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문적 요소와 그 장치
-동시 창작을 위한 유형별 사례
박일
건강검진을 한다. 문학인들 건강검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문진표를 작성한다.
‘당신은 일주일에 며칠이나 강도 높은 문학 훈련을 하고 있으며, 그 시간은?’
문학 훈련이란 독서, 필사, 착상, 메모, 창작과 퇴고 등의 일련의 창작을 위한 과정이다.
“3×4는?” 아이가 대답을 못한다. 엄마가 “12야”라고 말한다.
‘3×4=12’처럼 정답이 분명한 것은 지식이고 상식이고 과학이다.
‘3×4=34’일 수는 없을까? 문학은 엉뚱한 대답도 가능한 특별한 문제다. 과학이 추구하는 가치가 진리라면, 문학(예술)이 추구하는 가치는 아름다움이다. 문학은 상상력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객관적인 실제 세계보다 오히려 허구 세계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과학은 실험과 관찰에서 얻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문학적 진리는 있음직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획득한 예술적 희열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은 체험을 이야기 형식에 담아 표현한다. 서사성은 산문문학의 특징이지만, 서정문학도 이를 바탕으로 한다. 다만 서사적 정황(체험)을 운문적 요소에 대입하거나 운문적 장치를 이용하여 문학적 승화(형상화)를 이뤄내야 한다. 동시는 그렇게 창조된 아바타다.
동시의 기능은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일이다. 동시도 시詩다. 동시는 음악성(리듬)을 중시하지만, 현대시는 이미지의 시각화를 중시하며 회화성 위주로 흘러가면서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은 동시문학 장르가 선명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글은 동시 창작의 동기부여를 하고, 건강한 동시문학을 획득하기 위해 쓴 글이다.
운문적 요소
1) 비유(은유)를 하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명확하게 틀린 두 개의 사물 사이에서 동질성을 찾아내는 것이 시인의 능력”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두 관념의 차별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이 비유다. 비유를 모르면 낱말의 사전적 의미만 전달할 수밖에 없다. 시는 비유에 의존하여 태어났고,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비유는 주요한 시적요소다. 직유는 단순하고 부정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피하는 게 좋고, 은유로 표현하도록 힘써야 한다.
봄비 그친/ 텃밭은/ 일학년 교실//
저요,/ 저요,/ 저요,//
왁자하게/ 손 내미는/ 새싹/ 새싹들.
- 공재동「새싹」전문
막내라서/ 동생 있는 친구가 부러웠는데/ 오늘/ 동생이 생겼어요./ 아주 특별한//
몇 달 전부터/ 물건 놔둔 곳을 몰라/ 깜박깜박하시던 할머니/ 며칠 전에는/ 금방 아침 드시고도//
밥 굶긴다고 엄마를 미워하시더니/ 오늘은/ 학교 갔다 오는 나를 보고/ 언니라고 불렀어요.//
나보다 일곱 배나 나이 많은/ 특별한 동생/ 아기처럼 잘 보살펴야 할/ 아주 특별한 동생
- 박선미「아주 특별한 동생」전문
2) 의인화(물활론) 하라
의인법은 무생물이나 생물에게 사람만이 가지는 감성(기쁨, 슬픔, 분노 등)을 부여하면서 시적 분위기나 주제를 띄우는 방법이다. 사물이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물활론적 사고는 동심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에 철저히 익숙해지면 벚꽃들의 눈웃음이 보일 것이다.
난/ 입이 있어도/ 누굴 흉보지 않아/ 누가 뭐래도/ 아무 때나 입을 열지 않지/ 꼭 다문 입/ 빨랫줄에 빨래가 널리면/ 내 입은 번쩍 열리게 돼/ 그리고 덥썩 문 빨래/ 함부로 뱉지 않지.
-한상순 「빨래집게」 전문
우리 할머니가/ 산 속 마을/작 은 무덤집으로 이사 간다.//
산에 사는 짐승들/ 풀꽃들은 참 좋을 거다/ 할머니랑 함께 살 수 있어서/날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재미난 이야기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할머니의 자장가 들으며/ 토실토실 살찌고//
정말로 좋을 거다./ 오늘부터/ 우리 할머니의 손자, 손녀가 될 수 있어서
-이성자 「참 좋을 거다」 전문
3) 화자를 통해 말하라
시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화자’(서정적 자아. 이와 반대로 ‘청자’는 시적 대상임)라고 한다. 시인 자신이 화자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인 대리인을 설정하기도 한다. 화자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대변한다.
