날 어느 도시의 광장 한가운데에 기둥이 서 있고,
그 위에 정의의 신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왼손에는 저울이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의 법률이나 백성들의 마음과 가정에
정의가 군림하고 있다는 표시였지요.
새들도 저울의 접시에 둥지를 마련했었고
햇빛에 번쩍이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 나라의 법률이 문란해지고
힘은 정의를 대신하여 약한 자는 학대를 받고
강한 자가 철퇴를 휘둘렀지요.
그 무렵,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진주 목걸이가 없어졌는데,
오래지 않아 그 혐의가 그 집의 하녀였던 고아 소녀에게 쏠렸지요.
재판 결과는 이 소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은 정의의 동상 밑에서 집행되었소.
그녀의 결백한 영혼이 하늘에 계신 신에게 오르자
그 도시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고,
우뢰와 번개가 무서운 기세로
동상 위에 떨어져 왼손에서 저울이 떨어져
돌바닥 위에 내동댕이 쳐졌어요.
그 저울 접시 속에 까치가 둥우리를 틀고 있었는데
진흙을 이겨바른 둥우리 속에
진주 목걸이가 박혀 있더라는 거요.'
이야기가 끝나자
대장장이 바씰은 말이 없었지만 승복하지 않았고
말을 하고는 싶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마치 겨울날 유리창에 수증기가 이상한 모양으로 얼어붙듯이
그의 온갖 생각은
얼굴의 주름살 하나하나에 응결되어 있었다.
그때 에반제린은
식탁에 놓일 유기 등에 불을 밝히고
백랍의 큰 잔에 가득히 넘치도록
그랑쁘레 마을에서 독하기로 이름난
집에서 담근 호두빛의 에일(ale) 주(酒)를 따라놓았다.
한편 공증인은 호주머니에서 종이와 잉크를 꺼내어
침착하게 날짜와 두 사람의 나이를 쓰고
신부가 지참할 양이 몇 마리이고
소가 몇 마리인지 기록하였다.
모든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서류가 적당하게 잘 끝나고,
여백에 공증인의 도장이 태양같이 선명하게 찍혔다.
농부 베네딕트는 가죽 지갑에서 은화를 꺼내어 식탁에 놓고,
세 곱이나 되는 공증료를 치렀다.
공증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부와 신랑에게 축복하며 큰 예일 주 술잔을 높이 쳐들어
그들의 행복을 빌며 마셨다.
그리고는 입술의 거품을 닦은 후
근엄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남은 사람들이 난로곁에 묵묵히 앉아 침묵에 잠기자
에반제린은 방 한 구석에서 체스판을 가져왔다.
곧 체스가 시작되었다.
노인들은 의좋은 내기에서
잘 둘 때나 실수를 할 때나 한결같이 웃기만 하고,
한 사람이 장군을 부를 때나, 멍군이 틀릴 때도 웃기만 했다.
한편 좀 떨어진 곳에서
사랑하는 두 젊은이가 황혼의 어둠 속에 창가에 앉아서
파리한 바다와 목장의 은빛 안개 위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하늘의 무한한 목장에는 천사들의 물망초인
아름다운 별들이 고요 속에 하나 둘씩 꽃피기 시작했다.
- Gabriel and Evangeline
저녁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이윽고 종루(鐘樓)에서
마을의 취침 시간인 아홉시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손님들은 일어나서 집을 떠나가고
고요만이 집안을 에워쌌다.
문간에서 주고 받은 여러차례 작별 인사는
에반젤린의 가슴 속에 여운을 남겨 기쁨으로 설레이었다.
벽난로 속의 불에 조심스럽게 재를 덮고,
농부가 참나무 층계를 소리내어 올라가자
에반젤린도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 뒤를 따랐다.
이층의 어둠속으로 빛나는 그림자가 올라가는데,
그것은 램프의 불빛이라기 보다는
처녀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光彩)였다.
그녀는 조용히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방은 검소하였다.
흰 커튼이 드리워졌으며 크고 높은 옷장이 놓여 있는데
옷장의 넓은 시렁에는
에반젤린이 손수 짠 린넨과 양털 옷감들이
정성스레 개어져 들어 있었다.
이것은 주부로서의 솜씨좋은 증거로써
결혼 때 그녀의 신랑에게 가지고 갈
양이나 소보다 더 좋은 훌륭한 혼수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램프의 불을 껐다.
부드럽게 빛나는 달빛이 창으로 흘러들어와 방안을 밝히자,
넘실대는 대양의 물결처럼 처녀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
달빛어린 방안에 백설같이 흰 발로 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과수원의 나무 그늘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이
램프의 빛과 그녀의 그림자를 고대하고 있으리라고는.