찾았다// 찾았어// 행운!// 하지만//
네잎클로버에겐//
참/ 운 없는 날
- 권영욱 「운수 좋은 날」 전문
엄마는 나를 꼭 낳고 싶었대요/ 첫째가 태어났는데요/ 내가 아니더래요/ 그래서 둘째를 낳았대요/ 또 내가 아니더래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낳았더니/ 글쎄, 짜잔! 내가 태어났대요//
형들은 아직 몰라요/ 알면 엄청 슬플 거예요/ 그래서 나만 알기로 했어요/ 엄마랑 꼭꼭 약속했어요.
- 김미희 「엄마가 나를 낳은 이유」 전문
4) 어린이의 입장이 되어보라
아동문학이 어린이의 체험을 중시한다면, 어린이와 체험활동한 시간은 중요하다. 어린이를 모르고 아동문학을 할 수 없다. 어린이가 되어보고, 어린이 속에 들어가 보고, 어린이 입장(화자)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어린이를 배재한 동심의 표현은 관념문학일 뿐이다.
내 짝이 벌을 섰다./운동장 열 바퀴다.//
“선생님, 제가 다섯 바퀴 돌아 줘도 됩니까?”//
고개 끄덕이는 선생님을 보며/둘은 사이좋게 운동장 트랙을 돈다.
-구옥순 「벌」
엄친아, 그 애/실컷/공부 잘 하라고 하세요.//
엄친딸, 그 애/실컷/상 많이 타라고 하세요.//
엄마 이마가/뜨거운 불판처럼 불불불 끓을 때/물수건 올려줄 아인/
엄마 다리에/쥐가 백 마리쯤 달라붙어 짜릿짜릿 못 견딜 때/살살살 주물러줄 아인//
엄친아도/엄친딸도 아닌/엄딸이라고요//
바로 나/엄마 딸
-오은영 「엄딸의 외침」
5) 내 감정(느낌)을 억제하라
감각은 오관에 느껴지는 생리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희로애락의 마음이다. 퇴고 과정은 겉으로 드러낸 감정을 없애거나 감추며 다듬는 일이다.
학교 앞 사거리에 있는/ 장수 흑염소 건강원//
그 앞을 지날 땐/ 바닥만 보고 가게 된다//
장수, 좋은 말/ 흑염소, 귀엽고/ 건강원, 좋은 말//
좋은 것만 합쳤는데/ 간판 속 웃고 있는 흑염소를/ 똑바로 못 쳐다보겠다
-홍재현 「장수 흑염소 건강원」 전문
형이니까 도와줘라/ 동생 손잡아줘라/ 엄마가 시킬 땐 하기 싫었는데//
민호가 괴롭히자/ 바로 달려갔다/ "그만 해!"//
민호 눈 똑바로 보며/ 동생 손 꼭 붙잡고 왔다.
-이서영 「반사작용」 전문
6) 주어진 현실(상화, 모양 등)-엉뚱한 상상을 해보라
주어진 현실(상황, 모양 등)을 바꿀 수 없다면, 거기서 새로운 의미(시적 의미)를 찾아보는 거다. 새로운 세계(엉뚱한 상상)가 보일 거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항아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우와!/ 우와!//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 너무 좋다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우와!/ 우와!
-오원량 「우와! 우와!」 전문
우리 가족은 밖에 나갈 때/ 현관문에서 꼭/ 고개 숙이고 허리 굽혀 인사한다//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종일 함께 걸어갈 신발에게.
-박예분 「인사」 전문
7) 언어유희도 가능하다
말장난 또는 말재롱이라고도 부른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하는 경우,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연속하여 각운을 맞추는 경우,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조합하여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경우 등이다. 넌센스 퀴즈, 아재개그 등도 언어유희다.
날마다/ 시도 때도 없다.//
사거리 우리 집/ 창문 밖/ 요란한 싸이렌 소리//
미안하다는 듯/ 구급차는/ 쏘리쏘리쏘리쏘리//
앞서 달리던 차들이/ 길을 만들어 준다.//
소음 아닌 소음이던/ 쏘리쏘리쏘리가/ 이제는 짜증나지 않는다.//
명절 전날 갑자기/ 몸을 다친 할아버지를/ 구급차가 응급실로/ 데려다 주었다.
-김춘남 「소리, 쏘리」 전문
파래는 때밀이//
쓱싹, 쓱싹//
담치 수염이랑/갯바위 붙은 때/말끔히 씻어주고//
바다 친구 모두/공짜로 때 밀어 준다.//
파래가 있어/바다는 언제나 파래.
-김이삭「파래」 전문
8) 고정관념을 깨뜨려라
문학은 시인의 ’미적인식‘에 의해 재발견된 세계다. 그러나 익숙한 고정관념(지식과 상식)이나 이미 습관이 되었거나 편한 것(사은유), 누구나 알고 있는 상투적인 것이나 반짝이는 말(수식어) 등에 지배를 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버섯 같은 것이다. 과감히 버려야 한다. 매몰차게 이별해야 한다.
길 잃어버릴까/ 걱정 없는/ 골목길이지.//
애벌레한테는-//
꽃 피고/ 잎 지는/ 산책길이지//
애벌레한테는-
-추필숙 「나뭇가지」 전문
추녀 끝에/ 물고기 한 마리//
죽었을까?/ 살았을까?//
바람이 살작 건드려 봅니다.//
쨍그랑/ 쨍그랑//
물고기는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말고 고운 소리를 냈습니다.//
쨍그랑/ 쨍그랑//
죽은 물고기들/ 바람이 살려놓고 갔습니다.
-최새연 「풍경소리」 전문
9)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눈 오는 날 아침/ 길이 긴장한다.//
학교 가는 아이들/ 엉금엉금/ 길도 아이들을 꼭 잡고/ 조금씩 조금씩 놓아준다.//
시장가는 할머니/ 조심조심/ 길도 할머니 꼭 잡고/ 조금씩 조금씩 발을 옮겨준다.//
햇살 짙은/ 낮이 되어서야/ 길은 긴장을 내려놓았다.
-이재순 「눈길도 조심조심」 전문
시적화자가 아이들이나 할머니가 아니라 길이다. 화자를 바꾸니까 눈길 위로 걸어가는 이들이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이 긴장하게 된다. 화자를 바꾸거나, 주체와 객체를 바꾸어보는 발상의 전환은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10) 사회의 문제점도 고민해 보라
경제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지만, 환경(생태)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다. 문학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니까.
날개 없는/ 새//
나뭇가지에/ 올라 앉아//
하늘까지/ 쓰레기장이 되어간다고//
펄럭이며 찢으며/ 깃발 시위하고 있다.
- 졸시 「비닐봉지」 전문
골목대장이 된 바람 따라/ 온 동네 휩쓸고 다니는/ 우리 동네 문제아들//
비닐봉지/ 신문지/ 음료수 캔’
-김이삭 「우리 동네 문제아들」 전문
11) 엉뚱한 생각(자연의 힘이나 현상의 재해석)을 해보라
‘벚꽃나무에 장미가 피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벚꽃나무는 빛나는 꼬마전구다’라고 하면 엉터리지만 그럴듯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게 시의 세계다.
힘이 솟아나고/ 땀이 흐르고 있는데//
푸른 날개/ 잠시도 쉬지 않고 / 훨-/ 훨-//
연습/ 또 연습//
저러다가/ 바다가 날아가 버리겠다.
-졸시 「바다」 전문
나비와/ 벌과/ 개미에게//
밖에 나가 놀아도 된다고/ 알려 주어요.
-박두순 「봄이 하는 일」 전문
운문적 장치
1) 쉽게 써라
소통이 안 되면 쓸모가 없다. ‘쉽게’와 ‘저급’은 다르다. 동시는 쉽게 써야 한다. 어린이들과 소통이 될 수 있어야 하니까. 동시를 역설의 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쉽게 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 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리가 되었다.//
뚜벅뚜벅/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길이 되었다.
-박방희 「징검돌」 전문
고향 가는 길/ 보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안경 안에/ 또/ 안경을 끼신다.//
통일되는 길/ 보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안경 안에/ 또/ 안경을 끼신다.
-졸시 「할아버지 안경」 전문
2) 길이에 신경 쓰지 말고-짧아도 좋다
운문은 짧고 리듬이 있는 문학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귀담아 듣지 않듯이, 동시도 길어지면 눈여겨보지 않을 수 있다.