그녀 또한 연인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달빛을 가리는 구름의 그림자가
방 마루 위를 스쳐가 잠시 방안이 어두워질 때
슬픈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언듯 스쳐지나갔다.
창 밖을 내다보니,
마치 아브라함의 천막에서 쫓겨난 어린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정처없이 떠나듯이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자
별 하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Ⅳ
이튿날 아침,
태양은 그랑쁘레 마을에 상쾌하게 솟아올랐고,
마이나스 포구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대기 속에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 여러 척의 배들이
물위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던지며 정박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마을은 생기가 돌고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수백의 손들이 아침의 황금문을 떠들썩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웃과 농장에서, 근처 조그만 마을에서
쾌활한 아카디의 농부들은 나들이 옷차림으로 몰려들었다.
수레바퀴 자국이외는 인적이 없는 풀밭 위로
여러 목장에서 떼를 지어 나타나
한데 모여서 큰 길로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주고 받는 아침 인사와 즐거운 웃음 소리는
밝은 대기를 한층 더 밝게 했다.
그러나 정오가 되기 전에
마을에서 일하는 모든 소음(騷音)도 잠잠해진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문간에는 떼를 지어모여
즐거운 햇빛 속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집집마다 손님이 넘치고 반갑게 맞으며 대접한다.
이 순박한 마을의 사람들은 형제처럼 지내고 있어
모든 것을 내 것 네 것 없이 나눠 갖고 살고 있었다.
베네딕트 집에서는 더욱 풍성하게 대접한다.
에반젤린이 아버지 손님들 사이에 서 있을 때
미소를 띈 얼굴은 더욱 빛나고
고운 입술에서 환영의 말이 새어나오고
대접하는 잔에는 축복이 가득 찼다.
광활한 하늘 밑에
황금빛 과일이 무겁게 달려 있는 과수원의
향기로운 대기 속에서 결혼 잔치가 벌어진다.
저쪽의 그늘진 현관에는 신부와 공증인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마음 착한 베네딕뜨와
건장한 바씰이 있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사이다 제조기와 벌통 옆에는
화려한 조끼차림의 명랑한
바이올린 켜는 미카엘이 자리잡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눈같이 흰 머리 위로
나뭇잎의 그림자와 그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아롱거렸다.
그의 명랑한 얼굴은 타다 남은
그루터기에서 재를 털었을 때
새롭게 피어 오른 석탄 불같이 벌겋게 빛났다.
나이든 미카엘은 바이올린의 떨리는 음률에 맞추어,
‘샤아뜨르의 주민’ 과 ‘던케르크의 종소리’를 노래 부르고,
나막신 신은 발로 마루를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기도 했다.
과수원 나무 그늘과 목장 가는 길가에는
원무(圓舞)가 맴돌고 있었다.
처녀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는
베네딕뜨의 딸 에반젤린,
젊은이 가운데 가장 점잖은 사나이는
대장장이의 아들 가브리엘이었다.
이렇듯 한낮이 지나갔다.
바로 그때 종루에서는 모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초원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남자들은 성당에 모이고,
바깥 정원에는 여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묘옆에 서서
숲에서 꺾어온 가을 나뭇잎이며 사철나무 가지로 화환을 만들어
묘석 위에 놓았다.
그때 함대에서 온 병사들이 뽐내며 성당의 문을 들어섰다.
그러자 그들의 쇠북소리가
천장과 창너머로 요란히 울려 퍼졌다.
그 메아리 소리가 일순간에 그치고
육중한 문이 조용히 닫혔다.
군중들은 침묵 속에 군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때 사령관이 일어나 제대(祭臺)의 층계를 올라
봉인된 국왕의 위임장을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이 모이게 된 것은 폐하의 명령에 의한 것이오.
폐하의 인자함과 친절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했는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나의 성품과 기질로는 내가 하려는 일이 괴롭고,
여러분들에게 슬픈 일인 줄 아오.
그러나 나는 폐하의 뜻을 받들고 복종하여
이를 전하지 않을 수 없소.
그대들의 토지와 집과 모든 재산을 국왕께서 몰수하고,
그대들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어명이오.
이주한 뒤에는 그 곳에서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백성으로 살기를 기원하오.