이 한 몸 바쳐 반드시 세상을 환하게 만들겠습니다!//
공약 지킨 벚나무들
-남은우 「벚나무 나라 선거」 전문
물에 뼈가 있다.//
말에도 뼈가 있다.
-한상순 「서릿발」 전문
3) 재미있게 써라
인간은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완전해진다고 하든가. 놀이는 재미와 연관된 것이다. 동시도 재미가 있어야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 생긴다.
식탁 위 음식들이/ 공부하러 갑니다//
1교시 : 입 안/ 2교시 : 위/ 3교시 : 소장/ 4교시 : 대장//
영양분이 되는 공식/ 피가 되는 원리//
그 어려운 수업/ 다 마쳤다고//
교실 밖으로/ 튀어 나오며//
수업 끝’이라고/ 외치는 소리//
“뽀- 옹”
-하빈 「수업 끝」전문
찾았니?/ 옥의 t//
얼른 지워버려/ 티 나지 않게//
저런 t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거 봐/ 지우니까 훨씬 낫지?//
I Can
-랄라 「I Can't」 전문
4) 독특하게, 적절한 긴장감을 주어라
애착과 긴장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말하고 싶은 것을 앞부분에서 풀어놓지 마라.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영상을 이미지(심상)라고 하는데, 이를 잘 활용하면서 감각과 인상을 생생하게 해야 한다.
우리 식구는/ 손이 없다//
우리 식구는/ 발이 없다//
“막내야!”/ 부르기만 하면 된다//
엄마는 나를/ 심부름 시키려고 낳았다
-김자미 「입만 갖고 산다」 전문
수업시간마다/ 다리 떠는 주원이도/ 화장실 간다고 손드는 민재도/ 책에 낙서하는 솜이도// 오늘은 모두/ 의자에 등 딱 붙이고/ 똑바로 앉았다.//
진짜 모습/ 아무도/ 공개하지 않았다.
- 강기화 「공개수업」 전문
5) 긍정의 메시지가 좋다
아동문학은 온정과 긍정의 문학이다. 어린이들이 내 동시를 먹으며 자란다는 생각을 가지면 어떤 자양분을 주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희망과 꿈과 용기와 사랑이 동시의 주제다. 또한 사춘기가 빨라지면서 소재가 확장되었지만, 정서 수용의 한계를 넘으면 안 된다.
풀씨도 아니고/ 꽃씨도 아니지만//
풀잎 꿈 꾸는 속엔/ 풀씨가 되고/ 꽃잎 꿈 꾸는 속엔/ 꽃씨가 된다.//
마을도/ 봉의 꿈 꾸고 있다가/ 봄 봄/ 봄봄봄봄/ 흠뻑 적시는데//
또,/ 누구일까?/ 푸른 꿈 꾸는 아이….
-졸시 「봄비」전문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 그는 오디션에서 800번 떨어졌어/ 그러는 동안 연기 실력이 조금씩 늘었지/ 결국 헐리우드 스타가 됐어//
그 사람이 누구냐고?/ 영화 어벤저스의 주연 마크 러팔로야//
몇 문제 틀렸다고 슬퍼하지 말자/ 한두 번 넘어졌다고 울지 말자/ 괜찮아, 이제 시작인 걸/
아직 100번도 안 되는 걸, 뭐.
-유은경 「800번 떨어진 사람」전문
6) 근사한 제목을 붙여라
제목은 글의 간판이다. 제목이 1차적인 선택의 관문이다. 제목도 내용과 유기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임보 시인은 ‘독자를 끄는 향기’라고 했다.
-가마/ 타고// 간/ 누나// -오마/ 없어/ 못 오나.// -오랑비/ 안 오고// -가랑비/ 오네
-조유로 「오마 없어」 전문
조선오이는/ 까칠까칠하게 살아 있고/ 조선호박은/ 아예 엉덩이 퍼질러 앉아/큰소리 떵떵 치고/ 조선간장은/ 슈퍼에 진을 치고 있어./ 조선 팔도에서/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떻게 조선이 사라지겠어?
-박해정 「아직 조선은 사라지지 않았어」 전문
7) 생각(관념)만으로 짜내지 마라
상상력은 창의력과 동거한다. 상상이란 예민한 연상작용은 이외의 넓은 세계로 확장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 생각만으로 짜낸 관념시보다 체험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체험시가 훨씬 감화력이 높다.
냉장고 문 열고/ 반찬 그릇 꺼내다가/ 그만 바닥에 쏟아버렸지/
걸레 가져다 이곳저곳 닦으며/ 문득 깨달았지/
걸레는 훌륭하다/ 남을 위해/ 이렇게 더러워지다니
-김옥애 「훌륭하다」 전문
수박씨/ 호박씨/ 대추씨/ 분꽃씨/ 해바라기씨//
꽃과 열매가 고마워/ 사람들은 씨앗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최영재 「존댓말」 전문
8) 리듬은 살리고
자유시가 운율을 소홀히 하면서 딱딱해지고 메마른 글이 되고 있다. 소월이나 미당의 시가 아직도 사랑 받는 것은 운율의 힘이다. 동시는 리듬이 생명이다. 이를 잘 살려낸다면 전달력이 훌륭한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기는 살짝/ 신 벗어 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 갔나//
가지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최계락 「꼬까신」 전문
구름이/ 감아 둔 실꾸리//
솔,/ 솔,/ 솔,/ 풀려 내리네//
가느다란/ 봄 빗줄기//
꽁꽁 언 겨울이/ 녹아내리네
-이재순 「구름 실꾸리」 전문
9) 가급적 제목은 본문에서 보이지 않게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으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들길까지 내려와서/ 손짓하실까?//
가을 볕살에/ 까매진 얼굴로/ 하얀 머릿수건 쓰고//
논두렁에 올라서서/ 한길 쪽 건너보시는/ 우리 어머니.
-권영세 「억새꽃」 전문
억새꽃이 들길까지 내려와서 손짓한다.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있다. 한길 쪽을 건너보기 좋게 논두렁에도 올라서 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억새꽃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어머니다. 은유로 표현한 억새꽃의 모습이나 특징만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다 읽지 않았는가.
10) 잔소리를 삼가라
어린이는 어른의 종속물이 아니다. 폭포는 위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잔소리도 한 쪽이 부족하거나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쏟아지는 폭포다. 어린이도 인격체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높낮이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잔소리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교훈(바르고 착하게)이나 당부(~해야 한다) 따위의 말은 해서는 안 된다. 이미지화하거나 비유를 통해서 얼마든지 그 뜻을 표현할 수 있다.
약수터 길/ 이른 새벽이 약수다/ 이슬 묻은 풀꽃이 약수다//
덤으로 받는/ 꽃향기가 약수다/ 새소리가 약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가는 인사말이 약수다/ 눈웃음이 곱빼기 약수다
-손동연 「약수」 전문
하얀 요정들이/ 자꾸/ 자꾸/ 내려오더니//
욕심쟁이/ 세상/ 하얗게 지워 놓고//
빛나는 글씨로/ 글을 쓴다.//
-떳떳이 살아라./ -좀 바르게 살아라.
-졸시 「눈 내린 날」 전문
시인을 줄이면 신神이 되고, 신을 늘이면 시인이다. 시인과 신은 동의어다. 그렇다면 신의 말씀을 가장 잘 대변하는 분들이 시인이 아닌가. 시詩를 파자破字해 봐도 ‘언言’과 ‘사寺’다. 즉 ‘부처님의 말씀’ 이다.
삶이 메마르고 힘들어진다. 시의 힘은 무엇일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외쳤다.
왜 쓰는 것일까? 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어야 하는가. 공감(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시 속에는 혼이 담긴다고 한다. 그게 시정신이다. 동시 닮은꼴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러나 치열한 문학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맹탕일 뿐이다.
길 가의 돌멩이를 주워 탑을 쌓기도 한다. 형상화란 돌멩이(소재)를 탑(작품)으로 변화(창작)시키는 일련의 행위다. 내가 쓴 글이 돌멩이 그대로 있다면 형상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것이다. 문학은 형상화 과정을 거쳐 이룩한 탑이다.
가끔 백화점에 들러 상품을 사기도 할 게다. 어떤 상품을 고르는가. 가성비를 생각한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노력(가격)과 작품(성능)성이 좋아야 읽어지고 선택받는다.
임보 시인은 좋은 시의 조건을 소통, 아름다움, 새로움, 재미, 긍정적인 영향 그리고 시정신으로 보았다. 좋은 동시도 마찬가지다. 좋은 동시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다.
워즈워스처럼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서 가슴 설레고, 어린 날의 경이감을 깊이 간직하며 늘 그런 동심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2023. 3. 8, 김해아동문학회 세미나)
|