폐하의 뜻에 따라 오늘부터 그대들은 포로라고 선언하는 바이오! ‘
무더운 한 여름날, 조용하고 청명하게 개인 날인데,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밭의 곡식들을 두드리고, 창의 유리들을 산산이 부수고,
태양을 가리고,
지붕의 짚을 몰아가 땅위에 흩어지게 하고,
가축들이 울부짖으며 달아나 울타리를 부수려고 하듯이
사령관의 그 말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엄청난 놀라움을 주었다.
놀란 나머지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마침내 다시 제 정신이 들어
슬픔과 분노의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드높아 갔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움직이자
모두가 미친듯이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망가려는 생각은 헛된 일
다만 울음소리와 불길 같은 저주의 외침만이
성당 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의 머리위로 우뚝하게
양손을 높이 치켜든 대장장이 바씰의 모습이
마치 성난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돛대처럼 나타났다.
‘횡포한 영국놈들을 타도하자.
우리는 그들에게 충성을 다짐한 일이 없다.
우리의 집과 곡식을 약탈하는 외국군을 죽여라!’
그는 더 외치려 했으나 무자비한 병사들의 손이
무참히도 그의 입을 내리쳐 쓰러뜨렸다.
노여움의 싸움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제대(祭臺)쪽 문이 열리더니
펠리시앙 신부가 근엄한 얼굴을 하고 들어와서
서서히 제단 위로 올라와
성스러운 손을 들어 손짓하여 소란을 진정시키고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비장한 어조로 시계소리처럼 선명하게 말하였다.
‘ 그대들은 무엇을 하는가?
내 생애의 사십 년 동안 그대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써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왔거늘,
나의 수고, 자지 않고 밤새워 어버이를 뵈오러 가는
여행 같은 기도와 고행의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벌써 사랑과 용서의 교훈을 모조리 잊어 버렸는가?
이 집은 평화의 왕의 집인데
그대들은 난폭한 행동과 마음으로 이 집을 모독하려 하는가?
보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을!
저 슬픔이 가득 찬 눈에는
자비와 거룩한 연민들이 얼마나 있는가를!
들을지어다, 그의 입술이
‘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는 기도를!
악인들에게 습격당한 우리도 지금 그 기도를 반복합시다.
‘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를 반복합시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듣는 이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
그들에게 감정 폭발의 뒤를 이어 회오의 울음을 울게 했다.
‘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신부의 기도를 따라 하였다.
이윽고 저녁 미사시간이 왔다.
촛불이 제대((祭臺)에서 빛나고 있다.
신부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침통하였고,
회중은 입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호응하였다.
그들은 성모송(聖母誦)을 부르며,
무릎을 꿇고 앉아,
믿음으로 황홀해진 그들의 영혼은
마치 하늘로 오르는 엘리야와 같이
열렬히 기도를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
불행한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고,
여인과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이 집 저 집으로 갈팡질팡 했다.
해질 무렵,
마을의 거리를 신비스런 광휘로 빛나게 하고
농부들의 집들을 하나하나 금빛의 지붕으로 이어주고
창문들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기우는 햇빛을
오른손으로 가리며 에반젤린은 문간에 서 있었다.
식탁에는 이미 새하얀 테이블보가 펼쳐져 있고
밀빵과 들꽃들의 향기 그윽한 꿀이 놓여 있었다.
큰 잔의 예일주가 있었고 목장에서 금방 가져온 치즈도 있었다.
그 식탁 윗 자리엔 아버지의 큰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향기로운 넓은 풀밭 위의 나무가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 그녀의 가슴에는
그것보다 한층 더 짙은 그림자가 어리어 있었다.
그 마음의 들녘에서는
자애와 자비와 사랑과 희망,
관용과 인내의 훈훈한 하늘의 향기가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을의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집안 일을 걱정하고,
아이들의 피곤한 다리를 달래며,
저무는 들길을 허전한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여인들의
수심어린 마음은 에반젤린의 안색과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
시나이 산을 내려오는 예언자처럼
크고 붉은 태양은 그 빛나는 얼굴을
황금 빛으로 가물거리는 안개처럼 가리었고
성당의 저녁 종소리는 은은히 마을에 울려 퍼졌다.
- Evangeline going to church
그 무렵, 에반젤린은 황혼 속에 성당 옆을 서성이었다.
성당안은 고요하기만 했고
그녀는 문 옆과 창가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들여다 보았으나 허사였다.
감정에 북받쳐 떨리는 목소리로
‘가브리엘!’ 하고 외쳤으나,
죽은 자의 무덤이나 산 자의 무덤과 같은
성당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난로에는 불이 가물거리고
식탁에는 손대지 않은 식사가 놓여 있는 채
방마다 비어 공포의 그림자가 감돌고 있었다.
신부가 에반젤린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곳까지 왔을 때
깜박이는 불빛 속에
여위고 바늘을 떼낸 시계처럼 생각도 감정도 잃은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에반젤린은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말을 붙였으나
아무 말이 없었고 시중을 들어도 음식을 권해도 허사였다.
에반젤린의 아버지는 움직이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고
정신나간 눈초리로 오로지 흔들리는 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민(憐憫)에 어린 신부(神父)가
‘축복이 있으시길’ 하고 작은 소리로 말해주었다.
좀더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메어
마치 문턱에 발이 걸린 아이처럼
말이 입술에 걸린 채 나오지 않았고
눈 앞에 벌어진 정경과
엄연한 슬픔의 존재 앞에 말이 막혀버렸다.
다만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
인간들의 죄악과 슬픔에도 흩어지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고 있는 별들을 쳐다보면서,
말없이 처녀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주저앉아 말없이 함께 울었다.
갑자기 남쪽에서부터 한가닥의 빛이 솟아 올랐다.
그것은 가을에 핏빛의 달이
지평선 위에서 하늘의 수정벽을 기어올라
타이탄이 풀밭 위에 백 개의 손을 펼치며
바위와 시내를 휘어잡고
커다란 그림자를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은 점점 더 넓게넓게 빛나서
마을의 지붕을 비치고,
하늘과 바다를 비치고,
항구 밖에 정박한 배들을 비추었다.
빛나는 연기 기둥들이 솟아서 화염의 섬광은
순교자의 손과 같이 떨며
겹친 연기 사이로 보였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불어오자
불덩어리와 불타는 지붕을 집어올리고
허공에 높이 휘둘러
삽시간에 지붕 꼭대기에서는
화염의 섬광과 함께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떠올랐다.
이 광경을 보고
해변과 배 위의 사람들은 절망하였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지만
마침내 비통 속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그랑쁘레 마을, 우리 집은
다시 볼 수 없게 됐구나!’
날이 밝은 것으로 알았는지
농장 안의 닭은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들의 우는 소리가 저녁 바람결에 들려와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섞였다.
그때 무시무시한 소리가 일어났다.
그것은 저 멀리 서쪽의 초원 또는 네브라스카 강 기슭의 숲의
야영지에서 잠을 자다가 놀란 야생마들이 질풍같이 달려가고
물소의 무리가 우렁차게 강가로 돌진할 때의 소리와 같았고,
또는 한밤중에 소와 말들이 우리와 담장을 부수고 뛰쳐나와
미친듯이 목장으로 돌진할 때 일어나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 광경에 압도되어
신부(神父)와 처녀는 말도 없이
빨갛게 퍼져나가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묵묵히 앉아있는 노인에게 말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
아, 노인은 자리에서 넘어져
바닷가에 길게 쓰러진채 아무 움직임도 없다가,
영혼은 이미 그의 몸에서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신부가 조용히 시신의 머리를 안아 일으키니
에반젤린은 아버지 곁에 무릎을 꿇고,
공포 속에서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더니 에반젤린도 기절하여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넘어졌다.
그녀는 긴 하룻밤 동안을 혼미한 잠 속에 빠져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의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눈물에 젖은 눈과 동정하는 슬픈 표정을 하고,
구슬프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파리한 모습의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불타는 마을의 화염이 모든 정경을 밝게 비추고
머리 위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주위의 얼굴들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희미한 정신으로는 혼미한 그녀의 감각으로는
그것은 최후의 심판날인듯 싶었다.
그때 사람들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이 바닷가에 묻기로 합시다.
즐거운 시절이 다시 찾아와
유랑의 낯선 땅에서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의 성스런 유해를 성당묘지로 정중하게 다시 옮기도록 합시다.’
이것은 신부의 말이었다.
서둘러서,
바닷가 불타는 마을의 빛나는 화염을 장례의 횃불로 삼아,
미사의 종소리도 복음의 낭송도 없이 그랑쁘레 농부를 매장했다.
신부가 슬픔에 어린 조사(弔詞)를 낭독하자
수많은 신자들의 목소리인 양 바다가 응답하여
구슬프고 장엄한 음조의 파도소리와 만가(輓歌)가 울려퍼졌다.
멀리 황량한 넓은 대양으로부터 다시 들어오는 바닷물은
날이 밝아옴에 따라서
육지로 향해 급하게 밀려오며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또 다시
승선(乘船)의 소음과 소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다시 썰물이 되었을 때 배들은 포구(浦口)를 빠져나갔다.
죽은 사람과 황폐한 마을만을 뒤에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